[286호 사람과 상황] 대한변협 세월호 대책위원회 대변인 박종운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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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음과상황 이범진 | ||
박종운(49) 대한변호사협회(변협) 세월호 참사 피해자지원 및 진상조사 특별위원회(세월호 특위) 대변인을 지난 8월 2일 법무법인 소명 회의실에서 만났다. 7·30 재보선 이전에는 변협이 제시한 기준까지는 아니더라도 특별법 협상의 진전이 보이는 것 같았으나, 선거 이후 원점으로 돌아갔다. 그간의 활동 이야기와 함께, 세월호 특별법 제정 진행 과정을 들었다.
― 어떻게 세월호 특위 대변인을 맡게 되었나요?
4·16 세월호 참사 발생 직후 진도에 가장 먼저 내려갔던 두 명의 변호사 중 한 명인 배의철 변호사가 기독법률가인데, 변협에서 세월호 태스크포스(TF)를 만들 때 배의철 변호사를 통해 기독법률가회(CLF)에 TF 참여 요청을 하였고, 마침 CLF 사회위원장인 제가 사회선교 분야에 경험이 많다는 이유로 파견되었습니다. 세월호 TF가 세월호 특위로 발전하면서 그 대변인을 맡게 되었고, 현장대응지원단장, 총괄지원팀원, 법제도개선단 산하 특별법 제정팀 등의 업무를 맡게 되었습니다. 총괄지원을 하다 보니 법률상담지원단, 진상규명조사단 및 산하 재판지원팀 등의 업무도 지원하고, 특별법 국면에 들어와서는 피해자단체 입법청원 특별법(안) 작업, 특별법 협상 작업 등에도 관여하게 되었습니다.
― 세월호 유가족들과 관계 트기가 만만치 않았을 텐데요.
언론을 통해 전원 구조된 것으로 알고 있다가 침몰한 선박 내에 부모, 형제, 자녀들이 남겨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피해자 가족들은, 언론이든 정부 관계자든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최초에 변협 소속 두 명의 변호사가 진도 팽목항으로 내려갔을 때에는 가족대책위도 제대로 구성되기 전이었고, ‘변호사는 돈 받고 소송을 해주는 사람’이라는 불신이 강했기 때문에 법률지원을 거부했습니다. 단원고 학생 가족들을 중심으로 ‘세월호 사고 희생자·실종자·생존자 가족 대책위원회’(가족대책위)가 꾸려지고 난 이후, 안산의 어느 교회 목사님 주선으로 가족대책위 임원 몇 분을 만나게 되었는데, 변협에서 왔다고 하니까 정부 편을 드는 관변단체에서 왜 왔냐고 하더군요. 그동안 일반 시민들이 변호사나 변호사 단체를 어떤 시각으로 보고 있는지를 잘 알 수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사실 변협 세월호 TF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이나 CLF 등 여러 임의단체, 지방변호사회 소속 변호사들이 변협이라는 큰 우산 아래 함께 모여서 변협 이름으로 일을 했습니다. 첫 만남 이후 불신이 신뢰로 바뀌기 위해서는 계속 만나고 부대끼고 함께하는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법률적인 상담과 조언을 하고 거듭 자세히 설명하고, 얼굴도 자주 마주하게 되면서 신뢰를 쌓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5월 16일에 가족대책위와 변협이 상호 업무협약을 체결하기 전까지 현장을 계속 방문하고, 가족대책위가 조직을 갖추는 과정에서 조언을 드리고, 상황이 각기 다른 피해자 간에 갈등 상황이 발생하게 되면 오해를 푸는 것도 돕고, 정부 관계자와의 협상도 도왔습니다. 욕먹고 집에 못 들어가는 시간을 꽤 거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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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동안 어떤 활동을 해왔는지 궁금합니다.
피해자 가족들은 법적인 분쟁이나 협상에 관한 경험이 거의 없는 평범한 일반 시민들이시기에 그 분들을 대변할 수 있는 전문가들이 있어야 합니다. 정부관계자와 협의를 하거나, 가족들끼리 회의를 하고 의결을 할 때에도 변호사가 참석하여 함께 합니다. 예컨대, 박근혜 대통령이 세월호 특별 담화를 발표하기 전에 비공개로 몇몇 유가족 대표만 만나자고 제안을 해 왔을 때에도, 왜 비공개적으로, 그것도 몇 사람만 만나야 하는지 따지며 변호사도 참석시켜 달라고 청와대 측에 요구하였습니다. 협상을 통해 참석 대상자를 임원뿐만 아니라 단원고 피해학생 가족 측 10개 반 대표까지 확대할 수 있었지만, 대통령과의 만남 바로 직전에야 청와대 초청 사실이 공개될 수 있었습니다. 가족들과 동행한 변호사들은 결국 청와대 앞까지 갔지만 들어갈 수 없었고, 춘추관 기자회견 준비를 약속받았음에도 결국은 청와대 앞 분수대에서 기자회견을 해야 했습니다. 정부 측 면담, 기자회견 등 가족대책위의 공식/비공식 활동에 자문을 하고 적절한 대응방안 제시, 회견문 작성 등을 돕는 일도 합니다.
― 생존자 및 유가족들에 대한 심리 치료 지원 보도가 많았는데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요.
정부와 안산시 측에서 트라우마 치료 관련 전문가들을 동원했는데, 결과적으로 행정적 현황 파악에는 도움이 되었지만 치료 효과에 대해서는 평가가 좋지 않았었습니다. 이후에 마인드프리즘 대표인 정혜신 박사 등 민간 쪽에서 자발적으로 심리 치료를 진행하면서 훨씬 나아진 것으로 보입니다. 생존 학생들은 상당기간 동안 연수원에 따로 모여서 교육을 받아야 했습니다. 세월호 선장과 선원들의 범죄사실을 입증하기 위해서 생존 학생들의 증언이 필요했는데, 광주지방법원의 담당 재판부는 학생들의 심리적 상태를 고려하여 안산지원 법정에서 영상으로, 혹은 부모 등 신뢰관계에 있는 분들과 동석하여 증언할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처음에는 증언 자체를 두려워했던 학생들이 사고 당시 상황에 대해 비교적 또렷하게 증언을 하는 모습을 보면, 장거리 여행은 여전히 힘들지만, 그래도 사고 초기 상태보다는 훨씬 좋아진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학생들은 얼마 전에 안산에서 국회까지 도보 행진도 하지 않았습니까? 점차 나아지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앞으로도 지속적인 관심과 치료가 필요합니다.
― 광주법원에서 첫 재판이 진행될 때 참석하셨나요.
광주지방법원 첫 공판 때에는 안산에서부터 가족분들을 모시고 갔습니다. 출발하기 전에 가족들께 재판 안내문을 나누어 드리고, 법정에서 재판이 진행될 때 어떻게 할지를 설명 드렸습니다. 그 이전에 담당 재판부와 여러 차례 협의를 하여 미리 준비를 하였고요. 언론에는 너무 지나치게 취재하지 않도록 협조를 구하고, 방청권도 미리 배정받아 나눠 드리고, 가족들이 다 함께 움직이도록 계획하고, 법정에 들어가기 전 검색대를 통과할 때 거부감을 갖지 않도록 변호사들이 먼저 검색을 받고 법원 경비 측과도 협의를 했습니다. 막상 법정에서 선장과 선원들 얼굴을 보게 되면 가족들로서는 분노와 울분이 치솟을 수 있으므로 재판 진행시에 가족들이 흥분하지 않도록 진정시키는 일도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울분과 통한이 쌓이고 쌓인 분들인데 법정에서 피고인들이 뻔뻔하게 나오면 당연히 흥분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럴 때마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도 미리 준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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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제 재판 중의 상황은 어땠나요.
예상했지만, 그렇게 준비했는데도 여러 차례 마찰이 있었습니다. 법원 밖에서 피켓팅을 하려고 만들어온 피켓을 무심코 법정 안으로 가지고 들어가려다가 법원 경비들과 충돌했을 때에는, 가방을 맨 채로 중간에 나서 몸으로 막아야 했지요. 피고인들이 입장할 때에도 여기저기서 웅성웅성, 피고인 중 한 명이 웃고 있는 모습으로 비취는 바람에 부모님들은 흥분하시게 되고, 판사님들과 국선변호인들이 왜 저 나쁜 놈들한테도 잘 해 주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아서 또 화가 나시고, 그때마다 갑자기 일어나서 발언을 하려고 하고, 저는 말리고, 다행히 담당 재판부에서도 여러 차례 가족분들이 공식적으로 발언할 기회도 주셨지요. 법원 입장에서도 초유의 사태이기 때문에 저희 변호사들이 완충 역할을 해주기를 바라지요. 처음에는 격앙된 감정 때문에 정말 힘들어 하셨는데, 두 번째부터는 나아졌습니다. 재판을 지켜보시던 어머니들 중에는 내 자식은 죽고 없는데, 살인자로 여겨지는 사람들은 눈앞에 멀쩡히 앉아 있으니 견디지 못하고 도중에 뛰쳐나가시는 분들도 계셨습니다. 재판 중에 누군가 갑자기 화를 내는 상황이 벌어지면 안정시켜서 다시 앉혀 드리고, 하고 싶은 말을 적어 주면 재판부에 제출해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첫 재판이 시작될 때 유가족 대표는 피고인들에게 제발 진실을 말해달라고 울부짖었습니다. 그런데 15명의 피고인 중 단 한 명만 잘못을 인정할 뿐, 14명은 범죄사실을 부인했습니다. 그 상황에서 가만히 앉아 있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제가 재판지원팀 소속은 아니었지만 당시에는 유가족분들과 신뢰 관계가 형성된 변호사가 적어서 처음 몇 번은 제가 직접 유가족분들을 모시고 갔고, 나중에는 재판지원팀에서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지원했습니다. 지금 세월호 사건으로 기소된 사람이 청해진해운 관계자부터 해경까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백 명을 훌쩍 넘어 섰고, 광주, 목포, 인천 등 전국 각지에서 관련 재판이 열리고 있습니다. 저희 변협 세월호 특위 재판지원팀 소속 변호사들은 그 재판에 직접 참여하여 모니터링을 하기도 합니다. 선장/선원 재판 1심은 11월경에 선고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 ‘세월호 특별법’에 대해 묻고 싶습니다. 입법청원안, 야당안, 여당안까지 여러 가지가 있지 않습니까.
가족대책위분들은 법률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처음에는 특검을 하자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나 세월호 참사의 심각성을 알게 된 저로서는 특검이나 국정조사 정도로 끝날 일이 아니고, 특별법을 제정해야만 풀어낼 수 있는 문제라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특별법 초안 만들기에 들어갔습니다. 이후 특별법 제정 국면이 조성되었을 때, 제가 만들 초안과 민변이 만든 초안, 김희수 변호사님이 만든 초안을 통합하는 과정을 거쳐 입법 공청회를 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피해자 지원이나 보상·배상 부분이 내용에 일부 있었지만, 공청회에서 나온 유가족 의견의 핵심은 진실규명이었고, 지원이나 보상·배상 부분이 많이 들어가면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해서 결국 피해자 지원과 보상 배상에 관한 원칙만 넣는 정도로 그쳤습니다. 진상규명 부분을 강화하여 철저한 진상규명 ― 대안(재발 방지 및 대처방안) 마련 ― 마련된 대안의 이행 ― 이행 여부에 대한 모니터링 시스템을 갖추었습니다. 또한 이 법의 궁극적인 목적은 안전한 대한민국 건설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그래서 피해자 단체 입법청원 특별법안의 명칭이 “4·16 참사 진실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 등을 위한 특별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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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협은 법안에 수사권과 기소권을 모두 넣었고, 야당은 수사권까지, 여당은 모두 허용하지 않겠다는 입장인데, 수사권과 기소권이 왜 반드시 필요합니까?
특별조사위원회에 기소권과 수사권을 준다는 방안은 실질적인 조사권 강화를 위해 꼭 필요합니다. 입법청원안을 만들 때 과거사진상조사위원회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김희수 변호사가, 그 당시에는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권력기관과 고위공무원들은 조사에 제대로 임하지 않았다며 강력한 권한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수사권과 기소권이 있어야 조사권에 힘이 생깁니다. 여당 쪽에서는 9·11테러가 있었던 미국의 9·11위원회에도 주지 않았던 수사권과 기소권이라고 이야기하는데, 미국의 경우에는 그런 권한이 없어도 전·현직 대통령이 모두 증언을 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미국의 사회적 분위기입니다. 이에 비해, 세월호 사건 수사에 우리나라 현직 대통령이 자진해서 증언을 할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철저한 진상규명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제대로 된 대안을 만들 수 없습니다. 과거에도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매뉴얼은 만들어졌지만 여기저기서 로비가 들어오면 그 매뉴얼은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과거로부터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했기에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것입니다. 입법청원안에는 이행에 대한 고민도 들어있습니다. 특별조사위원회에서 권고한 내용을 정부기관이 이행하도록 하고, 그 이행 여부에 대한 감시 시스템을 넣었습니다. 특별조사위원회의 조사 권한 강화로 진상규명을 제대로 하고, 안전 사회를 위한 대안을 창출하고, 그 대안을 국회와 대통령에 보고하고 정부기관으로 하여금 이행을 강제하도록 규정했습니다. 대통령이 정기적으로 국회에 이행 사항을 보고하고, 국회에서는 이행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정당한 이유 없이 이행하지 않으면 책임이 있는 공무원에게 징계요구를 하도록 규정했습니다. 제 생각에는 정말 잘 만들어진 법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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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당 입장, 그러니까 수사권 기소권 포함을 반대하는 쪽에선 사법 체계에 위배된다는 문제제기를 하던데요.
삼권분립에 위배된다느니, 형사사법시스템을 깨뜨린다느니 하는 말은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국가위원회 혹은 중앙행정관서에 해당하는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가 입법권이나 재판권을 행사하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삼권분립에 위배될 수 있겠습니까? 기소권 문제는 상설특검법과 마찬가지로 검찰청 구조 바깥의 특별조사위원회에 (현직 검사가 아니지만 특별법에 의해) 검사의 자격과 능력을 갖춘 검사를 둔다는 것입니다. 수사권 문제는 우리나라에 이미 40개 이상의 행정관청에서 특별사법경찰리 제도를 운용하고 있듯이 특별법에 의해 조사관에서 특별사법경찰리의 지위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법률적인 문제가 아니라 정책적인 문제인데, 다만 기득권이 있는 검찰청이나 경찰청 입장에서는 동의하기 어려울 뿐입니다.
― 그런데 여당은 왜 그렇게 반대하는 겁니까. 국민 안전의 문제인데요.
솔직히 여당 입장에서는 ‘철저한’ 진상규명을 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현 정권의 권력 핵심부까지 조사대상자가 될 수 있을 테니까요. 잘못이 드러나면 정치적인 타격을 받게 되지 않겠습니까? 권력의 상층부에 속하는 사람들이 조사를 받으면 불협화음이 생기고 여러 가지로 문제가 발생할 것 같으니, 그런 것을 우려하여 반대하는 것입니다. 눈앞의 정치적 타격만 생각하는 꼴입니다. 예컨대, 특별검사의 경우에도 진상규명 의지가 강한 사람을 특검으로 임명해야 수사가 제대로 됩니다. 진상규명 의지가 없거나 약한 사람을 특검으로 세우면 시간과 예산만 낭비되고 국민들께 실망만 드리게 됩니다. 이번에야말로 여당도 협조하여 제대로 해내면 ‘위대한’ 새누리당이 될 수도 있습니다.
― 특별법 성사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요.
여/야 의원을 만날 때마다 설득하고 있습니다. 지구온난화, 난개발 등으로 인해 자연재해와 인재가 섞여서 참사들이 더 크게 더 자주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현 정권이 하필이면 새누리당 정권일 뿐 사실상 어느 쪽이 정권을 잡아도 발생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말로만 보수정당, 진보정당이지, 제가 볼 때는 갈수록 진짜 진보도, 진짜 보수도 찾기 어려워집니다. 정권을 어느 한 쪽이 너무 오래 잡게 되면 정치가 자꾸만 경직화되고, 세상사를 유연하게 헤쳐 나가기가 어려워집니다. 특별법이 제정되기는 될 것인데, 그 내용이 문제겠지요.
― 변호사님은 왜 이렇게까지 세월호 문제에 매달리시나요.
세월호 참사는 명백한 인재입니다. 짐을 지고 사막을 건너는 낙타 등에 모두가 무심히 지푸라기 하나씩을 얹다 보니 결국 낙타가 쓰러졌는데, 사람들은 마지막으로 지푸라기 하나 얹은 사람한테만 책임을 떠넘기고 있습니다. 사실은 너나없이 지푸라기 하나씩 얹은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저라고 그 책임에서 무관할까요. 세월호 참사 이전까지 저는 법률전문가로서 안전에 대한 고민을 한 적이 거의 없습니다. 선장과 선원, 화물 고박 업체, 선체 불법 증개축 업체, 평형수 문제, 해경, 해운업체 등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것만 문제가 아닙니다. 국내 여객선업체로 하여금 20년된 중고선박을 들여와서 사용하게 하고, 사용연한을 20년까지 늘려줌으로써 안전 문제에 대한 책임을 규제 완화라는 미명하에 업체 쪽에 떠넘긴 정부를 비롯하여 전체 국가 시스템을 깊이 파고들어 연구해야 합니다. 제대로 된 진상규명 없이 ‘국가개조’다 ‘해경 해체’다 하면서 정부기관 하나 바꾼다고 해결될 문제가 절대 아닙니다. 이번에 세월호 특별법을 통해 안전 대책을 만들어서 제대로 감시해야 합니다. 몇 년, 아니 몇 개월 지나지 않아 규제 완화 소리가 또 나올 것이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모니터링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는 이 일을 하면서 하나님께서 제게 주시는 어떤 선명한 역할이 느껴집니다. 그것은 ‘Peace―Maker’(화해자·중재자)입니다. 피해자 가족들 내에서, 변협 세월호 특위 내에서, 정부관계자나 정치권과의 관계에서도 제 자리는 ‘중재자’였습니다. 마음속에 계속 ‘화평케 하는 자’를 떠올리고 있습니다. 정치권과의 협상 때도 이 점을 계속 견지하면서 최대치를 이끌어내려 했던 것 같습니다. 진정성 있게 이야기하면 여당 의원도 개인적으로는 공감하고 동의합니다. 다만, 당의 입장이 있으니 공식적으로 입장을 밝힐 수 없을 뿐입니다.
― 세월호 특위 대변인 활동으로 본업에 지장이나 가족들의 반대는 없었나요?
제가 속한 법무법인(소명)의 업무도 있고, 자비량으로 해오던 여러 사역들도 있어서 시간적으로 체력적으로 많이 힘들었는데, 감사하게도 법무법인 후배 변호사들이 법정 출석 업무를 일부 맡아주기도 해서 큰 힘이 됐습니다. 몸과 마음이 힘든 건 그렇다 치고, 일본에 대해 관심이 많은 중3 딸과 함께 가족휴가 대신 다녀오려던 일본 평화연구여행(한반도평화연구원·KPI 주관)을 취소해야 했을 때는 가족들에게 참말로 미안했습니다. 특별법 제정 싸움이 한창일 때라서 거의 매일 국회에서 법안 협상 작업을 했는데, 거기서 농성하시는 분들도 계시고, 일이 참 많았습니다. 원래 집에 텔레비전이 없었는데 가족과 여름휴가 갈 시간이 없을 것 같아서 휴가 대신 텔레비전을 사서 함께 보고 있습니다. 그래도 가족들이 제 사역을 지지해주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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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음과상황 이범진 | ||
― 수년 전 “법률 영역에 파송된 자비량 사회선교사”(복상 2010년 3월호)의 소명을 늘 의식한다 했는데, 현재 ‘자비량’을 ‘사회선교’가 훨씬 더 앞지른 것 아닌가요? (그는 현재 복음과상황 이사장, 공익법센터 어필 이사장, 교회개혁실천연대 공동대표, 한국정신장애연대·KAMI 공동대표, 장애물없는생활환경시민연대 대표/이사장, CLF 사회위원장, 이단대처 관련 업무 등을 맡고 있다.)
자비량이라는 게 피곤하긴 합니다. 자비량 사회선교사를 하려면 두 가지가 필요한데 하나는 자비량을 하기 위한 전문성입니다. 그리고 사역과 텐트 메이킹 양쪽에 사용하는 시간을 잘 조절해야 합니다. 두 번째가 힘듭니다. 지금보다 더 나이 들었을 때 이 둘을 잘 조화시킬 수 있을지 걱정이 있긴 합니다. 풀타임 사역자로의 요청이나 희망이 있었음에도 자비량으로 해온 건 내 상황 자체가 부모 형제를 봉양해야 하는 처지(장남)였기 때문입니다. 몸은 피곤하지만 현재의 삶에 만족하고 행복합니다. 원래 허약체질인데다 일이 너무 많아서 쓰러질 만도 한데, 쓰러지지 않고 잘 버티고 있으니 스스로도 놀랍습니다. 하나님이 더 건강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도 같고, 오래 하다 보니 익숙해진 듯도 합니다. 7.30 재보선 이후 좌절하기도 했는데, CLF 전국대회에 다녀와서 어느 정도 회복되었습니다. 한 곳에 안주하지 않는 ‘나그네 신앙’을 추구해왔는데 요즘엔 후퇴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어디든 가라 하시면 가야 하는데, 이젠 내 몸이 너무 무거워져서 모든 걸 다 내려놓고 떠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 후배들에게 넘기고 좀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초창기에는 이러한 사역을 하는 사람이 없다 보니 너무 여러 방면에서 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요 몇 년간 어떻게 후배들한테 잘 물려줄 것인지 고민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나중에는 두 번째 소명으로 생각하는 통일 선교 사역을 하려고 KPI 일은 놓지 않고 있습니다. 지난 몇 년 동안 이주/다문화/난민 관련 사역은 이미 후배들한테 넘어갔고, 장애인 관련 사역을 넘겨주려고 애쓰고 있는데 속도가 더디네요. 자비량 사역은 경험이 많이 축적되어야 가능한 일이라 후배들에게도 적정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통일 선교 사역의 핵심은 통일 과정 및 그 이후의 새로운 법률시스템, 빈곤과 양극화 문제 해결입니다. 큰 틀에서 보면 이 또한 Peace―Maker 사역일 것입니다. 제 나이 50대 후반이 되면 그 일을 하고 있지 않을까 기대해 봅니다.
인터뷰 며칠 뒤인 8월 7일 여야 원내대표는 특별법 합의를 발표했다. 야당은 내부 합의도 거치지 않은 상황이었고, 결국 11일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총회에서 당내 반발로 세월호 특별법 재협상을 결정했다. 그리고 임시국회 마지막 날인 8월 19일 “극적 타결”에 성공했다는 언론 발표가 떴다. 유가족 대책위는 통보된 합의 내용에 반대의사를 밝혔고, 오랜 단식 중에 있는 ‘유민 아빠’ 김영오 씨도 여전히 단식 중이다. 급박하게 벌어지는 협의 과정을 지켜보면서, 어디선가 또 온몸을 던져 평화를 일구고 있을 반백 머리의 박 변호사를 다시 떠올렸다.
진행 옥명호 편집장 lewisistⓒgoscon.co.kr
정리 오지은 기자 ohjieunⓒgoscon.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