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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 70년을 맞는 ‘십자가 복음’ 묵상
[291호 신년 특별기고]
[291호] 2015년 01월 28일 (수) 17:33:27 김회권 숭실대 기독교학과 교수 goscon@goscon.co.kr
   
ⓒ복음과상황

<복음과상황>은 현실 상황을 복음의 관점으로 해석하고 그 해석에 근거하여 하나님 나라 구현을 위한 하나님의 구령사역과 사회갱신, 그리고 세계변혁 사역에 동참할 방안을 찾아보려는, 기독청년의 생각을 벼리는 대장간이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사모함과 동시에 그 나라를 구현하기 위한 첫 순서는 나 자신이 하나님의 다스림 안에 순복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다스림에 대한 순복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을 영접하고 죄 사함을 받은 후 성령의 감화감동에 부단히 노출될 때 실현된다.

기독청년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당대의 가장 중심 죄악과의 싸움에서 시작된다. 우리 시대의 중심 죄악은 분단, 분열, 적대와 증오, 그리고 파편화된 인간관계다. 이것은 인류 역사의 근본 문제이면서 우리 시대의 중심 죄악이다. 골로새서 1:13~14이 말하듯이, 흑암의 권세에서 하나님 아들의 사랑의 나라에 복속되는 것이 죄 사함, 곧 속량의 근본이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동참하는 길은 당대의 중심 죄악에서 벗어나 성령의 감화감동으로 하나님 및 이웃과의 화해에 들어가는 것이다.

기독청년들이 처한 ‘영적 간빙기’의 현실
오늘날 한반도 현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우편 보좌 통치를 의심하게 만들 정도의 불의와 불법, 거짓과 잔혹으로 얼룩져 있다. 북한은 역사상 전대미문의 세습왕조적 독재정치와 인권 범죄를 당과 국가의 이름으로 자행한다는 국제적 비판에 직면해 있다. 남한에는 한 세대 동안 일군 민주주의와 인권, 공동체적인 삶의 기율이 심각하게 훼손당하는 사태가 병발(竝發)한다. 한반도에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호소하는 연약한 피조물의 아우성이 하늘에 상달되지 못한 채 하나님 나라를 대망하는 자들의 귓전을 두드린다. 나라 안팎으로 군사력과 경제력, 정치권력과 문화권력, 말과 글의 권세를 가진 자들이 하나님의 통치를 인간의식에서 도말하는 사기극이 활개친다. 지성사회, 언론, 사법부, 시민단체, 종교인은 이해관계를 초월해 말과 글에 침투한 거짓의 오염을 막아내고 제어할 사명이 있음에도 돈 먹은 벙어리가 되어 무덤 같은 적막을 뿜어내고 있다.

이런 상황에 직면한 기독청년들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을 유지하기가 힘들어지는 영적 간빙기가 시작되었다고 느낀다. 제도권 종교는 더 이상 하나님의 아들이 보내신 성령의 감화감동권을 벗어나 돈과 세력에 집착하면서, 자신들의 안정된 삶의 토대를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를 중심으로 구축하고 있다. 교회는 영적으로 둔감한 성직자들의 일터로 전락한 듯하고, 태만한 평신도들의 어리석은 추종으로 유력 성직자들마저도 시대를 분별할 수 있는 영적 감수성을 거의 상실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담임목사에게 고급차를 사드리자고 헌금을 강요하는 교회 광고시간에 수많은 청년들은 실족하고 있고, 시대의 아픔을 외면하고 몽롱한 타계주의적 구령주의적 개인구원설교로 호객행위 하는 철없는 설교자들의 자장가 풍 설교에 목이 타들어간다. 직업을 통해 자신의 자존감을 유지할 수 없는 청년세대는 큰 교회에서는 재롱잔치로 어른교우들을 기쁘게 하는 주일학교 미성년 아동처럼 취급당하고 자신의 시대를 뒤흔드는 정치, 경제, 국제관계, 군사, 하나님 나라의 세계격동 등 가장 중요한 쟁점들로부터는 멀찍이 소외되어 있다. 기독청년들의 미성년화, 아동화는 그들에게 직업을 제공하지 못하는 기성세대의 무의식적인 음모다. 그들은 아무런 미래도 열지 못하는 스펙 경쟁이라는 미시적인 경쟁에 매몰되어 시대의 중심 죄악을 깨뜨리기 위한 공민적인 사명감을 망각해간다.

영적 ‘대속죄일’을 위한 성경 읽기
이런 시대상황 앞에서 절망하지 않고 냉소주의자가 되지 않으려면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과 성령의 감화감동에 붙들려야 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믿고 성령의 감화감동을 받으며 주 예수의 현존을 누리는 거룩한 교제권에 참여하지 않은 채 시대문제를 두고 고뇌하고 씨름하면, 처음에는 비관주의자로 변하고 나중에는 냉소주의자, 그리고 저항적 무신론자로 바뀌어간다.

그래서 연초에 시대상황으로 고뇌하는 모든 기독청년들은 십자가 복음을 다시 영접하고 스스로 쇄신되어야 한다. 고대 이스라엘은 1년에 1차 대속죄일을 거족적으로 기렸다. 대속죄일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 개개인의 속죄는 물론 지성소, 성소 등 성전의 모든 시설물에 대한 정화와 정결화의 날이었다. 지성소와 성소마저 수염소 제물의 피를 흥건히 받아 정결케 되었다.

우리도 신년초에는 반드시 영적 대속죄일을 치러야 한다. 로마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히브리서는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 양심에 일곱 번 뿌려지는 효력을 발하는 책들이다. 특히 로마서의 복음 핵심, 그리스도의 보혈 권능이 한 해 동안 감가상각이 일어난 우리의 영적 감수성을 소생시켜주셔야 신앙생활의 감격과 능력을 회복할 수 있다. 따라서 매년 초에 로마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히브리서를 함께 읽어야 한다. 그중에서도 로마서가 최고다. 로마서는 구약성경 전체의 압축파일로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일어난 구원을 가장 논리적이며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로마서 안에는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적 결속과 이완, 해체와 회복 드라마가 압축적으로 나타나 있다.

구약성경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부름받아 온갖 구원의 은총과 혜택을 다 누리고도 결국 하나님을 배역한 결과로 심판을 받아 망하는 이스라엘의 불의(언약적 불충성과 배반)에도 불구하고 언약을 유지하려는 하나님의 이해할 수 없는 부단한 다가섬의 역사이자, 의로우신(계약 유지적) 친절과 사랑과 죄 용서의 역사, 곧 하나님의 의(치드코드 아도나이, the righteous deeds of Yahweh)의 역사였다. 구약 역사 자체가 하나님의 진노를 초래하는 죄와 불법, 불경건과 우상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죄 용서, 심판-갱생-재활복구의 역사였다. 율법과 선지자들의 기준으로 볼 때, 이스라엘의 죄와 불의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관계를 파탄에 이르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율법과 선지자 외에 다른 근거, 하나님 아들의 순종을 통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됨을 유지했다. 하나님 아들의 순종을 대신하여 언약관계를 유지시킨 것은 동물희생제사였다. 어린 양의 순종을 부분적으로 파편적으로 구현한 하나님의 거룩한 종들의 희생 역사가 바로 종말에 오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원형적인 십자가 희생의 그림자였고 전조였다. 결국 로마서는 구약의 하나님의 신실한 의와 이스라엘의 부단한 불의가 맞물리다가 마침내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어떻게 이스라엘의 불의(곧 인류의 불의)를 초극했는가를 아주 정교하고도 세밀하게 보여준다. 그러므로 로마서의 주제는 구약의 중심 주제인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다. 로마서는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구약성경의 유비, 그림, 그리고 상징제의로 심층적인 해석을 시도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 가까이에서 보기
요한복음 19:23~30은 나사렛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당하는 상황을 정밀하게 묘사한다. 그리고 십자가상의 의식을 따라 예수가 외친 비명에 초점을 맞춘다. 확실히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단 마지막 실행자들은 로마군병들이다. 백부장의 지휘 아래 네 명의 군병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매달았다. 이 네 명의 군병들은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아들 나사렛 예수의 죽음 현장에 있으면서도 자신들 앞에서 십자가에 매달린 채 죽어가는 분에 대해 최소한의 관심도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예수님이 남긴 겉옷과 속옷을 취하는 데 열중한다. 자색(왕의 옷을 흉내 낸) 겉옷은 4분의 1씩 나눠가졌고 속옷은 나눠 가질 수 없어 제비를 뽑아 가지자고 의논했다. 통으로 짠 속옷은 제사장들이 입는 속옷이기도 했다. 이 속옷에 비추어 볼 때, 예수님의 죽음이 대제사장의 죽음이라는 점이 암시된다(히 4:14; 5:5).

전체적으로 예수님의 옷에 대한 군병들의 제비뽑기는 시편 22:18의 성경이 실현되는 현장이었다. 시편 22편은 다윗 왕이 폐위되어(아마도 아들 압삽롬의 반역으로) 예루살렘을 떠났을 때 그의 대적자들이 그가 입던 왕의 의복들을 나누던 상황을 노래한다. 이는 다윗 왕이 폐위와 굴욕을 겪고 방황할 때 그의 왕권과 왕의 위엄을 노략질하던 상황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구절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과 죽음은 가히 시편 22편의 드라마적 성취였다. 예수님은 시편 22:1의 “엘리 엘리 라마 사박타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의 절규를 터뜨릴 정도로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다. 그러다 그 극한의 고통을 경감시키는 신포도주를 받으신 후 “다 이루었다”라고 외치며 돌아가셨다. 예수님은 자신의 필생 과업을 의식하면서 사셨기에 이런 종료 소감을 피력했다.

요 4:34(6:38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는 예수님이 자신의 과업, 즉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대해 언급하시는 장면을 보여준다. 요한복음 10:11, 14에는 자신이 이스라엘의 흩어진 양떼를 모아 인도할 선한 목자 사명을 수행할 것임을,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목숨을 바칠 것을 언급하시는 장면을 보도한다. 이런 필생의 과업을 위해 당신은 아버지께서 주시는 잔(요 18:11)을 마셔야 할 것을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을 이 모든 과업의 절정이라고 생각하시는 장면을 적어도 세 번이나 명시적으로 언급하셨다(요 3:14, 8:28, 12:32).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요 3:1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인자들 든 후에 내가 그인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요 8:28)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요 12:32)

결국 “다 이루었다”는 이 종료 선언은 다음과 같이 여러 의미를 갖고 있다.

1. 십자가에 달려 고통당하는 과정이 끝났다.
2. 예루살렘에 와서 곤욕을 당하고 십자가 죽음으로 마무리되는 유월절 어린 양의 죽음과정이 종료되었다.
3. 예수님의 공생애가 하나님의 뜻을 100% 이루고 끝났다.
4. 구약에 약속된 인류 구원의 드라마, 이스라엘 회복 드라마가 완성되었다.

십자가의 굴욕적 죽음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스라엘 백성이 1500년간의 선민 역사를 통해 아버지 하나님께 바쳐야 할 총량의 순종을 다 채워 순종하는 행위였다는 것이다. 죽음마저 불사한 이 극한의 순종이 하나님 아들이 보유한 능력이요 위엄이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함으로 예수님은 이제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 등극해 모든 불순종자, 반역자를 굴복시키고 감복시키고 무장해제할 것이다. 빌립보 2:6~11의 드라마는 이 십자가 죽음도 불사하는 복종에서 완성된다(빌 2:6~11).

유월절 ‘어린 양’과 ‘피흘림’ 되새기기
“다 이루었다”는 말뜻을 해명하기 위해 요한복음 19:31~37은 예수의 자의식을 유월절 어린 양의 자의식으로 파악하고 그것을 부각한다. 요한복음은 나사렛 예수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1:29, 36; 3:14; 8:28; 12:32[12:24])임을 보여주는 데 초점을 맞춘다. 유월절 어린 양은 출애굽 구원의 역사 때 유대인들을 죽음의 천사들이 벌이는 심판에서 구원해준 제물이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풀어주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께 저항하는 애굽인들을 심판하기 위해 그들의 맏아들을 죽임으로써 애굽 제국이 계승될 가치가 없다고 선언했다.

이 때 히브리인들도 맏아들 심판이 임하는 애굽에 거주했다. 하나님은 히브리인들을 구해주시기 위해 집 대문, 인방과 설주 등에 어린 양의 붉은 피를 발라 자신들이 애굽인이 아님을 밝히라고 명하셨다. 히브리인들은 어린 양을 잡아 명하신대로 준행하고 죽음의 심판으로부터 살아났다. 히브리인들 또한 맏아들 심판을 받아야 할 죄인이었으나 하나님께서는 어린 양의 피를 보고 넘어가셨다.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나중 염소도 사용)의 피를 보고 이스라엘의 죄를 묵과했고 용서하셨다. ‘유월’은 담을 넘어가듯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죄를 못 보신 것처럼 그냥 넘어가 주는 행위를 가리킨다. 이처럼 유월절은 하나님이 어린 양의 피를 보고 심판을 행하지 않고 넘어가 주신 날을 기리는 절기다. 곧 민족적 용서 체험을 기리는 날이다. 이 절기의 핵심은 문의 인방과 설주 등에 뿌려지고 발라진 어린 양의 피다. 그런데 왜 피가 죄를 속하는 것일까?

히브리서 9:22(레위기 17:11)은 피흘림이 속죄를 위한 것임을 말한다. 또한 죄악된 생명은 죽음으로써 그 죄로부터 풀려날 수 있다는 원리를 말한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생명이 피에 있음으로 피가 죄를 속하게 하느니라”(레 11:11 참조. 레 11:14_“모든 육체의 생명은 그것의 피인즉…”). 결국 피가 죄를 속하는 까닭은 피가 생명 자체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유월절에서 죄인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죄인의 자아를 대신한 어린 양의 죽음을 요구하신 것이다. 즉 어린 양의 피를 보고 옛 죄인의 생명이 죽었다고 보신 것이다.

그러나 유월절 어린 양 예수님의 피에는 또 다른 차원이 있다. 한편으로는 예수님의 피는 불순종하는 이스라엘이 죽을 때 흘리는 피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독생자가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기 위해 죽기까지 바친 순종 과정에 자발적으로 흘린 피였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흘리는 피였기 때문에 어린 양 예수의 피는 이스라엘의 죄를 용서하시려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극한으로 표현하는 피였다. 즉 예수의 피는 죄의 징벌을 대신 받는 피인 동시에 의로운 대속제물이 되어 주신 하나님 아들이 아버지에게 바치는 사랑의 피이다.

이런 맥락에서 십자가에서 피흘리며 죽으신 예수님은 유월절 예비일에 잡혀 도살된 어린 양이다. 유월절 어린 양은 일제히 예비일에 붙들려 도살된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22:15에서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식사를 할 수 있기를 열망했다.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누가복음은 예수님이 유월절을 제자들과 함께 먹고 유월절의 어린 양 죽음을 당하셨다고 본다(눅 22:19-20). 복음서들은 예수님의 죽음 시점을 강조함으로써 예수님이 유월절 어린 양으로 죽었음을 암시한다. 더 나아가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뼈가 꺾이지 않는 점도 유월절 어린 양의 죽음임을 가리킨다고 말한다(요 19:33; 출 12:46). 유월절 어린 양은 뼈를 꺾지 않고 통째로 구워먹었기 때문이다. 로마 군병들은 십자가에 달려 죽지 않는 죄수들의 뼈를 꺾어 죽음을 재촉하곤 했는데 예수님은 이른 시기에 운명하셨기에 뼈를 꺾을 필요가 없었다.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 양이었다!

마지막으로 창에 찔린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쏟아져 나온 물과 피가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의미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을 다시 하나님 백성으로 회복시키는 어린 양으로 죽으셨던 것이다. 예수님이 흘린 피는 종말론적인 유월절 식사를 가리키는 성만찬을 창조하는 피다. 예수님의 보혈로 용서받는 하나님 백성은 새 이스라엘이 되어 언약적 상호연대와 속박으로 들어간다. 하나님께 속박된 성만찬 참여 백성은 이웃과 결속된 언약적 돌봄의무를 받아들인다. 예수님의 피는 성만찬 나눔 공동체, 즉 교회를 창조한다. 교회는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피 위에 건축된 성만찬 공동체다. 예수님의 보혈을 마신 자마다 죄 사함을 받고 십자가 위에 들린 놋뱀을 쳐다 본 모든 사람은 주님께 이끌림을 받아 성만찬으로 나아간다. 복음서들이 자세히 묘사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과정을 창세기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구원 드라마의 관점에서 심층적으로 파헤치는 것은 로마서다. 복음서와 사도 바울은 항상 긴밀한 상호적 해석관계 안에서 읽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하나님의 구원 권능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아 예수의 박해자에서 예수의 사도로 환골탈태를 맛보았다. 자신은 마땅히 심판받아 죽어야 했는데 이방인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구원계획 때문에 구원을 받아 사도가 되었다. 따라서 바울은 이방인에 대한 채무자 의식으로 가득 찼으며 세계의 수도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기를 열망했다(롬 1:15). 그 열망의 이유로 로마서 1:16이 시작된다. 1:15~17은 이유접속사 가르(gar, 왜냐하면)가 세 번 사용되는 논리적 구문이다. 이 가르를 반영해 15~17절을 풀어쓰면 이렇다.

“로마에 가서도 복음을 전파하기 간절히 소망하는 이유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기 때문이다(복음은 사도 바울의 신조어로서, 할례나 율법 준수 없이도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을 받아 하나님 자녀로 입양된다고 선언하는 바울의 케뤼그마).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구원을 이루는 하나님의 권능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맺은 언약,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시내산에서 맺은 모세 언약을 지키고 하나님 백성으로 살아갈 능력을 선사한다. 복음이 하나님의 구원 권능인 이유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믿음으로부터 믿음으로 이르게 하기 때문이다.”

로마서 3:24~26은 이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자세히 설명한다. 왜 예수님의 죽음이 하나님의 의로우심도 증명하고 예수님의 보혈을 믿는 사람도 의롭게 하는가를 아주 논리적으로 설명한다. 구약성경의 제사 그림을 통해 이신칭의(롬 1:17하반절)를 아주 논리적으로 납득시켜주는데 3:23부터 읽어야 바울의 정교한 논리를 이해할 수 있다. 3:23(“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즉 하나님의 지성소에 현존하는 그 영광에 나아가지 못하더니)은 창세기부터 시작되는 인간의 죄악 역사를 요약한다.

선민 이스라엘 역사도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고 하나님 백성다움을 상실해간 역사였다. 그때 하나님이 예비하신 독생자가 불의한 이스라엘(불의한 인류)를 대신해 심판받아 죽었다.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다. 이유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이스라엘은 언약관계를 파탄내고 멀리 떠났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 예수의 죽음을 통해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고 하셨다. 하나님은 예수의 십자가 보혈이 이 하나님의 일방적인 언약 회복 조치임을 믿고 영접한 사람도 의롭게 하신다. 당신의 독생자를 보내사 대신 정죄받게 하면서까지 하나님은 (인류의 대표자인) 이스라엘과의 언약관계 회복에 전력을 쏟으셨으니 하나님은 의로우심을 입증했다. 이제 남은 것은 이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언약관계 회복의 중보자라고 믿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언약적 결속에 들어가게 되므로 의로워진다. 의로워진다는 말은 언약관계에 충실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은 창세기의 구원 드라마를 통해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화해가, 하나님과 온 인류의 화해임을 깨달았다. 아브라함은 만민을 복주시기 위하여 택한 복의 근원이었다. 선민 이스라엘은 만민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매개하고 중보하는 선교사였던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이방인의 빛으로 이방인을 하나님께로 데려오는 제사장 백성이요 선교사 백성이었음을 자각한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이방인의 선교사요 제사장’이라는 바울의 의식이 명료하게 표명된 곳이 로마서 9~11장, 15장, 갈라디아서 4장, 에베소서 2~3장이다. 특히 로마서 9~11장과 에베소서 2:11~18은 하나님과 화해를 이뤄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적대관계에 있던 이웃과의 화해를 이룰 수밖에 없음을 잘 보여준다.  

사도 바울은 구원받자마자 자신의 민족 전체에게 부여된 사명인 이방인의 제사장 역할을 떠맡았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 복음을 영접하고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이 원래 이스라엘 백성을 부르실 때 작정하셨던 이방인과의 화해 사역에 투신한다. 이처럼 하나님과의 화해를 맛본 성도는 반드시 자신과 적대관계에 있는 이웃과의 평화를 추구하게 마련이다. 한국교회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평화와 화해 창조능력을 적대관계에 놓여 있는 북녘 동포들을 향해 드러낼 사명을 회피할 수 없다.

한반도 분단 문제는, 하나님과 분단된 모든 인간의 문제
창세기는 하나님과 인간의 불화상태, 즉 아담 인류의 죄가 모든 분단의 원형임을 말한다. 아담은 하나님께 범죄하고 하나님과 분리되고, 아내와 분리를 경험하고 마침내 자신을 둘러싼 자연환경과 적대적 관계에 놓인다. 가인은 아벨을 죽이고 하나님과 분리되자마자, 이웃과의 분리와 적대관계를 예기하고 아예 아들 에녹의 이름을 딴 성을 쌓는다. 성채는 타자배제적이고 하나님 배척적인 자기파괴적 자율성 추구의 상징이다.

아담 인류는 하나님과 분리되자마자 하나님과 원수 상태에 빠져 버린다. 결국 이 세계의 근본 분단은 자본가와 노동자의 계급갈등도 아니요, 기독교와 이슬람의 종교갈등도 아니다. 하나님과 죄인의 영적 갈등과 분단이 모든 분단의 원형이요 효시다. 공산주의 사상의 원조인 엥겔스가 영국에서 《영국노동계급의 조건》이라는 책을 써서(1840년대) 계급투쟁의 필연성을 역설할 때, 찰스 스펄전 목사는 로마서 강해에서 하나님과 죄인(인간)의 갈등이 어떤 투쟁보다 더 항구적인 투쟁임을 역설했다.

신약성경은 예수님과 사도 바울을 통해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갈등의 본질은 하나님과 원수 상태에 빠진 모든 인간의 영적 갈등임을 역설한다. 특히 에베소서는 아담 인류와 하나님의 갈등과 투쟁의 결과 유대인과 이방인의 갈등이 생겨났음을 암시한다. 토마스 카일 라일, 엘리 할레비 등이 잘 지적하듯이(Elie Halévy, Translated and Edited by Bernard Semmel, The Birth of Methodism in England), 영국에 계급투쟁혁명이 일어나지 않도록 막은 것은 영국 하층노동자들을 몸낮춰 섬겼던 감리교도들의 헌신적 사회선교 때문이었다. 그리스도 보혈의 영적 감화력에 노출된 사람들은 모든 사회적 갈등과 장벽을 무너뜨리고 평화를 창조하는 선교사들이다. 에베소 교회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하나님과의 화해를 맛본 사도 바울의 선교 사역의 열매였다.

에베소 교회는 갈등하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진 결과 생겨난 종말론적 화해공동체였다. 그리스도의 피가 이방인과 유대인의 장벽을 해소한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흘린 피는 이방인들을 상대로 적대적인 우월감에 빠져있던 유대인들에게 세계선교적 화해의 메시지, 복음을 깨우쳤던 것이다. 하나님과 원수 상태에 빠져있는 모든 인간은 죄 없으신 채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을 증거하면 그 양심이어린 양의 피로 일곱 번 뿌려진 성소휘장이 갈라지듯 하나님을 향해 갈라져  하나님 앞에 엎드리게 된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나사렛 예수는 십자가에 매달려 3시간만에 운명하셨다. 운명하신 후에도 확인 사형을 집행하려는 로마군병의 창에 찔려 옆구리에서 피와 물을 쏟아내셨다. 창에 찔린 그 옆구리에서는 그리스도의 피가 흘러나왔다. 지금도 하나님께 반역하며 살아가는 자들의 완악하고 패역한 양심은 그리스도의 보혈에 뿌림을 받으면 하나님께로 되살아난다. 이 세상에 출현한 교회는 이 세상에서 가장 화해하기 힘든 두 집단을 가깝게 하신 그리스도의 보혈이 창조한 작품이다(엡 2:10; 고후 5:17). 그리스도의 보혈로 창조된 새 피조물인 교회는 이 갈라지고 찢어진 세상을 치유하고 하나 되게 하시는 하나님 나라 건설 전위대로 부름받았다. 그리스도의 보혈은 성령을 상징하는 생명의 원액으로 아무리 멀어진 원수 사이라도 화해시키는 신비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권능 그 자체다.

에베소 교회는 이방인과 유대인이 이 그리스도의 보혈로 하나가 되어 한 몸을 이루어 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국제적 친교모임이었다. 인종, 계급, 계층, 직업, 종교, 성별 등 인간을 갈라놓는 모든 차별을 그리스도의 보혈은 거룩하게 소거시켰다. 예루살렘 성전에는 유대인의 뜰과 이방인의 뜰이라는 구별된 구역이 따로 존재했다. 유대인의 뜰로 들어가는 담에는 “누구든지 이 경계를 넘어 가는 이방인은 죽임을 당한다”는 살벌한 차별경고문이 새겨져 있었다. 사도 바울이 사도행전 21장에서 유대인 드로비모를 예루살렘 성전으로 데리고 갔는데, 그것이 바울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성전훼방죄를 범한 상황으로 오해를 받았다. 이방인을 유대인과 하나 되게 하려는 일념으로 이방선교의 열매인 이방신자 5명을 데리고 오순절에 달려온 사도 바울은 오로지 유대인과 이방인 그리스도의 보혈로 하나 되어 한 하나님을 섬기는 종말론적인 화해를 그리며 분투했던 것이다.

하지만 음식법, 할례법, 안식일법, 정결예법(이방인적인 요소, 불순하고 불결한 속된 물건이나 사람들, 우상숭배) 등에 집착함으로써 메시아를 영접하려고 안간힘을 썼던 선민 이스라엘의 이방인 배척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적대적이었고 몰상식적이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불결하고 우상숭배적인 이방인들과 접촉함으로 부정하게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이방인들과의 음식먹기, 어울리기를 가장 큰 죄악으로 여겼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은 이방인, 불결한 것, 속된 것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믿고 선포했다. 십자가 복음을 선포할 때마다 이방인들은 할례를 받고 유대인이 되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도 성령을 받아 재창조되는 구원을 맛보았다.

이방인들의 존재를 자신의 종교적 성별과 성결을 잠재적으로 해치는 존재라고 간주하며 배척했던 대다수의 동시대 유대인과 달리 바울은 무할례당이라고 경멸당하던 이방인들에게 가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예수 그리스도는 세계 만민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화목제물임)을 전파하고 성령의 강림을 매개하는 구령활동을 벌여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유대교 회당에서 할례를 받지 않았다고 하나님의 자녀 대우를 받지 못하던 개종 직전의 이방인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이고 이스라엘 백성 성도와 동일한 하나님의 권속이라고 불렀다. 그 결과 에베소 교회가 생겨났다.

그리스도의 보혈이 선포하는 진리
에베소 2:11~18(또한 2:19~22)은 골고다의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흘린 보혈이 성령을 불러오고 성령이 임한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는 기적을 증거한다. 그리스도의 보혈은 이스라엘을 선민으로 불러 모은 목적을 성취했을 뿐 아니라 그동안 하나님의 구원사에서 2차적인 수혜자로 분류되던 이방인들을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로 불러모으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을 택하신 목적이 아담 후손(아담 인류, 롬 5:12-21에 나오는 아담의 죄 권세 아래 태어난 인간)을 죄와 죽음의 저주에서 건져내기 위함이었음을 고려해보면 그리스도의 보혈은 창세기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구원 드라마를 완성하는 결정적인 하나님의 행동이었다. 이것을 바울은 복음의 비밀이라고 불렀다. 종말의 때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하나님의 독생자)를 통해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로 삼기 위해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셨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보혈은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께 가깝게 불러오게 한 숱한 동물희생제사의 피의 원형이었다. 하나님과 멀어진 죄인 이스라엘은 동물희생제사의 피로 하나님께 가까이 갔다(레위기 희생제물, 코르반은 카랍 동사[가깝다]에서 파생).

레위기 17:11, 히브리서 9:22가 강조하듯이 피는 생명의 진수다. 하나님께 죄를 지은 옛 자아는 죽음을 통해 하나님과 새롭게 되는 관계로 재진입한다. 우리의 옛 자아는 죽음을 통해 하나님께 가까이 간다. 피는 심판당한 죄인이 흘리는 죄 인정의 피다. 아울러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피는 억만 인류의 불순종과 죄의 결과 하나님과 멀어진 상황을 반전시키는 자발적인 죽음, 자기희생적 죽음의 피다. 하나님 아들의 죄인 사랑을 증거하는 피이며 궁극적으로 독생자를 대신 심판당하게 하면서까지 죄인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피다. 아담의 불순종이 하나님과 인간을 멀어지게 하는 힘보다 그리스도의 보혈이 아담 인류를 하나님께 가깝게 돌이키는 힘이 비교할 바 없이 더 크다.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만드는 그리스도의 보혈이 성령의 하나 되게, 화평케 하고, 화목케 하는 사역을 수행한다. 그리스도의 보혈은 우리를 하나님께 돌이키고 서로 원수되었던 이웃에게로 하나 되게 만든다. 그리스도의 피로 가깝게 된 우리가 교회가 되었다.

요약하자면, 그리스도의 피는 다음과 같은 진리를 선포한다.

1. 죄의 삯은 사망이다. 피만이 죄를 속한다. 죄인은 죽음으로써 죄로부터 벗어난다. 동물희생제물의 피는 헌제자(제사드리는 자의 옛 자아의 죽음을 대신).
2. 구약의 동물희생제사의 피는 매년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속하는 피를 흘렸다. 이스라엘은 온 아담 인류의 대표자다. 따라서 구약 희생제물의 피는 아담 인류의 죄를 대신해 죽은 대속제물의 피인 셈이다.
3.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동물희생제물이 흘린 모든 피의 원형이자 원천이다. 동물희생제물의 죄 사하는 효력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흘린 보혈의 가불인 셈이었다.
4. 그리스도의 보혈은 하나님께 멀리 떨어져 살던 죄인 이방인들도, 가깝게 떨어져 살던 유대인 모두를 하나님께로 이끌어 들여 화목시켰다.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나온 보혈 사역을 성령이 대신 행하신다. 성령은 화평의 영이요 죄 사함을 창조하는 영이다.
5. 그리스도와 화목케 된 유대인과 이방인들은 한때의 불화와 적의를 해소하고 한 가족이 되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보혈의 영적-화학적 작용이 아주 왕성하게 일어나는 인간 재창조의 현장이다.


결론: 교회다움의 회복이 화해와 통일에 참여하는 지름길
하나님과 화해를 인격적으로 맛본 사람들만이 우리 겨레의 분단해소, 우리 사회의 계급적·세대적 계층갈등 해소의 사명에 부르심을 받는다. 자신이 하나님과 화해를 맛본 사람만이 하나님과 원수 상황에 놓여 사는 이방인들이 얼마나 불쌍한가를 실감한다. 한국교회가 이 십자가의 복음, 그리스도의 보혈 복음만을 제대로 납득하고 이 복음만을 증거하면, 즉 교회가 교회답기만 하면 한국 사회의 모든 단위의 갈등과 대결은 크게 완화되고 그 사회통합적, 사회화해적인 변혁의 에너지는 겨레화해의 에너지로 치환될 것이다. 우리 겨레의 화해와 통일은 민족주의 단결담론을 넘어 동북아, 유라시아 일대에 복음통상국가로서의 대한민국 사명수행에 결정적인 선결과제가 될 것이다.

본문이 증거하듯이 교회는 적대적이거나 서로 낯선 이방인 관계였던 개인들이 자유의사로 형성한 독특한 결사체다. 그리스도의 강력한 중력체에 끌림을 받은 개인들이 이룬 모임이다. 그리스도의 보혈이 일으킨 사죄 권능을 맛본 개인들이 이룬 모임이다. 그리스도의 보혈권능의 효력을 매개하는 것은 복음 전파(복음), 찬양, 기도, 사랑 실천 등이다. 그리스도 보혈의 사죄 권능을 맛본 개인들은 우주적 고아의식을 갖고 살다가 하나님 나라의 권속이 되고 하나님예배공동체의 일원으로 초청받는다. 그리스도의 몸과 연결된 개인들은 서로 연결, 상합, 연락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간다. 그리스도인들의 이 역동적인 사회생활 안에 하나님의 임재는 가득 차며 하나님 영광이 발출된다. 사랑의 나눔, 베품, 고백과 용서, 급진적인 사랑 실천, 친교권 개방 등을 통해 하나님 사랑, 사죄 권능을 매개하는 성령의 역사가 왕성하게 일어난다. 이런 공동체에 합류한 개인들은 자신의 은사와 재능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자신도 모르게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세워가는 데 기여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보혈은 우리의 원죄, 죄악 충동, 죄악 형벌, 죄책감을 다 청산케 하는 복음의 진수다. 을미년 새해에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하나님과 억만 광년 떨어져 살던 삶을 돌이켜 하나님 자녀, 하나님 나라의 가족으로 입적되는 감격이 하루하루 넘치길 간구한다. 하나님과 불화상태에 놓여 있던 죄인들이 하나님과 맛본 화해와 평화가 궁극적으로 우리 겨레의 평화와 통일을 이루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북한은 유대인이라고 자부하는 우리 선민의식 가득 찬 자유민주 대한민국에는 이방인, 즉 무할례당이라고 불릴 수 있는 외인들이다. 선교사명을 가진 쪽은 하나님의 십자가 복음으로 하나님과 화해를 맛본 자유대한의 국민이다.

하나님의 선민 유대인들이 먼저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과 화해하고 평화를 누렸고 그 힘으로 이방인 선교가 일어나 교회가 되었다. 비유컨대 남한은 유대인의 자리에서 하나님과 먼저 화해를 맛본 교회가 자유롭게 활동하는 곳이다. 유대인이 주도한 이방인과의 하나됨이 교회의 본질이다. 여기에 시사점이 있다. 유대인의 자리에서 교회는 먼저 북한 주민에 대한 과도한 선민의식을 접어두고 사랑의 손길을 내뻗어 교회를 이루어야 한다. 교회의 교회다움이 우리 겨레의 통일과 화해 과정에 결정적인 추동력을 제공할 것이다.

2015년 을미년 새해 하나님과 원수된 상태를 그리스도의 보혈로 해소시킨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겨레의 화해와 통일 사명에 참여하도록 부름받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슬럼가와 부유층 주거지대의 갈등을 해소시킬 수 있다. 한국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원수 상태에 놓여있는 모든 쌍방을 하나의 화해된 백성, 공동체로 재창조할 수 있음을 보여줄 사명이 있다. 천만 교인들은, 교세 규모를 자랑하거나 과시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자랑하는 데 투신해야 한다.

한반도의 분단해소와 겨레의 민족화해와 통일은 십자가의 복음으로 구원받은 성도의 가장 긴급하고 중대한 기도제목이 될 수밖에 없다. 동독의 라이프치히에 니콜라이교회, 성토마스교회 등은 1980년대 초부터 동독의 민주화를 위해 기도하고, 인권을 위해 기도하면서 통일의 불씨를 지폈다. 10년 기도의 결실이 1989년 10월 7만 기도회, 100만 거리시위였다. 동독 비밀경찰 슈타지와 소련 비밀경찰 케이지비(KGB)마저도 교회를 중심으로 터져나온 인권, 민주주의 신장, 우리는 하나라고 외치는 민족화해구호(Wir sind ein volk)를 억누르지 못했다. 통일독일은 기독교 신앙의 힘, 복음의 힘이 이룬 위대한 신앙적 결실이었다. 니콜라이교회의 기도회 정신으로 우리 겨레의 분단혼을 화해와 통일의 영으로 바꾸는 일에 진력해 온 우리 기독청년들도 선을 행하다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이 겨레의 분단을 통해 선을 이루고 결국 적대적 분단시대를 견디어 낸 우리 겨레를 동북아 평화, 세계평화의 향도로 삼아주실 것이다. 

 

김회권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서 공부했으며, ESF(한국기독대학인회)에서 회심하고 신앙 훈련을 받은 뒤 11년간 ESF 간사로 섬겼다. 장신대 신대원을 나와 미국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성서신학석사 및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숭실대학교 기독교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는 《하나님 나라 신학으로 읽는 모세오경 1, 2》 《김회권 목사의 청년설교》 《하나님 나라 신학으로 읽는 사도행전 1, 2》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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