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6호 3인 3책] 우상의 시대, 교회의 사명 | 톰 라이트 지음 | 김소영 옮김 | IVP | 2016년

나는 생각했다. 어떤 책은, 내용의 90%, 아니 99%를 버린다 하더라도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내게는 톰 라이트가 쓴 《우상의 시대, 교회의 사명》이 그런 책이다. 본론 부분만 따지면 이 책은 라이트가 이른바 복음주의자로서 쓴 다른 책들과 견주었을 때 특별히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다. 신약학자로서 그의 면모를 살피고 싶다면 크리스챤다이제스트에서 펴내는 ‘기독교의 기원과 하나님의 문제’ 시리즈를 구입해서 보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어느 정도 자신이 비판적인 안목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독자라면 이 책이 90년대에 나왔음을 상기하며 뉴에이지 풍조는 이미 지나갔다고, 이를 염두에 두고 쓴 라이트의 분석과 대안은 힘을 잃었다고 이야기할지도 모르겠다. 어느 정도는,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이 책에서 정말 볼 만한, 본격적인 논의가 펼쳐지는 1부 중반 이후가 아니라 서론에 해당하는 그 1장 초반부다. 여기서 그는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이원론자가 아니면 일원론자라고 말한다. “전통적인 배경을 지닌 많은 그리스도인은 기본적으로” 이원론자다. 그들은 창조의 물질성과 강하게 연관되는 세상을 본질적으로 악하게 여기고, “비물질적 천국이나 비물질적 지옥”을 마음에 그린다. 이러한 이원론에 반감을 느끼는 이들은 “일원론으로 기꺼이 전향”하는데, 일원론자들은 “자신의 육체성”을 긍정해주는 영성에서 위안을 얻고 더 나아가 이들은 “하나님과 세상을 혼동하기 시작해 선과 악의 차이”를 부정한다. 이에 라이트는 말한다.

“이원론과 일원론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 나아가려면 상당한 기술이 필요하다. 교회로서 우리는 하나님과 세상에 대한 더 나은 관점, 예수님의 복음에 근거를 확고히 두며 우리가 처한 상황을 분명히 다루는 관점이 필요하다. … 우리는 자랑할 것이 별로 없다. 우리가 어떤 새로운 사명에 뛰어들거나 그것을 위해 진심으로 새로워지려 한다면, 결코 하지 말아야 하는 일이 한 가지 있다. 바로 개인으로서든 당파로서든 지혜, 기술, 성숙함, 통찰, 지식, 영성, 전망, 그 밖의 무엇이든 우리가 이미 가진 것을 크게 기뻐하며 사명을 시작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우리의 기획을 시작해 보기도 전에 망치는 꼴이다. 우리는 오직 실패를 고백하며 시작할 수 있다.” 

2017년은 종교개혁 500주년이다. 곳곳에서 온갖 행사를 준비하고 출판사에서는 관련 책들을 쏟아내고 있다. 게다가 최근 뉴스는 10년마다 한 번씩 통계청이 실시하는 종교 분포 조사에서 신자 수가 가장 많은 종교가 개신교라고 전함으로써 축제를 준비하는 한국 개신교계에 샴페인 하나를 보태주었다. 하지만 정말, 그럴 때인가? 우리는 이원론과 일원론 사이에서 균형을 잡기는커녕 더 한쪽으로 기울어져 무게중심을 잃은 것은 아닌가? 그러면서도 “자랑할 것을” 찾아 헤매는 것은 아닌가? ‘지금, 여기’서 다른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실패의 고백”이 아닌가? 

벌써 세 번째 연재글이다. 첫 번째는 ‘언어’를, 두 번째는 ‘공부’를 다뤘으니 이번엔 교회, 혹은 공동체 이야기를 하자고 원래는 마음 먹었더랬다. 그런데 막상 원고를 쓰면서 든 생각은, 교회 이야기를 통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우상의 시대, 교회의 사명》은 바로 그 부분을 상기시켜 주었고, 그 점에서 내게 라이트의 다른 어떤 저작보다 중요하고 의미심장하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해, 한국 개신교의 구성원으로서 내가 첫 번째로 말하고 싶은 말은 이거다. 우리는 실패했다. 그리고 바로 이 실패의 자리에서 다시금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

  

박용희
장신대 구내서점, IVP(한국기독학생회 출판부) ‘산책’ 북마스터로 일했다. 책, 여행, 사람을 좋아한다. 새해 들어 고양시 덕은동에 헌책방 ‘용서점’을 내고 책과 더불어 하루를 열고 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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