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7호 커버스토리] 세월호 희생자 故 박성호 학생의 누나 박예나 씨

   
▲ 세월호 기억교실 2-5 교실. 교탁 바로 옆이 박성호 학생의 책상 ⓒ복음과상황 이범진

올해 부활절은 4월 16일이다. 3년 전 4월 16일, 세월호 참사가 있었다. 아직 이날의 사고가 어떤 연유로 발생했는지 진상 규명도 되지 않았고, 선체도 바닷속에 그대로 있다. 슬픔과 분노는 더욱 커졌다. 이런 때, 예수의 삶을 따라야 할 신앙인에게 부활을 기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세월호의 아픔, 분노, 슬픔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는 유가족 박예나(23) 씨를 만났다. 예나 씨는 사제를 꿈꾸던 고(故) 박성호 학생의 누나로, 동생과 함께 어릴 때부터 성당에 다녔다. 영세명은 스콜라스티카. 성당은 동생 성호와 함께 수도자의 길을 준비하던 소중한 곳이다. 그러나 세월호 사고 후에는 성당에 나가지 않는다. 늘 함께하던 신앙인들로부터 ‘밀려났다’고 표현하는 게 더 정확하겠다. 매일 밤 아무도 모르게 눈물범벅의 기도를 드렸을 그에게, 그동안의 안부와 더불어 예수의 부활에 관해 물었다. 예나 씨는 “고통의 묵상이 없으면 주님의 부활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인터뷰는 겨울잠을 자던 동물들이 깨어 꿈틀거린다는 경칩(驚蟄) 이틀 전, 세월호 유족(형제자매)을 위해 마련된 ‘우리함께’(안산시 단원구)에서 진행됐다.

― ‘카메라 셔터 소리에 노이로제가 있다’는 기사를 접했습니다. 부담스러우면 사진은 찍지 않겠습니다.
미리 알려주시니 부담이 훨씬 덜 되네요. 막무가내로 동의 없이 찍히는 게 아니니까 괜찮을 것 같아요. 세월호 참사 이후부터 카메라가 좀 무서워졌어요. 국민에게는 바른 정보를, 국가를 향해서는 바른 대응을 위한 압박을 해야 할 언론이 그때 단원고와 팽목항에서 하는 행태를 보면서요. 어머니들 실신하는 것만 쫓아다니며 찍고요. 부모님들과 경찰이 대치하니까 “저기 그림 났다” 하면서 기다렸다는 듯이 웃으면서 그것만 찍어요. 왜곡 보도로 국민과 세월호 유가족을 이간질한 일은 다반사였죠. 그때부터 카메라 셔터 소리가 무서워졌어요.

― 아픈 이야기를 다시 끄집어내는 인터뷰를 요청하는 게 죄송스러웠습니다. 용기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세월호 진상 규명을 위한 활동을 하다가 지금은 아무것도 안 하고 있었어요. 건강도 나빠지고, 일상을 살아내야 하니까요. 쉬고 있었어요. 그럼에도 죄책감에 계속 세월호를 위한 활동을 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갖고 있었거든요. 쉬고 싶으면서도,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아픈 이야기이지만, 사람들과 나누고 싶고 소통하고 싶었어요. 보내주신 인터뷰 요청서를 보니 깊은 이야기도 할 수 있을 것 같았고요.

― 참사 후 3년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요.
2014년도에 대학교에 입학했어요. 그러니까 3월에 입학하고 4월에 사고가 난 거죠. 그때 휴학을 하고, 계속 휴학을 꾸역꾸역 연장하다가 이번에 자퇴를 했어요. 지금은 어머니도 아파서 일을 못 하시고, 막내는 고등학생, 언니는 세월호 활동 중이고요. 일할 상황이 되는 사람이 저밖에 없어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어요.

― 상황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보상금 받았는데 왜 고생하느냐?’ 하겠어요.
저희는 보상금을 받지 않고 소송 중이에요. 물론 유족들이 보상금을 받은 것이 특별대우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단순한 교통사고를 당해도 보상금을 받잖아요.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은 드는데, 동생 목숨값이잖아요. 전 받아도 못 쓸 것 같아요. 아무튼, 어렵게 지내고 있는데 “보상금 많이 받아서 좋겠다” “로또 맞았네” 이런 소리를 들으면 답답하고 울화통이 터지죠.

― 경제적인 상황도 어렵지만, 세월호 참사 후 인간관계에서도 큰 변화를 겪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휴대폰 전화번호부에 몇 명 남지 않았다고….
인생의 절반을 함께한 친구와도 결별할 정도였어요. 주변 친구들도 다 떠날 때여서 덤덤하긴 했어요. 제가 어떤 특별한 요구를 한 것도 아니고, 세월호 사건에 관심을 갖고 유가족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를 요청한 것인데 불편했었나 봐요. 오랜 시간 함께해온 사람들 대다수를 끊어냈어요. 인간관계가 전복되는 경험이라고 해야 할까요.

― ‘진짜’라고 생각했던 관계가 ‘가짜’임을 드러내는 순간들이었겠어요. 20년 넘게 다니던 성당도 떠났다고 들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쭉 성당에 다녔어요. 부모님 집안이 다 천주교였거든요. 사고가 났을 때는 성당에서 중고등부 교사를 하고 있을 때였어요. 캠프 프로그램에 관한 회의를 나누는데, 어떤 선생님이 이런 제안을 했어요. 세월호 사고로 역할극을 하자고요. 그 역할극을 통해 선장, 선원, 희생자, 생존자, 유가족이 서로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자고요. 그 자리에 있던 제가 너무 황당해서 역할극은 아닌 것 같다고 문제를 제기했는데, 그 누구도 저에게 공감해주지 않았어요. 배신감을 느꼈어요. 저와 사람들 중간에서 다리 역할을 해주던 친구도 저보고 예민하다고 했어요. 많은 것을 바란 게 아닌데…. 그저 조금만 상처에 대해 배려를 해주길 바랐을 뿐이었어요. 그저 잘 몰라서 우리에게 상처를 주는 것 같아서 잘 지내보려고 제가 먼저 사람들한테 솔직하게 이야기했어요. ‘이렇게 배려해줬으면 좋겠다’ ‘이런 점이 서운했다’ 용기 내서 먼저 말을 꺼냈는데 부담스러워 하더라고요. 그때 느꼈어요. 몰라서라기보다는 관심이 없는 거구나. 애써 용기 냈던 내 마음을 외면하고 싶은 거구나…. 제가 그들을 더 이해해주면서 지낼 수는 없었어요. 그리고 또래 친구들을 잃은 성당 아이들도 큰 상처를 받았는데, 어느 틈엔가 성당에서도 세월호 언급이 금기시되는 느낌을 받았어요. 크게 실망했고 깊이 상처받아서 더 못 다니겠더군요.

   
▲ 박예나 씨. "세월호 유족 간담회에 다니면서, 제가 희망을 말했어요. 그래야 사람들이 더 용기를 낼 것 같아서요. 그러다 보니 제가 지치더라고요. 나는 아직 슬퍼할 시간도 없었는데, 동생의 부재를 채 실감하지도 못하는데 희망을 이야기하다 보니 스스로 괴리감을 느낀 거죠."  ⓒ복음과상황 오지은

― 역할극 제안은 너무 충격적인데요.
어른들도 어려워서 세월호 관련 말을 안 하고 외면하고, 아이들도 슬픔을 어떻게 해소할지 몰라 방황할 때 치유를 위한 계기를 마련해보자면서 나온 아이디어였어요.

― 그렇게 ‘치유’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왜 몰랐을까요?
세월호는 일반적으로 겪는 죽음, 이별과는 많이 다른 슬픔인데 대다수는 잘 이해하지 못하는 거 같아요. 저는 치유라는 말을 쓰기가 싫어요. 치유는 불가능하거든요. 동생이 다시 살아서 돌아오면 치유가 되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어떤 것으로도 치유될 수 없을 것 같아요.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고통이 그냥 주어진 거잖아요. 피할 수 없이…. 그래서 치유라는 단어는 적절하지 않은 것 같아요. 그저 최악을 피하고, 차악의 상황을 만드는 거죠. 성당뿐만 아니라 사회 분위기인 것 같아요. 추모가 무엇인지도 잘 모르면서 눈물 다 흘렸으면 그만하라, 이제 추모가 끝났으니 얼른 일상으로 돌아가라는 거죠.

― ‘그럼에도 희망은 있다’는 식으로 얼른 결론짓고 부채감을 털어내려는 사회 분위기도 있는 것 같습니다.
세월호 유족 간담회에 다니면서, 제가 희망을 말했어요. 그래야 사람들이 더 용기를 낼 것 같아서요. 그러다 보니 제가 지치더라고요. 나는 아직 슬퍼할 시간도 없었는데, 동생의 부재를 채 실감하지도 못하는데 희망을 이야기하다 보니 스스로 괴리감을 느낀 거죠. 어느 수녀님은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이런 상황일수록 네가 사람들에게 더 웃으면서 다가가야 한다.” 분명 걱정해주셔서 하는 이야기였지만, 서글프더라고요. 나는 정작 슬퍼할 시간도 없었는데, 다 부숴버리고 싶고, 마음에는 악만 남았는데…. 사람들은 오로지 희망만을 바라는 거 같아요. 보상금을 많이 받았으니 된 거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그럼 네가 겪어봐” 말하고 싶을 만큼 제 안에는 분노가 가득해요.

   
▲ "저는 어디로 가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아요. 자아 탐색을 다시 하고 있어요. 다만, 동생을 위해서라도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하는 삶을 살겠다’고 한 다짐을 나침반 삼고 있어요."  ⓒ복음과상황 오지은

― 세월호 생존 학생과 형제자매 이야기를 담은 《다시 봄이 올 거예요》(창비)에 보니, 예나 씨와 언니인 보나 씨가 공통적으로 말하는 게 ‘울면 안 된다’는 책임감이더군요.
형제자매들은 여기저기서 부모님 챙기라는 말을 자주 들었어요. ‘남은 자식’으로서 울 수 없었던 형제자매들이 많아요. 자기가 울면 엄마가 더 슬퍼할까 봐서 꾹꾹 눌러온 것이죠. 주변에서도 ‘너라도 정신 바짝 차리라’는 말을 많이 하니까요. 요즘 형제자매들 근황을 들어보면, 참다 참다 이제 터지는 경우도 많은 것 같아요. 부모님과 대화를 안 하거나, 집을 나간다거나. 우리 사회는 세월호 유족들에게서 희망적인 모습을 발견하고자 기대하면서, 슬퍼하고 분노하는 감정을 표출하는 것은 불편해하고 외면해버려요. 저는 이제야 저를 허용해주고 있어요. 마음껏 슬퍼하고 분노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 단원고가 있는 안산시 성당이었을 텐데, 세월호 유족에 대한 배려나 관심이 부족했다는 것이 쉽게 이해가 되지는 않습니다.
언론에 좋지 않게 비치니까 세월호 집회에 참석하는 것을 우려하거나 말리는 부모님들이 많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아이들은 부모님 몰래 집회에 나왔어요. 집회에 참석하는 어른은 극히 소수였어요. 저도 성당 분들이 부담가질까 봐 별다른 표현을 안 하다가 참사 200일 앞두고 너무하다 싶어서 말을 꺼냈어요. 집회에 관심을 가져 달라고요. 그랬더니 ‘우리도 회사 다니느라 바쁘다’ ‘생계 때려치우고 나서라는 거냐’ 하는 식의 반응이 돌아왔어요. 마음을 나누고 싶어서 말을 꺼낸 거였는데, 그런 식의 반응을 한다는 것은 세월호 유족과 함께할 마음이 없다는 것으로 받아들이기에 충분했어요.

― 아이들이 부모님 몰래 집회에 참석한다고요?
단원고 아이들 오랜만에 만나면 저에게 너무 미안해해요. 집회에 참석하지 못했다고요. 아이들도 계속 죄책감과 슬픔에 시달리고 있어요. 그럼에도 어른들은 그 슬픔을 ‘유난 떤다’며 통제만 하니까, 아이들은 더 힘들어해요. 슬픔을 표출하고 풀어낼 시간을 충분히 허용해주며 도와줘야 하는데 계속 억압만 하는 거예요. 한국 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 같아요. 안 좋은 일은 빨리 잊고 없었던 일처럼 기억을 지우려 하잖아요. 국가, 종교, 교육 기관 모두 기억 지우기를 하는 것 같아 안타까워요.

― 그래도 개신교보다는 천주교가 더 사회 이슈에 관심이 많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괴리가 있어요. 믿는 것을 실천으로 옮겨야 진짜 신앙인 것 같아요. 저도 밀양 송전탑, 위안부 문제, 4대강 등 사회 이슈에 관심이 많았는데요, 지금 돌아보면 기도는 했는데 행동은 안 했어요. 알고 있는 것만으로는 신앙이 아닌데, 제 신앙을 돌아보게 돼요. 내가 믿어온 신앙을, 실천으로 옮겨야겠다 느끼고 있어요.

― 지금은 미사를 드리지는 않고요?
미사를 가끔 나가기는 했는데 큰 의미를 찾지 못했어요. 사람들 많은 데 가는 게 두렵기도 하고요. 종교와 신앙이 별개라는 생각도 해요. 신앙을 버린 것은 분명 아니에요. 혼자 정리하는 시간이 필요한 거 같아서 개인적으로 기도하고 있어요. 

― ‘종교와 신앙은 별개’라는 말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가요?
주일에 성당에서 살다시피 하는 직책 있는 사람들이 보상금 이야기로 가장 많이 트집을 잡고, 세월호 집회 참석하는 것을 비난했어요. 세월호 집회 때문에 기도 시간에 늦거나 하면, “땡땡이치느냐”며 집회 비하 발언을 일삼았어요. 그 자리에는 제 동생도 있었는데, 상처를 많이 받았겠구나 싶어요. 오히려 거리에서 만난 사람들, 종교가 없지만 고통받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분들이 더 예수님과 닮은 얼굴을 하고 있었어요. 그런 분들 보면,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진정 신앙생활인가 돌아보게 돼요. 

― 오는 길에 ‘세월호 기억교실’에 잠시 들렀습니다. 성호 자리 공책에 보니 신앙인들이 글을 많이 남기셨더라고요. 성호가 가톨릭 사제가 되는 게 꿈이었다는 사실이 많이 알려져서겠지요.
엄마가 원래 수녀님이 되고 싶었대요. 당신이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해 자식이 뭔가 해줬으면 하는 마음도 자연스레 작용한 것 같아요. 큰이모도 수녀님이고요.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는 스스로 판단한 것 같아요. 함께 사제의 꿈을 키우던 성호 친구 기윤이도 성호에게 큰 원동력이 되어준 것 같아요. 사회복지사나 역사 선생님을 할까 고민도 했었는데, 결국 사제가 되기로 했어요. 함께 사제의 꿈을 키우던 성호 친구는 작년에 신학대학교에 들어갔어요. 성당 다닐 땐 정말 셋이서 매일 만났어요. 성호 친구이지만 저랑도 친해서요. 요즘은 대학교에 들어가서 자주 못 보지만 계속 연락하며 지내고 있어요.

― 이번 부활절은 4월 16일입니다. 부활의 ‘기쁨’을 만끽하기보다는 예수의 부활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여야 하는지 더 근원적인 신앙의 물음이 필요하다 싶어요.
신앙인들이 기본으로 돌아갔으면 좋겠어요. 예수님 행하시는 대로 우리가 실천하는 것이 신앙의 기본인 듯해요. 그냥 단순하게 생각해도요.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 사람의 좋은 면들도 보지만, 슬프고 어두운 면도 알고 싶고 품고 싶어지잖아요. 사람들이 부활절이나 성탄절은 화려하게 보내면서도 주님이 수난과 고통을 받았던 시기는 마주하기 불편해서 외면해버리는 것 같아요. 그 고통의 묵상이 없으면 주님의 부활은 사실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거잖아요. 아프고 귀찮은 것은 피하는 게 신앙이 아니잖아요. 2천 년 전 주님이 고통받으신 것처럼 지금 이 시대에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고 그들과 함께하는 게 진정으로 주님을 믿고 사랑하는 것 아닐까요. 이웃의 아픔을 향한 적극적인 동참 없이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일 챙기듯 형식적인 달걀 나눠주기에 그친다면 신앙을 돌이켜봐야 하지 않을까요? 저도 간담회나 인터뷰하면서 많은 질문을 받았지만, 이런 심오한 질문은 처음이라 신앙적으로 되돌아보게 되네요.

― 사고 후 하나님의 뜻을 몇 번이고 물었을 것 같은데요. 
인간은 신이 아니니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다고 생각해요. 주님이 세월호 참사를 허락해서 제가 주님을 미워하고 이런 것은 아니고요. 난 인간이니까 신의 뜻을 이해할 수가 없고, 굳이 이해해야 한다고도 생각 안 해요. 부활도 어떤 거창한 해석이 덕지덕지 붙을 필요가 없어요. 거짓으로 덮여 있는 지금의 세상에서 진실이 드러나는 게 곧 부활 아닐까요? 우리 사회도 양심을 좀 회복하고, 차차 정상적인 모습을 찾아가는 것이 부활이겠지요. 문득 궁금해지네요. 예수님께서 지금 또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시면 어떻게 될까? 그래도 사람들이 극적으로 변화할 것 같진 않아요. 동화 속 권선징악의 이야기처럼 혼란스러움이 정돈되고 착한 사람이 상을 받고 나쁜 사람이 벌 받으면 좋겠지만, 과연 그런 일이 일어날까요? 예수님께서 한 번 왔다 가셨는데도 이 세상은 여전히 제자리잖아요. 예수님을 믿는 한 개인이 그 믿음을 실천하는 것이 가장 큰 믿음인 듯해요. 그렇게 조금씩 최악을 차악으로 바꾸기 위해 나아가는 것.

― 사람이 두려워진 이유는 역시 세월호 때문인가요? 언니인 보나 씨는 참사 직후 인터넷상의 가짜 뉴스와 악플 등에 대응하는 일을 도맡아서 했는데, 악플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일이었잖아요. 유족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언니에게 그만하라고 몇 번이나 말했어요. 너무 잔인했어요. 저도 언니를 도와 일했던 적이 있는데, 도저히 사람이 할 짓이 아니었어요. 그럼에도 언니는 책임감에서 한 것 같아요.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었으니까요. 온갖 모욕과 비난을 당하면서도, 자기 감정을 죽이면서 대응하는 거죠. 일반적으로 왕따를 당한 기억이나, 무리에서 배척당한 기억 등이 트라우마로 남잖아요. 그런데 세월호 여론과 악플은 몇 명인지 헤아릴 수도 없는 군중이 나의 적으로 느껴지는 공포였어요. 지금까지도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풀어지지 않아요. 유가족이라며 찾아와 펑펑 울며 말을 걸던 사람이 나중에 알고 보니 기자였어요. 만나는 기자는 전부 죽이고 싶었어요. 

― 당시 정부에서 세월호 여론전을 지시했다는 뉴스도 최근에 접하셨을 텐데요.  
세월호 7시간 보도들, 참사 후 3년간 어떤 일이 있었는지 뉴스를 보면서 화가 너무 많이 났어요. 계속 뉴스를 찾아서 봤어요. 그러다 보니 건강이 너무 나빠졌어요. 단명할 것 같더라고요. 문득 가해자들보다는 오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은 뉴스를 안 보려 해요. 외면하는 게 아니라 오래 걷기 위한 조절이지요. 휴식이라고 해야 할까요? 피해자들이 다 병에 걸리고, 트라우마에 시달리다가 먼저 죽으면 안 되잖아요. 다 목격자들인데, 오래 살아남아서 증언해야죠. 3년 전이지만, 단원고와 팽목항에서 절규하던 소리들이 아직도 또렷해요. 그런 기억들이 끔찍하고 아프지만, 오래 살아남아서 계속 증언해야죠. 

― 전화번호부에 몇 사람 안 남았다고 했는데요. 어떤 분들인가요?
성호를 잊지 않고 힘든 시기를 함께해준 성호 친구들과 참사 후에 만난 사람들이요. 다들 우리의 아픔에 공감해주는 사람들이에요. 참사 후에 우리를 이해해주는 사람과 비난하는 사람으로 나뉘었어요. 진짜 신앙인들이 보이기 시작했고요. 진짜 내 사람만 남았구나, 하는 마음에 오히려 잘된 거라 생각해요. 

― 앞서 ‘전복되는 경험’이라고 했는데, 학교를 자퇴한 것도 관련이 있나요? 유족이라서 등록금도 지원받을 수 있었을 텐데요.
당연히 받아야 할 지원이지만, 싫었어요. 정부에서 생색내는 것 같고요. 지금 방황 중이에요. 삶 전체가 흔들렸잖아요. 전처럼 아등바등 사는 게 의미가 없어졌어요. 사회가 거꾸로 돌아가고 있는데 취업을 위해 날 잃어버린 채 거기에 나를 던지고 싶지 않아요. 그런 삶이 무가치하다는 걸 알았으니까요. 사고 전과는 달리 너무 많은 걸 알아버려서요, 주변에선 걱정해요. 나이 더 먹기 전에 학교로 돌아가서 얼른 스펙을 쌓으라고요. 그런데 저는 어디로 가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아요. 자아 탐색을 다시 하고 있어요. 다만, 동생을 위해서라도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하는 삶을 살겠다’고 한 다짐을 나침반 삼고 있어요. 

   
▲ 박성호 학생의 책상 ⓒ복음과상황 이범진


―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하는 삶?
어릴 때부터 왠지 모르겠지만 엄마랑 봉사활동을 가거나 어려운 사람들 도와주는 것을 좋아했어요. 사람은 누구나 하나씩 소명을 갖고 태어난다고 생각해요. 이런 말을 하면 꼭 이렇게 살아야 할 것 같아서 부담스러운데요. 제가 아파보니까 아픈 사람들이 더 잘 보이더라고요. 아픈 사람들은 아픈 책임이 자기한테 있는 것도 아닌데 혼자 그 고통을 견뎌야 하는 모진 사회가 더 잘 보였어요. 공감을 기대하기도 힘들고요. 그래서 아픈 사람들을 품어줄 수 있는, 아직은 추상적이지만 그들과 연대할 수 있는 삶을 살고 싶어요. 어떤 직업을 갖더라도 아픈 이들과 의로운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어요.  

― 신앙인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사람들이 저마다 겪는 아픔은 자기 혼자 짊어질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요즘 더 절실히 느껴요. 어머니는 아파서 치료를 받고 있고, 가족 모두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힘들어해요. 저도 이제야 조금씩 아픔이 밀려와요. 사람이 갑자기 퍽 하고 맞으면 그때 당시에는 정신이 없어서 모르다가 나중에 그 고통이 밀려오잖아요. 지금 그래요. 동생이 더 보고 싶고, 더 그리워요. 어떤 말로도 형용할 수 없을 만큼 힘들어요. 그만큼 분노도 커지고요. 일상을 제대로 살았던 때가 언제였나 까마득해요. 신앙인들이 성당이나 교회 건물에만 갇혀 있는 게 아니라 2천 년 전 주님처럼, 거리로 나왔으면 좋겠어요. 아픈 이들과 함께하는 삶을 보여줬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믿는 바를 행동으로 완성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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