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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를 던지고 싶은 사람들
[319호 시사 잰걸음]
[319호] 2017년 05월 24일 (수) 17:06:07 박제민 기독시민운동가 goscon@goscon.co.kr
   
▲ "장애인도 평등하게 차별없이 투표하고 싶습니다."

‘장애인도 투표하고 싶습니다’
2017년 5월 9일, 광화문 광장으로 갔다. 최순실 게이트, 박근혜 탄핵, 대통령 보궐선거로 이어진 한 시대의 마무리를 꼭 그 자리에서 보고 싶었다. 보슬비를 맞으며 서 있던 사람들은 시간이 오후 7시 59분 50초를 지나가자 카운트를 세기 시작했다. 열을 다 세고 나니 화면에 세 부류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각각 파란색, 빨간색, 연두색 ‘드레스 코드’를 한 사람들. 그중에 오직 파란색 집단만이 박수를 치며 환호를 질렀다. 그 모습을 본 광장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한 시대가 가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것을 몸소 체험하고 있는데 마치 기분이 오미자차를 마시는 것 같다고 할까? 달고 시고 쓰고 맵고 짰다. 오묘한 감정을 느끼며 잠시 광장을 서성거리다가 집으로 가기 위해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길 건너 세종문화회관 계단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가까이 가 보니 장애인들이었다. 계단에는 엄청 긴 현수막이 놓여 있었는데  ‘장애인도 투표하고 싶습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 투표는 국민이 주권을 발휘하는 가장 기초적인 방법이다. 이번 선거도 그랬다.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보수를 새롭게 하기 위해, 노동이 존중받는 세상을 위해…. 각자 이유는 달랐지만, 많은 유권자들이 투표를 통해서 자신의 주권을 행사했다.

그런데 투표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어서 억울하고 분통터지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 중에 장애인들이 있다. ‘2017 대선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하 ‘대선연대’)는 5월 4~5일 실시된 사전투표에서 투표소 3,516곳 중에서 18.3%에 해당하는 644곳이 장애인이 접근할 수 없는 곳이라고 밝혔다. 지체장애인은 투표장소가 1층이 아닌데다 엘리베이터 등 이동수단이 없어서, 청각장애인은 수화통역사가 없어서, 시각장애인은 장애인용 보조 용구가 없거나 사용이 불편해서, 발달장애인은 특별 제작된 투표 안내문이나 그림 안내가 없어서 불편을 겪었고 심지어 투표를 할 수 없었다. 이 문제는 대통령 선거 당일인 5월 9일에도 크게 개선되지 않았다.

5월 9일, 대선연대는 기자회견을 열어 중앙선관위원회에 다음과 같은 사항을 요구했다. △모든 투표소의 장애인 접근성을 확보하라 △투표 과정에서의 모든 정당한 편의를 제공하라 △선거 사무원 등 관련자들의 장애인 지원에 대한 교육을 강화하라 △모든 투표과정에서 장애인 당사자의 직접 참여에 대한 권리를 보장하라 △장애인 거주시설 장애인의 참정권을 보장하라 △장애인 참정권 보장을 위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대책 수립하라 등이었다. 장애인 유권자들이 무슨 편의를 봐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비장애인과 똑같이, 갖고 있는 권리대로 투표를 하려는 것뿐이다.

우리 헌법 제24조는 “모든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선거권을 가진다”고 명시하고 있다. 공직선거법 제6조 ①항은 “국가는 선거권자가 선거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필요한 조치를 취하여야 한다”고 되어 있고, 장애인차별금지법 제27조 ②항은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는 장애인의 참정권을 보장하기 위하여 필요한 시설 및 설비, 참정권 행사에 관한 홍보 및 정보 전달, 장애의 유형 및 정도에 적합한 기표 방법 등 선거용 보조 기구의 개발 및 보급, 보조원의 배치 등 정당한 편의를 제공하여야 한다”고 되어 있다. 한마디로 장애인이 투표를 함에 있어 불편을 겪어서는 안 되며, 이를 어기는 것은 헌법에 위배되고 법률을 위반하는 것이다.

   
 

만 18세, ‘19금’은 봐도 투표는 못해
투표권으로부터 배제당하는 사람들은 또 있다. 만 18세 이하 청소년들이다. 헌법에서 모든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선거권을 가진다고 했는데, 그 결과가 만 19세 이상에게만 투표권을 주는 것이다. 그나마 만 20세 이상이었던 것을 2008년 들어서 한 살 내린 것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시민은 의무와 권리를 동시에 갖는다. 하지만 만 18세의 청소년들은 의무는 있고 권리는 없는 ‘반쪽 시민’이다. 그들도 취업을 해서 소득이 생기면 세금을 낸다. 남성의 경우에는 병역 의무도 생긴다. 만 나이도 아닌 18세가 되는 해 1월 1일부터 적용된다. 행정 편의상 그렇게 하는 것 같다. 권리도 생긴다. 만 18세가 되면 혼인도 할 수 있고, 9급 공무원 시험도 볼 수 있다. 심지어 그동안 바라마지 않았던 ‘19금’ 영화도 당당하게 볼 수 있다. 하지만 유독 투표만큼은 누구 말마따나 “지금은 곤란하니 기다려 달라”는 것이다.

현재 OECD 국가 중에서 만 18세 국민에게 투표권이 없는 나라는 우리나라뿐이다. 혹자는 OECD에 가입해서 좋은 것은 우리나라가 얼마나 엉망인지 알 수 있는 것뿐이라고 농(진)담한다. 학업 시간 1위, 어린이의 주관적 행복지수 뒤에서 1위, 청소년의 주관적 행복지수 뒤에서 1위, 대학교육 가계부담 1위, 사교육비 지출 1위, 공교육비 민간 부담 1위 등이다. 최근 조사에서 몇 개 부문은 뒤에서 2~3위로 ‘약진’했다. 이런 수치만 보면 대한민국의 어린이와 청소년들은 그야말로 아비규환(阿鼻叫喚) 속에서 살고 있는 것 같다. 도대체 이 사람들이 아비지옥, 규환지옥에 들어갈 만큼 무슨 잘못을 지었나!

세계적으로 봐도 234개국 중에 216개국이 만 18세부터 투표권을 준다. ‘글로벌 스탠다드’에 맞게 우리도 만 18세에게 투표권이 있다면 어떨까? 최대 약 60만 명의 유권자가 늘어난다. 무시 못 할 숫자다. 15대 대선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약 39만 표 차, 16대 대선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약 57만 표 차로 겨우 당선됐다. 만 18세 유권자들의 투표에 따라 당락이 바뀔 수도 있는 것이다. 실제로 이번 대선에서 YMCA 등 청소년 단체가 주최한 청소년 모의투표 결과는 실제와 사뭇 달랐다. 1위는 문재인 후보(39.14%)로 같았지만, 2위가 심상정 후보(36.02%)로 1위와 살얼음 차이 밖에 나지 않았고, 3위가 유승민 후보(10.87%), 4위가 안철수 후보(9.35%), 5위가 홍준표 후보(2.91%) 였다.

만 18세 유권자들이 생기면 정치권은 그들의 표를 얻기 위해 수많은 공약을 내놓을 것이고, 그중 일부는 실제가 될 것이다. 학업 시간이 줄어드는 대신 자기 자신을 가꿀 시간을 갖게 되면 좋겠다. 이전보다는 주관적으로 행복하다고 생각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사교육비 안 써도 하고 싶은 일과 공부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대한민국의 어린이, 청소년들이 살만해지는 세상을 만드는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은 다름 아니라 투표권을 쟁취하는 것 아닐까?

   
▲ 사진: 공명선거시민네트워크 제공

그리스도인, 감시와 더불어 참정권 운동을!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여러 기독교 단체들은 <공명선거시민네트워크>(이하 ‘시민넷’)를 조직해서 개표 감시 운동을 벌였다. 시민넷은 총 1,300여 명의 참관 신청을 받아 그중 900명이 175개 개표소에서 참관 활동을 했다고 밝혔다. 개표 부정을 헛소문이라고만 생각할 수 없는 어처구니없는 시절에, 누군가 해야 할 일을 예수 믿는 사람들이 앞장서서 하고 있는 것이 다행스럽다.

다음 선거 때도 개표 감시 운동은 계속해야 할 것이다. 더불어서 그리스도인들이 한 가지 일에 더 수고를 해줬으면 한다. 바로 장애인이나 청소년 등 투표할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들의 ‘함께 투표’할 권리를 주장하면 좋겠다. ‘공명’(公明)은 “사사로움이나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이 공정하고 명백하다”는 뜻이다. 개표 부정이 없도록 감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투표할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 권리를 찾도록 편드는 것도 공명선거를 위한 일이다. “대낮처럼 네 권리를 당당하게 해주시리라”(시편37:6, 공동번역)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져서 장애인과 청소년이 당당하게 투표할 수 있는 세상이 비장애인에게도, 만 19세 이상인 사람들에게도 훨씬 좋은 세상이다.

2017년 5월 9일, 그날은 보슬보슬 비가 내렸다. 비에 젖어 축 늘어진 현수막을 뒤로한 채 한 장애인은 돈이 아깝다며 “저 현수막을 잘 말려서 다음 선거 때도 사용하겠다”고 말했다. 부디 그런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꼭 필요하다면 다음 선거 딱 한 번뿐이길 바란다. 그때 예수쟁이들이 잘 말린 그 현수막 함께 펼칠 수 있기를, 그래서 다음 선거 때는 누구도 불편함 없이 차별 받지 않고 함께 투표할 수 있기를 바란다.  

 

박제민
20대 끝자락에 기독시민운동 판에 들어와 어느덧 30대 중반이 되었다. 낮에는 ‘기독교윤리실천운동’ 실무자, 밤에는 ‘동네교회청년’ 활동가로 살아가는 30대 청년이다. 보수적인 교회와 선교단체에서 자라면서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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