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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발견, 유교의 발견
[322호 교회 언니, '종교와 여성'을 말하다]
[322호] 2017년 08월 25일 (금) 14:27:55 양혜원 《교회 언니, 여성을 말하다》 저자 goscon@goscon.co.kr

‘여성의 경험’으로 학문하기
지금 돌이켜보면 코스웍 3학기가 가장 활기찼었다. 웬만큼 적응도 했고, 리듬도 생겼고, 뭔가 알 것 같은 그런 시기였다. 그리고 이때 논문 주제, 연구 방법, 논문 지도 교수가 다 정해졌다. 3학기 수업 중에서 두 과목이 나중까지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는데, 그중 하나가 〈종교, 제국, 민족주의 그리고 이슬람 페미니즘〉(Religion, Empire, Nationalism and Islamic Feminism)이라는 수업이었다.

이 과목은 소위 T-코스(course)라고 불리는데, 내가 다니던 학교에서는 박사생들이 의무적으로 T-코스 한 과목을 들어야 했다. ‘Transdisciplinary course’의 약자로 학제간 연구를 촉진하기 위해 개설되는 이 과목은, 전통 분과의 접근법만으로는 연구하기 어려운 주제들, 혹은 두 가지 이상의 방법론으로 새롭게 연구 영역을 확대해가는 과목들이었다.

여성학은 처음부터 학제간 학문일 수밖에 없었는데, 여성과 여성의 경험에서 출발한 학문인 만큼 어느 전통 분과에도 들어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전통 분과가 여성학을 학문으로 인정하지 않으려 하기도 했다. 한편 종교학도 고유한 방법론이 없다고도 할 수 있는 학문이다. 종교학은 여러 종교를 인문/사회학적 관점에서 연구하는 분과인데, 종교학 전공자는 모든 종교를 연구하는 게 아니라 특정한 종교를 전공으로 하고 나머지는 부차적으로 연구한다. (요즘은 아예 세계 종교를 전공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긴 하다.) 각 종교는 자기 나름의 신학이 있고, 근대 이전까지 신학은 주로 경전을 연구하는 것이었다. 신학이 자기 종교를 (그리고 그 신자들을) 어떠한 식으로든 증진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하는 연구라면, 종교학은 철학, 사회학, 심리학, 역사학 등 여러 분과의 방법론을 통해 종교를 연구함으로서 인간과 사회를 이해하고자 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이러한 경계가 그렇게 분명하게 그어지지는 않는다.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차차 설명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여하튼 그래서 종교학을 연구하는 사람은 자신이 주되게 공부하는 종교 분과의 연구 생태 틀 안에서 자기 주제에 맞는 방법론을 택하게 된다. 예를 들어 내가 주로 연구한 종교는 그리스도교이고, 그 안에서 나는 여성의 경험을 매개로 하는 문학과 역사학의 방법론을 택했다. 

다소 복잡하지만 이러한 설명을 늘어놓는 이유는 그만큼 여성의 경험이라는 관점에서 종교를 이해하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그 예로 이번에는 종교와 문화 그리고 여성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려 한다.

종교가 가부장적일까, 문화가 가부장적일까?
그리스도교가 가부장적인가, 아니면 한국 문화가 가부장적인가? 다르게 표현해 보자면, 가부장제는 문화적 현상인가 아니면 종교적 현상인가? 가부장제가 종교적 현상이라면, 어떠한 식으로든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만약 문화 현상이라면 종교의 권위로 그것을 바꾸도록 요구할 수 있다. 여성주의 의식을 가진 한국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가부장제는 유교 문화의 유산이고 따라서 그리스도교라는 종교의 권위로 그것을 바꿀 수 있고, 바꿔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 또한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한국뿐 아니라 서구에서도 그리스도교의 권위로 가부장제 문화를 바꾸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남성들뿐 아니라 여성들도 가부장 구조의 교회를 지지하는가? 이것이 3학기 무렵부터 화두가 되었고, 지금까지도 나는 그것을 연구하고 있다.

그런데 세 번째 학기에 들은 ‘이슬람 페미니즘’ 수업이 종교와 문화의 문제를 조금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보는 길을 열어주었다. 이슬람 페미니즘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의아했다. 이 조어가 형용모순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복음주의 페미니즘’이라는 말도 이상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페미니즘은 리버럴리즘의 유산으로서 보수적 종교와는 맞지가 않는다. ‘다양한 페미니즘들’이라는 말이 나온 지도 한참 되었지만, 이상하게도 보수주의와 페미니즘의 결합은 거기에 포함하지 않았고, 나 또한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서구 리버럴리즘에서 주로 해온 그리스도교 안의 여성주의 작업 중 하나가 성경의 재해석이다. 아마도 보수주의와 가장 극명하게 차이 나는 부분이 성경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텐데, 보수가 성경의 문자에 집착한다면 리버럴은 말 그대로 리버럴하다. 성경을 인간의 편집과 해석에 의해 취사선택된 텍스트로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를 들어, 뒤로 갈수록 여성에 대한 비하나 제약이 심해지는 일명 바울 서신에 속하는 문서에 대해서, 그것은 후대에 삽입된 것들로 교회가 로마 사회의 주류 문화에 편입되기 시작하면서 로마 사회의 가부장체제를 받아들인 결과라고 본다. 그렇게 하면 그리스도교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그리스도교의 가부장성을 해결할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을 통째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는 경우, 남녀평등과 남녀차별의 발언을 다 안고 있는 성경의 모순을 그대로 안고 씨름하며 살아가야 하는데 대부분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남녀차별의 해석만을 하나님 말씀이라고 보고 종교의 권위로 가부장제를 정당화한다.

한편 이슬람 페미니즘이 하는 작업은 보수 그리스도교에서 하는 작업과 비슷한 면이 있다. 쿠란을 재해석하되 경전을 해체하지 않고 그대로 신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면서 재해석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정말로 쿠란이 여성에 대한 억압이나 폭력을 지지하는지 묻고 그렇게 해석해온 근거 본문들과 그 맥락을 분석하고 쿠란의 전체 정신이 결국 무엇인지를 물음으로써 쿠란으로부터 남녀평등과 인권의 메시지를 읽어낸다. 그리고 그 작업을 한 학자들의 결론은 이슬람이라는 종교가 본질적으로 가부장적인 게 아니라 이슬람권에 오래 전부터 있던 문화가 가부장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법들 앞에서 한편으로는 의문도 생긴다. 만약 종교에 가부장적인 요소가 없다면 왜 종교는 가부장제 문화 앞에서 그토록 무력하단 말인가? 인류학자 클리포드 기어츠의 이론은 이 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는 종교와 문화의 관계를 “model for” 와 “model of”라는 말로 설명하는데, 전자는 지향하는 모델, 그리고 후자는 무엇을 본 딴 모델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즉 종교는 문화가 지향하는 모델인 동시에 문화를 본 딴 모델이다. 이는 인간이 이 세상 너머의 어떤 세계는 이 세상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세계여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 세계가 존재하는 방식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데는 자신이 가진 문화적 상상력을 넘기가 힘들다는 뜻이다.

이 이론을 그리스도교에 적용해 보자. 그리스도교 초기 역사를 보면 처음에 예수께서 가르치신 것들에 기초해서 일어난 운동은 지도자를 세우는 데 남녀를 구분하지 않았다. 하나님 나라는 남자와 여자 모두 동등하게 들어가 인간됨을 누릴 수 있는 세계였다. 그것은 배움과 삶에 제약이 많은 사회에 살았던 여성들에게 그 문제를 해결해주는 다른 세계의 바람직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 운동이 커지고 제도화하면서 점차 그리스도교는 사회의 모델을 본 따기 시작했다. 지향 대상의 모델에서 무엇을 본 따온 모델이 된 것이다. 그래서 인간 사회의 모델을 따라 교회에도 주교, 사제, 수사, 평신도, 남자, 여자 사이에 위계가 생기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위계는 신학으로 정당화되었다. 하나의 정교한 체계가 생긴 것이다.

물론 이러한 체계는 고정불변이 아니다. 사람의 의지가 작용해 만든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 변하고 시대가 변하면 같이 변한다. 그리고 종교가 무엇을 본 딴 모델이 되어도 지향 대상으로서의 모델은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에, 지향 대상으로서의 종교에 대한 열망이 커지면 본 딴 모델로서의 종교에 개혁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기어츠와는 다른 접근법이지만 미로슬라브 볼프는 《인간의 번영》에서 이것을 두 세계 이론으로 설명하기도 했다.)

따라서 여성주의 입장에서는 종교를 가부장제 문화로부터 구원하여 그 원래 의도를 복구하려 하지만, 이미 가부장제 문화 안에서 형성된 종교를 그 문화에서 구원하는 과제는 생각만큼 쉽지가 않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가부장제 안에서 형성된 세계 종교들을 떠나 평화와 상생과 돌봄의 여신 영성을 추구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분리주의 입장은 다수 여성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한계가 있어 보인다. 

침범할 수 없는 신성한 문화?
문화를 쉽게 바꾸지 못하는 또 한 가지 이유는 그것이 정체성과 깊은 연관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문화적 정체성은 식민 시대를 거치면서 동과 서의 대립 구도에서 더 강경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예를 들어 일본의 경우, 서구의 산업 및 기술 발전은 본받고 싶어했지만, 그리스도교는 따로 떼서 구분하려 했다. 서구의 기술 발전이 그들의 정신인 그리스도교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고 둘 다를 받아들이려고 한 사람들이 있는 반면, 그렇게 할 경우 일본의 정체성과 정신이 위협을 받는다 보고 그 둘을 구분한 사람들도 있었던 것이다. 결국 후자가 채택되어 서구의 기술, 일본의 정신이라는 조합을 만들어 내었다. 이 일본의 정신에는 당연히 유교 문화를 바탕으로 하는 일본의 젠더 구조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사람도 젠더 질서는 일본 고유의 문화로서 서구가 침해해서는 안 되는 영역이라고 주장했는데, 우치무라 간조의 회심기에 보면 이런 말이 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자유 결혼’과 ‘여성의 권리’라는 자기들의 예법과 관습을 가르치는 선교사들에게 우리가 돌을 던진다고 우리를 나무라서는 안 된다.” 간조는 여기에서 자유로운 선택에 의한 결혼과 여성의 권리 주장 같은 것은 그리스도교에 고유한 것이 아닌 서구의 관습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와 같이 문화는 종교도 건드리지 못하는 신성한 영역으로 둔갑하기도 한다.

이렇게 보면 문화도 종교도 다 여성의 편이기는 힘들어 보인다. 일례로 유엔의 여성차별철폐 협약을 비준하지 않은 아시아 및 이슬람권 나라들은 자신들의 전통과 문화를 내세우며 그것을 서구의 기준으로 침해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뒤늦게 비준한 한국도 마찬가지 입장이었다. 호주제를 폐지하기 전 가장 팽팽하게 맞섰던 주장도 한국의 문화와 전통에 맞는 가족 구조라는 담론을 둘러싼 것이었다. 여기에서 문화와 전통은 한국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따라서 그것은 바꾸거나 없애야 할 가부장제가 아니라 한 나라 혹은 한 집단의 고유한 성질이 되고, 그렇기 때문에 침해할 수 없는 것이 된다.   

그런데 이러한 문화적 정체성은 종교적 권위로 정당화되는 경우가 많다. 서구에서는 보수주의가 보수 그리스도교와 결부되어 있고, 이슬람에서는 이슬람 문화가 그 종교와 결부되어 있듯이 말이다. 반면에 한국의 경우, 유교라는 문화적/종교적 정체성과 그리스도교가 결부되어 있는 양상을 보인다.    

유교, 그리스도교 그리고 여성
유교를 종교라고 인식하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한국 종교를 연구한 돈 베이커(Don Baker)는 한국 사회에서 유교는 분명하게 종교적인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 어느 종교든 유교의 인간 관계를 윤리의 기준으로 삼기 때문이다. (그가 예로 든 종교에 그리스도교는 지목되지 않았지만, 나는 그리스도교 내의 젠더 관계를 볼 때 그리스도교도 예외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유교에는 특별한 내세관이 없기 때문에, 신, 천국, 지옥, 구원 이런 것들은 다른 종교들이 채워주고, 현세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문제는 사람의 도리라고 오랫동안 한국 사회에 회자되어 온 유교의 가르침이 담당하고 있다.

이를 처음 경험했던 때는 《소학》을 읽었을 때였다. 그 책을 읽으면서 (내가 3대째인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자랐지만) 부모님의 양육 방침의 기본은 성경이 아닌 《소학》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그리스도교에 이교가 침범한 것이고 따라서 타파해야 마땅했다. 그래서 오래 전부터 여성주의 의식을 가진 그리스도인은 유교의 구습과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대비했고, 오늘날 어떤 학자는 그리스도교가 가진 여성 해방의 가치가 한국에서 제대로 실현되지 못하는 이유가 유교 문화 때문이라고도 했다. 나 또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이슬람 페미니즘 수업 때 받은 과제가 무척 난감했다. 

미국에서 공부하는 동안 한국 학생이 있는 수업을 들은 적이 거의 없었는데, 어쩌다 보니 그 수업에 나 외에 다른 한국 여학생이 있었다. 교수는 우리에게 공동 작업을 하라고 하면서 한국의 페미니즘에 대한 페이퍼를 쓰라고 했다. 이집트 대사 출신이자 독실한 무슬림이었던 그 교수는 이슬람 페미니즘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고, 너희 문화에도 그렇게 너희 문화나 종교를 기반으로 하는 페미니즘이 있을 것 아니냐며 그에 대해서 쓰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유교가 어떻게 전통으로 구성되었으며 그것이 어떻게 여성주의와 양립할 수 없는지를 규명하는 게 한국 여성학 연구의 생태계였기에 나는 난감했다. (물론 유교 외에 샤머니즘과 같은 한국의 다른 종교 전통을 가져올 수도 있었지만, 그 종교가 근대의 여성주의와 결부된 담론은 형성되어 있지 않았다.)

“너희 고유의 것”이라는 말 자체가 이미 정치적 과정으로 형성된 것이기도 하기에 차라리 이 과제의 전제 자체를 문제 삼고 싶었다. 게다가 한국의 페미니스트들은 그리스도인이거나 그리스도교의 영향을 받은 경우가 의외로 많았는데, 무슬림 교수의 입장에서는 이 점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이렇게 나는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한국인에 대한 사전 지식 없이 한국인을 바라 보는 타자의 시선을 접했고, 그 시선 앞에서 다시 내 문화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그 교수의 입장에 대해 부연하자면, 중동의 이슬람권과 서구의 그리스도교권은 서로를 타자 삼아 자기 이해를 발전시켜왔기 때문에 각기 서로에 대항해서 형성된 자기 정체성이 뚜렷할 수밖에 없었다. 중국과 일본도 서구와의 대결 역사가 있고 그러면서 각기 오리엔탈리즘의 대상이 되어왔지만, 알다시피 한국의 상황은 달랐기 때문에 그렇게 서구에 대항해서 무엇을 발전시키지 않았다. 적어도 그것이 지배적인 경향은 아니었다. 오히려 ‘조선’은 ‘chosen’, 곧 하나님이 이렇게 우리 민족을 ‘택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나올 정도로 그리스도교를 한국 것으로 전유하는 상황이었다. 어쩌면 오늘날 서구의 교회들이 자유주의와 세속화의 영향으로 다 무너져 가는 상황에서 한국교회는 특별한 시대의 사명을 받았다고까지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그만큼 한국의 그리스도교는 한국 것이 되어 있는 상황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이야기
그러나 그 수업의 과제에서는 그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고, 그래서 나는 유교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중에 논문을 쓰면서 그때 그렇게 유교를 들여다보기 시작한 게 큰 도움이 되었다. 나는 유교의 경전이나 유교의 역사를 들여다 본 게 아니라, 인간 관계 그리고 젠더 관계에서 나타나는 유교적 정서 혹은 유교적 관계를 주로 관찰했다. 경험으로서의 유교를 본 것이다. 유교의 가부장성을 비판하는 것만으로는 그 체제 안에서 실제로 경험하는 젠더의 모습은 어떤지, 여성이 그 안에서 끌어오는 힘의 원천은 무엇인지를 제대로 파악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그렇다. 인류의 시작부터 함께 했던 가부장제 안에서도 여성은 힘의 원천을 찾아내었고 그 힘으로 자기 인생을 의미 있게 이끌어갔다. 보수 종교 안에서 여성주의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여기에 주목한다. 근대의 리버럴리즘과 함께 발달한 여성주의가 놓친 여성들의 힘의 원천은 그들이 믿는 신이었다. 내가 연구한 박완서 선생이나 공지영 선생도 종교 안에서 남녀평등의 문제를 제기하지 않은 이유는 자신이 믿는 신이 종교 제도보다 더 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박완서 선생은 ‘과연 하느님 보시기에도 병자의 손을 잡아주는 수녀의 손보다 권위 있는 교황의 손이 더 높아 보이겠느냐’고 반문한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현재의 가부장체제를 유지해주는 기제가 아니냐는 반론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맞는 말이다. 교회는 지금까지 여성이 하나님 나라에서는 또는 영적으로는 평등하지만 이 세상에서는 이렇게 남자와 서로 다른 역할을 하도록 지음 받았다는 가르침으로 성차별을 정당화해왔다. 그럼에도 섬김의 종교적 실천을 멈추지 않는 여성들의 행위에 진정성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이념적 관점에 입각한 일반화의 오류일 수 있다. 다음 글에서 좀더 자세히 다루겠지만, 사바 마흐무드(Saba Mahmood)라는 인류학자의 이슬람 경건주의 운동에 참여하는 여성들에 대한 연구는 기존의 여성주의 논의에 적잖은 당혹스러움을 안겨 주었다.

이러한 연구들을 거치면서 나는 유교를 다시 보게 되었다. 한국 그리스도교가 상당히 유교적이라는 점은 전혀 새로운 사실이 아니었지만, 이를 배격하는 것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기 시작한 것이다. 오랫동안 한국 사회의 의미 체계 역할을 해온 유교는 어느 날 하루아침에 뒤집을 수 있는 이념이 아니라, 사람의 생사고락과 맥을 같이 하는 살아 있는 유기체와도 같다. 언제든 사람들이 부활시켜서 사용할 수 있는 이야기가 유교에는 있다. 특히 젠더 관계에서는 아직 그것을 대체할 적절한 설명력과 무게가 있는 이야기가 제대로 개발되지 않았다.

유교의 이야기에서 여성들에게 힘을 주는 것은 ‘어머니 담론’이다. 이 어머니 담론은 그리스도교와도 잘 융합이 된다. “어머니의 기도”라는 말이 주는 울림이 얼마나 큰가. 그래도 그리스도교가 기여한 게 있다면, 이전에는 아들의 어머니만 힘이 있었다면 이제는 딸의 어머니도 어느 정도 힘을 가지게 된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앞으로 어떤 이야기가 개발되어야 모든 여성이 힘을 받을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 게 우리 세대의 과제가 아닐까 한다. 

 

양혜원
본지 해외편집위원. 서울대에서 불문학을, 이화여대 대학원에서 여성학을 공부했다. 1997년부터 번역가의 길에 들어서 유진 피터슨, 헨리 나우웬, 존 스토트, 톰 라이트, 알리스터 맥그래스 등 주요 기독교 저자들의 책을 번역했다. 미국 Claremont Graduate University에서 종교학 박사 학위를 받고, 올해 9월부터 일본 난잔종교문화연구소에서 연구 활동에 들어갈 예정이다. 《유진 피터슨 읽기》 《교회 언니, 여성을 말하다》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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