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수경의 독서일기

사무실이 종로로 이전한 후 걷는 시간이 많아졌다. 이전 사무실이 있는 신촌으로 출근할 때는 평균 1,000보 정도면 사무실에 도착했는데 종로로 출근하게 되면서부터는 3배 정도는 더 걸어야 도착할 수 있다. 게다가 신촌에서는 사무실에서 점심을 먹었기 때문에 바쁜 날이면 하루에 3,000보가 채 안 되는 걸음 수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런 날이면 한낮 날씨가 어땠는지 알지도 못한 상태로 하루를 마감하곤 했다.

종로에서는 점심을 바깥에서 해결해야 해서 일단, 걸어야 한다. 맛집을 찾느라, 밥을 먹고 나면 소화를 시키기 위해, 때론 날씨가 너무 좋아서, 혹은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느라, 그냥 이유 없이 산책하는 날이 많아졌다. 그러다 보니 단골 산책 코스도 생겼다.

사실 나는 심각한 길치에 지도를 읽지 못한다. 그래서 늘 다니는 길, 익숙한 경로, 안전한 과정만 선택한다. 그런 내가 ‘다른 길’을 선택하는 경우는 길을 잃었을 때다. 길을 잃는다는 건 익숙하고 안전한 길만 추구하던 내가 경로 이탈할 수 있는 모험을 감행할 기회인 셈이다.

몇 년 전, 10년 넘게 살던 동네에서 길을 잃은 적이 있다. 집 근처 시장에 갔다가 뭔가에 홀려 골목을 잘못 들어섰다. 당황하여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더 멀리, 알 수 없는 곳으로 가버렸다. 한참 길을 찾다가 뜬금없이 이런 생각을 했다. “와~ 길이 참 많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길이 없는 게 문제지, 많은 게 뭐가 문제인가. 새로운 길을 찾으면 되지.

   
▲ 『길 잃기 안내서』, 레베카 솔닛, 김명남, 반비, 2018

‘길 잃은’ 길 안내자, 리베카 솔닛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로 국내에 알려진 작가 리베카 솔닛은 《길 잃기 안내서》에서 길 잃은 사람을 “미지 속에서 편하게 느끼는 기술, 미지 속에 있다고 해서 당황하거나 괴로워하지 않는 기술, 길 잃은 상태를 편하게 느끼는 기술”을 가진 존재로 보았다. 이 말은 영국 낭만주의 시인 존 키츠가 말한 “불확실성, 미스터리, 의문을 수용할 줄 아는 능력”과 크게 다르지 않을 능력이다. 이쯤 되면 길을 잃어버리는 사람을 너무 미화하는 것 아닌가 싶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길을 잃어야 길을 찾는 방법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길을 잃는다는 건 궁극의 ‘능력’인지도 모른다.

여기에서 길은 실존적 개념이지만, 은유이기도 하다. 이 책은 솔닛이 살아온 인생이라는 ‘길’에 관한 이야기가 한 축을 이룬다. 솔닛은 자신의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관통한 인물들(특히 아버지), 그곳의 풍경 등을 되살리며 현재의 자신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보여준다. 즉, 자신이 지나온 길이 지금 서 있는 길, 앞으로 가야 할 길로 연결되는 셈이다.

길에 관한 솔닛의 이 책은 《걷기의 인문학》, 《멀고도 가까운》과 함께 읽는 것이 좋다. 세 권의 책 중 가장 먼저 쓰인 책은 《걷기의 인문학》(2000)이다. 이 책은 ‘걷기’라는 단순한 행위에 새겨진 의미, 역사, 철학, 진화론적 관점을 두루 살핀다. 또한 걷기가 여성의 관점에서는 어떤 사회적 의미를 가지는지, 광장과 축제 한복판에서 걷기는 어떤 정치적 맥락으로 이해되는지 우리가 당면한 현실 문제로까지 확장한다.

《걷기의 인문학》 이후 솔닛은 《길 잃기 안내서》(2005)를 썼다. 걸으며 길을 찾아가던 이야기는 길을 잃어버리는 이야기로 이어진 셈이다. 이 반전은 우리가 살아내고 있는 인생을 은유하는 게 아닐까? 우리는 무언가를 잘 안다고 착각하며 정해진 길을 가지만, 사실 그 길이 옳은 길인지 확신할 수 없고, 심지어 무엇을 모르는지조차 모르고 사는 사람들 아닐까? 그 무지를 발견한다는 의미에서 길을 잃는 게 필요하다. 이에 관해 솔닛은 《길 잃기 안내서》에서 플라톤의 대화록에 등장하는 메논의 질문을  인용한다.

우리는 아는 것은 이미 아니까 탐구하지 않고, 모르는 것은 모르기 때문에 탐구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데, 그렇다면 어떻게 모르는 것을 알 수 있는가?

이 책은 메논의 질문에 관해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그런 솔닛에게 길을 전혀 잃지 않는 삶이란 “사는 것이 아니고, 길을 잃는 방법을 모르는 파국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우리는 길을 잃어보지 않고 모르는 것을 알 방법은 없다. 그러므로 길을 잃는다는 건, 사는 것과 파국 사이 미지의 땅을 발견하기 위한 거룩한 ‘행위’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다면 동네에서 늘 다니던 골목이 아닌 다른 골목으로 들어선 걸 알아챘을 때 나는 길을 잃은 것일까, 새로운 길을 발견한 것일까? 질문을 새롭게 구성하면 새로운 방법이 보인다.

   
▲ 『걷는 사람, 하정우』, 하정우, 문학동네, 2018

‘루틴’을 지키며 걷는 사람, 하정우
리베카 솔닛이 길을 잃어버림으로써 새로운 길을 발견해가는 ‘길을 잃은 길 안내자’라면 《걷는 사람, 하정우》의 하정우는 ‘루틴’이라는 길을 만들어 걷는 사람이다. 그는 어딜 가든지 숙소에 짐을 풀고, 가장 먼저 주변 길을 탐색한 후, 걷기에 좋은 코스를 만들어 반복하여 걷는다. 그리고 그는 매일 수행하는 그 ‘루틴’을 소중하게 여긴다. “좋은 작품은 예술가가 안정적이고 반듯한 길에서 벗어나서 일탈하거나 방황할 때 나오지 않나요?”라는 사람들의 질문에 그는 좋은 예술과 안정적인 삶은 양립할 수 없는 게 아니라 좋은 작품은 좋은 삶에서 나온다고 자기 생각을 또렷하게 밝힌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이 가야 할 길이 하나의 길이라고만 생각하지는 않는다. 배우이지만, 영화감독이 될 수도 있고, 화가가 되기도 한다. 즉, 좋은 삶을 위해 늘 새로운 길을 탐색하는 탐험가인 것이다.

리베카 솔닛과 하정우는 어떤 상황에서도 한 발 더 내딛는 것을 포기하지 않고 걷는 사람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가던 길을 가든, 일단 새로운 길을 발견하든 걸어야 앞으로 나아갈 수도 있고, 길을 잃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다시 앞의 질문을 꺼내 본다. ‘길을 잃었다’는 생각이 들 때 우리는 정말 길을 잃은 것일까, 모르고 살았던 새로운 길을 발견한 것일까? 지금 걷고 있는 익숙하고 안정적인 길은 과연 맞는 길일까? 나도 잘 모르겠다. 걷다 보면 알게 되겠지.

 

오수경

낮에는 청어람ARMC에서 일하고 퇴근 후에는 드라마를 보거나 글을 쓴다. 세상의 수많은 이야기에 관심이 많고 이웃들의 희노애락에 참견하고 싶은 오지라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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