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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범죄자의 서사가 궁금하지 않다
[354호 편애하는 리뷰]
[354호] 2020년 04월 17일 (금) 17:59:18 오수경 goscon@goscon.co.kr

 

n번방이 고발하는 성착취의 ‘서사’ 
“내가 만약 죽으면 내 노트북 C 드라이브에 있는 ‘직박구리 폴더’를 꼭 지워줘.” 드라마 <태양의 후예>에서 ‘송닥’(송 닥터)은 친구인 간호사에게 이렇게 말한다. 아마 많은 사람이 이 부분에서 빵 터졌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는 ‘직박구리 폴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너무 잘 알고 있다. 소위 ‘야동’은 변태 같은 남성만 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평범한 A도, 친절한 교회 오빠 B도, 내 반경 50미터 내외의 저 늙은 아저씨도 볼 수 있는 흔한 ‘문화’라는 이야기다. 한때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의 이순재가 ‘야동순재’로 인기몰이를 하지 않았던가!

돌이켜 보면, 웃을 일이 아니었다. ‘야동순재’가 인기를 끌었을 당시 음란물 관련 검색 트래픽이 3-4배 증가했다고 한다. 우리가 웃고 있는 사이 소라넷에서는 성범죄를 공모하며 ‘불법촬영물’을 공유하고 있었고, 2016년 소라넷이 폐쇄된 이후에는 웹하드를 비롯한 ‘성 착취 카르텔’이 본격적으로 형성되었다. 이 카르텔은 생산자와 유통자와 참여자와 소비자의 유기적이고 능동적인 ‘협업’을 통해 성장했다. 그러니까 2020년, 우리가 알게 된 ‘n번방’ 속 남성들은 갑자기 나타난 괴물이나 악마가 아니다. 우리 사회 속에서 차곡차곡 쌓아온 ‘서사’의 결과다. ‘빨간 마후라’ 비디오를 돌려보고 룸살롱에서 비즈니스를 하며 여성을 거래하던 아버지의 얼굴이, 여성을 성적으로 학대하는 것을 그저 게임으로 여기는 아들의 얼굴로 바뀌었을 뿐이다.

텔레그램에 있는 n개의 방 중 가장 악랄하다고 소문난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이 검거되어 얼굴을 공개한 채 포토라인에 섰을 때 세상은 그의 입에 주목했다. 그는 한껏 자신을 부풀리며 말했다. “멈출 수 없었던 악마의 삶을 멈춰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피해자를 향한 사과 따윈 없었다. 잘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영화 속 주인공이 수상 소감을 밝히는 자리인 줄 알았을 것이다. 미디어는 빠르게 그에게 ‘서사’를 부여했다. 우리가 왜 범죄자의 성격과 학점과 교우관계를 알아야 하는가. 그런 서사가 범죄의 심각성을 드러내는 데 무슨 도움이 되는가.

‘피해자다움’ 따위는 없다
물론 피해자에게도 ‘서사’를 부여하는 경우가 있다. 피해자가 입은 옷, 외출 시간, 평소 행동, 피해당한 후 행동은 낱낱이 까발려져 ‘피해자다움’을 의심하는 증거가 된다. 즉, 가해자의 서사와 피해자의 서사 모두, 가해자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원인을 만들어 선처할 근거로 활용될 뿐이다. 그러는 사이 피해자는 사라진다. 나는 가해자 서사가 궁금하지 않다. 그가 몇 학점을 받았고, 무슨 동아리에서 활동했으며 평소 교우 관계가 어땠는지 알 필요가 없다. 다만, 피해자가 어떤 피해를 봤고, 무엇을 고발하고, 다른 피해자를 만들지 않기 위해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인지 궁금할 뿐이다.

   
▲ 드라마 〈라이브〉 화면 갈무리.

드라마 <라이브>는 ‘피해자다움’에 관한 통념에 의문을 제기한다. 한정오는 고등학생 때 동급생들에게 윤간을 당한 피해자이지만, 다른 피해자를 돕는 경찰이 된다. 그는 ‘12년 전 10시 58분’을 평생 잊지 못하지만, 그 시간이 자신의 인생에 별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그러면서도 트라우마를 겪지 않는 자신이 이상한 건지 끊임없이 의심한다. 피해자답지 못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그에게 안장미(과거 한정오 사건 담당 형사)는 이렇게 말한다.

“사건이 났고, 넌 잘못이 없고, 시간이 지났고, 현재 넌 경찰이 된 거지. (가끔 힘든 거) 그것도 정상이지. 매일 힘들어도, 가끔 힘들어도, 트라우마가 생겨도, 안 생겨도, 다 정상적인 반응 아닐까?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은 반응이면 그게 더 이상하잖아.”

또 다른 드라마에서 여성들은 피해자와 연대하며 폭력에 맞서 그들을 고발하고 응징하는 주체가 되기도 한다. <청춘시대 1>에서는 데이트폭력을 당한 하우스 메이트를 구하고, <청춘시대 2>에는 어릴 때 선생님에게 성폭력을 당한 후 불행한 삶을 살다 자살한 친구를 위해 선생님의 죄를 폭로한다. <동백꽃 필 무렵>의 ‘옹벤저스’도 여성을 살해한 연쇄 살인마 ‘까불이’를 비참하게 응징한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런 서사가 아닐까?

가해자의 서사 말고도 알아야 할 것은 많다
넷플릭스 드라마 <믿을 수 없는 이야기>(Unbelievable)는 복면을 쓰고 침입한 남자에게 묶인 채 강간당한 두 여성에 관한 이야기다. 2008년 미국 워싱턴주 린우드의 한 청소년 공동체에서 사는 18세 소녀 마리와 2011년 콜로라도주 골든에서 사는 대학생 엠버는 비슷한 사건을 겪지만 이후 상황은 다르게 전개된다. 성장 배경이 불우하고 ‘피해자답지’ 않은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마리의 진술은 꾸며낸 거짓이 되어 삶이 피폐해지고, 엠버는 자신의 말을 믿는 형사에 의해 피해의 충격에서 점차 벗어나게 된다. 그리고 그들 곁에는 이 사건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끝까지 추적하여 범인을 잡고야 마는 여성 형사들이 있다. 마리와 엠버는 결국 ‘희망’이라는 하나의 서사로 연결된다.

   
▲ 드라마 〈믿을 수 없는 이야기〉 화면 갈무리.

<믿을 수 없는 이야기>는 과감하게 생략해야 할 것과 애써 드러내야 할 것의 선을 정확하게 지킨다. 이 드라마에는 그 흔한 범죄자의 서사가 생략되었다. 심지어 범죄자의 얼굴과 범행을 저지르는 장면조차 제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피해자의 말이 ‘믿을 수 없는 이야기’로 취급받은 결과가 어떠한지, 반대로 피해자의 말을 신뢰한 결과가 어떠한지 촘촘하게 대비시켜 피해자의 서사가 왜 중요한지 문제의식을 환기한다. 무엇보다 이 드라마의 가장 큰 미덕은 마지막 장면에 있다. “피고에게 327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합니다.” 

2020년 대한민국에서도 꼭 보고 싶은 현실이다. 이렇게 우리는 가해자의 서사 말고도 알아야 할 것이 많다. 그러니 더는 가해자의 서사를 궁금해하지 말자. 대신 한정오처럼 이렇게 말하자. 

“분명히 알아야 돼. 그 어떤 것도 네 잘못이 아니야. 범인의 잘못이지.” 

 

 


오수경
낮에는 청어람ARMC에서 일하고 퇴근 후에는 드라마를 보거나 글을 쓴다. 세상의 수많은 이야기에 관심이 많고 이웃들의 희노애락에 참견하고 싶은 오지라퍼다. 함께 쓴 책으로 《을들의 당나귀 귀》 《불편할 준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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