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8호 무브먼트 투게더 3]

광주아시아여성네트워크의 시작

이름만 간신히 들어봤을 뿐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는 나라. 그게 미얀마였다. 미얀마와 인연을 맺게 된 건 나와 전혀 상관없을 것만 같은 사건 때문이었다. 당시의 나는 ‐그 당시 많은 젊은 여성들이 그랬던 것처럼‐ ‘강남역 살인사건’을 계기로 각성하게 되었지만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분노와 절망감에 허우적거리며 지내고 있었다. 1주기였던 날, 뭐라도 하고 싶었다. 다른 지역은 나름대로 추모 행사를 열고 있는데 내가 사는 광주는 아무 소식이 없는 듯해 고민스러웠다. 결국 구 전남도청을 향해 뻗어있는 길에 위치한 금남공원에서 “광주 사람이라서 죽은 5월 18일 하루 전 여자라서 죽어야 했던 5월 17일 강남역 살인사건을 추모하며”라는 문구를 들고 섰다. 답답한 마음에 뛰쳐나왔지만 처음 해보는 일인 데다 혼자라서 쭈뼛쭈뼛 서있는데 한 중년 여성이 나를 보더니 한참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서성거렸다. 그분이 지금 내가 활동하고 있는 광주아시아여성네트워크의 대표님이었다.

대표님은 광주에서 오랫동안 여성활동을 하셨고, 아시아 여성들과 연대하고 싶다는 꿈을 갖고 계셨다가 해외봉사 기회가 생겨 1년간 미얀마에 다녀오신 찰나였다. 나도 십여 년간 ‘FLOW Ministry’라는 단체에서 광주라는 도시를 품고 기도하고 예배하며 광주시민으로서 아시아를 향해 막연한 마음을 품고 있었던 터였다. 그날의 만남을 계기로 미얀마에서 5·18기념재단 인턴으로 온 활동가 한 명과 대표님과 내 주변 지인들까지 5~6명이 모여 광주아시아여성네트워크가 시작되었다.

3월부터 5월 첫째 주까지 광주에서 토요일마다 열린 '딴뽕띠' 집회. (사진: 광주아시아여성네트워크 제공)
3월부터 5월 첫째 주까지 광주에서 토요일마다 열린 '딴뽕띠' 집회. (사진: 광주아시아여성네트워크 제공)

삶의 터전에서 쫓겨난 미얀마 여성들을 만나다

미얀마에서 온 활동가는 나와 비슷한 나이대였다. 그녀는 현지에서 활발하게 인권운동을 해왔으며 여성운동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 활동가를 통해 미얀마 내 여성들, 특히 내전으로 자기 삶의 터전에서 쫓겨난 여성들의 상황을 듣게 되었다. 이번엔 양곤을 비롯해 큰 도시에서도 군부의 폭력적 진압이 발생하면서 미얀마가 세간의 집중을 받게 되었지만, 그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올해 갑자기 일어난 게 아니다. 지난 70년간 소수민족들이 끊임없이 겪었던 일이었다. 이번 시위를 진압했던 부대가 로힝야를 학살했던 부대라는 이야기가 잘 알려져 있듯, 군부는 70년간 축적된 경험을 바탕으로 무자비한 진압을 진행하고 있다.

미얀마 내에는 이런 군부의 탄압으로 인한 수많은 국내실향민(Internally Displaced Person, IDP)이 존재한다. 카친주는 한 수녀가 시위대에 대한 총격을 멈출 것을 요청하며 군경 앞에 무릎을 꿇었던 사건이 일어난 미치나를 주도로 삼고 있는 지역이다. 유엔난민기구(UNHCR)에 따르면, 2020년 기준으로 이 한 곳에만 10만 명에 가까운 국내실향민이 100여 개의 IDP 캠프에서 지내고 있다. 미얀마 정부군은 자신들의 입지를 지키기 위해 오랫동안 소수민족을 탄압해왔다. 그 갈등 사이에서, 남성들은 헬기 폭격과 지뢰 등에 의한 신체적·정신적 상해로 고통받고 있었다. 가정을 돌볼 수 없는 남편을 대신해 생계를 책임지는 여성들은 트라우마로 인한 남편의 폭력도 견뎌내면서 살고 있었다. 또한 여성들은 IDP 캠프에서 정부군과 소수민족군과 캠프 내 남성들로부터 삼중으로 성폭력 위협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래서 현지의 필요를 살피며 광주에 있는 여성 활동가들을 모았다. 여성 위생교육과 공감·경청 훈련, 여성상담의 기초적인 내용을 조합하여 현지 활동가들을 교육하는 프로그램을 준비했다. 우리 중 누구도 해보지 않은 일이라 처음에는 ‘누군가 하면 좋은 일이지만 서울에 있는 단체들이나 하는 일이지 광주에 있는 우리가 가당키나 하나’라며 반신반의했다. 그런데 광주의 활동가들은 3년 동안 여름휴가를 빼고 카친·카렌·친·샨·양곤에서 온 여성 활동가들과 양곤에 모여 일주일짜리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지금은 이 교육을 받은 미얀마 활동가들 중에 미얀마 내 다른 단체들 초청을 받아 교육하고 다니는 사람들도 생겼다.

미얀마에 처음 갔던 해 우리는 ‘광주라는 도시 이름이나 알까’ 싶었지만, 정작 미얀마 활동가들은 “영화 〈택시운전사〉의 도시 광주에서 왔다”며 더 반가워했고 많은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다. ‘이런 일은 서울에서나 하는 거지’라고 했던 사람들의 생각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또, 지역 여성으로서 소수민족 여성들과 연대할 때 도리어 우리라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기도 했다. 이 시간을 통해 먼저는 내가 효능감을 경험했다. 강남역 사건을 계기로 여성 폭력에 대한 분노와 무력감에 휩싸여있던 내게 아시아 여성들과 연대하는 일은 내 안에 끓어오르는 에너지를 생산적인 방향으로 틀게 했다. 여성이라는 정체성과 더불어 내 안에 오랫동안 갖고 있던 애증의 정체성인 광주 사람으로서 아시아와 연대하는 일이 광주에 미칠 긍정적 가능성을 엿보게 되었다.

엄마의 5·18을 만나다

눈에 보이는 5·18은 끝났지만, 광주는 아직 5·18의 아픈 기억을 제대로 치유할 시간을 갖지 못했다. 아직도 광주는 해결되지 않은 그 트라우마 속에서 5·18을 재경험하고 있다. 보수 정권이 힘을 쥐었을 때는 ‘빨갱이’나 ‘홍어’같은 광주를 폄훼하는 말이 가득하고, 진보 정권이 힘을 쥐었을 때는 ‘민주화의 성지’라고 추앙한다. 두 진영 모두 자신의 필요에 따라 광주를 호명할 뿐 광주의 목소리를 듣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살아있는 사람이 존재하는 이 도시가 어떠한 고정된 ‘상징’으로 호출될 때, 정작 이곳의 살아있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외면되었다. 그런 대상화는 광주가 이 트라우마를 마주하지 못하게 막아왔다.

이러한 대상화는 광주가 스스로 5·18을 기억하는 방식에도 체화되어있다. 이런 외부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그런 일을 당할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고 억울함을 호소하고 저들은 얼마나 극악무도한 존재인지를 고발할 때에만 5·18에 대한 증언이 가치 있게 여겨졌기에 다른 소리들에는 재갈을 물렸다. 다른 소리가 한쪽에겐 먹이를, 한쪽에겐 실망을 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나 또한 광주에서 자랐기에 5·18에 대한 교육은 많이 받았지만, 돌이켜보면 정작 이것이 내 피부에 와닿은 적은 없었다. 한국인이 일본에 대해 갖는 감정처럼 ‘학습된 분노’만이 내면에 자리했다. 그래서 어렸을 적 5·18에 대한 교육을 받고 집에 오면 나는 총소리와 군홧발 소리에 무서워 집에서 이불 덮고 숨어있었다는 엄마에게 ‘왜 엄마는 그때 시위에 참여하지 않았느냐’고 철없는 소리만 남발했다.

그러다 〈택시운전사〉를 보고 나서 엄마는 동생에게 사실은 자신도 주먹밥을 날랐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미얀마와 관련한 내 인터뷰 기사를 계기로 엄마가 주먹밥을 나르고 돌아오던 길에 시위대가 군인에게 제압당하는 모습을 보고 그 뒤로 이불 밑에 숨어지냈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목숨을 잃은 사람들도 있는데 숨었다는 사실이 창피해서, 차마 나도 무언가를 했고 무언가를 보았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고 하셨다. 빨갱이가 되는 것이 두렵고, 겁쟁이가 되는 것이 부끄러워 그날의 기억을 꼭꼭 숨겨놓았던 것이다. 살아있는 엄마의 이야기는 5·18이 정말로 있었던, 처음으로 내 피부로 느껴지는 사건으로 다가오는 경험을 줬다. 대상화된 1980년 광주 앞에서 입이 막혔던 엄마는 1980년 광주의 모습 그 자체가 힘을 갖는 것을 볼 때, 자신의 기억과 마주할 수 있는 용기를 얻었다.

5·18의 상처를 직면하고 재해석하기

5·18의 상처가 정말로 끝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외부에서 주어지는 객관적인 진상 규명도 너무 중요하지만, 그 경험을 직면하고 재해석하는 내적인 작업도 상처를 치료할 때 매우 중요하다. 둘 중에 외부 상황과 상관없이 좀 더 주체적으로 시도할 수 있는 일은 내적인 작업이다. 홍콩과 태국과 미얀마에서 온 청년들과 좌담회를 할 기회를 얻은 적이 있다. 그들은 홍콩과 태국의 시위를 ‘실패’로 규정하고 미얀마의 시위도 이번에는 성공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소리에 대해 이렇게 되물었다. 도청에서 진압당하는 것으로 1980년 광주의 항쟁은 끝난 것처럼 보였지만, 그것이 불꽃이 되어 한국 민주주의의 기틀이 다져지지 않느냐고.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라고. 광주는 이미 아시아에서 민주화를 염원하는 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곳으로 서있었던 것이다. 광주의 시간을 실패나 부족함으로 규정하지 않는 이들과의 연대를 통해 이 기억을 재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본다.

이번 미얀마 쿠데타 상황이 이어지면서 광주시민들이 어쩌면 짐과 같을 ‘민주화의 성지’라는 상징을 주체적으로 취하는 모습을 보았다. SNS에 올라오는 미얀마 소식에 애가 타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대표님을 보고 사람들이 구 도청 앞에서 집회라도 해보자고 제안했고, 단체들과 시민들이 연대하여 그렇게 두 달간 ‘딴뽕띠’ 집회가 진행되었다. 나는 두 번 정도밖에 참여하지 못했지만 1980년 5월을 경험하셨던 분들이 비가 쏟아지고 바람이 불어도 나와서 시위에 참여하는 모습을 보며, 영웅심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정말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그들의 발언을 들으며, 내적인 작업이 시작되었음을 느꼈다. 원해서 그런 시간을 겪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 경험을 지금 압제당하는 이들과의 연대로 승화하기로 선택한 광주시민들의 모습은 숭고했다. 단지 구호만 외치는 것이 아니었다. 사진을 찍는 회원은 사진전을 기획해 미얀마를 향한 관심과 후원을 모았고, 광주에 있는 어떤 교회들은 부활절 헌금과 5·18 헌금을 모았다. 광주의 여성단체들은 5·18 주먹밥을 만들어 판매한 수입금을 미얀마에 후원할 수 있도록 우리 단체에 전달해주었다. 그 후원과 염원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유엔(UN)의 무반응에 좌절했던 미얀마 활동가들이 너무 고맙다며 힘을 내는 모습을 보고 있다. 재미있는 점은 우리만 일방적으로 미얀마를 돕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한국이 미얀마 상황에 집중하면서 광주를 호출하다 보니, 광주에 대한 왜곡과 폄훼의 소리가 더 힘을 잃은 듯하다. 미얀마와의 연대가 외부에서 이뤄져야 하는 진상 규명에도 힘을 실어주고 있는 것이다.

미얀마를 보며 1980년에 이곳에서 있었던 일이 2021년에도 재현될 수 있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지만, 한편으로는 그때와 또 다른 모습들이 보인다. 미얀마에서 교육을 진행하면서 여성의 성에 대한 인식이 우리나라의 1960~1970년대와 비슷하다고 여겨졌다. 그런데 그런 곳에서 되레 여성혐오적 문화를 전유해 여성의 치마를 걸어놓아 군부가 지나가지 못하게 하는 항쟁의 도구로 사용했던 모습은 이제야 여성의 목소리가 조금씩 나오기 시작한 광주와는 분명 다르다. 또 새로운 정부 내부에서 로힝야 문제와 더불어 소수민족을 배제했던 과거 모습을 반성하고 사과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일어나고 있는 것도 정말 고무적이다. 로힝야 문제는 미얀마의 역사적 배경이 복잡하게 얽혀있어 풀기가 정말 어려워 보이는 숙제였다. 그러나 소수민족을 탄압했던 그 모습대로 탄압을 받으면서 소수민족이 겪는 문제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는 듯하다. 1980년 광주보다 한발 더 나아간 미얀마를 보니 우리가 지나왔던 길이 사라지지 않고 그 위에서 새로운 일이 시작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지금의 사태를 보면서도 희망을 놓을 수가 없다. 어쩌면 1980년 광주를 반복하고 있는 것은 군부뿐인지도 모른다. 이미 시민들은 진화했다. 과거가 어떻게 미래가 오는 것을 막을 수 있을까.

이 상황이 어서 끝나기를 기도하지만, 동시에 이후를 준비하고 싶다. 포스트 5·18 세대로 살면서 느끼는 것은, 민주주의는 독재자를 끌어내리는 일로 완성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형식적으로 민주주의가 이뤄진다고 해도 개인의 일상이 바로 회복되지는 않는다. 개개인 안에 민주주의가 심어지도록, 그래서 진정한 자유와 평화를 꿈꿀 수 있도록 돕는 사회가 되길 바란다. 광주시민으로서 나에게 있는 여러 의문에 대한 답도 이를 꿈꾸면서 발견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이희영
광주기독교병원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광주에 붙박이로 살고 있는 호남의 딸. 안티크리스천이었던 학창 시절 록 음악에 빠져 일렉 기타를 배우러 교회를 다녔다. 정작 교회에서 가르쳐준 것은 통기타였던 탓에 찬양 인도를 하게 되었고, 13년째 FLOW Ministry라는 찬양 사역 단체에서 활동 중이다. 구 전남도청과 한 정거장 사이에 있는 축제교회에서 전도사로 사역하고 있으며, 광주아시아여성네트워크에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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