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0호 사람과 상황] 시소와그네 마포영유아통합지원센터 임명연 관장
263명. 2008년부터 2014년까지 학대로 숨진 아이들의 숫자다.(《아동학대에 관한 뒤늦은 기록》, 시대의창, 2019) 이 가운데 59명은 신생아(영아) 살해, 92명은 ‘동반 자살’로 왜곡되는 ‘살해 후 자살’로 분류된다. 숨진 아이들 중 43명은 돌을 넘기지 못했으며, 76명은 여섯 살 미만이었다. 가해자가 확인된 아동 학대 사망 사건 107건 가운데 80% 이상이 친부 또는 친모가 범인이다. 아동 학대 의심 신고가 들어오면 공권력이 현장에서 판단해 즉각분리를 시행하고 있지만, 보호시설이 부족하고 아이들 심리 케어도 제대로 되고 있지 않은 실정이다. 학대가 벌어지기 전에 위험 요소를 없애는 길은 없을까.
‘시소와그네’로 더 잘 알려진 마포구 영유아통합지원센터(이하 ‘시그네’)에서 일하는 임명연 관장은 아이가 태어나서 1년까지를 양육 고립이 가장 심해지는 시기라고 말했다. 시그네는 현재 ‘유일’하게 남은 영유아 전문 복지기관이다. 지역사회의 재원으로 영유아와 양육자, 지역사회를 연결하여 이들의 지속가능한 변화를 추구하는 ‘커뮤니티 임팩트’ 정신에 기반한다. 2008년 사회복지공동모금회는 7세까지의 미취학 영유아가 지역사회에서 건강한 성장을 이룰 수 있게 하자는 취지로 마포구와 협약을 맺고 절반씩 예산을 부담해 센터를 설립했다. 이후 전국 11개 센터가 개소되었으나, 모금회 사업이 종료되자 마포센터만 개별적으로 지자체의 민간위탁에 성공했다.
임 관장은 아이가 태어나고 1년까지가 양육 고립이 가장 심해지는 시기라고 했다. 두세 시간마다 수유해야 하니 엄마는 잠을 잘 수가 없다. 말이 트이기 전까지 어린이집에 보내는 일도 망설여진다. 대가족 사회에서 핵가족 사회로 넘어오면서 이제 내가 돌보지 않으면 누군가 아이를 돌봐주지 않는다. “‘평범한’ 양육자도 화가 나서 아이를 침대 위에 던지는 경험을 많이 한다고 해요. 아이를 바닥에 던지는 더 위험한 상황도 발생하는데, 자칫 학대가 일어나기 쉬운 위험 시기예요. 높아진 산후 우울도는, 가족과 이웃, 지역사회가 어떻게 개입하느냐에 따라 낮출 수 있거든요. 지금은 이 네트워크가 너무 약해요.”
그렇다면 어떻게 양육 고립을 막는 네트워크를 잘 구축할 수 있을까. 양육 고립을 만드는 다른 원인은 없을까. 질문을 품고 그의 이야기를 따라갔다.
#조금만 더 일찍 이 아이들을 만났더라면
임명연 관장은 여유로운 가정 형편에서 자라났다. ‘복지는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세상은 아름다워 보였다. 아동복지학과 유아교육학을 전공한 그는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한 사회복지관에서 조직과 상사로부터 불합리한 일을 겪었고, 연대의 필요성을 절감해 노동조합을 조직하려 했다.
기관의 추궁에 사표를 던진 임 관장이 두 번째로 몸담은 직장은 한 개신교 교단의 여전도회전국연합회 산하 종합복지관이었다. 시범사업으로 아동권리교육을 어린이집에서 진행했는데, 어느 날부터 유독 말썽을 피우던 아이가 보이지 않았다. 외부 연구진이 올 때마다 교사가 아이를 다른 반으로 보낸 것이다. 수업은 원활히 진행됐지만 밖에서 힐끔힐끔 교실 안을 들여다보는 아이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어른들의 상황에 유리하게 아이를 끼워 맞추는 태도를 목격했어요. 이 교육이 아이를 위한 건가 싶었죠. 아이들 스스로 말할 수 있도록 하고, 아이들 목소리를 대변하는 역할을 하고 싶었죠.”
다음 직장은 한 천주교 수도회가 운영하는 복합적인 아동복지기관으로, 임 관장은 ‘복지 영역에서 가장 끝에 있는 청소년들을 만난 곳’이라고 표현했다. 정신적·신체적 장애 없이 태어났지만 부모로부터 제대로 된 사랑과 돌봄을 받지 못해 발달이 느려진 탓에 경계성지적장애를 갖고 있는 아이들이 많았다. “영유아 시기가 중요해요. 조금만 더 일찍 만났다면 참 좋았을 텐데. 아이들을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을 했어요.”
이곳에서 일한 지 7년이 되던 어느 날 이직 제안이 들어왔다. 그 문제를 놓고 기도하던 중 그는 매우 특이한 상황을 경험했다. 이곳을 떠나야 할 때라는 응답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임 관장은 그렇게 시소와그네 마포센터 총괄과장으로 2014년부터 일하게 된다. 마포구를 중심으로 영유아·아동 권리와 관련한 연대 및 정책 활동을 펼쳐왔으며, 2020년 5월 관장으로 취임했다.
#아동복지는 아이를 위한 것
- 2019년 유엔 아동권리위원회가 국내 아동권리협약 이행 상황을 점검하는 자리에서 나온 말이 “한국 사회는 아이를 혐오하는 사회인 것 같다”였죠. 현장 활동가로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간혹 아동에 대한 이해나 권리 교육을 외부에서 진행할 때 참여자들에게 ‘어린이 통학버스 특별보호법’에 대해 물어봐요. 옆 차선에서 통학버스를 추월하지 못하게 하는 법이죠. 그러면 ‘스쿨존에서 속도 내는 것도 참아주고 있는데 그것까지 참아야 하냐. 좌우를 잘 살피고 신호 잘 지켜서 건너야 되는 거 아니냐’고들 해요. 그때마다 전 ‘무단횡단 한 번도 안 해보신 분이 있으면 손 들어보실래요?’ 하죠. 나도 모르게 하기도 하잖아요. 학교 끝나서 얼른 집에 갈 생각만 하거나 눈앞에 공만 보일 수 있는 아이들 특성을 알면서도 이를 고려해주지 않죠. 우리 사회가 어떤 때는 아이에게 ‘아이다워야지’, 어떤 때는 ‘아이라도 이래야지’ 하는 이중잣대를 들이미는 것 같아요.
밥 먹을 때 부모님들이 아이들한테 스마트폰을 보여주죠. 조용히 밥 먹으라고. 그런 부모를 바라보는 시선은 ‘부모 편하자고 교육에 안 좋게 스마트폰을 준다’는 식이죠. 부모도 아이 교육에 좋지 않은 걸 알지만 조용히 시킬 수 있는 방법이 없어서 그러는데요. 아이가 고집을 부리면 안 되는 이유를 찬찬히 설명해주는 게 교육인데, 주변에서 참아주지 않잖아요.
- 아동 권리 운동은 아동 당사자를 위하는 것인데, 성인 양육자는 상황에 따라 아이를 위한 게 뭔지 헷갈릴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아이한테 뭐가 필요한지 보통 엄마들에게 묻잖아요. 아이하고 대화가 안 될 거라고 생각하니까요. 저희들도 양육자에 더 공감하기 쉽다보니, 아이들과의 대화를 놓치지 말자는 말을 가장 많이 해요. 아이한테 뭘 원하는지 직접 물어보라고요. 물론 상황에 따라서는 양육자와도 합의를 하지만요. 크리스마스 행사 때 한 아이의 엄마는 선물로 초등학교 들어갈 때 필요한 책가방을 이야기했는데, 아이가 원했을 것 같지는 않았어요. 아니나 다를까, 그 아이는 엘사 옷을 갖고 싶어 했어요.(웃음) 보통 만족도 조사도 기본적으로 양육자에게만 초점이 맞춰져 있거든요. 저희는 프로그램을 진행할 때 참여한 아이의 만족도를 함께 점검하려고 노력해요. 아이 말을 듣는다고 해서 양육자의 돌봄이 소홀해지지는 않아요. 오히려 엄마가 이해할 수 없었던 아이를 이해하게 되는 계기가 되고요.
#양육가정과 지역사회 잇는 관계망 구축
- 현장에서 만나온 양육자들의 주된 고민들은 무엇인가요.
적잖은 양육자들이 본인과 아이의 성향, 아이의 발달 시기에 드러나는 상황을 잘 몰라요. 양육자는 정적인데 자녀는 에너지가 많으면 둘 다 힘들 수밖에 없죠. 또, 첫째에게 동생한테 양보하라고 하면서도 나중에 첫째한테 상처가 되지 않을까 걱정하시기도 하죠. 이런 양육 과정에서 발생하는 너무나도 다양한 어려움에 섬세하게 공감하고, 각각의 차이를 인정하고 함께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다르다는 걸 경험하도록 해요. 다른 어머니들과 관계를 맺지 않으면 물어보기도 어렵고, 전문가가 아니면 모를 것 같은 질문들도 있죠. 맘카페가 그런 기능을 해주지만 전문가가 대답해주면 마음이 놓이는 내용들이 있잖아요. 마음의 병이나 우울감이 해소되지 않을 때 어떻게 아이를 다치지 않게 할지 고민하는 분들을 모시고 다양한 활동과 함께 전문가에게 온라인 상담을 받게 하고 있어요. 온라인인 이유는 정신과나 상담센터 방문을 부담스러워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에요. 물론 상담 횟수는 케이스마다 다르죠. 양육자의 우울감이 깊은 경우 아이 식습관 문제 등은 단기간에 해결할 수 없죠. 아이와 엄마의 스킬의 문제인지 마음의 문제인지에 따라 접근 방식이 달라져서 매번 전문가와 기획회의를 해요.
최근 영유아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의 욕구를 조사한 적이 있어요. 참여한 한 분은 1년간 육아휴직을 한 아버지였죠. 낮에 아이를 데리고 지하철을 타니, ‘엄마는 뭐 하시니? 어디 가셨어?’ 하고 묻더래요. 회사에서 일한다고 대답하면 ‘아빠는 공무원이세요?’라고 묻는다는 거예요. 자기라도 아이를 데리고 다니면서 인식개선 운동을 해야겠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런데 그분 말이, 자기 친구들한테 육아휴직을 쓰라고 하면 안 쓰겠다고 한다는 거예요. 일보다 육아가 더 어려워서요. 아버지가 육아휴직을 쓰지 못하면 육아수당을 받지 못하게 하거나, 어린이집 대기 순번에 들려면 부모교육을 받은 아버지에게 가점을 주든지 하는 정책들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다 같이 했죠.(웃음)
외동아이 가정을 위한 관계맺기 프로그램도 진행했어요. 한국 사회는 정상가족이라는 틀이 있어서 그 안에 들어오지 못하면 주위에서 한마디씩 하는 것 같아요. 저만 하더라도 아이가 없는데 어머니께서, ‘아이를 낳아라’고 하세요. 나이 마흔이 넘으니 ‘남매를 입양하라’고도 말씀하시고. 마찬가지로 외동아이 같은 경우엔 사회성이 부족할 것이라는 편견이 있죠. 다양한 연령대의 아이들과 어울리게도 하고, 그런 편견 어린 인식도 해소하고자 양육자분들이 먼저 제안을 주셨죠.
- 코로나로 변화를 겪은 가정들의 상황이 있을 것 같아요.
방이 구분돼있지 않은 열악한 가정인 경우 더 심하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엄마들이 가장 많이 했던 말이 집에만 고립되어서 삼시 세끼 먹이는 게 어렵다는 이야기였어요. 지금 거리두기 4단계지만 70-80%는 여전히 보육원 긴급돌봄을 이용해요. 엄마들이 너무 힘드니까. 양육자들이 아이들과 놀아주는 방법을 몰라서 힘들기도 해요. 육아를 이벤트가 아닌 일상으로 돌아오게 하려면 뭐가 필요한지 고민하면서 진행한 프로그램들이 있어요. 유튜브를 보면 많은 준비물로 대단하게 놀아주는 것들이 적잖은데, 저희는 특별한 재료 없이 일상으로 놀아줄 방법들을 나눠줬어요. 컵이나 신문지를 갖고 놀거나, 누워서 아이를 꼭 안고 못 빠져나가게 하거나. 그도 힘들면 참여 가정들은 놀이를 적용할 때 썼던 ‘꼼수’를 ‘노하우’로 공유하기도 하고요.
시그네가 진행하는 대부분의 양육자 참여 프로그램은 양육자들의 친밀성을 위해 여덟 명 이하로 제한된다. 프로그램에 참여한 개별 가정 중 70-80%는 종료된 이후에도 자발적으로 모임을 이어간다. 시그네는 양육자 참여 프로그램 외에도 통합사례관리(이하 ‘사례관리’), 아동권리 증진 사업, 지역사회와의 각종 연계사업, 센터 내 육아 카페 운영 등을 하고 있다. 육아 카페는 거리두기 4단계인 지금도 매일 운영 중이다. 그전에는 누구나 이용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공간 활용에 어려움이 있는 가정에 우선권을 주고 있다.
현재 마포구 내에서 시그네 서비스를 이용하는 회원가정은 600가구 정도다. 이용자들은 사업의 기획·실행·평가 등 전 과정에 참여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시그네는 양육자들의 심층 욕구를 조사하지만, 지역민이나 서비스 이용자들이 시그네 측에 먼저 사업 아이디어를 제안하기도 한다. 예결산을 심의하는 운영위원회에도 지역사회 내 유관기관에 소속된 자문단을 포함해 이용자 대표 등이 참여한다.
임 관장은 이용자 대표를 협력적 파트너이자 친구라고 표현했다. “어떤 사회복지사들은 이용자와 사회복지사의 적정한 거리 유지가 필요하다고 보는 분들도 있어요. 우리 사회는 서비스를 이용하는 사람들을 ‘대상자’ ‘사회적 약자’라고 표현하지만, 저는 엄밀히 그분들도 자신만의 삶의 방식과 역량이 있다고 생각해요.”
- 서비스에 불만을 보이는 이용자는 없나요.
물론 있어요. 사례관리를 진행 중인 가정의 어떤 분은 더 많은 경제적 지원을 원하세요. 하지만 시그네 기본 기조가 무조건 지원이 아니라 지역사회를 기반으로 양육가정이 함께 건강하게 변화될 수 있도록 하는 방향이에요. 시그네가 해줄 수 있는 일, 어머니가 할 수 있는 일, 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을 나눠서 분담하죠. 지원을 안 해주면 안 하겠다는 분도 계세요. 그런데 자원 지원만 받으면 그 아이는 건강할까 하는 생각이 들죠. 강제할 수는 없으니, 이 아이의 건강한 성장에 당장 큰 문제가 없다면 필요한 기관으로 연결해드리죠. 행정복지센터(동주민센터) 등 자원 연결을 잘하는 기관으로요.
사례관리는 복합적인 어려움을 겪는 가정과 함께 어려움을 해결하는 과정이다. 시그네는 연 50가정과 함께한다. 사례관리 가정으로 등록되는 과정은 다양하다. 어려움이 있는 양육자가 직접 신청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지역의 아동과 관계된 다양한 단위에서 복지서비스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양육자에게 센터를 안내하거나 동의를 받아 센터가 연락할 수 있도록 한다. 아동 학대 의심 신고가 들어온 현장에서 공권력이 연계한 가정을 받기도 한다. 심각한 학대 정황은 지속적으로 지역사회가 관심을 가져야 할 가정으로 판단되는 경우가 그렇다. 많지는 않지만 절대 빈곤에 놓인 가정도 존재한다.
- 양육자가 연계를 거절하는 경우도 있나요.
뉴스에는 극단적인 사례가 나오지만 보통은 평범한 어머니들이에요. 평범한 사람들도 잠을 못 자거나, 남편이 육아에 관심이 없어서 늦게 들어오면 스트레스가 늘어나겠죠. 주변에선 우는 소리가 몇 시간째니 신고하고, 당연히 의심이 들면 신고해야 하지만, 이런 경우는 아이와 엄마가 분리될 상황이 아니잖아요. 엄마의 스트레스를 줄일 수 있는 기관을 찾겠죠. 그럼에도 거절하시는 분들이 있어요. 그러면 공공이 민간 역할도 하게 되는 거죠. 담당 공무원이 영유아 분야에 전문성이 부족하다 보니 저희 같은 기관이나 보건소 간호사와 동행하기도 해요.
이용자 가정 가운데 공공기관이 당신을 감시한다는 망상이 있으신 어머니도 계셨어요. 공공에서도 일단 어머니에게 시그네를 소개하고, 저희 선생님이 매일 찾아갔어요. 처음엔 어머니가 문도 안 열어주고 가라고 하셨죠. 정신건강복지센터와 연계해서 함께 방문하고, 어머니가 그날그날 어떤 상태인지 체크했어요. 전문가 선생님이 말씀하시길, 정신적인 질환은 24시간 발현되는 게 아니래요. 그분이 “오늘은 이만 갑시다” 하면 그날은 철수했죠. 그렇게 계속 방문하면 문을 여실 때가 생겨요. 다행히 아이는 건강했어요. 미리 섭외한 어린이집에 어머니의 특수성을 알려드리고 같이 가기도 했죠. 어머니가 그곳에서 한 시간만 있다가 아이를 데리고 가셔도 세상에 한 발짝 나오는 순간들이 쌓이는 거잖아요. 다른 어머니들과 선생님을 만날 수도 있고, 돌아가시면서 빵집을 들릴 수도 있죠. 시그네가 일하는 방식은 이런 ‘관계의 고립’을 해소하는 데 있어요.
- 아동 학대 즉각분리제도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요. 현장의 판단 기준도 모호하고, 분리된 이후 아이를 위한 시스템이 없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죠.
아동 학대 사망 사건 가해자의 80% 이상이 친부모예요. 이들도 어린 시절 학대당했던 경험이 많아요. 이들을 어떻게 변화시킬지, 그래서 아이들이 태어나 자라고 익숙한 지역사회와 가정에서 보호받을 수 있을지 촘촘하게 고민해가야 하죠. 그런데 가해자 처벌에만 관심을 기울이면 아이들은 역으로 사회에서 단절돼죠. 일단 가정에서 분리되어 시설로 보내면, 사회적 비용이 많이 들지만 지역사회가 더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까 편하겠죠. 그러나 아이에게 좋은 걸까요? 그 아이가 아니라 어른이면 있을 수 없는 일이죠. 직장에서는 성추행당한 피해자에게 이직하라고 하진 않잖아요. 일단 부모가 학대행위를 고치고, 아이를 지역에서 잘 키울 수 있도록 우리 사회가 고민해야 한다고 봐요. ‘분리’라는 방법은 쉬운 선택 같아요.
저희가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이유가 비공식 네트워크, 즉 친구나 이웃 같은 관계망을 형성하기 위해서예요. 하지만 이렇게 관계망을 구축하는 건 쉽지가 않아요. 오히려 관계망이 더욱더 필요한 저소득 가정들은 떨어져 나오고요. 원래 여덟 가정 정도를 한 팀에 모으면 의도적으로라도 경제적으로 어려운 가정들이 한두 가정 들어갔었어요. 그런데 나중에 커뮤니티가 지속되면 각자의 경제 상황이 드러나요. 회비나 커피값을 안 낼 수는 없잖아요. 가끔 서로 집을 방문하기도 하는데, 자기 집만 안 된다고 할 수도 없고요.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또 관계망에서 벗어나더라고요. 그래서 나중에는 상황이 조금은 비슷한 분들끼리 연결해 드렸어요. 관계는 지속되지만 자원은 부족할 수밖에 없죠. 장애가 있는 가정이면 거기에도 참여하기 힘들고요. 최근엔 지역 맘카페의 양육자분들이 관계의 도움이 필요한 가정이 있다면 함께하고 싶다고 하시더라고요. 이런 분들이 늘어났으면 하고 바라죠.
#보편 복지가 약하면 관계망은 약화된다
이야기 도중 임 관장은 아동학대처벌법이 시행되기 전 사례관리를 했던 한 가정을 떠올렸다. 지적장애가 있는 부부였는데 어머니의 정도가 심했다. 어느 날 주 양육자인 아버지는 만취해서 어린이집에 아이를 데리러 갔다. 신고를 한 이후 어린이집 교사, 장애인복지관 사회복지사, 행정복지센터 직원 등 공공서비스 기관과 비영리조직들이 모였다. 모두 머리를 맞대고 지역사회가 아이를 돌보는 쪽으로 노력했지만 결론적으로 아이들은 분리가 됐다. “기관들은 정말 노력을 많이 했어요. 하지만 기관들이 언제까지나 관여해줄 수 없는 게 현실이에요. 결국 지역사회에서 친구나 이웃 등을 통한 비공식 돌봄이 들어가야 하는데, 우리 사회는 건강한 이웃끼리 관계를 맺길 원해요. 내가 누군가를 돌보는 역할을 상상하는 건 어렵죠. 그때도 지역에서 자원을 찾는 것이 어려웠던 것이 이런 인식 때문 같아요. 돌봄은 기관들이 하는 일이지 옆에 있는 이웃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인식이요.”
‘먹고살기가 힘들면’, 즉 가장 기초적이고 기본적인 복지가 약하면 사람들은 누군가를 돌보는 관계를 생각하기 어려워진다. 한국은 아직은 기본적인 복지의 기반 자체가 부족하다. 주거권 개념조차 낯선 나라다. 임 관장은 한국의 복지 마인드는 응급구호가 필요했던 한국전쟁 직후에 머물러 있다고 본다. 그는 이를 두고 ‘도움을 받아야 할 상황에까지 내몰리면 지원해주는’ 시스템이라고 짚는다. “기본적 욕구를 공공이 해결하고, 그 위에 민간이 보다 개별화된 욕구를 채워줘야 해요. 그런데 현실적으로 아직도 공공이 기본 욕구를 채워주지 못해서 민간이 그 영역에서까지 활동하는 거죠.” 임 관장은 자꾸만 ‘지역은, 우리 사회는 이웃의 고립을 얼마나 참아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장애나 어려운 경제적 형편 문제가 아니더라도, 양육자가 한계가 있을 때 그 한계를 연대로 풀어내기 위한 과정을 얼마큼 할 생각이 있는지, 우리 사회가 묻고 고민해야 할 때예요.”
#돌봄을 지속가능하게 하려면
시그네의 정책 사업은 보편 복지에 기반한다. 시그네가 진행하거나 협업한 사업 가운데 ‘우리동네꼼꼼육아정보’, ‘우리동네보육반장 서비스’, ‘육아사랑방’의 전신이 되는활동이 있어왔다. 지금은 지역에서도 활성화된 사업들이다.
‘서울특별시 마포구 영유아 발달 지원에 관한 조례’도 시그네가 진행한 ‘희망브릿지’ 사업 성과로 2020년 전국 최초로 제정됐다. 희망브릿지 사업은 마포구 만 3세 영유아 1,000명을 대상으로 진행됐다. 그중 심각한 발달 지연이 나타난 아이들에게는 필요한 맞춤형 서비스가 지원되었다. 이후 경제적으로 어려운 가정이면 발달재활서비스 바우처를 이용하게 하거나 사례관리를 진행했다. 1년간은 양육자도 치료 프로그램의 효과를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치료를 받은 아이들은 정도가 다 다르지만 6개월 만에 발달 수준이 ‘정상 발달’로 올라온 케이스도 있었다.
마포구 조례 제정이 의미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이의 발달 지연을 인지하고 검사를 받는 양육자도 있지만, 정보를 모르거나 주변에서 권유해도 기분 나쁘게 여기는 이들도 있기 때문이다. 검사 시기를 놓쳐 학교에 들어가기 직전에서야 검사를 받게 되면 치료가 어려워지거나 사회적 비용이 더 많이 들어가게 된다. 따라서 해당 검사를 만 36개월을 기준으로 아이들 누구나 받을 수 있게끔 해야 한다는 것이 이 사업의 취지다. 지금은 어린이집 같은 보육시설을 이용하지 않는 아이들을 고려해 행정복지센터에서도 신청할 수 있도록 체계화되어 있다.
이 서비스를 제도화하고 싶은 다른 지자체는 어떻게 해야 할까. 임 관장은 종합사회복지관이 시그네의 역할을 맡으면 된다고 말했다. 사람들 인식 때문에 장애인복지관이 처음부터 나서면 정말 검사가 필요한 가정들이 검사받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후 발달 지연이 확인된 아이들에게 장애인복지관이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면 된다. 시그네는 지역 맘카페와 함께 이를 서울시 정책으로 제안하는 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사실 이 사업은 작년에 서울시 시민참여예산 정책사업으로 선정돼 예산까지 책정된 상황이었으나 코로나 등의 상황으로 무산된 바 있다. “화가 길게 가지 않았어요. 믿음이 있기 때문에 아, 아직 하나님이 생각하는 때가 아닌가 보다 싶었죠. 때가 아닌데 억지로 하려 하면 탈이 나잖아요.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면서 있는 자리에서 열심히 하는 거죠.”
지역에서 낸 성과를 바탕으로 제도가 되거나 사업이 확장되면 시그네는 다른 사업을 구상한다. 임 관장은 시그네가 하는 일을 이렇게 비유했다. “개울이 있고 누가 건널 필요가 있을 때 돌들을 놓는 거죠. 그러다가 이용자가 많으면 튼튼한 다리를 놓을 수 있어요. 그 다리를 점검하고 보수하는 분들이 있고요. 그 일도 꼭 필요하지만 저희 같은 단체는 저희가 더 잘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거예요. 그 돌들을 다시 주워서 다른 필요가 있는 곳에 놓는 거죠.”
그렇게 개울에 돌들이 놓이면, 관계가 이어지고 필요한 과정을 잇는 ‘징검다리’가 된다.
진행 김다혜 기자 daaekim@goscon.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