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1호 사람과 상황] 새길기독사회문화원 송진순 연구실장
사랑하는 주님,
이 밤에 일하는 이, 파수하는 이, 우는 이의 곁을 지켜 주시고,
잠자는 이를 위해 당신의 천사들을 보내소서.
주 그리스도여, 병든 이를 돌보소서.
피곤한 이에게 쉼을 주시고,
죽어 가는 이에게 복을 주시고,
고난을 겪는 이를 위로하시고,
고통에 시달리는 이를 불쌍히 여기시고,
기뻐하는 이를 보호하소서.
주님의 사랑에 의지하여 기도합니다. 아멘.1)
살면서 막막함을 느낀 적이 없는 사람, 누가 있을까. 쉽게 해결될 수 없는 문제를 안고 기도하는 자리로 나아가는 발걸음은 참으로 무겁다. 쉽사리 바뀌지 않는 현실이 굳세게 버티고 있으면, 쇠구슬이라도 걸린 듯 목구멍이 막히고 암담해진다. 당장 주변만 봐도, 기도가 절실한 자리에서 말 그대로 ‘버티고 있는’ 사람을 최소 두세 명은 호명할 수 있지 않은가. 하나님을 신앙하더라도, 산다는 것은 때론 서글픈 일이어서 눈물을 떨구거나 침묵할 수밖에 없는 순간은 반드시 찾아온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에게 안부하며 ‘안녕’을 묻는지도 모른다.
9월 2일, 새길기독사회문화원에서 송진순 연구실장을 인터뷰하면서 여러 번 “삶은 고해苦海다”라는 M. 스캇 펙 《아직도 가야 할 길》(율리시즈)의 첫 문장을 곱씹었다. 그의 신학적 성찰이 고통의 문제와 맞닿아있었기 때문이다. 송진순 실장은 이화여자대학교에서 국어국문학과 기독교학을 전공하고, 동 대학원(기독교학과) 석사·박사 학위를 받은 후 이화여대 등에서 강의해왔다. 이화여대 대학교회 목사로 있다가, 올해 1월부터 ‘삼무’(三無, 목사·교단·건물 없는) 교회로 알려진 새길교회의 연구·문화 공간 새길기독사회문화원에서 일하는 중이다.
새길교회는 1987년 길희성·김창락·이삼열·한완상 등 민중과 함께하고자 하는 학자들에 의해 설립된 평신도 신앙 공동체로, 송진순 실장은 교회와 함께 ‘신학 운동’ ‘영성 수행’ ‘사회 연대’ ‘청년 사역’이라는 이름의 다양한 에큐메니컬 사업에 참여하고 있다. 송 실장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신학위원회 소위원(웹진 〈사건과신학〉 기획단),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기사연) 객원연구원, 기후위기기독교신학포럼 집행위원 등 다방면에서 연구 및 연대 활동을 이어가고 있으며, 《코로나19와 한국 교회 사회인식》(대한기독교서회)·《코로나 팬데믹과 기후위기시대, 생물다양성에 주목하다》(대장간)·《한국 기독교의 보수화, 어느 지점에 있나》(동연)·《혐오의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IVP)·《성폭력, 성경, 한국교회》(CLC) 등 굵직한 단행본 작업에도 공저로 참여한 바 있어서 한번 만나보고 싶었다. 이번 호 커버스토리 주제와 관련해서도 여러 물음을 던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가 해온 신학적 작업을 비롯해 다양한 이야기를 들었다.
- 신앙 배경이 궁금하다. 어린 시절 신앙생활에 관한 기억을 나눠달라.
아버지 인도로, 내가 초등학교 1학년 정도일 때부터 가족들이 다 같이 영락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구역예배 때 권사님·집사님들이 일부러 찬송가 찾는 일을 시키기도 하시고, 많이 예뻐해주셨다. 지금의 하겐다즈 뺨치는, 최고급 아이스크림 ‘빵빠레’도 곧잘 사주셨다.(웃음) 공동체의 각별한 사랑을 많이 느꼈다. 북한산에 있는 영락동산에서 열리는 어른 수련회에도 자주 참석하고는 했다. 마지막 순서는 늘 한반도 평화를 위한 기도였다. 교인 중 이북 출신이 많았고, 모두가 절실하게 기도했던 기억이 난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우리 가족은 매일 가정예배를 드렸다. 아버지는 평범한 소상공인이었는데, 주말이면 늘 장애인학교에서 목욕 봉사를 하셨다. 그때마다 나를 데려가 장애인을 경계 없이 대면하게 하셨다. 청량리 노숙자들을 후원하는 사업에도 오랫동안 참여하셨다. 낮은 곳, 경계 너머를 향해 자연스럽게 선교적 실천을 이어가신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 어떻게 사회로 나아가는지 아버지를 통해 자주 봤던 것 같다. 아버지는 평신도인데도 혼자 신학책을 읽으셨다. 어릴 적 교회를 둘러싼 기억이 아름답게 남아있다.
- 이력을 보면, 학부는 ‘국어국문학과 졸업’으로 나온다.
학부 때 국문학과 기독교학을 복수전공했다. 현대문학에 관심이 많았고, 소설이나 시를 좋아해 국어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김영랑 시인의 시를 늘 외우고 다녔다. 내가 이화여대에 진학할 당시에는 특정 학과가 아니라 ‘인문학부’로 뽑았다. 국문학·기독교학·철학·역사학을 같이 공부했다. 1학년은 탐색 기간이었고, 2학년 때 전공을 선택했다. ‘국문과로 가야지’라고 생각했는데, 1학년 때 들었던 기독교 교양과목들이 아주 재밌었다. 심리학·역사학·철학 등, 학문으로 기독교에 접근하는 수업이 정말 매력적이었다.
국문학과 기독교학을 같이 전공하고 싶다고 부모님께 말씀드렸더니, 반대 없이 응원해주셨다. 국어국문학의 경우, 문법론이나 중세국어론 같은 수업은 지루했다. 글쓰기, 창작 등을 들었고, 현대 시·소설 분석은 팀별로 재밌게 수행했다. 기독교학에서 문학 방법론을 그대로 가져오기도 해서, 성서 주석에 도움을 받기도 했다. 당시 기독교학과를 선택한 사람이 내 학번에 두 명밖에 없었는데 교수님은 열 명이라, “너희는 무릎에 앉혀 키웠다”라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사랑과 예쁨을 많이 받았다. 성서의 역사서·복음서·서신서에 담긴 내용이 각자의 역사적 상황, 삶의 자리를 박차고 나온 이들의 몸부림으로 느껴졌다. 주석책을 비롯해 다양한 서적을 읽으면서 자유로운 토론 속에서 기독교학을 공부하는 과정이 은혜로웠다.
- ‘1980년대 이후 역사적 예수 연구에 대한 고찰: 예수 세미나(Jesus Seminar)를 중심으로’라는 주제로 석사 학위논문을 썼다. 이 주제를 다룬 이유는 무엇인가?
어릴 때부터 대형 교회 주일예배 장소는 나에게 신성함을 느끼게 하는 자리였다. 높은 곳에 있는 강대상, 전면에 배치된 큰 십자가, 성가대의 웅장한 찬양은 말 그대로 “빛나고 높은 보좌와 / 그 위에 앉으신”이라는 가사를 절로 떠올리게 했다. 여기서 오는 ‘성스러운 느낌’에 영향을 받아, 어렸을 적 하나님은 전지전능한 절대 권위의 신으로만 인식되었다. 때로는 현실에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놓인 닿을 수 없는 거리감에 허무하기도 했다. 그래서 역사 속 예수, 인간 예수의 고뇌를 탐구하는 일에 관심이 갔다. ‘역사적 예수’를 공부하는 과정에서 해방감을 느꼈다. 예수가 인간의 몸을 입고 있었다는 것, 그 자신도 고통을 받았다는 것, 고통받는 사람들 곁에 머물면서 같이 밥을 먹었고 함께 슬퍼하고 분노했다는 것이 그렇게 좋았다.
나에게는 ‘고통의 경험’이 늘 중요한 화두였다. 어렸을 때부터 병원에서 생활을 많이 했다. 동생이, 태어날 때부터 계속 아팠기 때문이다. 동생은 약 40년간 꾸준하게 병원 생활을 했고, 동생이 입원하면 엄마와 교대로 보호자 역할을 맡아 병간호를 이어갔다. 이화여대 맞은편의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이었는데, 학부 때 이대 후문과 연세대 동문 사이에는 육교가 있었다. 도로를 사이에 둔 채로, 이대는 내가 공부하면서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는 즐거운 공간이었다. 그런데 육교를 건너면 슬픔과 침묵이 찾아왔다. 세브란스병원은 고통과 불안 가운데 삶을 견뎌내야 하는 이들이 있는 침묵의 공간이었다.
이대와 신촌 사이에서 젊은이들이 소위 ‘불타는 금요일’을 보낼 때, 병실 밖에서 밤하늘을 보면 그야말로 고요함 그 자체였다. 병원은 보통 저녁 8-9시가 취침 시간이니까 ‘도심 한복판에서도 이렇게 고요할 수 있구나’ 싶었다. 흰색 복도에서 느껴지는 말쑥한 침묵의 시간은 그곳에 있는 이들의 기다림과 인내로 점철돼있었다. 동생이 중환자실에 있을 때는 보호자 대기실에서 한없이 기다릴 수밖에 없었고, 그 기다림을 지루하게 견디는 일에 익숙해졌다. 그렇게 두 세계를 동시에 경험했던 것 같다. 그래서 ‘역사적 예수’에 더 천착했던 모양이다. 고통 가운데 하나님이 저 멀리 있지 않고 예수의 고통받는 얼굴 속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공관복음서의 ‘역사적 예수’를 들여다보면서 확고히 인식했고, 거기서 위로받을 수 있었다.
1세기 지중해 지역에서 로마제국의 압제와 억압 가운데 살았던 예수는 학자가 아니었다. 계급이 높은 사람도 아니었다. 하지만 예수에게는 명민한 통찰이 있었다. 통찰은 사회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고뇌할 때 얻을 수 있다. 고뇌하는 신앙인이야말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응답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이 땅에서 몸을 입고 고통받는 자들과 함께 살아갔던 예수라면 진정 고통받는 인간을 구원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고, 정곡을 찌르는 신학적 연구가 ‘역사적 예수’에 담겨있었다. 거기서 희망의 빛을 보았다.
- ‘요한복음서의 고별담론(요 13:31-17:26) 연구: 요한공동체의 파라클레토스 체험을 중심으로’라는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 주제에 주목한 이유는?
‘고통스러운 역사 앞에서 인간은 어떻게 자기 삶을 해석하고, 하나님 앞에 서는가’라는 문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요한신학의 정수가 담긴 고별담론을 통한 요한공동체 연구는 역사적 예수 연구와도 연결돼있다. 공관복음의 예수에게서는 인간의 모든 격동이 느껴진다. 요한복음의 예수는 신의 자리로 올라와 고민을 이어간다. 그 신을 바라보면서, ‘신이 우리 안에 있다’고 고백하는 공동체 모습을 요한복음을 통해 만날 수 있다.
성전 중심의 유대 사회가 와해한 후, 로마제국이 그 땅을 직접 통치하면서 기독교인을 향한 박해가 이전보다 더 심해진 위기 상황 가운데, 예수를 붙잡고 성령으로 황홀경을 느끼며 ‘신비스러운 하나 됨’을 경험한 요한공동체의 고백이 ‘고통 가운데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가’를 고민하던 내게 큰 힘이 되었다. 고통스러운 경험을 내면화하면서, ‘그럼에도 우리는 예수를 의지해서 한 발자국 내디딜 수 있습니다’라고 하는 요한공동체 모습이 굉장히 절실하게 다가왔다. 신비스러운 하나 됨을 경험했기에 목숨을 걸고 예수의 신성을 지켜낼 수 있었고, 이렇듯 핍박받는 상황에서 예수를 지키는 작업은 한마디로 공동체를 지켜내는 일이었다.
고별담론을 읽어보면, 의연하면서도 숭고하고 결연한 의지가 느껴진다. 요한은 한 걸음을 옮기기 위해 100번을 생각하고 기도하고 신학화하면서 공동체의 결속을 다진다. 머리와 가슴과 영이 동시에 움직여서 쓴 책이다. 가장 어두운 자리에서 가장 밝은 빛이신 예수를 품은 공동체로서 ‘빛이신 예수를 알고 있니?’라고 말을 건네는 느낌도 든다. 진짜 빛은 어두운 세상에서 진가를 발휘한다. 요한복음은 그렇기에 세상에 배타적이지만, 오히려 미워하는 세상으로 나아가 하나님의 빛을 전하겠다는, 목숨을 건 결단을 보여준다.
- 요즘 시대에도 통찰을 주는 주제인 것 같다.
코로나 이후 교회가 민낯을 드러내지 않았나. 타인의 안전을 지켜달라는 취지로 들어온 비대면 예배 요청을 ‘종교적 탄압’으로 규정하는 등, 생존을 위해 투쟁하는 모습을 너무 많이 보였다. 교회는 그간 목회자 중심의 위계적 권위 구조 속에서 자본주의 가치를 내면화하고, 경쟁적 사회의 적자생존 상황에서 성장 신화를 추구하는 작업을 지속해왔다. 맘몬의 축복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신학화하는 일을 이어왔고, 결국 모두가 ‘복 많은 신자’가 되기 위해 힘쓰니, 교회가 타인의 고통에 둔감하고 재난 상황에서도 자기 확장에 몰입하는 게 아닌가. 성령의 힘을 개인의 은혜 체험 도구로 삼아서는 안 된다. ‘지금 하나님이 나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내 자리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질문할 수 있어야 한다. 요한공동체는 예수의 십자가와 수난을 영광으로 보고, 그것을 삶의 중심에 놓았다. 이 땅의 부정의·불평등·억압적 구조 가운데 초월의 힘, 영성의 힘, 화해의 힘을 복원하는 길을 요한복음에서 발견할 수 있다.
- 앞선 대답들에서도 그렇지만, 그동안의 설교나 글을 보면 고통스러운 삶, 비통한 현실, 비극적 세계를 정직하게 대면하는 일을 많이 강조하는 것 같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고, 삶에서 발생하는 죽음과 고통을 피할 수 없는 비극적 부조리 상황에 놓여있다고 생각한다. 세계대전이 일어난 후 많은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죽음과 고통에서 도망칠 수 없는 인간의 현실을 대면했고, 그것을 극복하고자 노력했다. 나는 그중에서도 《이방인》과 《시시포스 신화》를 쓴 알베르 카뮈를 좋아한다. ‘유한한 존재가 죽음 앞에서 자기 삶의 의미를 어떤 방식으로 대면해야 하는가’를 카뮈만큼 정직하게 보여준 사람도 없다고 본다. 특히 ‘시시포스 신화’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그 모습이 드러나지 않나.
그리스신화에 등장하는 시시포스는 신을 속인 죄로 끊임없이 돌을 산 위로 밀어올려서 떨어뜨리고, 떨어진 돌을 다시 밀어올리는 일을 끊임없이 수행하는 벌을 받는다. 신에게 도전했다가 비극적 결말을 맞고 끊임없이 조롱받는 비극적 존재로서 유한한 인간이 처한 운명을 형상화한 시시포스를, 카뮈는 오히려 성실하게 자기가 짊어진 삶의 무게를 반복적으로 감당하면서 비극 안에서 묵묵하게 한 발자국씩 떼는 존재로 해석했다. 이 모습이 굉장히 거룩하게 느껴진다.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지는 않는다. 기적이 일어나면 삶의 모든 문제가 없어지는가? 고통의 세계에서 한 발자국을 떼는 힘을 얻으려면, 세계를 정직하게 대면해야 한다. 세계의 모습을 외면하지 않아야 다음 걸음을 옮길 수 있다. 한국교회는 고통스러운 세계를 대면하기보다는 교묘하게 회피하고, 위로와 안락을 주는 방식을 지향해온 것 같다. ‘모든 것이 하나님 뜻을 이루는 고난의 과정’이라고 포장하기에는 삶이 아름답지 않다. 부조리한 삶, 비극과 고통의 세계에서 하나님 사랑을 어디서 느낄 수 있는가. 하나님 또한 세계의 고통스러움에 몸부림치고 있다는 사실을 정직하게 직시해야 한다. 그래야 신앙 안에서 진정한 자유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정직한 대면이 진정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고 신앙인을 신앙인답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 젠더 갈등, 성소수자 문제, 장애인, 난민, 북한이탈주민 등을 둘러싼 다양한 이슈를 다뤄온 것으로 안다. 관련해서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사마리아인의 일그러진 욕망’이라는 제목으로, 북한이탈주민을 다룬 적이 있다. 논문과 실례를 찾아보면서 한국교회가 이들을 타자화하는 방식을 들여다봤는데, 난민·장애인·성소수자 등을 대할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신자유주의 체제와 자본주의 가치를 내면화했기 때문이다. 여러 프로그램을 통해 북한이탈주민을 대할 때 이들을 타자화해서 공장에서 물건을 찍어내듯이 남한 교인과는 다른 층위로 위계화해 ‘이등시민’으로 모델링한다. 남한 기준에 맞는 ‘아름답고 이상적인 기독교인’, 과거 북한에서의 모든 정체성을 부정하고 신자유주의 체제에 걸맞은 교양인으로서 거듭난 복음 사역의 도구로 상품화한다. 이 옷을 입지 않으면, 부적응자 혹은 갈등을 일으키는 사람으로 낙인찍는다. 시혜적 태도로 일관하기에, 인간 자체에 대한 수용·인정이 작동하지 않는다. 겉보기에 나이스한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행동하지만, 그 안에는 끊임없이 누군가를 타자화하여 내 밑에 두면서 위계적 질서를 만들어가려는 욕망이 들끓고 있다. 이것을 신학화·정당화하여 진리인 양 이야기한다. 이 포장지를 한 꺼풀 벗겨내어, 어떻게 타자화하는지 욕망을 폭로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요즘 ‘선교’에 대한 책들을 다시 읽고 있다. 보통 선교를 논할 때, 하나님이 파송 임무로 전해준 사업으로서 ‘교회의 자기 증식 과정’을 이야기하기 쉽다. 선교는 그렇게 한정적인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이 창조 활동을 통해 만물을 만들고, 역사 안에서 사람들을 위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는 그 모든 과정에 ‘흘러넘치는 사랑’이 있다. 그것을 고백하고 전하여 사랑을 구현하는 과정이 선교다. 기독교인은 하나님 사랑에 부름을 받아 나온 사람들이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세상을 끌어안는 하나님의 그 사랑에 동참하고 그것이 교회 바깥의 세계로까지 나아갈 수 있도록 힘쓰는 일이다.
따라서 오늘날 기독교적 가치는 ‘어떻게 세계를 대면하는가’ ‘내가 무엇을 결단하는가’와 연결된다. 세계를 정직하게 보고, 행간이 쌓여있는 성서 안에서 끊임없는 질문을 던져서 하나님 뜻을 구하고, 이 땅에서 무엇으로 구현할 것인지 생각해야 한다. 그래야 타자와 관계를 맺으면서 사회문제에도 제대로 반응할 수 있지 않을까. 종교개혁적으로 본다면, 성서를 다시 읽는 작업을 해야 하지 않을까.
- 성서 다시 읽기?
보통 성탄절 행사를 보면, 목자·양·동방박사 등이 다 나타나서 예수의 탄생을 축하한다. 빛도 막 떨어지고, 난리다. 모든 복음서에 있는 각종 탄생 이야기를 다 짬뽕해서 보여준다. 복음서를 보면, 각 복음서가 처해있는 고유한 삶의 자리에서 나타나는 고백들이 있다. 일례로, 마가복음에는 탄생 이야기가 없다. 먼저 저자의 독특한 경험에 근거한 ‘차이의 고백’을 고려해야 한다.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겪은 ‘삶의 고백’을 정직하게 읽는 태도가 중요하다. 그동안 교회가, 각 책들의 경험과 차이를 싹 무시하고 하나의 권위 안에서 흡수 통합해 ‘교리화한 성서 읽기’를 해온 게 아닌가 싶다. ‘끊임없이 개혁하는 교회’ ‘끊임없이 저항하는 교회’라는 종교개혁 전통을 따른다면, 경직된 사고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정직하게 그 시대의 고백, 진실을 대면하여 성서와 씨름하면서 한 걸음씩 나가는 자세가 중요하다.
간혹 ‘사영리’와 같은 하나의 구원 교리를 푯대처럼 놓고, 그것만으로 성서를 읽는 것 같은 교인들을 만난다. 성서 66권 속에는 다양한 삶의 이야기가 담겼다. 각 시대의 정치·사회·문화·경제 구조 속에 살아간 인간의 진짜 역사가 있다. 성서를 탈역사화하지 않을 때, 나의 이야기를 성서의 이야기와 정직하게 맞대어볼 수 있다. 나에게 위안을 주는 이야기만 재맥락화하는 식으로 왜곡해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 한 사람의 권위자만 해석 권한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본다. 교인들이 역사적 상상력을 발휘하며 읽고 질문하고 토론하면서 스스로 깨우쳐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목회자 역할은 성서를 건강하게 읽어나갈 수 있도록 지지하고 힘을 주는 데 있다.
- 이번 호 커버스토리 주제가 ‘죄’이다. 이 시대에 우리가 대면해야 할 ‘죄’는 무엇이라고 보는가.
우리는 신자유주의 체제를 살아가고 있다. ‘신자유주의 체제가 지금 누구를 억압하고 있는가’를 들여다보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단순히 인간만이 아니라, 지구와 자연에 대한 억압과 착취가 벌어지고 있다. 재앙적 기후 위기에 대응하여 일어나는 문명의 전환 앞에서, 또 다른 생명을 존중하고 하나님의 창조세계에서 생태적 신앙을 실천해야 한다고 말하는 나 역시도 가해자다. 이 현실을 인식해야 한다. 인류의 한 사람으로서 우리가 이 억압과 착취의 구조에 어떻게든 기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 ‘깨닫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죄이지 않을까. 교회가 예언자적 사명을 회복해야 한다. 신자유주의 체제가 지닌 태생적 한계를 들여다보면서 이 세계가 은폐하는 착취와 억압의 모습이 무엇인지 이야기해줘야 한다.
사람들이 신자유주의 구조에서 느끼는 것은 ‘각자도생’으로 인한 극심한 포기나 절망이다. ‘소확행’(작지만 확실한 행복)도 사실 체념적 상태에서 최소한도로 자기 욕망을 실현하는 방식을 일컫는 말이지 않나. 다들 허무와 절망 가운데 빠져있고, 교회는 병폐적으로 변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이라면, 불가능의 가능성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기 위한 ‘희망’을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그 ‘희망’을 붙잡기 위해서는 현재를 정확하게 진단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우리가 무엇을 깨닫지 못하는지, 이 상황에서 어떤 목소리에 주목해야 하는지 고민을 이어가야 한다.
오늘날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2018년 태안화력발전소에서 계약직으로 일하다 죽음을 맞은 20대 청년 김용균을 기억하는가. 故 김용균의 어머니 김미숙 씨 인터뷰를 본 적이 있다. ‘내 아들 같은 이가 없어야만 해’라는 마음으로, 불합리한 노동조건에 처해있는 생명을 살리기 위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었다. ‘자기 아들의 죽음’이라는 특별한 경험으로부터 나오는 분노, 그 진정한 분노가 사회를 변혁하는 힘이 될 수 있구나, 싶었다. 이 어머니가 갖고 있는 현실을 직시하는 힘에는,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또 다른 생명을 살리는 폭발력이 있더라.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은 성서의 행간과 사회적 사건을 겪은 이들의 목소리를 연결해 변혁의 힘을 드러내는 데 있겠다. 세례요한의 죽음 이후 요한의 머리를 받아 든 어머니 엘리사벳의 목소리, 십자가 처형 이후 예수의 시신을 안아 든 어머니 마리아의 목소리는 성서에 한 줄도 나오지 않는다. 이런 여성들이 갖고 있는 ‘말해지지 않은 목소리의 힘’에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
- 앞으로의 계획은?
지금 주어진 역할을 열심히 하기 원한다. 오늘 마주하는 삶의 한 부분 한 부분을 정직하고 성실하게 마주하면서. 먼 미래가 아니라 오늘을 사는 사람으로서 누구를 만나고, 누구와 대면할 것인지에 진지해야겠다. 신학자로서 사랑과 희망을 이야기할 때, 그것이 육화된 사랑이자 희망이기를 바란다. 그러려면 나와 가장 가까운 사회문제에 진심으로 관심을 갖고, 귀 기울이고 응답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사실 바쁘다. 새길기독사회문화원 연구실장 활동을 비롯해 여러 일이 있다. 이번에 NCCK와 협업해서 8명의 신학자·목회자가 ‘생태 매뉴얼’을 만든다. 교단들에 생태 매뉴얼이 없다. 환경분과가 있는 교단조차도 의제를 내는 데 소극적이다. 관심 있는 교회들이 각개전투하는 상황이라, 뒤늦게나마 작업 중이다. NCCK에서 코로나 이후 고백 문서를 만드는데, 그 일에도 동참하고 있다. 기사연에서 세대 갈등을 중심으로 진행한 ‘한국 개신교회 내 인식 조사’에서 젠더 영역을 맡아 연구하고 있다.
요즘 ‘돌봄’에 관심이 많다. 보통 ‘돌봄’을 취약하고 연약한 사람들을 위한 시혜적 미덕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알아야 한다. 돌봄이 필요 없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코로나 이후 모든 사람에게 돌봄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돌봄은, 젖먹이 때나 성장기에 부모로부터 받는 지원 같은 것이 아니다. 성인도 때때로 나락으로 떨어진다. 서로가 서로를 돌보지 않으면 취약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인간의 기본 조건에 관한 생각을 바꿔야 한다. ‘돌봄의 정치학’ ‘돌봄의 윤리학’에서는 이미 인간 자체를 연약하고 의존적인 존재로 상정한다. 정부·지자체·기업·시민사회의 거버넌스 정치가 이뤄질 때 가장 중요한 키워드가 ‘서로의 돌봄’이어야 한다고 본다. 하나님 나라 이해와도 맞닿아있다. 어떻게 신학화해서 정치적·사회적 과정 안에서 ‘모두의 돌봄’으로 구현할 것인지가 중요한 연구 주제다. 폭력과 차별 문제, 기후 위기 등도 다 ‘돌봄’과 연결돼있다.
1) 티시 해리슨 워런의 《밤에 드리는 기도》(IVP)에 있는 제사(題詞) ‘성공회 기도서’의 내용을 가져온 것이다.
진행 강동석 기자 kk11@goscon.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