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1호 커버스토리]

하나님, 제가 원하는 것만큼 그렇게 당신을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제 눈에 당신은 가느다란 초승달, 그리고 저 자신은 달 전체를 보지 못하게 가리는 지구의 그림자와도 같습니다. 그 초승달은 매우 아름다워서 어쩌면 저 같은 사람은 그것만 보아야 하는지 혹은 그것만 볼 수 있을 뿐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 제가 두려워하는 것은 제가 드리우는 그림자가 너무 커져서 달 전체를 가려 버리고, 아무것도 아닌 그 그림자로 저 자신을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7)

‘의인이자 동시에 죄인’이 의미하는 것 

죄에 대한 성서의 흥미로운 가르침 중 하나는 죄가 하나님의 창조 안에 ‘존재론적’ 지위를 차지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죄는 원래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세상에 들어온 것’이다(롬 5:12). 그런 의미에서 ‘스스로 있는 창조주’나 그가 만든 ‘창조세계’가 존재한다고 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죄가 존재한다고는 말할 수 없다. 세상에 존재하게 된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고, 하나님으로부터는 선한 것만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오감(五感)으로 경험하는 다른 모든 것과 달리 죄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선한 피조물 사이에서 ‘현상’으로 경험될 뿐이다. 신학적인 언어로 표현하자면, 죄는 존재론적으로 불가능하지만, 허상이 아니라 실재로서 개인과 공동체에 끔찍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8) 이렇게 ‘말도 안 되는’ 것이 죄의 실제 모습이기에, 인간은 언어를 가지고 죄를 온전히 이해할 수도 깔끔하게 설명할 수도 없다. 인간과 죄를 떼어놓고 이해하기는 힘들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인간’과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죄’의 존재론적 차이를 간과하다가는 죄를 내 방식대로 규정하고 통제하려는 강박이 생긴다. 이러한 강박이야말로 죄인으로서 인간이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죄성이다.

영원부터 ‘좋으신’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좋다’고 하신 피조물과는 달리, 죄는 그 자체로 ‘나쁜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긍정하신 창조와 달리 죄는 부정되어야 하며, 하나님께서 용납하신 창조와 달리 죄는 극복되어야 하고, 하나님께서 완성하실 창조와 달리 죄는 없어져야 한다. 이것은 죄를 정확히 알지도 못하고 통제하지도 못하는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과업이다. 이러한 인간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단번에’ 뭔가를 행하셨다. 첫 아담을 통해 하나님께서 만들지 않으셨던 죄가 창조세계에 들어오자, 하나님께서는 두 번째 아담을 통해 죄를 ‘우리 뒤에’ 두셨다. 이로써 그리스도인은 현실에서 여전히 죄를 지으며 살아가지만, 죄의 노예가 아니라 자유인으로 살아갈 가능성을 얻었다. 이 놀라운 상태를 종교개혁자 루터의 언어를 쓰자면 ‘의인이자 동시에 죄인’(simul justus et peccator)이라 묘사할 수 있다.

하지만 슬프게도 이 표현은 지난 500여 년간 우리를 미혹하고, 심지어 그리스도인의 도덕적 무감각 혹은 윤리적 실패를 용인하고 정당화하는 구실로도 사용되었다. 죄인이자 ‘동시에’ 의인이라고 말할 때 문제는 죄와 의로움의 공존이 우리 운명인 것과 같은 잘못된 인상을 풍긴다는 데 있다. 앞서 언급했듯 의로우신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고 부정하시고 심판하신다. 따라서 ‘의인이자 동시에 죄인’은 지킬과 하이드 씨 같은 인간의 이중성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중심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심판자이자 구원자이신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부정하시면서 우리가 의롭다고 확증하신다. 이 같은 하나님의 ‘영원한’ 결정이라는 관점에서만 우리는 의인이자 ‘동시에’ 죄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우리의 시간 감각에 맞게 풀어내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는 이미 옛것이 되었고, 완전한 의로움은 이미 약속되었다.9) 따라서 ‘동시에’는 우리의 삶 속에서 죄와 의로움의 불편한 동거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일어난 삶의 지향성의 급진적 ‘전환’이라는 역동적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 죄인이자 의인으로서 우리는 전적으로 죄인(totus peccator)인 과거를 뒤로하고, 전적으로 의인(totus justus)이 될 미래에 대한 희망을 지금 여기서 현실화하며 살아간다.

‘죄’, 다시 주목받다

구독안내

이 기사는 유료회원만 볼 수 있습니다.

후원구독, 온라인구독 회원은 로그인을 해주시고 인증 절차를 거치면 유료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후원구독(월 1만 원 이상), 온라인구독(1년 5만 원) 회원이 아니시면 이번 기회에 〈복음과상황〉을 후원, 구독 해보세요.

저작권자 © 복음과상황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