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1호 커버스토리]

“오직 은혜로만”(sola gratia). 

이는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주창한 종교개혁 3대 원리 중 하나로, 구원은 사제와 예전의 매개를 통해 신자에게 도달한다는 가톨릭적 교리를 파쇄하고, 하나님 은혜는 오직 하나님의 의지를 통해서만 도래하며 이 과정에 그 어떤 매개도 필요치 않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사제에게 고해성사하고, 그 사제가 내려주는 면죄의 책무를 수행하면, 죄가 면하여지는 가톨릭적 예전을 전면 파기해버린 셈이다. 성직자 특권을 무효화하고, 모든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동등한’ 신자로서, 동등한 죄인으로서 선다는 선언이었다. 법적 강제력이 있지 않은 이 선언은 유럽 문명을 넘어 인류 문명을 새로운 전환기로 몰아넣었다. 그 전환은 종교개혁을 통한 모든 인간의 ‘죄인으로서의 동등성’이 ‘모든 인간의 동등성’으로 전이되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다. 기실 종교개혁 이후 등장한 루터교의 예배와 형식은 가톨릭과 비교하여 새로운 것은 많지 않았고, 내용적 급진성만 있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서구 사회를, 서구 기독교를 가장 급진적으로 바꾼 것은 예배와 형식이 아니라, 바로 이 ‘선언들’이었다. 비록 어떤 구체적인 내용을 담지하고 새로운 종교의 기틀을 구성하는 데는 미치지 못하더라도, 이 종교개혁 선언들에 담긴 내용을 해석하고 구현해가는 과정에서, 서구 기독교뿐 아니라 서구 사회는 이전과는 급진적으로 다른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게 된다.

다시 말하지만, 모든 믿는 신자들의 ‘죄의 동등성’이 ‘인간의 평등성’ 개념으로, 그리고 ‘인간’ 개념이 서구 백인들뿐만 아니라 다른 인종·문화·종교인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나아가는 문명의 전이 과정이 있었다. 여기에는 ‘존재의 동등성’ 개념이 자리 잡고 있는데, 루터의 종교개혁을 통해 발명된 것이 아니라, 창세기 1장에 담겨있는 인간과 문명에 대한 당시 포로기 유대인들의 사상을 반복한 것이다. 약육강식, 승자 독식, 생존을 위한 무한경쟁이 벌어지는 고대 제국들의 시대, 전쟁에 패하고 포로로 끌려간 유대인들은 당대의 시대적 에토스에 반하는 생각을 전개한다. 패한 민족의 신은 온 우주를 창조한 하나님이시고, 그 하나님은 제국의 승리를 선포하신 것이 아니라, 패한 민족 이스라엘을 훈육하시기 위해 제국을 사용하셨다는 생각. 그 만유의 하나님은 이제 모든 나라와 민족이 서로를 잡아먹고 약육강식하며 살아가기를 원하지 않으신다는 의도를 ‘채식주의자 본문’(창 1:29-30)을 통해 분명히 하신다. 물론 이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선민의식을 반영하고 있다. 그럼에도 인간을 포함한 세상의 모든 생명들에게 동일한 먹거리를 제시하는 것은 서로를 잡아먹는 고대 제국의 문화에 반대하는 의사표시이며, 아울러 농경문화로의 전이를 암시하면서 새로운 문명의 에토스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기대감을 담아내고 있다. 비록 채식주의자 본문 배후에는 분명 모든 존재가 동등하고 존엄하다 —당시에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는 생각이 담겼지만, 이 고대 본문을 통해 ‘인권’ 개념이 성서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아전인수 격 해석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창세기 1장이 선포하는 하나님 형상을 담지한 인간, 그리고 그 인간에게 주신 다스리고 정복하고 지배하라는 명령은 고대 제국기의 신분제 위계질서를 전복하는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 명령은 고대 제국에서 황제와 황태자에게만 주어지는 사명이다. 창세기는 이 사명을 모든 인간이 부여받은 하나님 형상 속에서 동등하게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서로가 지배권력을 위해 살육하며 경쟁하라는 뜻이 아니라, 채소와 과일을 나누어 먹으며 함께 살아가라는 정치적 이상을 반영한다. 이 얼마나 반역적이고 정치적인 본문인가. 그 이면에는 서로를 잡아먹으며 ‘약육강식과 승자 독식 그리고 생존을 위한 무한경쟁’을 마치 자연의 질서인 듯이 문명의 질서로 만들려는 데 인간의 죄가  있다는 생각을 담고 있다.

‘죄인의 동등성’에서 ‘인권의 동등성’으로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서 동등한 죄인이라는 종교개혁적 선포는 정녕 ‘죄인’이라는 데 방점이 있었다. 이 종교개혁의 선언이 맞선 질서는 바로 중세 기독교의 존재론적 위계질서였다. 물론 기독교가 만들어낸 질서라기보다는 기독교회가 속한 사회적 질서, 즉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제국의 질서와 중세 봉건사회의 질서가 위계적으로 구성되었기에 그랬다. 하지만 교회는 창세기 1장에 담긴 하나님 형상을 위계적으로 해석하여, 소위 ‘존재의 위계질서’를 신학적으로 구성했다. 그 구원의 사다리라는 위계질서에서 성직자가 면죄를 선포할 수 있는 특권은 핵심축을 차지하고 있었다. 루터의 선언이 칼을 겨눈 자리가 바로 이 사제의 특권적 권리였다. 이것이 진정 ‘종교개혁’인 이유는 바로 자신이 속한 집단의 특권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해체하기를 촉구했을 뿐 아니라 행동에 옮겼다는 데 있다. 물론 이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당대 가톨릭교회 권력과 앙등하던 시민 세력 사이의 갈등과 견제 구도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묘한 갈등과 긴장이 분출될 수 있었던 것은 루터의 종교개혁이 타고난 ‘시대적 운명’이며, 신앙적으로는 하나님 뜻이라고 받아들일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터의 선포는 ‘기독교를 보다 기독교답게’ 만들어나갈 함축성을 충분히 내포하고 있었다. 

다스리고 지배하고 정복하라는 창세기의 명령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 위계적 질서를 통해 군림하라는 의미가 아니었다. 오히려 ‘지배’란 다른 존재들을 무력으로 제압하고 잡아먹으며 복종시키는 데 있지 않고, 하나님 형상을 따라 공생하며 살아가는 데 있었다. 당대의 세계관과 위계질서적 사유를 결합하여 제국의 종교가 되었던 기독교는 본래 반제국적 종교였고, 루터의 종교개혁은 창세기 말씀에 담겨있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들의 존재론적 동등성’을 회복하는 선언이었다. 귀족과 노예가, 자유민과 노예가, 여성과 남성이, 어른과 아이가 함께 모여 예배하는 가운데 한 형제 한 자매로 부르며 하나님의 가족 안에서 누렸던 존재론적 동등성 회복 말이다. 중세의 성직 구조는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 동등한 죄인’이라는 존재론적 동등성을 위반하고 있었다.

의도했든지 하지 않았든지 간에, 종교개혁은 인간을 이전과는 다른 개념 속에서 규정했는데, 바로 인격을 지닌 개인 개념이 발명된 것이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한 ‘개인’으로서 동등하다. 귀족도 노예도 자유인도 여성도 남성도 없다. 동등한 개인일 뿐. 이 개인은 그저 의미 없는 숫자 ‘하나’가 아니라 행위주체성을 가진 존재다. 근대는 이를 ‘인격’으로 규정한다. 인격적 개인으로서의 인간 이해는 종교개혁의 기여라기보다는 종교개혁의 선포로부터 촉발된 사상 전환의 산물이었다. 이전에는 사람의 개념이 존재의 위계적이고 공동체적인 질서 속에서 공동체의 일원으로 정의되었다. 이것이 각 개인의 행위주체성과 그에 대한 책임과 의무로 조망되면서, 각자는 자기 행위에 책임을 지게 되었다. 한마디로 이성을 지닌 합리적 인간주체의 고유성이다. 이 과정에서 죄는 전적으로 개인의 자유와 평등의 ‘책임’으로 남게 되었고, 그래서 누구든 상관없이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 간주된다. 종교개혁이 르네상스를 거쳐 근대적 발전으로 이행되는 과정에서 ‘죄인으로서의 동등성’이 ‘인간의 동등성’ ‘인격의 동등성’으로, 결국은 ‘인권’ 개념으로 발전된 것이다.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인권 감수성은 종교개혁으로부터 비롯된 발전들의 결과이다. 인권 개념의 확립을 위해 종교개혁이 일어났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역사적 의미를 되돌아볼 때 종교개혁이 그렇게 한 시대를 바꾸고 변혁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려 할 뿐이다. 종교개혁의 역사적 기여가 있으면, 그것이 초래한 부작용도 있을 수밖에 없다. 곧 ‘죄’를 물을 때 ‘우리’의 죄에서 ‘나’ 개인의 죄를 묻는 방식으로, 즉 개인의 책임을 인과적으로 밝히는 방식으로 바뀌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종교개혁의 영향을 벗어나 이성적이고 자율적인 개인으로서 인간에 대한 정의를 확립해가던 근대는 이제 ‘죄’의 개념을 ‘개인의 책임’으로 환원하는 도식으로 사유의 전환을 이루었다. 중세적 신분제 질서하에서 ‘우리 모두’가 구원받고 벌을 받는 구조가 아니라, 이성적 합리성을 발휘하여 자유로운 선택을 행사한 개인이 자기 행위에 책임진다는 생각으로 전환이 일어난 것이다. 이 근대적 전환에서 종교개혁의 선포 중 인간의 동등성 혹은 평등은 그대로 승계되었지만, ‘죄인’ 개념은 탈각되었다. 죄인으로 규정되려면, 자신이 책임질 일이 있어야 하는데, ‘나면서부터 죄인’이라는 생각은 종교적 영성을 위한 지혜의 말씀은 될지언정 세속화되어 가는 근대사회의 합리적 인간들에게는 일종의 난센스였다. 잘못된 일이 있으면,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이 너무나 당연한 사회, 그래서 우리는 인권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들의 행위를 판단하고, 죄를 묻는다. 마치 나는 그 잘못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듯이.

사실 죄인이 아닌 자유인으로서, 이성적 합리성과 자유로운 선택 의지를 가진 개인으로서 인간이라는 자의식은 지금까지 문명의 여러 부조리하고 부정의한 관행들에 저항하며 새로운 길들을 만들어왔다. 잘못된 제도·생각·행동·정치 등에 분연히 저항하며 일어났고, 우리가 어렴풋이 갖고 있는 인권이라는 생각은 이러한 근대의 배경 속에서 분명해진다.

그런데 정작 ‘인권’이 무엇인지를 묻는다면, 정확히 정의하거나 답하는 사람은 놀랍게도 많지 않다. 우리는 그저 알고 있는 듯이, 당연하다는 듯이 ‘인권’ 개념을 사용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인권은 분명히 한계가 있는 개념이다. 무엇보다도 기후변화와 생태 위기의 시대 가운데 인간의 권리만을 강조하는 매우 인간중심적인 개념이다. 존재론적 동등성을 인간들 사이에서만 나눌 뿐 인간 이외의 존재들에게는 존엄성과 평등을 나누어주지 않는다. 이러한 한계를 언급하며 등장한 ‘인간 역량’(human capabilities) 개념조차도, 비인간 존재들의 역량을 다루지는 않는다.

근대 문명을 이어받은 오늘날, 우리는 이 근대적 망각의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다. 팬데믹으로 말이다. 인간은 죄인이 아니라 자유로운 존재라는 생각, 자신이 꿈꾸는 그 무엇이든지 욕망하고 성실하게 노력해서 쟁취할 자격이 있다는 이 생각이 낳은 근대적 발전의 연장선상에서 우리는 고도의 물질문명이 가져다주는 영화를 누리고 있다. 물질을 인간이 문명을 영위하면서 수단과 도구로 활용할 수 있는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서 말이다. 인간의 필요에 따라 사용된 비인간 존재들이 팬데믹이라는 역습으로, 기후변화라는 역습으로, 생태 위기라는 역습으로 귀환하고 있다. 그 사건들은 우리에게 준엄히 경고한다. 인간 모두는 동등한 죄인이라고.

죄인의 역습: ‘없는 것들’의 행위주체성

오늘 우리가 마주한 문명의 위기는 바로 이 종교개혁적 선포 속에 담지된 의미, 즉 ‘우리 모두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망각하는 데서부터 비롯된다. 무슨 말인가? 이 시대에 우리가 당면하는 기후변화와 생태계 위기, 그로부터 유래하는 팬데믹은 인간 문명을 영위하는 우리 모두가,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간에 공모한 결과이다. 오늘의 문명은 물질의 소비를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우리의 삶 어느 구석에서도 물질의 소비와 무관한 영역은 찾을 수 없다. 우리의 사회 비판은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 권력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등으로 나눠진다. 하지만 그들 모두 물질문명을 통해 살아가는 이상 오늘 지구가 당면한 위기와 무관하거나, 이에 대한 책임이 없을 수 없다. 모두가 이 물질문명에 공모하고 있기 때문이다. 죄에 가담한 책임의 몫은 다르겠지만 말이다.

우리가 공모한 죄는 무엇인가? 바로 인간 이외의 존재들을 인간의 삶을 위한 도구로 삼은 죄이다. 팬데믹을 비롯한 기후변화와 생태계 위기가 아무런 잘못 없이 자연의 변덕 때문에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다. 지구와 생태계는 각 인간 개인에게가 아니라 인류 문명 전체의 행동양식에 ‘반응’하여, 우리에게 몸짓하고 있다. 팬데믹으로. 루터가 말한 ‘죄’ 개념과는 전혀 다른 맥락이지만, 이 시대에 우리의 죄는 곧 물질이 죽은 물질 덩어리이며 인간의 필요에 따라 마음대로 사용하고 폐기할 수 있는 수동적인 재료라는 생각으로부터 비롯된다.

우리가 명시적으로 혹은 암묵적으로 일구어낸 공모의 죄를 보여주는 한 단면이 생명과 물질의 이분법 속에 담겨있다. 물질은 생명이 없는 것으로 간주되어왔다. 생명 없는 물질이란 그 자체의 행위주체성이 결여된, 그래서 온전한 존재로 동등하게 취급될 수 없는 어떤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 생명과 물질의 이분법은 생명이 물질과 연속한다는 당연한 진실을 은폐하고, 인간과 자연의 이분법과 짝을 이루며,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의 존엄성을 강조하는 첨병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 물질이 ‘행위주체성’을 갖고 있어서, 살아있는 생물만큼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우리에게 영향을 받아 반응한다면 어쩔 것인가? 인간은 물질과 분리되지 않고, 물질과 더불어 ‘삶의 네트워크’를 이루며 살아간다. 광물은 생물로 간주되지 않겠지만, 그러나 인체 내의 뼈는 세포들이 광물화(mineralization)하면서 구성되는 것이다. 광물과 생물의 세포는 친족인 셈이다. 팬데믹 시대, 물질이 아무런 행위주체성을 갖고 있지 않은 수동적인 물질이라는 생각은 우리가 버린, 아무것도 아닌 쓰레기들이 문명을 향해 던지는 몸짓 앞에 무너지고 만다. 플라스틱 쓰레기로 거대한 섬을 이루고, 우리가 버린 빨대가 생태계 여러 생명들을 위협하는 현실을 보라. 그 물질들은 그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사실 ‘죄’를 벌하면, 죄가 사라진다는 생각은 은연중에 우리들 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어떤 극단적인 범죄나 잘못이 일어나면, 사람들은 앞다투어 온라인상에 자신의 의견을 표출한다. 뿌리를 뽑아야 한다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본때를 보여주어야 한다고. 그런데 정말 그럴 수 있을까? 일벌백계하면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처벌을 강화하면 없어질까? 이러한 마음에는 중세 가톨릭 신부가 가졌던 ‘면죄의 특권을 행사하는 태도’가 그대로 담겨있지 않은가? 고의성 여부를 떠나서, 근대 이래 법을 담당하는 판사·검사·변호사 유의 사람들이 보이는 태도에 중세 신부의 태도가 재연되고 있지 않은가? 다른 누군가를 정의의 잣대로, 평등의 잣대로 판단하고 정죄하고, 그에 응하는 벌을 주어야 한다는 태도 이면에는 분명 중세 신부들의 태도가 고스란히 간직되어있다. 어쩌면 중세 신부들에게만 있었던 태도가 아닌지도 모른다.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 문명을 치명적인 위기로 몰아넣는 인간예외주의의 태도이다. 그 예외자의 자리에 들어앉아, 다른 모든 주체와 대상들을 판단하고 분류하는 이성의 태도, 그것이 자유가 지불해야 하는 대가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근대인들은 그 대가에 대해 생각하지 못했다. 자신 이외에 다른 존재가 얽혀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모든 존재들이 위계적으로 얽힌 중세 ‘존재의 사다리’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면서, 종교의 존재론이란 실상 권력의 존재론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폭로했고, 그렇게 종교적 세계관에 대한 비판자로서 스스로의 역할을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이 합리적 이성의 눈에 존재하지 않는 것들, 비존재로 간주되는 것들이 오늘 우리를 역습하고 있다. 성경에는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고전 1:28)라는 말씀이 있다. 여기서 ‘없는 것’(ta me onta)은 문자 그대로 존재하지 않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없는 것으로 간주되는 것들, 그것은 곧 가치가 없다고 간주되는 것을 이름한다. 없는 것, 혹은 없는 자들은 이 사회에서 무가치한 것으로 간주되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그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신다고 말하고 있다. 있는 것이 폐하여진다는 것은 곧 ‘비존재’로 격하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없는 것들을 택하셔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신다는 의미일 것이다. 오늘날 기후변화와 생태계 위기가 딱 그렇다. 없는 것들로 간주되던 물질이 인간 문명을 뒤집어놓고 있지 않은가? 바이러스는 생물과 무생물의 경계에 속한 존재이다. 자체의 신진대사 과정을 갖고 있지 않기에 바이러스는 유기체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만의 행위주체성을 결여한 것도 아니다. 비록 숙주세포 내로 침투해서 숙주의 에너지원들을 빼앗아 쓰지만, 어쨌든 바이러스는 행위주체성을 갖고 있다. 그 있는 듯 없는 듯한 존재인 바이러스가 지금 지구 문명을 위기로 몰아넣고 있는 것 아닌가? 이런 위기의 시대가 되면, 늘상 이 위기의 근원에 대한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분석하고, 귀책사유을 물으려는 심사가 발동한다. 그 ‘마녀’를 찾아 책임을 묻는다. 하지만 많은 경우,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오늘 우리가 맞이한 위기는 그런 방식으로 결코 극복되지 않을 것이다.

‘책임’이 아닌 ‘응답-능력’으로

우리가 맞이한 위기는 모든 존재의 얽힘으로부터 비롯된다. 모든 존재가 동등하다는 말은 모든 존재가 획일적으로 똑같다는 의미가 아니다. 각 존재의 차이들 모두가 동등한 정도로 소중하고 중요하고 결정적이라는 말이다. 꿀벌은 꿀을 꽃으로부터 얻는다. 꽃은 꿀벌에게 꿀을 제공하고, 다음 세대를 번식할 꽃가루의 운반을 꿀벌에게 맡겨놓는다. 그런데 기후변화로 꿀벌이 멸종한다면 꽃에게는 무슨 일이 벌어질까? 아마 한 세대 정도는 자가생식이라는 식물의 고유한 방식을 통해 번식을 유지하겠지만, 그다음은 답이 없다. 꿀벌처럼 멸종이다. 공멸하는 것이다. 존재는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근대의 ‘개인’은 개인이 실체로 존재한다는 말이라기보다는, 중세의 봉건적이고 공동체적인 질서 속에서 억압당하고 묵인당해야 했던 개인의 존엄성을 강조하기 위한 문명적 발상과 노력이었다. 홀로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개인’이라는 말의 본래 의도가 아니었다. 각자가 ‘개인’을 기초 단위로 하여 모든 존재와 생명을 조망하는 시대에 우리가 사물과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에는 이 존재의 얽힘이 망각되어있다. 그 얽힘이 망각되어 우리는 사건의 원인과 결과를 대상들 사이의 추상적 인과관계로부터만 찾는다. 꽃의 멸종은 무엇 때문인가? 기후변화? 생태 위기? 꿀벌의 멸종? 반생태적 인간 문명?

우리의 시간이 증발하고 있음을 신학자 캐서린 켈러는 경고한다. 하지만 ‘우리’가 이 문명과 생명을 되살리겠다는 거대한 야망을 멈추는 일이 먼저다. 오히려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일은 ‘우리는 철저히 실패했다’는 인식이다. 우리 문명이 근본적으로 실패했다는 인식 말이다. 여섯 번째 대멸종의 도래를 예감하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인간 문명의 방식으로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자신만만해하지 않는가? 아니면 마치 그러한 일은 지구에 벌어질지언정, 나와는 상관없는 일인 척 지금까지의 삶의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거나.

얽혀있는 생명의 네트워크 안에서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책임’(responsibility)을 묻는 것이 아니라 ‘응답할-수-있는-능력’(response-ability)을 회복하는 일이다. 우리 주변에 있는 다양한 존재들의 소리에 응답할 수 있는 능력 말이다. 우리가 소비하는 물질들의 탄식이 들리지 않는가? 나에게 정신이 나갔다고 반문할지 모른다. 그렇다. 안 들린다. 그 존재들의 몸짓과 소리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소리를 들을 준비가 안 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철학자 브뤼노 라투르는 비인간 존재들의 소리를 인간 정치 영역에 대변할 수 있는 ‘사물 의회’(parliament of things) 개념을 제안하기도 한다. 지금의 대의민주주의가 이렇게 철저히 붕괴하고 있는 것은, 다른 이들의 목소리들을 대표하고 대변하겠다는 정치인들이 선거 이후에 철저히 자신의 이익과 목소리를 대변하는 행태를 반복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물질문명의 편리함을 만끽하고, 전기자동차 회사의 주식을 구입하면서, 기후변화와 생태 위기에 의식이 있는 척 말을 내뱉고 있는 ‘우리’는 직업 정치인들과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우리 역시 다른 존재들의 목소리를 들을 준비가 전혀 안 되어있긴 마찬가지이다. 이 팬데믹에 고통받는 수많은 존재들의 몸짓과 울부짖음에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철학자 카렌 바라드는 힘주어 강조한다. 응답할 수 있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고. 우리는 모두가 물화(mattering)의 ‘내적-작용’(intra-action) 안에 있는 존재들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신학적으로 표현하자면, 우리 모두는 이 물화의 내적-작용 안에서 동등한 죄인들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다스리고 정복하고 지배하라는 소명을 철저히 배신했다. 서로를 잡아먹는 고대 제국들의 행태와 관행을 따르지 말고, 서로 잡아먹지 않는 채식주의의 정치와 삶을 살아가라는 창세기의 명령을 철저히 배신했다. 우리는 우리의 이익을 위해 모든 존재를 이용하고 착취한다. 힘과 권력이 없어서 못 하지, 할 수 있으면 이를 위해 무엇이든지 다 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죄인이다.

죄인이니 머리 숙이고 입 다물고 반성하라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이 ‘죄’가 근원적으로 존재들의 얽힘으로부터 온다는 것, 정도의 차이가 있다 해도 이 얽힘 속에서 우리 모두 공모하고 있다는 것, 그래서 삶 혹은 생명이란 그저 함께하는 공생을 넘어 ‘함께-만들기’(sympoiesis)의 과정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 그렇게 우리가 죄인으로서 ‘응답-능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말이다. 루터가 성직자의 면죄 특권을 파기하고 우리 모두 동등한 죄인이라고 선포했던 의미를 우리는 팬데믹 시대에 이렇게 해석해볼 수 있을까? 이 문명의 위기에 공모한 죄인으로서 우리의 실패들을 자각하고, 우리가 소비해왔던 물질들과 더불어, 다른 비인간 존재들과 더불어 함께 응답하며 살아갈 길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말이다.

죄란 결국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모습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문제의 원인을 찾아 다른 사람이나 존재들에게 책임을 물리기보다는 그 문제와 얽힌 다양한 측면들에 응답할 수 있는 능력을 회복하는 일이 지금의 위기에서는 중요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책임’이 아니라 ‘응답-능력’으로 우리의 태도를 전환해야 한다.

박일준
감리교신학대학교 객원교수이자 원광대학교 동북아인문사회연구소 HK연구교수. 저서로는 《정의의 신학: 둘의 신학》 《인공지능 시대, 인간을 묻다: 포스트휴먼 시대에 대한 종교철학적 신학적 성찰》 등이 있다. 캐서린 켈러의 《길 위의 신학》, 로버트 코링턴의 《바람의 말을 타고: 조울증의 철학》 《자연주의적 성서 해석학과 기호학: 해석사들의 공동체》 등을 우리말로 옮겼고, 다수의 학술 논문을 출판하였다. 현재 동북아시아 문명권을 위한 K-Christianity의 가능성을 주제로 연구하고 있다.

저작권자 © 복음과상황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