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3호 커버스토리] 북 콘텐츠를 만드는 서울책보고 박혜은 매니저

박혜은 매니저 ⓒ복음과상황 정민호<br>
박혜은 매니저 ⓒ복음과상황 정민호

“저의 주된 정체성은 실패한 복음주의 학생 운동가예요. 연구하다 만 연구자이고. 지금은 지극히 평범한 직장인이에요.”

10월 26일 송파나루역 근처 카페에서 만난 서울책보고 박혜은 매니저가 처음 건넨 말이다. 서울책보고(이하 ‘책보고’)는 서울도서관에서 운영하는 공공헌책방으로, 이곳에서 그는 북 큐레이션, 콘텐츠 제작 및 전시를 기획하며 ‘덕업일치’를 이루고 있다. 2019년부터는 〈뉴스앤조이〉 서평 코너에 참여하고 있으며, 〈복음과상황〉 365호(2021년 4월)에도 에세이를 실어 눈 밝은 독자들에게 주목을 받았다.

이렇듯 ‘기획자’이자 ‘읽는 사람’, 그리고 ‘쓰는 사람’으로 자신을 소개할 법도 한데, 무슨 이유로 스스로를 이렇게 소개하는 것일까. 그가 밟아온 여정을 통해 호기심을 풀고 싶었다. 쌓아온 독서 세계 및 본지에 실린 글과 관련한 질문을 던졌다. 3시간 동안 이어진 이야기와 추후의 만남, 그리고 서면 인터뷰를 키워드로 정리했다.

ⓒ복음과상황 정민호<br>
ⓒ복음과상황 정민호

1. ‘실패한’ 복음주의 학생 운동가

박혜은 매니저는 대학을 졸업하고, 자기가 몸담았던 캠퍼스 선교단체에서 간사로 일했다. ‘운동’을 하고 싶었고, 일반 시민사회 영역도 가치가 있다고 봤으나 자신이 할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기독교 영성이 없는 운동은 힘이 없다고 느꼈어요. 한 사람이 달라지고 사회가 바뀌는 것이 쉽게 일어날 일은 아니잖아요. 제 안에 있는 변혁에 대한 비전에도 한계가 있고요. 무엇보다 신앙을 잃지 않으면서 인간과 사회에 애정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이곳에서 배웠어요.”

그만큼 기독교 영성에 방점을 둔 그는 재직 중에 ‘사역을 더 잘하고 싶어’ 기독교학 석사과정을 밟기도 했다. 그러나 “젊은 여성 간사들이 대개 그러하듯” 30대 초반에 사임하게 되었다. 신앙의 문제나 사람에 대한 실망 때문은 아니었다. 구조적 문제였다.

6년간 캠퍼스 간사로 해온 사역의 내용이나 질과 상관없이 이 바닥에서 선교단체 여성 사역자로서 그려낼 수 있는 그림이란 게 어쩌면 이렇게도 조악하고 그 폭은 좁아터졌던지. 착한, 때론 너무 착하기만 한 나의 대다수 여자 동료 간사들은 주로 공동체의 소모적인 일에 자신을 드려 헌신한다. 그렇게 젊음을 드리고 다음 단계를 고민해야 할 때가 되면 ‘결혼’이나 ‘사임’ 외에 다른 아름다운 대안은 없다.
― ‘하나님의 딸들에게 자유를 허하라’, 〈복음과상황〉 230호(2009년12월호) 서평

사람들과 치열하게 작은 공동체를 이루었던 경험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감사하는 마음도 있고, 이곳에서 만난 인연들도 소중하다. 하지만 당시 신학을 전공하지 않은 여성 사역자로서 복음주의권에서 ‘유능함’을 드러낼 기회는 많지 않았다. 사임할 당시 조직의 반응도 ‘공동체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보게 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이냐고 물어보는 사람도, 도움을 주는 이도 없었다.

선교단체 ‘바깥’은 달랐다. 간사직을 내려놓으면서 연구를 그만두려 했지만, 재능의 일면을 알아본 한 교수는 그를 독려했다. 늦은 나이에 사회에 나가면 무엇을 할 것인지 염려하며 구체적으로 도움을 주기도 했다. 그렇게 학교에 다니며 몇몇 기독교 매체에 글을 쓰고 학생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쳤다. 원생들과 함께 무크지를 만들기도 했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나서는 한 도서관에서 첫 조직 생활을 시작했다. 이곳에서는 북 큐레이션 업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독서 프로그램을 맡아 진행했다. 도서관장은 마음껏 책에 대한 지식을 펼칠 수 있도록 그에게 장을 마련해주었다.

도서관 계약직 근무가 종료되고, 책과 사람을 잇는 ‘공간’을 만들고 싶어 작은 책방을 시작하려 했다. 그러다 2019년 서울책보고 직원 모집 공고를 봤다. 30대 후반의 나이였고 서점 근무 경력이 없는 상태로 지원했지만, 합격했다. 이번에도 그를 알아봐주는 사람들은 선교단체 ‘바깥’에 있었다.

서울 송파구에 위치한 서울책보고. ⓒ복음과상황 정민호
서울 송파구에 위치한 서울책보고. ⓒ복음과상황 정민호

2. ‘지극히 평범한’ 직장인

11월 6일 서울책보고에서 박혜은 매니저를 다시 만났다. 방문한 당일에는 그가 기획한 전시들이 진행되고 있었다. 상설전 ‘현대사를 가로지르는 읽기의 역사’는 《대한민국 독서사》를 읽다가 아이디어를 얻었다. 1945년 해방 이후부터 2000년대까지 현대사를 대표하는 책을 비치했다. 전시와 연계한 저자 북 콘서트가 이루어지기도 했고, 현장에서 책의 역사에 관한 대학교 수업이 이루어지기도 해 뿌듯함을 느꼈다. 지금까지 기획한 전시 중에서는 2019년 가을에 진행했던 ‘근현대 여성 작가전’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한국 최초 여성 소설가 김명순부터 현시점에서 주목받고 있는 소설가 최은영까지 다뤄낸 이 전시에서, 오정희·박완서·박경리 등 시대별로 주목해야 할 작가들의 책을 소개했다.

최근에는 코로나 때문에 온라인에서 책과 관련한 콘텐츠를 만드는 일에 매진하고 있다. 책보고 공식 홈페이지와 SNS에 희귀한 책들을 소개하고, 어떤 책인지 알려주지 않고(블라인드) 책을 큐레이션해 보내주는 서비스를 진행한다. 그중 신청자가 태어난 연도에 나온 출간물을 블라인드로 보내주는 ‘생년문고’가 가장 인기가 많다. “당해 연도에 일어났던 일, 관련해서 묶인 책이 가진 의미를 쓴 글을 같이 보내드려요. 태어난 해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짚어보면서 스스로를 좀 더 잘 이해해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만들었죠.” 대부분 게시물은 올리자마자 완판되었고, 먼저 메시지를 보내오는 손님도 있었다.

이런 기획을 하려면 평소 들이는 노력이 있을 터. 박혜은 매니저는 먼저 ‘사람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으려 한다’고 말했다. “책을 받아볼 사람에게 관심이 없으면 사람들이 무슨 책을 읽든 관심이 있겠어요. 두 번째로는 책에 대한 감각을 잃지 않고, 다양한 사회 모습을 보려고 노력해요. 늘 한 시간 정도 일찍 출근해서 책 읽는 시간을 확보하고요.”

그러면서 그는 괜찮은 책들을 ‘평소에’ 선별하는 일도 중요한 작업으로 꼽았다. 카운터 바로 옆 서가에 그가 모아둔 책들이 꽂혀있었는데, 몇 권 꺼내 펼쳐 보여주기도 했다. 옛날 신문 스크랩, 말린 단풍잎, 수제 책갈피, 편지가 적힌 내지…. ‘1980년대 감성’이라 말하며 씩 웃는 그를 보고, 탐나는 책들이 들어오면 그 책은 어떻게 되는지(?) 물었다. “얼른 사죠. 여기서 쓴 돈이 수억은 될 거예요.” ‘읽는 사람’으로서 그가 구축해온 세계가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다.

ⓒ복음과상황 정민호<br>
ⓒ복음과상황 정민호

3. ‘읽는 사람’이자 ‘쓰는 사람’

“제가 제일 갈증이 있는 주제는 ‘최전선’의 이야기예요.” 즐겨 읽는 분야의 책이 무엇인지 묻자, 박혜은 매니저에게서 돌아온 대답이다. 여기서 ‘최전선’이란 어제가 아닌 ‘오늘’ 이야기, 즉 가장 최신의 담론을 날카롭게 해석하는 작업을 뜻한다. 그는 잡지, 미스터리, 한국여성문학이 이를 가장 잘 다뤄내기 때문에 즐겨 읽는다고 말하며, 책에 관한 이야기를 쏟아냈다.

ⓒ복음과상황 정민호<br>
ⓒ복음과상황 정민호

- 웹진을 제외한다면 잡지는 인쇄물이라는 ‘고전적’인 매체이기도 한데요.

방식은 그렇지만 가장 트렌디한 내용을 담고 있죠. 그때그때 중요한 주제를 선정하니까요. 잡스러운 잡지부터 새로운 생각과 운동력을 드러내는 잡지까지 성격도 다양하죠. 그 안에서도 비평이나 창작 등 여러 형태의 글이 있어요. 사실 제가 ‘잡지 덕후’예요. 라디오 PD였던 아버지 영향으로 어릴 적부터 미디어 전반을 접할 기회가 많았는데, 그중에서 잡지를 가장 좋아했어요. 미취학 아동일 때 〈새벗〉을 접했고, 고등학생 때는 〈인물과사상〉에 큰 영향을 받았죠. 대학생 때, 그리고 간사 일을 할 때는 〈복음과상황〉이 마중물이 되어주었고요.

지금은 어떤 잡지든 창간호는 사서 살펴보는 편이에요. 근래에 주목하고 있는 것은 동물해방운동 잡지 〈물결〉인데요. 이외에도 인문 잡지 〈한편〉과 독립출판 잡지도 종종 사서 읽어요. 문학잡지 〈악스트〉·〈릿터〉, 내러티브 매거진 〈에픽〉과 미스터리 잡지 〈미스테리아〉는 구독하고 있고요.

- 미스터리는 어떤 점에서 최전선, 즉 ‘오늘’의 이야기를 잘 다룬다고 생각하시나요.

미스터리는 ‘최전선’이라기보다는 최‘저’선의 이야기를 다룰 때가 많아요. ‘미스터리’ ‘괴담’이라 불리는 사건을 들여다보면, 한 사회에서 가장 비추어지지 않는 사람과 공간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죠.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도 신용불량자여서 존재가 지워진 사람이 등장하는 작품이고요.

애거사 크리스티의 책들과 체스터턴의 ‘브라운 신부’ 시리즈, 도로시 세이어즈의 ‘피터 윔지’ 시리즈를 읽으면서 미스터리에 빠지게 되었는데요. 마거릿 애트우드, 어슐러 르 귄 등 영미권 장르소설 작가들도 좋아해요. 

- 한국여성문학도 즐겨 읽으신다고요. 

꾸준히 관심을 두고 사 모으는 분야예요. 강화길, 손보미, 편혜영 작가가 보여주는 한국 여성들의 일상 스릴러도 애정하고요. 특히 최은영, 박서련, 김초엽, 장류진 같은 젊은 여성 작가들 작품을 챙겨 읽으려고 해요. 김혼비, 윤경희 등 여성 에세이스트들 책에도 요즘 주목하고 있고요. 김선우, 진은영, 김혜순, 김승희, 손미 등 여성 시인의 시집도 밤마다 읽죠.

- 이외에도 ‘지금’ 좋아하는 작가가 궁금한데요.

도리스 레싱,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리베카 솔닛 등을 좋아해요. 최근에는 샬럿 퍼킨스 길먼의 책도 괜찮더라고요. 한국에서는 소설가 공선옥, 여성학자 정희진, 문학평론가 오혜진의 글도 좋아합니다.

사실 ‘테이프 B-사이드’ 같은 측면의 독서 세계도 있어요. 중고등학교 때부터 읽은 SF 순정만화들이 제 세계관을 형성했죠. 신일숙의 《아르미안의 네 딸들》, 강경옥의 《별빛 속에》 같은 만화들이요. 말씀드리고 보니 정말 ‘잡독’이네요. 사람을 거의 안 만나고 책만 읽어야 이렇게 읽을 수 있다는 걸 밝힙니다.(웃음)

박혜은 매니저가 책보고에서 따로 모아둔 서적들. ⓒ복음과상황 정민호<br>
박혜은 매니저가 책보고에서 따로 모아둔 서적들. ⓒ복음과상황 정민호

- 그만큼 영향을 받은 책도 많을 것 같은데요.

성인이 된 후에는 기독교 공동체 영향을 받아 유진 피터슨, 헨리 나우웬을 읽으면서 영성의 기초가 만들어진 것 같아요. 기독교 신앙과 마르크스주의가 함께 갈 수 있다고 이야기했던 서준식 선생님 글에도 많은 영향을 받았죠. 고전으로는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과 에밀 졸라의 《제르미날》을 꼽고 싶어요. 각각 인간과 노동에 대해 고민하게 만든 책들이었어요. 여성과 영성, 노동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만난 시몬 베유는 동경의 대상이자 롤모델 같은 분이고요. 석사 논문으로 썼던 권정생 선생님 글도 뼛속에 새겨져 있어요. 아, 김훈을 좋아한 ‘흑역사’도 있네요.

- 김훈, 김수영 등 글 잘 쓰는 작가들이 성 인지 감수성 측면에서 오늘날 비판을 받고 있죠.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시대가 달라지면 작품을 재해석하거나 소비하지 말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는데요.

예전에 김훈의 《칼의 노래》를 좋아했어요. 문장이 정말 아름답다고 생각해서요. 그런데 지금은 읽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추천하지도 않아요. 좋은 작가와 책이 정말 많은데 시간을 들여 읽을 가치는 없다고 생각해서요. 사적으로는 그렇지만, 시대별 책을 큐레이션할 때 비껴갈 수 없는 작가들이 있죠. 그런 경우에는 다루더라도 지금의 관점에서 새롭게 읽어야 한다고 꼭 얘기해요. 예를 들어, 책보고 SNS에 김승옥의 〈무진기행〉을 소개할 때가 있었는데, 여성 캐릭터를 대하는 방식은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코멘트를 넣었어요.

- 그럼에도 유명 작품을 언젠가 읽어야 한다는 부담감을 느끼는 분들도 있을 것 같은데요. 

저는 좀 더 적극적인 방향으로 말하고 싶어요. 굳이 책을 찾아서 읽지 않아도 되는 세계가 있다고요. 책을 읽는 이유는 우리가 모르는 다른 세계를 알기 위해서가 아닌가요. 그래서 저는 충분히 많이 조명된 김수영 시를 읽지 말고 한국의 다양한 여성 시인이나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시를 읽어보라고 권하는 편이에요. 한국 최초 여성 소설가인 김명순을 다룬 《탄실》이라는 소설을 보면 당대 여성 예술가의 삶이 어땠는지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어요. 1920-1930년대에 가부장적 사회와 남자 소설가들이 어떻게 한 명의 여성 소설가를 깎아내리고 매장했는지 보여주거든요.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고요.

- 〈뉴스앤조이〉에 서평을 쓰셨던 책들도 페미니즘 관점에서 많이 읽으셨더라고요. 여러 책을 소개하셨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은 무엇인가요.

레이첼 헬드 에반스의 《다시, 성경으로》예요. 정말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느낀 책이었어요. ‘잘 써야지’ 혹은 ‘어떤 표현을 쓸까’ 하는 고민 없이 서평을 썼어요. 길지 않은 그 글을 독자들이 좋아해 주셨다는 것도 새로운 경험이었죠.

- 책보고 SNS에서 책을 소개했던 글 중에서는 《전태일 평전》이 눈에 띄더라고요.

작년 11월 전태일 열사 기일에 맞춰 소개했어요. 이 책은 책보고에 세 가지 버전이 있는데, 각각 편집이 달라요. 시대가 엄혹해서 작가 실명을 밝히지 않은 판본도 있고요. 처음 읽었을 때는 너무 충격적인 책이었어요. 당시 노동문제도 그랬지만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대하는 애정에 눈길이 갔다고 할까요. 거룩하다고 느껴져서요.

- 비슷한 결을 느끼신 다른 책도 있을까요.

권정생 선생님 작품이요. 유명해지신 분이었지만, 글에서든 삶에서든 처음부터 똑같은 삶을 사셨던 분이에요. 선생님의 글을 읽으면서 깨달은 게 있어요. 약자를 위한 삶이 아니라 ‘본인이 약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요.

이전까지 안정된 자리에 선 사람들이 ‘사회적 약자를 위해 관심을 갖자’ ‘약자를 위한 삶을 살 거야’라는 식의 다짐이 불편했거든요. 저 또한 가정이나 공부했던 환경에 있어서는 소수자가 아니었고요. 그런데 간사의 삶을 살고 사회에 늦게 나오기도 하면서, 어떻게 해도 주류가 될 수 없고 늘 사회적 약자 위치에 있게 되더라고요. 그게 너무 감사했어요. 나 자신이 약자가 되지 않으면 그런 말들이 너무 힘이 없다고 느껴서요. 이분 작품을 읽으면서 ‘약자를 위하는 게 아니라 계속 약자의 자리에 있어야겠다’ ‘어디에서도 권력을 쟁취하는 것을 목표로 삼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권정생 선생님은 누군가가 탁월해지는 게 아니라, 이계삼 선생님의 책 제목처럼 ‘고르게 가난한 사회’를 향한 성서적 비전을 품고 있는 분이었죠.

ⓒ복음과상황 정민호<br>
ⓒ복음과상황 정민호

4. 교회가 하고 싶어서

박혜은 매니저는 교회와 관련한 에세이를 본지 2021년 4월호에 기고해 SNS에서 화제가 되었다. 이후 몇몇 독자들에게 받은 메시지를 그에게 직접 전달하기도 했다. 그중 다음 대목에 많은 독자들이 공감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교회를 이탈할 충분한 이유를 차곡차곡 수집하고 있는 중에도, 교회를 떠나지 않은 것은 교회 바깥의 작용 때문이었다. 파라처치 즉 선교단체에서 배운 성경의 다른 해석 세계, 기독교 신앙의 매력, 선교단체 선배들이 삶으로 보여준 세상 속 그리스도인의 실제 모습, 기독 인문 아카데미에서 배운 기독인문교양 지식, 대학원에서 배운 여성신학 등. 기독교 신앙의 넓고 깊은 세계를 알게 해준 교회 바깥의 누군가들. 이들 때문에 난 무척이나 강하고 건강한 개인이 되었다. 일부(!) 제도권 교회의 뻘짓에도 교회를 쉽게 떠나지 않을 만큼 견고한 확신이 생겨난 것이다.
― ‘이것은 교회 이야기가 아니다’ 〈복음과상황〉 365호 커버스토리

- 교회를 떠나지 않는 또 다른 이유가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지금 속하신 교회에 오랫동안 다니셨다고 알고 있는데, 어떻게 정착하게 되었는지 말씀해주시면 실마리가 보일 것 같은데요.

제게는 예배의 자리가 굉장히 핵심적인 시간인데요. 지금 다니는 곳은 전통적 교회로, 예배가 굉장히 단순하면서 성경에 충실해요. 설교에서 한국 사회나 정부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거의 없어요. 구체적으로 ‘이렇게 해야 해’라는 설교를 좋아하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저는 큰 그림을 제시해주면 알아서 적용해나가는 훈련이 되어있어요. 그런 걸 선호하기도 해서 좋아요. 설교에 군더더기가 없고 많은 여지를 남겨주는데, 그 여지 속에서 삶의 영감을 많이 얻거든요. 공동체 문화나 깊은 나눔은, 조금 비관적일 수 있는데요. 현재로서는 제도권 교회에서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런 부분들은 직접 교회를 만들어야 가능해진다고 생각해서요.

- 책방에 이어, 교회라는 ‘공간’에 대한 꿈도 품고 계신 건데요. 어떤 교회를 꿈꾸고 있나요.

일단 성직자가 아닌 소수의 사람들이 모여야겠죠. 지금도 어딘가에서 그렇게 모이고 있잖아요. 동네에 있으면 저도 갈 것 같은데…. 주위를 둘러보면, 교회와 신앙에 대해 조금 진지하다 싶은 분들은 ‘경계’에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잠재적 공동체원이 많더라고요. 조금 도발적으로 들릴 수도 있는데, 언젠가 교회를 하고 싶어요. 제가 바로 그 경계인이니까요. 그런 ‘어중이떠중이’들과 함께하고 싶고요.

- 교회를 직접 만들고 싶다고 생각한 구체적 계기가 있나요.

이전 교회에서 소그룹 목자가 사라졌을 때 느낀 게 있어요. 소그룹 구성원들이 거의 동등한 입장에서 수평적으로 드리는 예배가 가능하다는 사실이요. 단 6개월이었지만, 모두가 이전보다 훨씬 좋았다고 얘기했어요. 소극적인 사람이든 적극적인 사람이든 각자 자기 역할을 찾고 더 참여적인 모습이 되었죠. 누구 한 명의 카리스마나 인도자의 존재가 중요한 게 아니라고 느꼈어요. 조금 어수선하고 탁월하지 못해도, 모두가 참여하는 구조를 교회에 가져가야 한다고 생각했고요. 신앙의 마음은 천차만별이지만 그래도 한마음이면 예배가 되었거든요. 간사일 때도 많이 경험했던 부분인데, 사람은 공동체가 편하고 자기 자리가 있다고 느낄 때 적극적인 참여를 해요.

- 대안적 교회들이 처음의 동력을 잃는 경우도 많은데요.

저도 체계가 없으니까 결과는 엉망진창이지 않을까 생각해요. 기반이 약해서 느슨함을 넘어 헐렁하다 보니 언제든 해체될 수도 있고요. 다년간의 공동체 생활에서 배웠듯, 사람들은 늘 힘들고, 일정 기간 이후가 되면 섬김을 받는 몫보다 섬겨야 하는 몫이 많아지잖아요. 역시나 그러겠죠. 냉소는 아니고 약간 해탈한 것도 같아요.(웃음) 어쨌든 교회를 만드는 일은 아직 ‘꿈’이에요. 지금은 제가 매진해야 할 것들에 중심을 두고 있어서요.

- 어떤 일에 매진하고 계신가요.

내년에는 책보고에서 해야 하는 업무가 지금과 조금 달라져요. 공간 운영에서 책 콘텐츠 기획 쪽에 더 집중하는 자리로 가게 됐거든요. 헌책을 ‘오늘’의 주제와 연결하여 콘텐츠 및 전시를 기획하는 업무에 더 집중해서 제대로 해내고 싶어요. 다른 특별한 계획은 현재로서는 없지만…. 어쨌든 책의 길을 가려 해요. 그 길이 어디로 닿든지 간에.

ⓒ복음과상황 정민호<br>
ⓒ복음과상황 정민호

에필로그

미처 녹여내지 못한 이야기가 있다. 그는 간사직을 사임하고 나서 여성인력개발센터에서 경력 단절 여성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만드는 일을 잠깐 맡기도 했다. 자신처럼 사임한 다른 여성 간사 후배들 삶에 관심을 가지면서 선택한 일이었고, 이를 위해 상담사 자격증도 땄었다. 

2019년부터는 고립 위기에 놓인 청년들과 함께하는 비영리단체 리커버리센터의 청년들과 글쓰기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긴 글을 써오는 이들도 있고, 글쓰기를 어려워하는 친구들도 있지만 각자 깊은 자기 얘기를 꺼낸다. “매번 놀라요. 그것만 읽다가 시간이 다 가고요. 내가 뭐라고 이렇게 진실하게 글을 써주나 싶어 고맙죠. 뭔가를 가르친다기보다 친구로 느끼고 있어요. 청년들이 자기를 발견하고 건강하게 세상에 안착하려고 애쓰는 모습이 얼마나 애틋해요. 제가 그 마음을 너무 잘 알고요.”

그 말을 들으면서 스스로를 돌아봤다. 평소 나처럼 텍스트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놓치기 쉬운 게 있다고 느껴왔기 때문이다. 바로 ‘사람’에게 애정을 두고 이를 표현하는 일.

진행 김다혜 기자 daaekim@gosco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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