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1호 장애와 신앙의 교차로에서]
시내버스를 마지막으로 탔던 날은 5년 전 주일이었다. 3년간의 가나안 성도 생활을 청산하고자 교회를 알아보고 다녔다. 나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합동·고신, 기독교한국침례회 소속 교회에 등록한 전력이 있었다. 이명(移名) 절차는 밟지 않았다. 말하자면, 이중교적을 넘어 사중교적이었다. 교단별 차이를 별로 실감하지는 못했는데, 죄다 엇비슷하게 보수적이었던 탓이다. 이사·진학 등으로 옮긴 경우가 대부분이고, 확실한 의지를 갖고 바꾼 적은 두어 번이었던가. 대한예수교장로회 대신, 한국기독교장로회, 기독교대한감리회 소속 교회를 등록 없이 다니기도 했다. 7-8년 전만 해도 교회를 판단하는 주된 근거가 ‘설교’였다. 전례에 대해 잘 몰랐다. 예배 순서가 ‘묵찬기찬설기찬’(묵도·찬송·기도·찬송·설교·기도·찬송)1)으로 통일된 교회들만 제대로 경험해보았다.
세계 기독교 통계로는 한 줌도 안 되는 장로교 일색2)에, 간소화된 예배 형식을 취하는 교회가 대부분인 한국 개신교 풍토를 고려하면 충분히 그럼직한 상황이었다. 여러 번 숙고한 끝에 결정을 내렸다. 전례적 예배를 하는 교회에 방문하기로. 전례적 예배 경험이라면, 딱 한 번 있었다. 이때로부터 몇 년 전, 개신교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가톨릭 미사에 참여했다. 하필 ‘성령운동’에 몰입하던 성당이었다. 한국 개신교에서 통성기도할 때 붙이던 ‘주여 삼창’ 구호를 차용한 ‘엄마 삼창’을 하며 성모마리아를 부르는 장면은 적잖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번에는 그때처럼 예상 밖의 일이 벌어져도 도망치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그렇게 ‘고(高)교회’적 특징을 따르는 한 성공회 교회의 감사성찬례에 참석하게 되었다.
예배 후의 몸 상태 때문에 경황이 없어 그 교회 감사성찬례 순서가 어땠는지는 선명하지 않다. 인도자가 이끄는 대로 몇 차례 일어났다가 앉았고, 의자 무릎받침대에 무릎 꿇는 등 여러 행동을 반복했다. ‘잘못 왔구나’ 싶었다. 근방을 헤매어 오후 예배에 참석한 상황이었다. 오전보다 축약된 형태로 전례가 진행됐을 텐데도 힘들었다. 어지럼을 느꼈다. 하반신 근육들이 뜨거워졌고, 천천히 예배당을 나왔다. 모두가 같은 동작을 하는 분위기 속에서 나만 안 할 순 없었다. 몇 차례 망설였지만, 하란 대로 따랐다. 미련하게. 장딴지와 허벅지 근육통이 이틀 정도 이어졌다. 다만, 약간 놀란 점은 설교단에 선 신부가 말의 첫음절을 종종 반복하는 경증 언어장애인이었다는 사실이다. 설교할 때는 증상 없이 대단히 유창했다. 메모를 잃어버린 지금으로서는, 깊이 있는 메시지를 들었다는 인상 정도만 남아있다.
돌아가는 길. 몸 상태에도 불구하고, 택시 타기에 애매한 위치라고 생각했다. 근처 정류장에서 시내버스를 타면 한 번에 갈 수 있었다. 고민하다 버스를 기다리기로 했고, 결국 이 선택은 패착이 되었다. 저상버스는 오지 않았다. 계속 고상버스만 도착했다. 그날따라 두 개의 계단이 유독 높아 보였지만, 더 기다릴 수 없었다. 다리에 힘이 딱 들어가지 않으니 문의 양 손잡이에 매달렸다가 힘껏 탔다. 계단 위에 다리를 얹는 동작을 몇 번이나 반복하여 버스에 오를 수 있었다. 이렇게 낑낑대며 겨우겨우 올라가는 꼴이라니…. 마음은 울적했다. 팔은 얼얼했고, 살짝 멍든 것처럼 아팠다. 급작스럽게 힘을 쓰니 가슴 쪽 근육에도 통증이 일었다. 좌석을 찾아 이동하는데, 죽을 맛이었다.
한 발 한 발 가볍게 계단을 오르고, 아무렇지 않게 대중교통을 이용하던 시절이 언제였던가. 그간 버스를 탈 때 줄이 길면 허겁지겁 올라가다 넘어지기도 했으며, 선 채로 손잡이를 잡고 가다가 균형을 잃어 휘청이던 아찔한 순간도 있었다. 출발은 또 어찌나 빠른지. 탈 때마다 빈자리와 동선이 안전한지부터 확인하기 바빴다. 나는 이날 시내버스에서 내리면서 한 차례 고꾸라졌고, 덜덜 떨리는 몸을 힘겹게 일으키며 신음했다. 그러면서 이제 더는 미룰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내버스를 이용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래도 모든 버스를 안 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후 피치 못하게 고속버스나 공항을 오가는 저상버스를 이용한 적은 몇 번 있다.
‘장애’의 감각
지하철은 조금 낫지만, 거의 이용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많을 시간을 피하는 것은 당연하고, 20분 안쪽의 가까운 거리는 서서 탄다. 기다란 봉을 잡을 수 있는 양쪽 끝자리가 아니면 좌석에서 일어나기 힘든 탓이다. 자리마다 봉이나 손잡이가 부착된 열차라면 또 모르겠다. 잡을 게 없으면? 내릴 때 좌석 뒤 차창 쪽을 손으로 힘껏 밀어 반동으로 일어나야 한다. 한 번에 못 일어나면 그대로 주저앉았다가 다시. 비교적 최근, 몇 개월 만에 지하철을 탔던 날의 일이다. 그날따라 비어있는 중간 자리에 앉게 되었다. 기분이 이상하다 싶었는데, 내릴 역이 가까워지고서야 깨달았다. ‘지하철을 잘 안 탔던 이유를 왜 깜박했을까. 망했다. 내릴 때 옆 사람에게 도와달라고 할까?’
앉은 자리에서 그대로 일어서기 힘든 데는 여러 이유가 있다. 일단 허벅지를 비롯한 다리 근육과 함께 둔부를 펼치게 하는 골반 주위 근육이 약화된 탓이다. 이와 관련하여 현재 내 걸음을 유심히 보면, 배를 약간 앞으로 내밀고 뒤뚱거리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오르막일수록 더 그렇고, 병이 진행될수록 오리걸음에 가까워진다. 골반이 앞으로 나오고 발바닥이 안쪽으로 휘어지며 아킬레스건은 오그라들어 점차 발끝으로 걷게 된다. 단단히 짚을 벽이나 난간 같은 게 없으면 바닥에서 혼자 일어서기도 힘들다. 그럴 때는 손으로 허벅지를 누르고 기는 듯한 자세로 끙끙거리며 천천히 일어나야 한다.3) 컨디션이 안 좋거나 근육을 많이 사용한 상태라면 더더욱 힘겹다. 난처함과 무력함이 동시에 찾아든다. 내 몸과 소모전을 벌이는 순간이다. 빗길에 미끄러졌다가 힘이 없어 그 자리에 한참 주저앉아있던 때가 떠오른다. 허망함과 무력감이 절로 밀려들었었다.
그날 지하철에는 사람이 많았다. 퇴근 시간대가 가까이 왔고, 마음은 더 복잡해졌다. ‘그냥 종점까지 갈까?’ 고민하다 도착역에 내리기로 했다. 좌석 뒤쪽을 힘껏 밀었다. 세 차례 시도 끝에 겨우 일어섰다. “죄송합니다.” 가방으로 옆 사람을 슬쩍 치고, 앞사람과도 살짝 부딪쳤다. 시선들이 느껴졌다. 교통약자석에 앉으면 안 되냐고? 남의 사정 모르는 애꿎은 소리들이 번거롭다. 복지카드를 가슴에 붙이고 다녀야 할까 보다. 지팡이로 다닐 수도 있을 텐데, 같은 장애를 가진 지인의 말을 들으면 다시 망설이고 만다. “낫고 싶지 않으세요? 좋은 데 소개시켜 줄게요” 다짜고짜 참견하는 이들도 있고, 그냥 무시하고 갔더니 누군가 그랬다고 한다. “왜 시도해보지도 않고 포기하세요!” 휠체어 이용자는 다른 무례한 일도 겪는다. 뜬금없이 1~2천 원 돈을 쥐여주거나, 삶을 응원한다면서 멋대로 감동받는 이들도 있단다.
나 같은 경우, 지하철을 타고 약속 장소로 가려면 앞뒤로 꽤 긴 시간을 확보해둬야 한다.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 위치 찾고, 내려가서 또 멀리 걷고…. 버스도 못 타겠고, 번잡스럽고 힘들어 몇 년 전부터 ‘택시족’으로 살고 있다. 한 달 택시비로 수십만 원이 깨진다. 그래도 계산해보면 자가용 구입 및 유지보다 이쪽이 싸게 먹힌다. 차비를 일부 지원받으면서 그나마 형편이 나아졌다. 가까운 거리, 먼 거리 가리지 않고 택시를 타는 모습에 놀라는 이도 있다. 어쩌겠는가. 한 번 이동하는 데 택시비가 2만 원은 나와야 ‘비싸다’ 소리가 나온다. 그럴 정도로 이 생활에 적응하게 되었다. 내리거나 탑승할 때, 어느 타이밍에 차문의 어디를 잡으면 덜 넘어진다든지 하는 나만의 방식이 있다.
택시를 타고 다니다 보니, 방을 구하는 데도 변수가 생겼다. 위치에 따라 교통비 차이가 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직장과 한 정거장 차이로 애매한 위치에 잡을 바에야, 월세 10만 원 더 주고 직장 바로 근처에 방을 얻는 쪽이 내게 더 좋은 선택이었다. 올해 초 직장에서 걸어 다닐 수 있는 위치에 방을 구했는데, 매번 몸 상태를 설명하며 엘리베이터와 여러 조건을 갖춘 집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엘리베이터가 있어도 심한 오르막이라 헛걸음하기도 하고, 비장애인 공인중개사와의 거리 감각이 맞지 않아 서로 미안한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 방을 구할 때 적당하게 타협했다가 피를 본 경험이 있어서, 구하는 횟수가 늘어갈 때마다 마음이 어려워진다. 공간과 관련한 일들에 있어서는 변수를 고려하는 일이 자연스러워졌다.
‘접근할 수 있는 하나님’
생활 속 불편에 대한 어떤 목록을 작성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지리학에서는 ‘물질적 기반’이자 ‘가장 친밀한 지리’로서 신체를 ‘공간’으로 인식한다는데, 신체와 공간의 연결과 점유, 단절과 배제 등이 빚어내는 환경과의 연쇄적 상호작용을 어설프게나마 내 위치에서 그려보았다. 이렇듯 ‘일상의 사회공간적 환경’은 누군가에게 경제·사회·정치 영역에서 주변화·장애화되는 경험을 선사하곤 한다.4) 말하자면, ‘접근권’ ‘이동권’ 이야기다. 두 개념은 사실상 혼재돼서 쓰인다. ‘접근권’은 ‘정보’ ‘공공시설’ ‘교통수단’과 관련한 권리가 대표적이며, ‘이동권’은 자유로운 이동을 통한 ‘인간다운 생활’ 보장과 관련이 깊다. 고로 ‘접근권’ ‘이동권’은 생존과 직결된다. 물리적·사회적·경제적·문화적 차원에서의 활동이 모두 이를 통해 이뤄지기 때문이다.5)
쉽게 말해 자리 하나 내주고, 길 하나 터주는 것. 이와 관련하여 거리에 깔린 ‘그놈의 턱’이 거대한 벽과 다르지 않아서 연속된 절망 앞에 1984년 ‘턱을 없애달라’ 유서를 남기고 목숨을 끊은 장애인 김순석에 관한 이야기나 저상버스 보급과 지하철 엘리베이터 설치로 가는 ‘장애인 운동’ 기폭제로 작용한 2001년 오이도역 수직형 리프트 추락 사고에 얽힌 행간이 떠올라 가슴이 턱 막히기도 한다. 이렇게 보면, 경사로 하나 놓고 엘리베이터 하나 설치하는 일이 ‘생명’과 직결되는 문제인 셈이다. 나에게는 사소한 불편인 것이 누군가에게는 목숨값이 되기도 한다. 김현경은 《사람, 장소, 환대》(문학과지성사)에서 누군가에게 자리를 마련해주는 것은 그 사람의 성원권을 인정하는 일과 다름없다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질문을 하나 던진다면. 만약 당신의 교회에 전맹 시각장애인이 온다면 어떡하겠는가? 혹은 보청 지원이 필요한 청각장애인이 온다면?
이런 질문 자체가 난감하고 당혹스럽다면, 교회 내 장애인들을 위한 ‘자리’가 있는지 진지하게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그들이 오롯한 성원권을 인정받는 존재들인지 확인해보기 위해서 말이다. 당연한 이야기로, 교회에도 ‘접근권’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데이비드 앤더슨은 《신학적 관점에서 본 장애인 이해》(밀알서원)에서 장애인과 장애인 가족을 교회 공동체에서 분리하게 만드는 장애물로 네 가지를 언급하는데, ‘접근권’을 풀어서 표현한 것과 다르지 않다(55-58쪽). ‘건물과 의사소통 장애물들’ ‘태도적 장애물들’ ‘신학적 장애물들’ ‘상호 간 정서적 장애물들’이다. 김홍덕은 《장애신학》(대장간)에서 이렇게 말한다.
예수님께서 사회로부터 버림을 받은 세리, 간음한 여자, 문둥병자 등을 찾아가시며 그들을 치유해 주심으로 그동안 사회적으로 종교적으로 접근이 금지되었던 이들에게 예수님 자신을 ‘접근할 수 있는 하나님’(Accessible God)으로 친히 내어 주신 것이다. … 오늘날 교회가 장애인의 접근을 막는 장벽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잘못된 신학의 적용, 기복적 축복관, 교회성장이론과 경제적 득실에 따른 계산, 건축구조 양식, 건강한 자를 표준으로 한 프로그램 운영, 리더십 독점, 장애인에 대한 문화적 거부감 등을 들 수 있다. (429쪽)
사실 한국 개신교는 여러모로 장애인 친화적이지 않은 듯하다. 자료를 찾아보다가 그 점을 조금 더 직시할 수 있었다. 그중 《한국 교회 건축에는 공공성이 있는가》(동연, 2017)에서 김정두가 쓴 ‘교회 건축의 포용성과 장애인을 위한 편의시설에 관한 연구’는 ‘장애인을 위한 교회 건축’과 관련한 신학적 근거부터 나름의 대안과 실례까지 종합적으로 제시한다.6) 그가 연구사를 검토하면서 선행 연구로 언급하는 논문은 단 4건이었는데, 신학자·목회자의 연구는 전무했고, 가장 최근도 2012년 논문이었다. 교회 내 장애인 접근권에 대한 무관심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종희가 쓴 〈장애인 및 노약자를 고려한 교회 본당 시설의 환경 개선 방안〉을 보면, ‘서울 및 수도원에 위치하고 단일건물을 보유하고 있으며 성도 수가 500명 이상인 개신교회 38곳’을 연구 대상으로 삼았는데, ‘(장애인을 위해서) 시설을 개선할 의사가 있느냐’는 물음에 ‘그렇다’고 답한 목회자는 18.5%(38곳 중 7곳)였다.7)
유니버설 디자인과 함께하는 예배
교회가 ‘접근권’ 차원에서 힘을 쏟는다면, 배리어 프리, 유니버설 디자인을 지향하는 것이 기본 방향이겠다. 톰 셰익스피어는 《장애학의 쟁점》(학지사)에서 ‘환경적 장벽’에 초점을 맞춘다면 유니버설 디자인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고 이야기한다. 첫 번째로는 접근 가능한 환경을 조성하여 사회적 배제를 줄어들게 한다는 점, 두 번째로는 그 자체로 장애인이 어떤 어려움을 겪는지를 보여주는 강력한 상징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유니버설 디자인, 배리어 프리가 만능은 아니다. 톰 셰익스피어는 “모든 잠재적 사용자에게 접근 가능한 하나의 환경을 조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87쪽)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고 언급한다.
인도의 턱을 없애면 휠체어 이용자에게는 이동의 자유가 주어지지만 시각장애인이 차도와 인도를 구분하기 어렵게 만들 수 있으며, 시각장애인을 안내하는 점자블록은 역으로 휠체어 이용자 혹은 나와 같이 안정적인 보행이 어려운 이들에게 불편을 끼칠 수 있다. 지체장애인·시각장애인 중 경사로보다 계단을 선호하는 이들도 많다(87-88쪽). 중복장애인의 경우에는 대처가 또 달라야 하겠다. 접근권에 있어서 물리적 설계에만 치중했을 때 실재하는 장애 억압이 축소된 채로 인식될 위험도 상존한다.8)
그렇지만 이 모든 사안을 입체적으로 고려하는 ‘장애물 없는 건축’은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건축가는 출입문의 최소 너비 등을 만족시키는 것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사용자를 위한, 모든 생활 상황과 발전단계에 적합한 생활공간 창조라는 건축문화를 요구하고 있다.”(필립 모이저, 《장애물 없는 건축 시공과 디자인 매뉴얼》(한국환경건축연구원), 13쪽) 시각장애인을 위한 단순하고 명확한 공간 배치, 휠체어 이용자가 움직이기에 충분한 회전 공간, 척수장애인의 시야각을 염두에 둔 안내표지 등을 비롯하여 어린이·임산부·노인에게까지 적용될 법한 세부 규정들을 보면, ‘인간을 위한 건축’이 무엇인지 그 ‘감수성’에 대해 잠잠히 생각해보게 된다. 장애인이라는 존재가 하나로 뭉뚱그려지지 않고, 낱낱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음도 깨닫는다. 서두에 언급한 내 장애 경험이 나의 것인 것처럼.
‘접근권’에 관한 문제로 유니버설 디자인을 언급하다 보니, 충분한 비용을 들여 설비를 갖출 수 있는 교회라야 장애인과 함께할 수 있는 것처럼 비춰질지 모르겠다. 오히려 작은 교회가 각각의 사람에게 맞춤한 ‘예배 큐레이팅’에 더욱 용이한 측면도 있다. 형식과 순서에 얽매이지 않고 그 자리에서 함께하는 ‘사람’을 본다면, 새로운 가능성이 생기니까.
물론 장애인들과 함께하면 기존의 예배 풍경이 도전받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풍경 속에 놓일 때 우리는 비로소 ‘교회가 어떤 공간인가’ ‘예배는 무엇인가’ 하는 본질적 물음과 마주하게 된다. 코로나가 예배의 자리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교회의 공공성을 일깨우면서 예배 풍경을 바꿔놓은 것처럼. 김재우는 《기꺼이 불편한 예배》(이레서원)에서 누군가와 함께 예배하는 것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함께 예배한다는 것은 새롭게 예배해야 함을 의미한다. 내가 있는 곳이 아니라 그들이 있는 곳에서 예배할 수 있어야 하고, 내 방식만 고집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예배할 수 있는 유연성을 갖추어야 한다. 함께 예배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복잡한 많은 문제를 야기한다. 하지만 우리에게 함께 예배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있을까? (69-70쪽)
‘예배는 세상을 상상하는 일’
일본 정신장애인 공동 주거 ‘베델의 집’에서 자립 생활을 하는 이들의 유쾌한 이야기를 담은 《지금 이대로도 괜찮아》(삼인)에는 어느 교회에 대한 에피소드(57-69쪽)가 나온다. 그 교회에는 정신장애인, 알코올중독자, 깨어진 가정의 아이들이 자꾸만 찾아왔다. 내버려두자, 조용했던 교회는 떠들썩한 공간이 되고 말았다. 예배가 한창일 때도 맘대로 들락거리고 중얼거리는 사람들 투성이였다. 못마땅하게 여긴 교인들 일부는 교회를 떠났다. 그렇게 ‘고민 많은 교회’가 되고서야 목사는 생각했다. “아아, 교회다워졌구나”(64쪽)라고. “교회는 그들이 있을 수 있는 물리적인 장소이면서 그들에게 계속해서 “여기에 있어도 된다”는 메시지를 보내는 안온한 장소였다.”(67쪽)
내가 지금 다니는 교회에 정착하게 된 계기가 떠오른다. 이전 교회들은 하나같이 대예배 시간에 어린이들이 뛰어다니거나 장난치거나 소리를 내면 제지하기 바빴다. 가만있지 않으면 내쫓았다. 지금 다니는 교회는 어린이들을 제압하려 들지 않았다. 그런 분위기가 좋았다. 조금 시끄럽다고 해서 예배가 중단된다거나 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그 교회 예배의 자연스러운 풍경 중 하나였다. 어린이들이 존재 자체로 존중받는 공간처럼 보였다. 물론 단일한 정답은 아닐 것이다. 다만, 마태복음 19장이 떠올랐다. 예수께서 말씀을 전하고 있는데 사람들이 예수께 어린이들을 데려와 기도해달라고 요청하는 장면이다. 제자들은 꾸짖었지만,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린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막지 말아라. 하늘 나라는 이런 어린이들의 것이다.”(마 19:14)
마가복음 2장에도 설교를 방해받는 혼란스러운 상황 자체가 ‘설교’가 되는 뜻깊은 대목이 나온다. 막 2:1-12의 한 중풍병 환자에 대한 내용이다.9) 사람이 많아 예수께 갈 수 없으니 별 수 없이 지붕을 걷어내 중풍병자가 누운 자리를 바로 앞에 내린 네 사람의 믿음을 예수께서는 귀하게 보셨고, 그 환자를 치유하셨다. 독일의 바이올린 장인 마틴 슐레스케는 묵상 에세이집 《울림》(니케북스, 128쪽)에서 “일상 중에 방해를 받은 예수의 모습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이야기들” 중 하나로 이 본문을 소개한다. 예수께서는 지붕이 뜯기고 설교가 중단되는 것을 기꺼이 허락함으로써,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하나님 나라 복음’10)이 무엇인지를 몸소 보여주셨다. 마틴 슐레스케 말마따나 진짜 설교는 ‘혼란과 방해’를 통해, 그것이 불러온 ‘치유’를 통해 나타났다.
예배는 세상을 상상하는 일입니다. 그렇기에 예배 큐레이션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어떤 세상을 상상하는지, 어떤 세상이 만들어졌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조니 베이커, 《내일의 예배》 (브랜든선교연구소), 24쪽)
1) 이와 같은 한국교회 예배 순서에 관한 고찰은 최주훈의 《예배란 무엇인가》(비아토르) 180-181쪽을 참고하라.
2) 기독교윤리실천운동에서 펴내는 웹진 〈좋은나무〉에 실린 옥성득의 ‘통계로 보는 한국 장로교회’(2019년 5월 27일)를 보면, 세계 장로교인 수는 1,200만으로 전 세계 기독교인 수인 24-25억 명의 0.5% 수준이다. 이 글은 장로교인이 한국에 550만, 북미에 200만, 유럽과 오세아니아에 100만, 아프리카에 300만 정도 있다고 본다.
3) 이 증상은 처음 기술한 의사 이름을 담아, 가우어 징후(Gower’s sign)라고 부른다. (알란 E. H. 에머리, 《근이영양증》(백의) 4장 ‘근이영양증의 여러 유형’ 참조.)
4) 질 밸런타인, 박경환 옮김, 《공간에 비친 사회, 사회를 읽는 공간 – 사회지리학으로의 초대》(한울아카데미) 2장 ‘신체’를 참조하라.
5) 박창석, 〈기본권으로서의 장애인의 이동권〉, 《법학논총 Vol. 38 No. 4》(2021).
6) 규율서(The Book of Discipline)에 ‘장애인들의 권리’ 조항을 넣은 미국연합감리교회 정책 사례가 눈여겨볼 만하다. ‘공간의 접근성’을 높이면 지원금을 주고, ‘교회 접근성 평가(검사)’도 1년 1회씩 진행한다. 교단으로서 적절한 대응이 아닐까 싶다. ‘교회 건축의 포용성’에 대한 좋은 실례로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거룩한빛광성교회 예배당을 제시한다.
7) 이종희, 〈장애인 및 노약자를 고려한 교회 본당 시설의 환경 개선 방안〉, 《한국디자인문화학회지 Vol. 15 No. 1》(2009).
8) 브렌던 글리슨, 최병두·임석회·이영아 옮김, 《장애의 지리학》(그린비), 336-340쪽.
9) “그 때에 한 중풍병 환자를 네 사람이 데리고 왔다. 무리 때문에 예수께로 데리고 갈 수 없어서, 예수가 계신 곳 위의 지붕을 걷어내고, 구멍을 뚫어서, 중풍병 환자가 누워 있는 자리를 달아 내렸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 환자에게 “이 사람아! 네 죄가 용서받았다” 하고 말씀하셨다.”(막 2:3-5)
10) 존 바클레이 외, 《IVP 성경비평주석 신약》(IVP), 241쪽에 따르면, 막 2:2에서 전한 예수의 ‘말씀’은 1:14-15에서 언급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선포를 지칭한다.
강동석
본지 기자. 베커근이영양증을 진단받은 경증장애인이다. 학부에서 국어국문학과 문예창작학을 공부했으며, 기독교 독립 언론 〈뉴스앤조이〉에서 편집기자로 일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