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3호 현대신학의 모험]
길게 보면 성서를 바탕으로 정신적 내면성의 깊이를 더욱 깊이 살피는 일, 기술사회에서 인간의 생존 문제에 정면으로 대응하는 일, 성서적 개인도덕뿐 아니라 비신화화된 역사의 목표 및 사회윤리를 이와 매개하여 세계 평화를 확립하는 데 기여하는 일, 이 세 가지 요소를 만족시키는 신학만이, 그리고 ‘기술사회에서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색해낼 수 있는 신학만이 현대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모리타 유자부로, ‘현대신학의 동향’, 《현대신학은 어디로 가는가》 중에서)
그동안 지난 100년의 현대신학을 ‘해방신학’ ‘과학기술신학’ 계통으로 구분하고, 그에 따라 동향을 분석하고자 그려본 ‘새로운 항해도’를 바탕으로 향방을 전망해보았다. 하지만 다가올 현대신학의 내용들을 제시하는 일은 연재 범위를 넘어선다. 본 연재 마지막 섹션인 ‘현대신학의 향방과 과제’는 가까운 미래의 현대신학을 구축하기 위해 유의해야 할 논점을 정리하고 앞으로의 논의를 위한 길을 마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따라서 현대신학의 향방을 논하기 위해 ①보편성과 특수성 ②이론과 실천 ③주체와 장(場)을 세 가지 축으로 설정하고 각 주제를 세 차례에 걸쳐 다뤄볼까 한다. 이번 글에서는 그리스도교 사상의 보편성과 특수성, 특히 교파 문제 혹은 에큐메니즘을 살펴보려 한다.
특수성과 보편성의 순환구조
그리스도교는 초기 단계에 바울의 이방인 전도(바울주의)를 기본 방침으로 채택하여 고대 지중해 세계로 확장해가는 과정에서 고전적 정통 교의, 즉 ‘삼위일체론’과 ‘그리스도 양성론’을 구축했다. 이것이 현재 세계에 종교로서 존재하는 그리스도교의 출발점이며, 여기서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보편성에 대한 신앙이 생겨난다. 이후 보편성에 관한 신념은 19세기 서구 그리스도교의 세계 전도활동에서 볼 수 있듯이, 세계 그리스도교화 추진으로 이어졌으며, 여기에는 서구 계몽주의와 열강의 식민주의(Colonialism)가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이러한 근대 서구 그리스도교 선교에 대한 반성은 현대 에큐메니즘 선교론을 낳게 된다. 1910년 에든버러 세계 선교 대회에 담긴 의의는 여기서 인정할 수 있다. 서구적 근대에 대한 재고와 반성으로 현대사상계에서도 1980년대 이후 포스트모던이라는 개념하에 다양한 논의가 전개되었다. 이러한 사상적 상황에서 문제시되는 점은 그리스도교가 믿는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보편성이란 무엇인가, 세계 모든 종교가 단일한 그리스도교로 돌아가는 것이 보편 종교로서 그리스도교의 목표인가, 혹은 계몽주의적 이성의 보편성(거대담론 혹은 거대서사)과 함께 그리스도교의 보편성도 그저 한 시대를 풍미하고 지나가는 것인가 하는 질문 등이다. 현대신학의 향방을 논의할 때 우선적으로 재고할 것은, 그리스도교의 보편성을 둘러싼 일련의 문제들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보편성과 특수성의 대립도식’도 수정해야 한다는 점이다. 즉 거대담론에 대한 포스트모던(미시담론 혹은 미시서사)이라는 대립도식은 과연 자명한가 하는 물음이며, 이에 대한 재검토를 통해 현대 에큐메니즘의 의의가 더욱 명확해질 것이다. 이를 위해 특수성과 보편성을 둘러싼 순환구조에 주목하면서 다음 논의로 넘어가보자.
대표적으로 민주주의 이념을 실례로 들 수 있겠다. 민주주의 이념이 지닌 보편성은 고대 그리스라는 특수성 가운데서 탄생했다. 그러한 특수성이 보편성을 지시하고 이끌어가면서 어느새 특수성의 의미는 그것이 지시하는 보편성을 통해 확인되는 순환구조가 형성된다. 이러한 논리 구조에서 특수와 보편은 언뜻 보기에 서로 대립하는 듯하지만 양자는 생성 과정에서 순환하고 있으며, 이는 현대신학과 현대사상 양측 논의에서도 잘 확인된다. 예를 들어, 현대 포스트모던의 문제 상황에서 그리스도교 자연신학 쇄신을 논하는 가운데, 알리스터 맥그래스(Alister E. McGrath)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물론 맥그래스의 아래 논의는 ‘합리성’에 관한 내용이기는 하다.)
자연신학이 어떻게 복권되고 재생되는가. … 자연신학은 (계몽주의에 의한 것과 같은) 이성 혹은 상식의, 이른바 보편적이고 자율적인 진리보다는 그리스도교 전통의 특수한 신학적 견해에 의해 형성되고 특징지어진다. (맥그래스, 《‘자연’을 신학하다》)
맥그래스가 지향하는 쇄신된 자연신학의 합리성은 계몽주의적 전통초월적 합리성이 아니라 전통특수적 합리성이다. 그것은 ‘신 존재 증명’으로 드러나지 않고 과학 지식이나 일상 경험과 그리스도교적 신 이해가 공명하는 가운데 나타난다. 이러한 주장은 역사적 현실에서 그리스도교의 특수성과 그리스도교가 지시하는 보편성을 연관짓는 데 유의해야 할 논점이다. 현대사상계에서는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이 “뉴에이지, 포스트모던, 자본주의, 그노시스주의(영지주의), 이교, 카니발” 등에 대해 “유대교, 그리스도교, 마르크스주의, 라캉, 취약한 절대”를 대치하면서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의 논의를 들고나온 것은 위 논리와 다름없다.
진짜 정치란, … 고대 그리스에서 처음 나타난 다음과 같은 현상이다. … 사회조직 안에 고정된 장소를 갖지 못하고 배제된 사람들(고대 그리스 시민들)은 스스로를 ‘사회 전체’의, 진정한 ‘보편성’의 대리인, 대표로서 제시한다. ; 정치 투쟁이란, 구조화된 사회와 ‘부분이 되지 않는 부분’(보편성의 원리, 원리상 평등성으로 위해 구조화된 기존 질서를 흔드는 것) 사이의 긴장관계를 나타낸다. ; “정치란 원래부터 늘 ‘보편’과 ‘특수’라는 일종의 단락을 포함하고 있다. 즉 그것은 ‘보편적이고 단독적인 것’이라는 패러독스(역설)를 포함하고 있는 셈이다.” 이것은 “모든 위대한 민주주의적 현상들 속에서 인정된다.” (지젝, 《操り人形と小人−−キリスト教の倒錯的な核》, 青土社, 2004 ; 한국어판 《죽은 신을 위하여 : 기독교 비판 및 유물론과 신학의 문제》)
그리스도교에서 ‘보편적이고 단독적인 것’의 패러독스(특수성과 보편성의 순환구조)는 시간 축에서 이미지화되고 종말론적으로 표현된다. 즉 종말에서의 보편성 실현과 특수성의 선점을 의미하며, 현대사상에서는 하버마스의 ‘이상적 발화(=담화, 대화) 상황’1)에 상응한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교파적 특수성(종파화)과 조직신학
그러면 그리스도교의 특수성, 특히 교파 관련 특수성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틸리히는 조직신학 체계를 구축하는 데 있어 ‘규범’(Norm)의 역할을 다음과 같이 논한다. 이는 신학에서 교파가 지닌 의의와 관련된다.
원천 자료와 매개적 경험이 따라야 하는 규준의 문제 ; 이러한 규준의 필요성은 소재의 분량과 다양성을 고찰하고 한편으로 경험의 매개 기능이 지닌 불명확성을 돌아봤을 때 명료하다. 자료와 매개란, 그러한 사용이 어떤 규범에 의해 인도되는 경우에만 신학 체계를 창출할 수 있다. ; 종교개혁을 통해 명확히 정식화된 내용적 규범의 빛에 교회사 전체를 조망해본다면 유사한 규범들이 모든 시대에 스며들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폴 틸리히, 《조직신학 제1권》)
틸리히는 종교개혁적인 ‘신앙에 의한 의인(義認)’ 규범(칼뱅주의는 예정설도 추가)을 논하면서 고대 희랍교회는 “불사의 생명과 영원한 진리에 수육(Incarnation)하여 유한한 인간이 죽음과 오류로부터 해방”된 것이라고 보았고, 로마교회는 “신인(神人)의 현실적이고 성사(Sacrament)적인 희생을 통한 죄와 멸망으로부터 구원” 등의 규범으로 자리 잡아 각각의 신학 체계 성립이 가능해졌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논의에 기초할 때 비로소 프로테스탄트적 전통이 17세기에 교의학을 성립하게 된 사정을 이해할 수 있다. 17세기 교의학(조직신학)의 성립은 가톨릭을 포함한 개신교 교파들이 근세(16-17세기)에 보인 ‘종파화’, 즉 신앙 선택에 관한 속지주의(属地主義, 영주가 영방의 교파를 결정하는 것)와 그에 근거한 여러 교파의 신조 및 신앙고백서(제 교파 규범 선언 문서) 형성을 전제하고 있다. 종파주의는 18세기 이후 근대적 신교(신앙)의 자유 원칙 확립을 거치며 여전히 교파 형태로 유지되고 있다.
현대 개신교 조직신학에서 발견되는 불안정성은 이러한 역사적 배경과 사정으로 생겼다. 국민국가가 기본 형태인 근대 이후 시민사회는 ‘종파(교파)’를 통한 국가 통합 시도로부터 ‘국민’을 단위로 삼는 국가 통합으로 이행되어간다. 종파는 그 과정에서 공적 기반을 원리적으로는 상실하게 된다. 하지만 현실 세계에서 교파는 정교분리 원칙하에서도 신앙 공동체로서 의미를 여전히 간직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현대 개신교 조직신학은 교파적 기반으로부터 유리되어, (바르트와 틸리히 신학이 말하듯이) 신학자 개인의 신앙적이고 지적인 작업으로 이행된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조직신학의 개인화 논의는 별도로 치더라도, 본래 조직신학은 공동체에서 공유된 신앙고백에 기반을 둔다는 점을 확인해두고 싶다.
길게 보면 성서를 바탕으로 정신적 내면성의 깊이를 더욱 깊이 살피는 일, 기술사회에서 인간의 생존 문제에 정면으로 대응하는 일, 성서적 개인도덕뿐 아니라 비신화화된 역사의 목표 및 사회윤리를 이와 매개하여 세계 평화를 확립하는 데 기여하는 일, 이 세 가지 요소를 만족시키는 신학만이, 그리고 ‘기술사회에서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색해낼 수 있는 신학만이 현대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모리타 유자부로, ‘현대신학의 동향’, 《현대신학은 어디로 가는가》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