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7호 내 인생의 한 구절]

애매하게 이른 아침 시간. 3월부터 공식적으로 고3이 되는 큰아이가 지금껏 한 번도 다니지 않았던 학원에 가는 첫날이었다. 심지어 학교 다닐 때보다 더 일찍 갔다가 밤에는 더 늦게 온다. 지금까지는 하고 싶은 일이 없어서 공부를 열심히 할 필요성도 못 느꼈지만, 최근 공부하고 싶은 분야를 찾았기에 이제는 해보려 한단다. 성적이 얼마나 오를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하고 싶은 공부를 찾은 것이, 또 새벽부터 밤까지인 학원에 가는 것만으로도 기특했다. 아이가 학원에 가는 첫날 아침, 아이보다 조금 더 일찍 일어나 주먹밥을 만들어줬다. 밥을 차려도 분명 시간 없다며 잘 안 먹고 가겠지 싶어, 혹시 들고 나가더라도 편하게 먹도록 주먹밥을 만들자고 전날 밤부터 생각했었다. 평소보다 일찍 일어났더니, 등교하는 둘째 아이를 깨워야 할 시간까지 어중간한 시차가 발생하고 말았다. 아직 바깥은 깜깜하고, 배우자와 둘째는 쿨쿨 자고 있고, 나만 계속 깨어있자니 그것도 애매했다. 일단 이불 속에 들어왔지만 다시 잠이 올 것 같지 않아서, 가까이 있던 아이패드를 집어 들고 성경 앱을 켰다.

재작년에 시작한 통독을 한동안 그대로 두다가 얼마 전, 멈추었던 신약 진도를 찾아 다시 읽기 시작했다. 오늘은 누가복음 22장이었다. 예수님이 가룟 유다에게 팔려 가시는 대목과 그 전후 장면들이다. 처음에 멈칫한 곳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라면 여러 번 들어보았을 법한, 그래서 나도 익히 알고 있는 장면. 예수님이 잡혀가신 후, 닭 울기 전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다. 예수님은 갑자기 군인들에게 잡혀가고, 아마도 황망했을 베드로는 차마 자리를 뜨지 못한 채 근처에서 불을 쬐고 있는 상황. 그곳에 있던 사람들과 베드로의 대화. 현대적으로 바꾸어보자면 대략 이런 대화일까.

사람 1 : 어, 당신 혹시 예수랑 같이 있었죠?
베드로 : 뭔 소리예요, 나는 그런 사람 몰라요.
사람 2 : (조금 있다가) 어, 이상한데? 당신 아무래도 예수 그 패거리 같은데?
베드로 : 아, 이 사람아. 뭔 말이야, 난 아니라니까.
사람 3 : (조금 있다가) 아냐, 당신 갈릴리 출신이잖아. 예수랑 있었던 거 맞죠?
베드로 : 거참, 난 모르는 일이라니까!
[닭이 세 번 운다] [베드로는 밖에 나가 심히 통곡한다]

그런데 여기서 ‘닭이 세 번 운다’와 ‘베드로는 밖에 나가 심히 통곡한다’ 사이에 가려져 그동안 내가 보지 못했던 것이 있었다.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눅 22:61). ‘앗,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셨다고? 예수님이 어딘가로 끌려신게 아니라 그 근처에서 베드로 말을 듣고 계셨던 거야?’ 하는 생각에 새번역을 찾아보았다. 심지어 여기에는 “주님께서 돌아서서 베드로를 똑바로 보셨다”고, 더 분명하게 적혀있었다. 아니, 예수님이, 나는 예수를 모른다고 세 번이나 말하는 베드로를 ‘돌아서서’ ‘똑바로’ 쳐다보셨다고?! 그 순간 예수님은 어떤 심정이셨을까. 아무리 하나님의 아들이고, 베드로가 그럴 줄 알고 있었다지만, 그래도 그 순간, 일부러 ‘돌아서서’ 베드로를 똑바로 보시다니. 외로우셨겠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을 읽어오는 동안 느꼈던 것은 예수님의 ‘사랑’과 ‘외로움’이었다. 예수님은 인간들을 지독히도 사랑하셨구나. 예수님이 하고 다니셨던 일이란 대체로 아픈 사람을 고쳐주시고 약한 사람을 세워주시는 일이었으니. 또 예수님이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먹이시는’ 일이 내 마음에 들어왔다. 오병이어 기적도, 예수님 말씀을 들으러 왔던 수많은 사람들이 먹을 게 없어 배고파하는 모습을 불쌍히 여기시어 하신 일이니까. 또 죽은 소녀를 살리신 후에 이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시기도 했다. 생명을 살리기만 하고 휙 사라지지 않고 끝까지 돌보아주셨다. 예수님은 정말 이 땅의 사람들, 그 때 그 시대 사람들을 정말로 사랑하셨구나.

하지만 늘상 어떤 인간에게도 온전히 이해받지 못해 외로워 보이는 예수님 모습도 만날 수 있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설교하는데 제자들은 엉뚱한 질문을 하거나 자기들끼리 세력 다툼이나 하고 있고. 나는 A를 말하는데 듣는 사람은 이해 못 해서 B를 말하고. 나는 분명 하나님의 아들인데 인간이기도 하고. 이 땅의 누구에게도 온전히 이해받지 못하셨을 것 같다. 그래서 누가복음 22장 그 장면에서도, 베드로는 분명 예수님의 신뢰를 받는 제자였겠지만, 그만큼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인간적인 배신감도 느끼셨을 테고, 역시 또 외로우셨겠구나 싶었다. 그 부분을 영화의 한 장면으로 담아낸다면 쓸쓸한 예수님의 표정을 클로즈업하고, 몇 초간 빙글빙글 돌아가는 배경에 애잔한 음악과 같은 효과를 넣어서, 예수님의 쓸쓸함과 외로움을 극대화하는 장치를 연출해볼 수도 있겠지.

이런 생각을 하며 22장을 다시 읽었다. 이번에는 또 다른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눅 22:42)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니라.”(22:43) 이 역시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알 만한 유명한 기도 장면이다. 그런데 여기서 기도 중에 천사가 하늘에서 나타나 예수께 힘을 더해주었다고 했다. ‘아, 하나님이 예수님을 사랑하시는구나!’ 싶었다. 천사를 본 적도 없는 일개 인간인 내가 갖고 있는 천사의 이미지를 빌려오자면 뭔가 하얀 날개도 달렸고 흰 옷도 입고 광채도 나고 거룩한 아우라를 뿜뿜 뿜어내는 그런 존재가,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바로 그곳에 나타났던 거구나. 그보다 더한 위로가 있을까. 하나님이 보내주신 천사가 나에게 와서, 지금 내가 기도하는 바로 이 자리에 와서, 나에게 힘을 더해주는 것. 예수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졌다.

그러고 나서 또 눈에 들어온 구절은 42절 예수님의 기도였다.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아, 예수님도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셨구나!’ 이전에는 이 기도가 대체로 ‘순종’으로 읽혔다. 본인의 뜻과 욕구를 내려놓고 온전히 하나님 뜻에 집중하는 본보기적인 기도라고 들어왔고 그렇게 생각해왔다. 그런데 이날 나에게 이 기도의 키워드는 순종보다는 사랑이었다. 얼마 전, ‘사랑’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으면서 사랑한다는 말을 어떻게 표현할지 고민하면서 영화 〈헤어질 결심〉의 대사를 썼다는 정서경 작가의 인터뷰를 읽은 적이 있다. 이 기도가 바로 그런 사랑의 표현이었다. 십자가에 달려 고통스럽게 죽어야만 하는 나의 미래가 예정되어 있다는 걸 알면 누구라도 그런 고통은 피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기도하신다. 의무감, 사명감, 인류애, 이런 어떤 정신으로 무장하더라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이런 기도를 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나님 뜻대로 하시라고 기도하셨구나 하고, 예수님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이게 바로 ‘사랑’을 말하지 않는 사랑 표현 아닌가. 그와 동시에, 아주 오래전 나에게 주셨던 말씀이 떠올랐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벧전 4:8)

2013년 어느 날 아침, 나에게 주셨던 말씀이다. 미국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시가에 1년 넘게 맡겨둔 큰아이를 데려오고, 곧 둘째 아이를 출산했다. 내가 낳은 아이지만 더 이상 내 아이가 아니라 주 양육자인 할머니의 아이로 큰아이가 자라는 걸 보면서 심적으로 괴로웠기에, 둘째 아이는 맡기지 않고 내가 키웠다. 그래도 한 학기에 한 개 강의는 하느라고 남들보다 일찍 어린이집에 보냈더니, 아이는 늘 감기에 걸려왔다. 아이가 감기에 걸리면 다 나을 때까지 며칠간 집에서 데리고 있어야 했다.

그날 아침, 채 네 돌도 되지 않았던 어린 둘째 아이는 아침부터 눈물과 콧물을 흘리며 일어났다. 얘를 어린이집에 보내야 할지 병원에 데려가야 할지 잠시 고민하다, 아이의 눈물 콧물이 짧은 시간 안에 점점 심해지는 걸 보고 병원에 데려갔다가 어린이집에 보내기로 했다. 그날은 ‘줌마네’라는 단체에서 하는 영화 만들기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그 일로 사람들을 만나기로 했던 날이었으니까. 아이 가방을 싸고, 내 가방도 싸고, 4인 가족이 먹은 아침 식탁도 대충 치우고, 출근길에 병원까지 데려다주겠다는 배우자가 운전하는 차에 올랐다. 다행히 길에서 택시를 잡는 수고만은 면했지만, 평소 사람이 없던 그 소아과는 때마침 건강검진을 받으러 아기를 데려온 엄마들로 북적였다. 병원 가는 길에 그날 만나기로 한 누군가의 전화를 받고, 기다리고 앉아있는 동안 또 다른 전화를 받고, 한참을 기다려 진료를 받고, 작은 아기를 데리고 걸어가 약국에서 약을 타고, 오르막길이 이어지는 주택가 골목길을 아이 손을 이끌고 걸어서, 어린이집에 데려다주는 데 겨우 성공했다. 아이를 어린이집 선생님 손에 인계해주고 돌아 나왔는데, 그때 당시 새로 부임하신 의욕적인 부목사님에게서 문자메시지가 와있었다.

무엇보다 서로 뜨겁게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문자를 읽는 순간, 눈물이 났다. 찔끔거리는 눈물을 닦으며, 바람을 가르며, 경사진 골목길을 내려왔다. 내가 말로는 아이들에게 ‘사랑해’라고 하지만, 어린아이 둘을 혼자 돌보는 일이 힘들어서 그런지, 내가 하는 돌봄의 행위들을 ‘사랑’이라 생각해본 적이 이전까지는 없었다. 내가 하는 일은 그냥 ‘애 보는 일’, 조금 더 좋게 말해 ‘돌보는 일’이었지,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아이들을 ‘사랑하는 일’이라고 구체적으로 느껴본 적이 없었다. 남들이 보기에 특이하게도 박사까지 공부하고도 취업을 안 하고 아이를 키우고 있는 것은, 한 번 해보니 어린아이를 남의 손에 맡겨 키우는 일은 두 번 다시 하기가 싫은 내 성격 때문이지, 내가 아이들을 남들보다 더 많이 ‘사랑’해서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구절은, 내가 아침에 한 일이, 짐을 챙기고 병원에 데려가 오르막길을 걸어 아이를 데려다준 그 정신없는 일련의 일들이 바로 ‘사랑’이라고 나에게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때 그 구절이 이 아침에 생각났다. 전통적으로 여성의 일이라고 여겨져서 사회적으로 평가절하되고 있는 돌봄노동, 특히 어린 자녀 돌봄을 해오느라 지쳐있던 나에게, ‘네가 지금 하는 그 일이 바로 사랑하는 일이란다’ 하고 위로를 주셨던 10년 전 말씀을 생각나게 하셨다. “무엇보다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나의 수많은 허물, 하나님 앞에서 지은 나의 허다한 죄를 덮을 수 있는 것이 지금 내 아이들을 사랑하는 일. 지금껏 내 아이들을 돌보아온 일이구나. 오늘 아침 나에게 이런 깨달음을 주시다니, 이 또한 ‘사랑’이라는 단어를 말하지 않으면서도 ‘내가 너를 사랑한다’ 말하시는 하나님의 표현 방식인가 보다.

10년 전 그날 아침처럼, 눈물을 찔끔 흘렸다. 감사기도를 한 다음에, 눈물을 슥 닦고, 둘째 아이를 깨우러 나갔다. 깜깜했던 밖이 조금 밝아져 있었다. 예수님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 나에게 알려주신 사랑, 오늘 아침 내 세계의 키워드는 ‘사랑’이다. 저녁에는 밤늦게까지 공부하고 오느라 배고플 큰아이를 위해 간단한 야식을 준비해 둬야겠다.

김동진
‘여성주의 교육 연구소 페페(Feminist Pedagogy)’ 대표. 페미니즘 교육이라는 방향성 아래 독서모임, 책 번역, 책 출간, 강의 등의 일을 하고 있다. 저서(기획 및 공저)로 《지금 시작하는 평등한 교실 : 가르치며 배우는 페미니스트 페다고지》(동녘, 2022)와 《N번방 이후, 교육을 말하다 : 페미니즘의 관점》(이하 학이시습, 2020), 역서로 《벨 훅스, 당신과 나의 공동체》(2022)와 《페미니즘, 교차하는 관점들》(2019)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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