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3호 내 인생의 한 구절]
나는 사람들의 마음 문제를 다루는 상담심리사다. 꽤 오래도록 대학원 석사과정을 졸업하기 위해 애쓰던 백수였는데, 재작년부터 ‘찾아가는 상담사’로 일하다가 1년 반 만에 취업했다.
청년기의 가장 큰 과업은 아무래도 직업과 사랑이다.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청년기에 직업적 고민을 하며 비전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자기 정체성과 진로 적성을 놓고 앞날에 대해 고민하면서 신앙적 의미까지 생각한다. 나는 취업이 안 되는 것으로 악명 높은 인문사회대 중에서도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아무런 ‘증’도 발급되지 않는 과였다. 졸업할 무렵, 나의 경제적·정신적 후원자였던 엄마가 폐암 3기 판정을 받았다. 나는 사정없이 흔들렸고 20대 후반의 시간을 꽤 오래 헤맸다.
그래서였을까? 신비체험에도 꽤 목을 맸다. 그것이 고통의 표현이었는지 돌파구 없는 현실 탓이었는지는 모르겠다. 둘 다이지 않았을까. 기도 도중 마음으로 ‘내가 너를 마음이 아픈 자를 위로하는 데 쓰겠다’라는 음성을 듣고 ‘아멘’으로 화답했다. 당시 나는 마음이 아픈 자를 위로하는 일로 하나님께 쓰임 받을 만한 사람이라기보다 마음이 아픈 사람에 가까웠다. 그런 나를 위로해준 체험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 체험은 강력했다.
학부 졸업 후 엄마를 잃고 자력으로는 원하는 수준의 직장에 취업하기 힘들었다. 뜻하지 않은 사고로 1년여 병원 생활을 했고, 6급 지체장애인이 되었다. 당시에는 장애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한 달 가까이 집에만 있기도 했다. 그러다 사회 활동을 시작하면서 집 근처 고등학교에 실무원으로 취업했다. 다소 복잡한 가족사 때문에 관심이 생겨 가족상담학 전공으로 석사 공부를 시작했다. 장애인이 되고 이대로 인생이 영 끝나버리는 줄 알았는데, 새로운 길이 열렸다. 사람 마음을 다루고 다양한 가족 이론을 살피는 공부는 재미있었다. 2학기가 되어 대학원에 적응해 공부에 열중하던 어느 날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났고, 혼자가 되었다.
‘설마 굶겨 죽이시지는 않겠지!’
어느덧 30대가 되었지만 세상에 의지할 사람 하나 없는 진짜 ‘고아’가 되었다. 영화 〈마션〉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우주의 미아가 된 기분이었다. ‘고독이 병이 되는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종종 고독사에 대한 공포가 몰려오던 시절이었다. 그런 나를 붙들어준 것이 공부와 신앙이었다. 내가 해온 공부가 나를 지켰다.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 의심하고 원망도 했지만 힘든 순간에 하나님을 떠올렸다. 하나님을 향한 불신과 원망은 나에게 신앙의 다른 이름이었다. 하나님에 대한 의문조차도 하나님의 존재를 전제한 고민이었기 때문이다.
고독의 시간을 보내며 실존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다. 나는 왜 사는가? 나는 무엇으로 사는가? 살아있으니 사는 거고 사니까 사는 날들을 지나 혼자서도 생존할 수 있게 되었고 조금은 강해졌다. 종종 참석했던 집단상담에서 내가 가족이 없는 1인 가구라고 하니까, 자신은 그 상황이 상상이 안 된다며 우는 분도 있었고, 나를 내공이 깊다고 평가하는 분도 있었다. 나도 한때는 가족 없이 살아가는 삶을 상상해본 적 없었지만, 생명은 그 자체로 강하기 때문인지 혼자의 삶에도 익숙해졌다.
열아홉 때 처음 교회에 나가서 만난 하나님께는 나를 돌봐주는 아버지 이미지를 기대했고, 예수님은 치유자 이미지로 강하게 다가왔다. 오래도록 가족과 내면 문제로 씨름했기 때문에 상담사의 길로 들어섰고, 신비체험의 강력한 기억이 상담사로서 소명을 고민하게 했다.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니 하나님이 책임지시겠지 싶었다.
상담사의 길은 초기 비용이 많이 들고 수익은 매우 적다. 처음 이 길로 접어들었을 때 체감되는 비용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기본 석사에 학회 자격증 공부, 각종 교육을 들어도 봉사 수준의 일을 받았고 최저임금을 벗어나기 어려웠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의 내 삶처럼 내 직업과 진로도 한판 버티기에 가까웠다. 그때마다 내가 체험한 하나님 음성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립보서 2:13)라는 말씀을 떠올리곤 했다.
30대 후반인 지금, 나이로 보면 삶에서나 커리어 면에서나 실패한 인생은 아닐까, 조바심이 들 때도 있다. 20대 때 선교단체에서 만난 친구들은 모두 기혼에 자녀가 있다. 집단상담에서 만나는 또래 여성들도 대부분 기혼이었다. 나는 결혼하지 못했고, 아이를 갖고 싶다는 바람도 이루지 못했다. 이 나이면 박사까지 마치기도 하는데, 논문이 아닌 연구 보고서를 쓰며 겨우 석사를 졸업하는 데 성공했다. 이마저도 아등바등한 결과이다.
삶이 뜻대로 풀리면 얼마나 좋겠냐만, 인생은 즐거움보다 어려움이 많은 고해(苦海)다. 지금 나는 대한민국에서 마이너한 사람이다. 비만도 일종의 장애 후유증이다. 경증이지만 장애를 입은 이후 움직임이 다소 불편해져서 예전처럼 에너지 넘치게 움직일 수 없게 되었고, 그 결과 체중이 엄청나게 불어났다. 가족 없는 미혼, 장애인 여성. 이런 비주류적 조건은 취업 장면에서 약점이 되었다. 대한민국은 일정 규격에 들어오지 않는 사람에게 다소 잔인했고, 나는 서류에 붙어도 면접에서 불합격을 거듭했다. 최종 면접에서 탈락의 고배를 수도 없이 마셨다. 적극적인 구직 활동으로는 6개월, 구직을 시작한 지는 1년 반 만에 겨우 취업에 성공했다.
나는 불리한 조건들로 인한 차별과 배제를 경험하며 다소 의기소침해졌다. 하지만 희망을 잃지는 않았고 구직도 포기하지 않았다. 나는 꾸준히 쉬지 않고 성실히 공부해왔다. 내 안에는 그런 나의 저력을 믿는 마음이 있고, 하나님 또한 내 생존에 관심이 있으리라는 생각과 ‘설마 나를 굶겨 죽이시지는 않겠지!’라는 믿음이 있었다. 하나님을 의심했지만, 하나님을 찾았다. 힘들고 지칠 때마다 하나님의 음성을 되뇌곤 했다.
그분의 기쁘신 뜻을 따라
나는 아직 정식 상담을 시작한 지 3년밖에 안 된 초심 상담자에 불과하다. 하지만 내담자들을 만나는 일은 큰 기쁨이다. 원하는 만큼 소득을 얻지는 못해 여전히 생존과 생계가 고민이지만, 내가 소명이라 여겼던 일을 하고 그 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이 감격이고 기적이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 아직도 잘 모르겠다. 다소 거창했지만 흐릿하게만 보였던 내 길이 지금은 소박하지만 구체적이고 선명해 보인다. 어떤 특정한 일만이 아니라 내 일상과 삶 자체가 소명과 연결되어 있음을 점차 깨달아간다. 남루하고 멋지지 않아도, 나의 인생을 껴안고 오늘을 버티고 내일을 그린다. 인생이 자기 뜻과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절감하는 중년을 향하고 있다. 뜨거웠지만 불안했던 청춘의 시기가 지나가고 여전히 흔들리지만 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점점 생겨나고 있다.
앞으로 내 삶은 어떻게 될까? 아이를 낳아 양육하는 꿈은 접었지만, 언젠가 남편 될 사람과 만나 연애하고 싶다. 몇 년쯤 뒤 박사과정에 진학해 더 깊이 공부하고 학회 자격증 과정도 완료해 국내 양대 심리학회 슈퍼바이저도 되고 싶다. 무엇보다 하나님과 깊이 사귀고 동행하는 삶을 살고 싶다.
결혼으로 이어질 줄 알았던 지난 연애를 마감하고 제법 길었던 가나안 신자 시절을 끝내며 작은 교회 공동체에 정착하게 되었다. 여전히 하나님을 찾으며 그분의 임재와 부재를 모두 경험하고, 의심과 원망의 터널을 지나면서도 하나님과 만나고 있다. 하나님과 가까울 때도 있고, 멀 때도 있다. 그분을 의심할 수 있는 특권이 내게는 신앙의 표현이기도 하다. 세월이 지났지만 지금도 고민하고 생각하는 신앙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또 어떤 소원을 주실까? ‘마음 아픈 자를 위로하는 자’라는 소원은 내 삶의 과정을 통해 점차 실현되고 있다. 이제 적응한 1인 가구의 삶을 청산하고 배우자와 함께 연약하고 소외된 자를 돌보며 살고 싶다. 교회 공동체의 좋은 일원으로서, 끝까지 그리스도인이길 포기하지 않고, 그분의 기쁘신 뜻을 남은 생에서 실현하고 싶다.
차현정
예수님과 복음과상황을 사랑하는, 부산에 사는 초보 상담심리사. 나와 타인의 마음 건강에 관심이 많고, 상담과 글쓰기 영역에서 프로가 되고 싶은 의욕 넘치는 사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