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5호 나의 순정만화 순례] 유시진: 《쿨핫》

어젯밤 꿈속에서 동경에 대한 멋진 시를 썼었다. 깨어났을 때는 유감스럽게 단 한 줄도 쓸 수 없었다.
― 전혜린, 《이 모든 괴로움을 또 다시》(민서출판사, 1981), 106쪽.

내 삶의 멋진 여성 계보에 오른 이 중 이상은이 먼저인지 《생의 한가운데》(루이제 린저 지음, 전혜린 옮김, 문예출판사, 1998)의 니나 부슈만이 먼저인지 전혜린이 먼저인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확실한 건 중학생 때 방을 같이 쓰던 둘째 언니가 좋아하던 가수 이상은을 나도 좋아했고, 아마도 이상은이 언급했을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가 궁금해 펼쳤다가 니나를 만난 것 같기는 하다. 언니의 결혼식 날 면사포에 침을 뱉은 니나가 등장하는 첫 페이지부터 열광했고, 그 책을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민서출판사)를 쓴 전설의 전혜린이 번역했다는 건 나중에 알았다.

1950년대에 독일 유학을 떠났었고 요절한 천재(라고 불렸던) 문학가 전혜린1)도 이상은 때문에 알고 좋아했던 것 같은데 이 또한 확실하지는 않다. 중학교 때 만나 고등학교까지 함께 다닌 내 베프 이름이 혜린이었고, 혜린이네 엄마가 딸의 이름을 ‘전혜린’에서 따와 지었다는 것만이 확실하고도 지극히 문학적인 사실일 뿐. 그 이름의 유래가 어찌나 부럽던지. 우리 엄마는 나를 임신했을 때 기도 중 큰 은혜를 받아 내 이름을 ‘혜은’이라고 지었다는데 뭔가 혜린이의 작명 서사에 비하면 평범하고 지극히 기독교적이었다. 같은 ‘혜’자가 들어가지만, 뒤에 ‘린’이 붙은 이름과 ‘은’이 붙은 이름이 불러일으키는 사뭇 다른 감수성이란. ‘ㄹ’이 들어간 이국적 이름, 좀 부럽군. 난 혜린이의 ‘지극히 문학적인 취향’을 따라가려면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만 같았다.

혜린이네 엄마는 온종일 여러 신문을 탐독하던 분이었는데 당시 내 관계의 스펙트럼 안에서 그런 여성상은 처음 보았고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이후에 나도 혜린이네 엄마처럼 신문을 열심히 읽어서 신문방송학과에 간 걸까?) 중고등학교 때의 혜린이 또한 공연 예술 전문지 〈객석〉을 정기구독하며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책을 읽던 친구였다. 뒤라스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괜히 혜린이가 읽으니까 《이게 다예요》(문학동네, 1996)를 따라 샀던 기억이 난다. 서른다섯 살 연하의 연인(와우…! 잘은 모르지만 뒤라스 언니 좀 멋있…)을 생각하며 쓴 사랑의 글이어서 산 걸지도.

이상은 같은 아티스트가 내 여고 선배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는가 하면 혜린이와는 서로 “학교에서 말이 통하는 건 너뿐이야”라며 같이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던 시절, 혜린이와 나만큼 ‘읽고 쓰는 일’에 진심이었던 여자 고등학생들을 순정만화에서 만나기도 했다. 유시진 작가의 《쿨핫》에서 ‘쿨’을 맡고 있는 김동경과 서영전. 교실에서 공부 잘하는 친구, 잘 노는 친구, 학교생활에 착실한 친구, 인기 많은 친구, 잘 꾸미는 친구, 외모가 특출한 친구, 조용하고 사려 깊은 친구는 있었어도 유독 ‘책 읽고 글 쓰는 친구’를 만나기는 어려웠는데 순정만화에서 ‘책 읽고 글 쓰는 여자 고등학생’을 만났던 기억은 혜린이네 엄마를 봤을 때만큼 강렬했다.

이하 사진: 필자 제공
이하 사진: 필자 제공

어젯밤 꿈속에서 동경에 대한 멋진 시를 썼었다. 깨어났을 때는 유감스럽게 단 한 줄도 쓸 수 없었다.
― 전혜린, 《이 모든 괴로움을 또 다시》(민서출판사, 1981), 1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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