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9호 나의 순정만화 순례] 이미라: 《남성해방대작전》
미러링은 린치를 수반하는 증오 발화(hate speech)가 아니라, 새로운 형식의 여성의 저항이다.
― 류진희, 《양성평등에 반대한다》(교양인, 2016), 142쪽.
아침에 출근하면 지난밤 자기가 ‘새로’ 알게 된 정치 이슈 관련 지식을 늘어놓는 남자 직원 때문에 괴로워하는 여성 직장인의 토로를 들었다. 나만 당하는(!) 특수 사례인 줄 알았는데 너도 그래? (야, 너두?) 놀라워하며 어설픈 맨스플레인 시전하는 남직원 퇴치법을 간략히 전수해주었다. 일단 그 남직원이 평소 어떤 주제에 관심을 가지는지 물었다. 기계? 자동차? 게임? 스포츠? 기계란다. 혹시 그 남직원이 정치 시사 분야 ○○○ 유튜브 채널도 보고 그러는 건 아니지? 가끔 ○○○ 언급한단다. 휴. 최악이다. 그럼 일단 그가 또 아침 인사로 정치 이슈 설명을 시작하면 뚫어지게 쳐다봐. 절대 그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거나 호응하면 안 돼. 그런 말은 근거 없는 음모론 아니냐며 의심해서도 안 돼. 그냥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한마디만 해. “혹시 온라인 커뮤니티 하세요? ○○○ 같은 거” 하고 그냥 가던 길 가. 당신이 아는 척하는 지식의 출처가 대개 그렇게 뻔하고 빈곤하다는 걸 내가 다 알고 있다는 사실만 알려줘. 그렇게만 해도 도망가.
경험상 그래도 완전히 퇴치되지는 않고 종종 또 대화 걸기를 가장해 시비를 걸어오지만 그래도 당분간은 평화롭게 지낼 수 있는 간단한 방법이다. 오랜 기간 맨스플레인 ―특히 정치 관련 아는 척― 을 가만히 들어본 결과 주장의 논리가 대부분 남초 온라인 커뮤니티의 그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사무실을 지나가다가 우연히 R 커뮤니티 창을 띄워놓고 일하는 맨스플레인 시전자를 보고 내 의심이 어느 정도 근거 있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어느 날은 “정의당이 페미니즘 논조 때문에 망했다는 거 어떻게 생각해?”라고 물어보던 그. 일단 질문 자체가 틀렸음을 먼저 따지고 진보 정당 역사를 읊어주며 참교육해주고 싶었지만 참고, ‘하하’ 썩소를 날리며 자리를 떴다. (어젯밤에 온라인 커뮤에서 그 주제로 무슨 글 읽으셨나 봐요.)
마치 나(혹은 여성)는 온라인에서 활동하지 않거나 그런 지식을 잘 모르겠거니 여기는 걸까. 온라인상에서 혐오 논쟁이 한창이던 2015년에 나온 《여성혐오가 어쨌다구?》(현실문화)에서 여성학자 윤보라는 디시인사이드 메르스 갤러리에서 여성들의 패러디를 처음 본 남성들 반응을 이렇게 분석한 바 있다. “불현듯 나타난 ‘메르스 갤러리(메갤)’를 보고 당황한 남성 유저들의 언설을 보자. ‘메갤’에서 시도된 여성들의 패러디를 처음 본 그들이 가장 먼저 보인 반응은 ‘여성들이 저런 (고난이도) 드립력을 갖고 있을 리 없으며 따라서 남성들이 여성인 척 가장해 논란을 이끌고 있다’고 굳게 믿는 것이었다. 일단 사건을 조기 진화해 웃음의 권력이 여성에게 배당되는 것을 차단하고자 한 것이다.”(44-45쪽) 여성이 이 정도 유머 생산 능력을 지니고 있을 리 없다고 생각하다니!
윤보라의 논의를 이어받아 연구한 언론학자 김수아는 더 나아가 “남성 이용자들의 당혹과 불쾌는 ‘자신들만의 온라인 공간에 여성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어왔던 신념이 무너졌을 때, 즉 온라인 세계에 여성이라는 타자가 존재함을 환기하게 되었을 때 온 것이라는 점에도 주목해야 한다. … 여성 역시 온라인 공간에서 살아가며 남성들이 하는 일을 알고 있었다”고 말하며 “되받아쓰기의 전략이 지워진 식민지 타자의 목소리를 들리게 함으로 해서 제국의 유일성에 도전하게 된 것과 비견할 수 있다”1)고 분석했다. 웃음의 권력 투쟁(?) 과정 중, 남성 이용자들이 여성들은 온라인에 없는 것처럼 상정한다는 분석에 눈이 번쩍 띄었다. 온·오프라인을 막론하고 남성들이 여성이라는 타자가 존재하지 않을 거라 믿었다는 건 상상도 못 했으니까.
그런데 나는 왜 상상하지 못했을까? 여성이 있는 자리에서도 여성을 대상화하며 성적 농담을 하는 남성들을 그렇게 많이 보아놓고서는. 온라인으로 스포츠 중계를 볼 때 마치 여성 시청자는 없다는 것처럼 여혐 드립을 쏟아내는 채팅창을 늘 보아놓고서는. 어느 순간부터는 스포츠 중계를 보며 틈틈이 응원 창의 혐오 발언을 신고하는 게 일이 되어놓고서는. ‘여기 여자 있다!’ 외치기라도 해야 하나. 그러니까 난 저렇게 상대방은 고려하지 않고 자기 말하고 싶은 순간 뜬금없이 정치 시사 이슈로 맨스플레인을 쏟아내는 남성들로부터도 그런 태도를 느껴왔다. 내가 아는 세계를 넌(여성은) 모르지? 그런데 웬걸. 나도 너만큼 정보를 접하고 활용하는 온라인 세계의 1인이라고. 그 세계 나도 잘 알고 있다고. 그래서 네가 아는 척하는 지식의 출처가 얼마나 얄팍한지 꿰뚫고 있다고. 너랑 10분만 대화하면 네가 어느 온라인 커뮤를 끼고 사는지 알아맞힐 수도 있어. (Just One 10 MINUTES, 내가 네 소속을 아는 시간.)
그렇게 일상에서 ‘없는 존재’로 여겨지거나 여성 혐오적 온라인 댓글을 보는 일이 얼마나 힘 빠지는 고통인지 구구절절 설명하며 상대를 이해시키기란 참 어렵고 귀찮은 일이다. 가끔은 이런 회의도 든다. 왜 내가 이걸 설명해야 하지? 왜 내 역량과 에너지의 많은 부분을 이런 데 써야 하지? 억울하다는 생각도 든다. 그럴 때 가장 많이 하는 생각.
하루, 아니 단 몇 시간만이라도 대한민국에서 여성으로 살아보면 이런 설명 다 안 해도 몸으로 이 고통을 체득할 텐데.
남자가 단 몇 분이라도 여성으로 사는 일은 드라마에서만 가능한 일이므로, 여성들은 남성들이 쓰는 언어와 문화를 그대로 돌려주기로 했다. 이른바 ‘미러링’2)이다. 미러링이란 길게 말하지 않고 상대를 이해시키는(!) 전략이다. 한국에서 2015년 (지금은 사라진) 메갈리아 사이트에서 유효하게 활용된 미러링은 이토록 복잡한 정치·사회·문화적 맥락 속에서 탄생했다. 혐오 대상이 세상에 없는 존재인 양 공기처럼 퍼져있던 여성 혐오 언어는 그걸 사용하는 주체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되돌려주고 나서야 사회 의제가 되었다. 남성이 주어가 된 ‘혐오 언어’가 발화되고 나서야 ‘혐오’가 얼마나 큰 문제인지 의제화되었다는 점이 웃기고 슬픈데, 그마저도 미러링으로 같은 말을 되돌려준 여성들에게 젠더 갈등을 조장한다는 혐의를 씌우며 사회문제가 되었다. 이전까지 여성이 그 많은 혐오를 당할 때는(참고 있을 때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김치녀’라는 표현을 ‘김치남’으로 되돌려주자 문제가 된 거다.
‘혐오’가 주요 이슈가 된 것만으로도 미러링 전략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다고 생각한다. 2015년 이후 일련의 페미니즘 리부트를 지나 이제는 거센 백래시의 시간을 맞이하며 많은 순간 내 마음의 수면 위로 떠올랐던 순정만화가 이미라 작가의 《남성해방대작전》이었던 것은 이 만화가 1990년대에 이미 ‘미러링 전략’의 두 가지 핵심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미러링은 린치를 수반하는 증오 발화(hate speech)가 아니라, 새로운 형식의 여성의 저항이다.
― 류진희, 《양성평등에 반대한다》(교양인, 2016), 142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