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4호 나의 순정만화 순례]
‘약자’들은 다시쓰기를 통해 서사의 주체가 된다. 약자들의 다시쓰기는 그 자체로 저항의 행위이다. 저항은 용감한 사람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어떤 이야기를 자신의 언어로 바꿔 전유하려 한다면, 그것은 이미 주류의 서사에 저항하고 있는 것이다.
― 노지승, 《여성의 다시쓰기》(오월의봄, 2022), 7쪽.
안녕. 잘 지내냐고 묻고 싶은데 최근에 이직하고 매일 야근하느라 힘든 시간 보내는 거 알아서 차마 그렇게 묻지는 못하겠다. 그래도 네가 가장 잘하고, 원하던 직무를 하고 있어서 재미있다고 했지? 이 시간이 네게 더 많은 기회가 돌아가는 시간들로 쌓이길 바라. 우리 그런 얘기 많이 했잖아. 우리에게 더 많은 기회가 열렸으면 좋겠다고. 누군가에게는 자연스레, 혹은 지당하게 주어지는 기회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여러 제약을 넘어서 쟁취해야 할 힘든 싸움의 결과물이라는 거, 우리 너무 잘 알잖아. 그래서 김승희 시인은 시집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세계사, 1995) 자서에 이렇게 썼나 봐.
나는 쓴다, 나에게 제공된 세상만으로는 충분치 않기 때문에. 라 독사의 세계, 제도들의 세계, 당연한 것들을 믿는 것이 당연히 자연스러운 당연의 세계와 그것에 아무 반성 없이 동의하는 물론의 세계가 싫어서 나는 쓴다. 당연의 세계와 물론의 세계에 대한 거부.
갑자기 네게 왜 편지를 쓰는지 궁금하다고? 언젠가 네가 ‘나의 순정만화 순례’를 잘 읽고 있다고 말했던 게 생각나서. 《호텔 아프리카》 다룬 글인가를 읽고는 그런 말도 했었잖아. 요즘 무슨 일 있느냐고. 이번 글의 퀄이 너무 좋았다고. 그렇지. 무슨 일이 생겨야 내 글의 퀄리티가 좋아진다는 거 너무 잘 알고 있네? 고마웠어. 알아봐 줘서. 그때 네가 언급한 그 글은 정말 한 달 내내 고민하며 쓴 글이었어. A4 네 장의 글을 쓰기 위해 책을 열 권쯤 옆에 쌓아두고 다양한 논문을 찾아보며 한 일주일은 잠을 설치고 나서야 겨우 그런 글을 쓸 수 있었어. 그 정도는 해야 아주 가끔 좀 읽어줄 만한 글이 나오는 거 같아.
그런 말도 했잖아. 《남성해방대작전》을 읽고 그랬던 거 같아. 이번 글은 개그력 풀충전한 글이었다고. 웃겨 죽는 줄 알았다고. 충분히 자료를 조사해 쌓은 배경지식과 물리적 시간을 들여 고민한 걸로만 글을 쓰면 항상 뭔가 아쉽더라고. 난 이상하게 내 글이 웃겼으면 좋겠어. 왜 그런 욕심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그냥 웃기고 싶어. 내 삶을 블랙코미디로 페르소나화하는 버릇 때문인지 나를 갈아 넣어 웃기고 싶더라고. 세상사 사는 게 힘들고 생의 본질이 ‘슬픔’이라고 믿는 사람이어서 그런가 봐. ‘독자 여러분, 제 삶에서 차마 웃지 못할 소소한 비극을 깔 테니 슬며시 즈려밟고 웃어주세요. 그 웃음 너머 제가 순정만화를 타고 나누고 싶었던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그런 마음이었나 봐.
여성 서사의 계보, 순정만화
네가 태어나고 유년기를 보낼 즈음 창작된 이야기들이 네게 어떤 의미로 전달될까 생각해보기도 했어. 내 첫 번째 글에서, 벤치에 앉아 순정만화를 읽던 나를 보고 “순정만화 읽나 봐”라며 소리 내어 웃고 가던 남학생들을 소환해 “여학생과 순정만화 조합, 심히 불온. 아니, 심히 우스운 조합이다”라고 쓴 문장을 읽고는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물었잖아. 당시 여성주의 연구활동가 권김현영 선생님 글을 덧붙여 설명했었는데, 최근 노지승 교수님의 《여성의 다시쓰기》를 읽다 보니 이런 내용이 나오더라고.
여성을 위한 여성들의 이야기에 대한 편견과 폄훼는 분명 그 주된 수요층인 여성들이 문화적 헤게모니에서 밀려나 주변화된 그룹이었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모든 계층의 여성들이 남자 형제들에 비해 교육받을 기회를 상대적으로 박탈당하고 공적 영역에서 어떤 역할을 부여받기 어려웠던 시절, 남성 엘리트 비평가들의 눈에 여성들의 취향이 사적이고 사소하게 보이는 것은 부당하지만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 같은 책, 17쪽.
1930년대 후반 대중극에 관한 이야기지만 ‘순정만화’라는 장르 또한 여성이 만들고 여성을 위한 순정만화 잡지가 유통하고 여성(소녀)이 소비한다는 면에서 언제나 변방에 자리했던 거 같아. 사적이고 사소한 로맨스물이라는 편견도 많았던 거 같고. 그런데 내가 10대에 읽었던 이 순정만화들을 2020년대의 눈으로 보니까 시대를 앞서 도착한 이야기들이었다고 말했지? 당시에는 ‘페미니즘’이라든가 ‘여성 주체’, ‘SF’라든가 ‘판타지’, ‘퀴어’나 ‘소수자 연대’ 같은 주제 의식도 모르고 자연스레 이야기를 흡수했었는데 말이야.
그래서 더 이 연재를 하고 싶었나 봐. 우리가 이런 보물 같은 대안 서사를, 장르물의 시초를 이미 보유하고 있고, 이 안에서 이전에는 만나보지 못했던 캐릭터의 향연을 맛볼 수 있을 거라고 말하고 싶어서. 대안적 상상력이라는 걸 이 오래된 서사에서 꺼내 볼 수 있다고 말하고 싶어서. 흔히 생각하듯 순정만화는 가부장제를 강화하는 방식의 이성애 로맨스 범벅이 아니라고.
무엇보다 우리 문화에서 자주 경멸의 의미로 지칭되는 ‘소녀’가 그 편견의 틀에 갇힌 ‘소녀’만 있는 건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서(가까운 예로, 우리가 같이 보는 남자배구 경기에서 선수가 약한 서브를 넣으면 바로 채팅창에 ‘소녀 서브’라는 비아냥이 들려오잖아. 어떤 한국 영화에서는, 덩치는 크지만 자기보다 연소한 성인 남성을 경시하는 호칭으로 이름 대신 ‘소녀’라고 부르더라고).
‘소녀’는 그런 존재일까. 정말 대중 서사에서 그렇게 한정적으로만 표현되었을까. 그 대답으로 난 1990~2000년대 순정만화의 소녀들을 불러왔어. 지구에 있을 때는 배구를 즐기고 우주에 가서는 주체적으로 사유하며 자기 행성을 구해내는 권능의 소녀 시이라젠느를, 쇼트커트에 근육질인 귀한 딸 이루다를, 남자들 전유물이었던 대장장이 일을 탁월하게 성취해 자기 부족에게 불의 검을 선사하는 아라를, 전 세계를 자유로이 여행하며 자기 정체성과 사명을 찾아가는 샤르휘나를.
얼마 전에 읽은 소녀문화 연구서 《마법소녀는 왜 세상을 구하지 못했을까?》(백설희·홍수민, 들녘, 2022)에는 18세에 처음 《프랑켄슈타인》을 집필해 20세에 탈고한 메리 셸리 이야기가 나오더라. 그 작품이 ‘소녀소설’ 기준을 훌륭하게 충족한다면서 작품 내 젊은 여성인 작가 본인이 투영된 듯한 인물인 ‘엘리자베트 라벤차’를 불러왔어. 이 소녀 묘사가 작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닐까 여기는 대목이 흥미로웠어. “반면 그녀들은 시인들의 신기루 같은 창조물을 좇느라 분주했다. … 그러나 그녀에게 세상은 텅 빈 여백이어서, 자기만의 상상력으로 그 여백을 채우고자 갈망했다.”1)
《프랑켄슈타인》에는 “삶과 죽음, 과학과 자연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다룬 문장들이 수없이 등장”해. 이게 “여느 소녀소설에 쓰였다면 ‘값싼 니힐리즘’이나 ‘싸구려 소녀감성’ 등의 표현으로 조롱받았을” 텐데, 출간 당시 오히려 ‘인간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 ‘인간 내면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라는 평을 들으며 칭송받은 이유로 메리 셸리가 이 작품을 익명으로 발표한 사실을 꼽더라고. 저자의 본명이 공개되자 비평가들이 하나같이 저자가 여성이라는 점을 지적하기 시작했다나.2)
수많은 문학 작품이 소녀에 의해, 소녀를 위해, 소녀를 주인공으로 하여 탄생했습니다. 그중 대다수는 소녀로서의 경험 없이는 결코 태어날 수 없는 글이었고요. 이렇듯 문학의 근간을 이루는 데 큰 영향을 끼친 소녀는 언제쯤 문단 내에서 그 중요성을 제대로 인정받게 될까요?
― 《마법소녀는 왜 세상을 구하지 못했을까?》, 134쪽.
내가 이번 연재에서 소개한 순정만화들을 감히 《프랑켄슈타인》 계보에 세우고 싶은데 네 생각은 어때? 한편, 이 책을 읽으며 여성사가 거다 러너(Gerda Lerner)가 했다는 말이 떠오르기도 했어. “여성/사회적 약자들은 자기 동료의 글은 모르고/읽지 않고 ‘초기 개척자의 사명’을 반복한다.”3) 왜냐고? 한국에서 ‘소녀문화’를 탐구하는 책이 1960년대 일본 애니메이션 〈요술공주 샐리〉나 1997년에 KBS 2TV에서 방영한 〈달의 요정 세일러문〉 등 마법 소녀 애니메이션까지 분석해 소녀 캐릭터의 한계를 다루고, 2013년에 디즈니가 〈겨울왕국〉을 만들어 “여자아이들은 처음으로, 스크린 속에서 왕이 될 수 있었던 것”4)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1980~2000년대 한국 순정만화 속 소녀들을 다루지 않은 점이 못내 아쉽더라고. 비록 TV나 디즈니 애니메이션 같은 주류 문화는 아니었지만, 2013년의 엘사와 안나 이전에, 한국 소녀들에게는 이미 왕이 되었던 권능의 소녀 시이라젠느와 샤르휘나가 있었으니까.
정희진 선생님은 거다 러너의 저 말에 이런 코멘트를 덧붙이시지. 여성들이 “여성의 글은 인용하지 않는다. 여성의 지식은 제대로 계승되지 않는다. 그러니 언어의 발전이 없다. 나는 이 문제가 사회적 약자의 결과가 아니라 원인이라고 본다.”5) 정말 정희진 선생님의 핵심을 찌르는 통찰력은 언제나 놀랍지 않니? 난 여성들이 만들고 여성 주체가 등장했으며 여성들이 소비했던 이 순정만화들이야말로 계승되어야 할 여성의 지식이라고 생각해. 그래서 이 연재 프롤로그에서도 언급했던 SF 작가 전혜진의 《순정만화에서 SF의 계보를 찾다》(구픽, 2020)에서 이런 문장에 마구마구 밑줄을 그었잖아.
순정만화를 빙자하여 온갖 것들이, 혁명을 말하는 청년들이, 부친 살해가, 싸우는 여자들의 이야기가, 자아에 대한 질문과 정상성에 대한 의문들이 쏟아져 나왔다. … 순정만화 안에는, 모든 것이 다 있었다. 뛰어나고 걸출한 작품들이 많았다. (13쪽)
나는 “한국은 SF의 불모지”라는, 이제는 낡다 못해 망언이 된 그 게으른 말을 떠올린다. … 순정만화는 비현실적인 사랑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말하던 사람들이 생각난다. … 한국 순정만화 속의 걸출한 SF 작품들을 “여자들이나 보는 만화”라며 비하하던 자들이 생각나 불쾌해지기까지 한다. 영원히 한국 SF가 양적으로도 질적으로도 별 발전 없으면 좋겠고 남들 안 읽어 본 외국의 SF들을 접하는 자기 혼자 선각자였으면 좋겠고 그것으로 남성성을 증명하고 싶은, 그러니 동시대에 나온 수많은 SF 순정만화들을 다 파묻어 버리고, 지금 와서는 여성 작가들이 쓰는 작품들을 아주 열심히 부지런히 폄하하고 다니는 사람들 말이다. … 지금 한국 SF를 만들어 가는 작가들, 그들의 소설에 열광하는 팬덤을 보라. 그들은 텅 빈 불모지에 갑자기 뚝 떨어진 신의 역사하심의 산물이 아니다. 그들에게도 계보가 있다. 지금 한국에서 SF를 읽고 쓰는 사람의 최소 절반 이상이 여성일 수 있게 하는 단단하고 꾸준한 기반이. 그것이 바로 바로 순정만화였다. … 1980년대 이후 한국 순정만화에서 꾸준히 나왔던 SF의 자취들을 소급해서 말하고 싶었다. 그건 내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모든 작품들에 대해 경의를 표하는 일인 동시에, 어떤 의미에서 나 자신의 계보를 찾는 일이기도 했다. (29-30쪽)
내 또래 SF 작가가 절절히 기록했듯, 나도 이 순정만화 순례를 하며 내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모든 작품에 경의를 표하고 내 사상의 계보를 찾아낸 것 같아. 재미있지? 어떤 사상서보다도 큰 영향을 끼친 게 순정만화라니. 난 이 계보를 따라 나만의 이야기를 찾는 사람이 된 것 같아. 그래서 내 연재 글은 누군가를 설득하거나 객관적으로 순정만화를 설명하는 글이 아니라 여성들에게 계승하고 싶은 여성의 지식 한 조각이었어. 너만의 이야기를 찾아가는 네게 줄 수 있는 여성 서사의 계보.
부디 여성의 지식이 묻히거나 잊히지 않고 인용되고 계승되어 너랑 내가 ‘초기 개척자의 사명’을 반복하지 않기를. 그래서 서사의 발전이 일어나기를. 그렇게 마음 담아 쓴 글이 네게 가닿았다면 그보다 더 큰 기쁨이 없을 거 같아.
다른 세계를 꿈꾸게 하는 비기(祕器)
아직 남은 선물이 더 있어. 같은 작가의 작품이라 다루지 못한 두 작품을 더 말해주고 싶어서 그래. 언니가 말이 너무 많다고? 조금만 참고 더 들어 봐. 네가 얼마 전에 그랬잖아. 20대를 돌아보니 언니들 말 듣고 배운 게 너무 많았다고, 앞으로 언니들 말 잘 들어야겠다고 나한테 충성을 맹세했잖아. (기억나지?)
그래서 마지막 두 작품은 뭐냐면. 흣. 이미라 작가의 《겔다를 찾아서》와 유시진 작가의 《마니》야. 순정만화 안에는 고전을 재해석해 우리 시대로 끌어온 이야기의 힘이 담긴 작품들이 있어. 순정만화 스펙트럼을 넓힌 이 두 작품을 난 정말 애정하거든. 특히 내가 좋아하는 안데르센의 《눈의 여왕》 이야기를 뒤집은 《겔다를 찾아서》는 겨울에 종종 다시 읽곤 해. 카이를 찾아 떠나는 겔다가 아니라, 겔다를 찾아 나온 카이의 이야기. 한국 고등학생 이가을과 서지원 버전의 겔다와 카이 이야기. 원작과 함께 읽으면 더 좋아. 어때, 벌써 궁금하지?
《마니》는, 유시진 작가 작품으로 뭘 다룰까 하다가 《쿨핫》과 끝까지 경합했던 작품으로, 고대 ‘처용 설화’를 모티프 삼아 펼쳐지는 이야기야. 우리 세계로 건너온 용족인 왕녀 마니(摩尼)와 그를 지키는 주술사 해루가 인간 세계에 은신해 들어와 인간과 얽히고설키는 이야기. 캬, 설정이 다 했지. 어떻게 그 짧은 고대 설화에서 이렇게 흥미로운 이야기를 상상할 수 있는지. 다른 세계의 존재들이 인간 세계에 들어와 인간과 관계 맺으며 인간의 아름다움과 추함을 모두 경험하며 성장하는 이야기야. 이후에 정면으로 후계 싸움에 임하는 왕녀 마니와 흑발 남주 해루 이야기는 한국 판타지 계보에 넣어도 좋을 완성도를 가졌다고 생각해. 내가 이 작품을 어찌나 좋아했던지 1995년에 네 권으로 나온 초판이 있는데 2002년에 나온 애장판도 갖고 있지 뭐야. 항상 책 정리하다가 두 권씩 있는 책을 발견하면 난 생각하지. 내가 이 책 정말 좋아하는구나….
이상 사족 끝. 여태까지 내 계보를 찾는 여정에 함께해줘서 고마워. 우리가 한국 사회에서 여성으로 사는 일에 세대를 초월해 공감하고 연대하듯, 내게 힘과 상상력을 선물한 이 순정만화들이 네게도 다른 삶과 세계를 상상할 비기가 되기를.
이제 정말 끝.
■ ‘나의 순정만화 순례’는 이번 회로 연재를 마칩니다. 성원해주신 독자 여러분과 지면을 빛내주신 필자에게 감사드립니다.
1) 메리 셸리, 김선형 옮김, 《프랑켄슈타인》(문학동네, 2012), 44쪽.
2) 《마법소녀는 왜 세상을 구하지 못했을까?》, 133쪽.
3) 정희진, 《다시 페미니즘의 도전》(교양인, 2023), 19쪽에서 재인용.
4) 백설희·홍수민, 위의 책, 26쪽.
5) 정희진, 위의 책, 19-20쪽.
박혜은
문화기획자. 뉴스레터 〈에밀앤폴〉 발행인. 책을 직접 만지는 일에서 책 문화를 다루는 일로 세계를 넓혀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