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3호 나의 순정만화 순례]

하지만 봄은 올 것이고 꽃도 필 것이며 인간은 자신의 파멸을 재잘거려야만 한다 … 기억은 일종의 성취이고 일종의 갱신 심지어는 일종의 입문, 왜냐하면 그것이 열어 보이는 공간은 새로운 장소들이기에 지금까지는 인식하지 못했던 새로운 부류의 무리가 살고 있는 —왜냐하면 그들의 움직임은 새로운 목표를 향해 있기에 … 전적으로 패배로만 이루어진 패배는 없다— 왜냐하면 그 패배가 열어 보이는 세상은 늘 이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어떤 장소이므로. 어떤 잃어버린 세계, 생각지도 못한 세계가 … 절망으로 이루어졌고 아무 성취도 없는 하강은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다 : 그것은 바로 절망의 반전. 

—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 황유원 옮김, 《패터슨Paterson》(읻다, 2024), 113~114쪽.  

얼마 전 〈듄: 파트2〉를 2회차 관람하고 《아르미안의 네 딸들》을 다시 정독하는데 〈듄〉의 주인공 폴과 《아르미안의 네 딸들》의 주인공 레·샤르휘나(이하 ‘샤리’)가 같은 고뇌에 빠지는 설정을 발견하고 퍽 흥미로웠다. 샤리는 BC 5세기 초, 고대 갈데아의 작고 신비한 나라 아르미안의 넷째 황녀다. 대대로 전사의 여왕이 다스려온 신지(神地)이자 전설과 샤머니즘의 나라인 아르미안에서는 신성한 여왕을 ‘레·마누’라고 부른다. 37대 레·마누는 딸이 네 명 있었고 하필 첫째와 넷째가 동시에 여왕의 운명을 타고난다. 이런 상황에서는 역사적으로 ‘마누의 불문율’에 따라 누군가가 제거되어야 하는 상황. 당시 겨우 열 살이던 샤리는 자기보다 연장자이자 야심가이며 정치적 수완과 초능력을 타고난 첫째 언니 레·마누아의 계략으로 죄인이 되어 사막으로 추방된다. 마누아가 율법에 따라 ‘불새의 깃털’을 찾아오면 모든 죄가 사해진다는 말을 건네자 샤리는 자기 운명과 싸워 사랑하는 조국으로 돌아오리라 다짐한다.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레·샤르휘나의 운명과 맞붙은 싸움 혹은 불새의 깃털을 찾아가는 여정.    

폴 역시 자기 가문이 차지했던 아라키스에서 지배권을 빼앗기고 쫓겨나 아라키스 원주민 프레멘이 사는 사막으로 간다. 사막에서 꿈을 꾸다가, 자기가 예언된 메시아가 되면 종교전쟁이 일어나는 미래를 내다보고 이를 바꾸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하기도 한다. 사막으로 추방된 샤리 또한 사경을 헤매다 본인의 예지 능력으로 자기가 불러올 미래를 내다보는데 그 운명이 어쩐지 폴과 비슷하다. 

붉은 꼬리를 가진 별이 나타나요. 그것은 나의 운명을 나타내는 별이에요.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전쟁을… 병과… 지진… 기아… 슬픈 일이 생겨요. 많은 사람이 죽어요. 난 알 수 있어… 그 사람들은 나 때문에… 내가 가진 운명 때문에 죽어요… 나의 별이 그 운명을 가지고 와요…! 나의 미래는… 나의 운명은 많은 사람들을 다치게 해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나는… 난…. (1권, 145쪽)

샤리는 세 언니들과 아버지가 달라 신과 인간의 피가 섞인 존재다. 그 덕인지 불새의 깃털을 찾는 여정에서 그리스 로마 신화의 신들을 변주한 《아르미안의 네 딸들》 버전 신들의 조력을 받는데, 바다의 신 ‘라아나’는 자기 운명에 좌절하는 샤리에게 다음과 같은 격려를 건넨다. “레·샤르휘나… 너의 일은 너 스스로 이겨나가는 수밖에 없다. 미래가 그렇다면 그대는 미래를 바꾸어라! … 운명의 전사, 싸우거라! 최선을 다해! 운명과….” 라아나는 운명과 싸우라고 말로 임파워링할 뿐 아니라 강력한 싸움 아이템인 ‘물의 검’까지 선물한다. 

이렇게 불새 찾기 여정에서 다양한 인간의 조력과 신들의 선물을 받으며 여전사 아마조나로 성장하는 샤리. 미래를 바꾸는 싸움 과정에서 운명의 상대를 만나기도 하고 여정을 마친 후엔 끝내 아르미안의 왕이 되기도 하는데, 사실 샤리의 운명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마지막에는 왕을 넘어 자기에게 주어진 비밀스러운 존재로까지 나아가니까. 이렇게 자기 운명 때문에 전쟁과 기아로 파멸하게 될 인류의 미래를 바꾸고자 ‘살리는’ 싸움을 시작한 샤리의 이야기는 한마디로 ‘생명의 대서사시’다.

〈듄〉의 폴은 자기가 죽게 되더라도 ‘순교자’로 추앙받으며 종교전쟁이 일어날 미래가 달라지지 않을 걸 알고 황제가 되기를 선택해 우주전쟁의 한가운데 선다. 샤리 또한 개고생 후 자기를 추방했던 아르미안으로 돌아와 왕으로 등극하는 것까지는 언뜻 비슷하지만, 어린 샤리가 파멸의 운명에 맞서 사람을 살리는 미래를 선택했듯 조국으로 돌아온 성인 샤리는 왕으로서 폴과 사뭇 다른 선택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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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사진: 필자 제공

하지만 봄은 올 것이고 꽃도 필 것이며 인간은 자신의 파멸을 재잘거려야만 한다 … 기억은 일종의 성취이고 일종의 갱신 심지어는 일종의 입문, 왜냐하면 그것이 열어 보이는 공간은 새로운 장소들이기에 지금까지는 인식하지 못했던 새로운 부류의 무리가 살고 있는 —왜냐하면 그들의 움직임은 새로운 목표를 향해 있기에 … 전적으로 패배로만 이루어진 패배는 없다— 왜냐하면 그 패배가 열어 보이는 세상은 늘 이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어떤 장소이므로. 어떤 잃어버린 세계, 생각지도 못한 세계가 … 절망으로 이루어졌고 아무 성취도 없는 하강은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다 : 그것은 바로 절망의 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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