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6호 나의 순정만화 순례] 김혜린: 《불의 검》
문 밖까지 땅 끝까지 강물소리 자분자분 번져가고 푸른 잎새 축축 휘늘어지도록 열매 주렁주렁 매단 오동나무가 흐뭇하게 따님들을 굽어보시는 것이었다
― 김선우, 〈오동나무의 웃음소리〉 중에서1)
연휴를 맞아 가족과 함께 A대기업 계열에서 운영하는 리조트에서 먹고 놀다가 밤이 되어 씻고 누우니 ‘현타’가 왔다. 일에 치여 바쁘게 살다가 인공적으로나마 조성된 자연을 벗 삼은 깨끗한 리조트에서 쉬는 삶이 행복일까? 보통 ‘이게 행복이라는 것인가’ 되새길 때는 문득 평범한 순간 행복을 느끼며 던지는 아름다운 질문일 수 있겠지만 나처럼 레저 생활에 별 감흥이 없고 정상가족 문화에 깊은 의문을 품는 사람에게는 리조트의 나날들이 지루하고 회의적이었고, 그때 이 질문이 떠올랐다. 과연 이런 게 행복인가?
남이 치워주는 일시적 공간에서 남이 차려주는 음식을 먹고 깨끗하게 정리된 자연을 향유하며 남들 다 누린다고 믿는 평범한(!) 쉼을 누리는 삶. 편안한 레저 시설 안에서 딱히 맛있지는 않지만 차려놓은 것 많은 메뉴의 음식을 골라 먹고 종류별로 구획이 나뉜 숲을 거닐며 겨울에는 스키를 타고 여름에는 워터파크에서 놀며 휴가를 보내는 삶. 바비큐를 해 먹으며 불멍을 하고 때때로 음주 가무를 즐기며…. 하아… 글로만 써도 피로가 몰려오는 나 극내향형, 레저 공포인. 리조트에 와서 행복의 의미를 탐색하는 나. 왜 여기에 있지?
아마도 A대기업 임직원들이 주로 이용하는 것 같은 그곳에는 온통 연인과 핵가족을 기반으로 가정을 이룬 중산층 이상의 가족들이 바글바글했다. 닥스류 브랜드를 차려입은 할머니 할아버지부터 이제 막 걷기 시작한 아기까지 한 단위를 이룬 가족이 ‘어머니~’ ‘아버지~’를 연신 부르며 어색한 휴가를 즐기는 풍경. 아파트 브랜드 ‘스위첸’ 광고가 추구하는 가족 문화 ―가족을 이룬다는 건 ‘문명의 충돌’마냥 괴롭기도 하지만 이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인가 ― 를 은연중 깔고 있는 리조트에 불청객 같은 느낌으로 끼어 그들을 관찰하며 ‘행복이란 무엇일까’를 생각하는 나는 누구인가. 이렇게 진공상태로 편안한 생활이 내가 추구하는 삶의 궁극이었던가. 연휴를 맞아 야심 차게 쉬고 왔는데 영혼이 한층 더 시들해졌다.
영성신학자 유진 피터슨의 글 중 잊지 못할 몇 가지 장면이 있다. 하나는 필립 얀시의 《교회, 나의 고민 나의 사랑》(요단출판사, 2000년) ‘서문’을 쓰며 언급한 북미 대륙 극서 지방 탐험가 존 뮤이어(John Muir)에 관한 이야기다. 1874년, 유바강 지류 계곡에 자리 잡은 친구의 오두막을 찾았던 뮤이어는 어느 날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 미송나무에 오른다. 험악한 기후를 대비해 지은 안전한 오두막이 주는 안온함 따위는 뮤이어의 발목을 잡지 못했다. “산마루에 올라, 광풍의 변화무쌍한 소리와 색깔을 이왕이면 더 극적으로 맛보게 해줄 나무를 찾았다. 그는 마침내 찾아낸 거대한 미송나무에 올라갔다. 꼭대기 우듬지까지 올라가서 필사적으로 나무를 붙들어 안은 채 온 몸으로 폭풍을 견뎌냈다. 그는 무엇을 바라고 위태로운 천공에 올라 칼날 같은 바람에 온 몸을 내맡겼는가? 날씨를, 하나님의 숨결이 담긴 위대한 날씨를 맛보고자 했다. 신께서 내뿜는 그 원시적 생명력과 압도적인 에너지를 체험하고자 했다.”(13쪽) 피터슨은 뮤이어가 보여준 모습을 기독교 영성의 표상으로 이해했다. 위대한 날씨 앞으로 나아간 탐험가처럼 창조주와 근본적으로 대면하는 영적인 삶의 표상.
피터슨이 목회자로서 위기 상황에 처했을 때 자기 정체성을 찾기 위해 일곱 달 동안 도스토옙스키와 지속적으로 교제한 장면 또한 잊을 수 없다. “무질서하고 산만하지만 영적인 창조력이 뜨겁게 소용돌이치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으며 부재와 임재라는 양면에 걸쳐 하나님을 실감하는 유진 피터슨. 인물들이 살아 움직이는 이야기에서 “하나님과 열정에 사로잡혀 사는 삶”을 배우고 그 삶을 지켜낼 수 있었다니 정말 따라 하고 싶은 장면이었다.2) 내게도 그런 작품이 하나 있다. 피터슨의 삶에 영감을 주었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같은 작품, 존 뮤이어가 맛본 폭풍우 몰아치는 위대한 날씨 같은 작품. 시들시들해진 영혼에 내리는 처방 같은 순정만화, 김혜린의 《불의 검》이다.
문 밖까지 땅 끝까지 강물소리 자분자분 번져가고 푸른 잎새 축축 휘늘어지도록 열매 주렁주렁 매단 오동나무가 흐뭇하게 따님들을 굽어보시는 것이었다
― 김선우, 〈오동나무의 웃음소리〉 중에서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