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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여성의 소명’을 넘어
[321호 커버스토리]
[321호] 2017년 07월 20일 (목) 15:16:24 백소영 이화여대 기독교사회윤리학 교수 goscon@goscon.co.kr

소명(calling), 부르심. 이것이 어찌 개신교만의 신앙고백이랴. 아브라함을, 모세를, 예레미야를 부르신 하나님의 역사는 태초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데. 하지만 소명이라는 단어가 개신교 신학과 신앙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막스 베버가 “이세상적 금욕주의”(thisworldly asceticism)라고 명명했던 바, 개신교도들은 세속 사회에서의 일상을 통해 하나님께서 신자들에게 부여하신 특별한 부르심대로 ‘살아내려’ 노력했다. 그저 개인의 경건 생활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 세계에, 우리가 사는 일상에 적용하고자 했던 개신교 신자들, 그들의 첫 시도로부터 어느덧 500년이 흘렀다. 기독 신앙에 비본질적인 것들, 반대되는 것들에 저항(protest)했던 사람들인 개신교도들은, 아니 우리는 지금, 여전히 프로테스탄트인가? ‘여성의 소명’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이를 살펴보려 한다.

종교개혁, 어디까지 혁명적이었나?
종교개혁을 한마디로 말하라고 한다면, 나는 ‘권위 나눔’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왕과 귀족들, 사제들만 독점했던 성서 해석이나 신앙 고백의 권위를 평신도에게 부여한, 아니 돌려준 사건이었으니까. 신민(臣民)에서 시민(市民)으로! 물론 종교개혁 당시부터 전면적으로 실행된 것은 아니었지만, 개혁 신앙은 근현대적 시민을 낳는 촉발점이요 바탕이 되었다. 개혁 신앙은 더 이상 꿇고 복종하는 신민이 아니라 모두가 하나님 앞에 왕 같은 제사장으로 서라고 촉구했다. 종교개혁의 모토인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은총(sola gratia), 오직 성서(sola scriptura)’는 특권층이 존재의 위계를 주장할 수 없게 만들었다.

“모든 신자들은 사실상 성직자인 것이다. 따라서 그들 간에는 어떠한 차이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세례, 복음, 그리고 믿음을 통해서 누구에게나 성직자의 신분이 주어지는 것이다.”1

사실 루터는 ‘독일 그리스도인 귀족들에게’ 고했지만, 그 원리는 보편적일 수밖에 없었다. 루터가 인정했는가와는 별개로 그의 외침은 농노를 비롯하여 신분제 사회에서 ‘꿇고’ 지내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던 사람들에게 “만인제사장”의 권위를 주장할 근거가 되었다.

특히나 중세 말기 상인, 공인, 행정가들을 중심으로 자유독립도시를 형성하고 살아가던 수많은 부르주아(부르[Bourg]로 둘러싸인 독립도시에 거주하는 사람이란 뜻으로 당시는 ‘시민’과 동의어였다)에게 종교개혁의 외침은 큰 호응을 얻었다. 사실 제아무리 훌륭한 사상이라도 호응하는 이가 없고 이를 유지해갈 만한 물적 토대가 없으면 지속되기 힘든 법이다. 개신교 종교 사상이 유럽을 거쳐 미국, 그리고 한국에까지 이르는 동안 힘을 키울 수 있었던 것은 근현대(modern)라는 새로운 사회를 일구어갔던 부르주아들의 의미 추구와 맞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은 하나님 앞에 만인이 평등함을 외쳤고, 부르주아는 근대 법치 민주사회를 만드는 데 이 사상을 주요한 근거로 삼았다.

혁명, 맞다. 적어도 위아래로 보던 인간관계를 신앙적, 법적 평등권을 갖는 수평적 존재로 응시하게 했으니까. 인간 사이에는 언제나 마주 보아라. 이것은 성서가 창세기로부터 증언하는 하나님의 뜻이다. 그런 점에서 종교개혁은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지어졌던 문명을 제대로 돌려놓는 혁명적 사건이었다. 하지만, 근현대 역사를 돌아볼 때 우리는 ‘만인’이 언제나 ‘만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음을 안다. 만인에서 배제된 사람들이 많았다. 인종적으로는 흑인을 비롯한 유색인종들이, 산업 사회에서는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한 노동자들이, 국가적으로는 경제수탈의 대상이 되었던 피식민 국가들은 결코 ‘만인’의 범주에 들지 못했다. 그러면 ‘여성’은 어떠했을까?

‘하와의 후손’에서 ‘돕는 배필’로!
종교개혁은 여성을 바라보는 관점에서도 혁명적 변화를 가져왔다. 사실 유대-기독교의 형성과 전개는 가부장제도의 역사 가운데 펼쳐졌다. 그 문화적 전제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던 이들은 남성중심적 시각에서 여성을 응시했다. 물론 하나님의 계시는 보편적이다. 그러나 이를 받아 전하는 ‘유한자’ 인간의 제한성은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를 전하는 주체가 전적으로 남자일 경우는 어떤 일이 발생할까?

“똥자루, 오물자루, 탐욕스런 암늑대, 덧없는 파리들, 남편의 완벽하고 순수한 정액을 담는 봉지 같은 여자들.”2

오늘날 들으면 여성혐오라고 발끈할 언어들이 중세 기독교 텍스트와 콘텍스트를 가득 채웠다. 필시 한스 니더의 《개미집》(1435)이나 하인리히 크래머와 야콥 슈프랭거의 《마녀들의 망치》(1487)는 그 절정이었을 거다. 생각해보라. 예닐곱에 엄마와 떨어져서 수도원에서 금욕적인 신앙생활을 하던 수도자 집단에서, 그러니까 건강하고 친밀하게 여성들과 자연스러운 인간관계를 경험해보지 못한 남성들의 여성 응시가 어떠했을지. 독신서약을 하고 “그리스도의 순결한 신부”로 살기 위하여 금욕을 신앙적 경건으로 동일시하던 이들에게 ‘여성’은 열등의 기호요 위험의 징표였다. 그러니 멸시하고 경계하고 심지어 저주할밖에.

물론 중세 수사들만이 이런 여성혐오적 발언을 했던 것은 아니다. 인류 문명사에서 가부장제의 역사는 약 5,000년이나 지속되었다. 히브리경전(구약성서)이나 기독교 교부들의 여성 응시가 부정적인 것은 당연했다. 고대 교회의 권위 있는 교부였던 테르툴리아누스는 여성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하와가 너 자신이라는 것을 모르느냐? … 살아라. 그리고 비난 받아라. 악마의 문은 너이니라. 생명수의 봉인을 뗀 너. 신성한 계율을 최초로 변절한 자. 악마가 공격하지 못한 남자를 설득한 너. 신의 이미지인 남자를 망가뜨린 너.”3

우리가 신앙적으로 존경하는 성 아우구스티누스도 여성 응시에서만큼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남자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여자가 만들어졌다고는 하지만, 자식을 낳는 일 말고 무엇 때문에 여자가 만들어졌는지 도무지 모르는 일이다.”4

이와 비교하면, 종교개혁가와 이들의 신앙을 따르던 개신교도들의 여성 응시는 과히 ‘혁명적’이라 할 만하다. 남성과 여성을 태초부터 짝으로 부름받은 공동체적 인간임을 천명하며, 여성을 “하나님의 선물” “필요선” “영혼의 동반자” “돕는 배필”로 불렀으니까. 루터는 중세 말기 만연했던 성직자들의 성적 타락을 보며, 창세기를 다시 읽었고 〈수녀에서 아내로〉라는 소논문을 비롯하여 ‘소명으로서의 결혼’을 강조하는 글과 말을 아끼지 않았다. 루터의 아내가 된 카타리나 폰 보라도 이에 고무되어 수녀원을 탈출했던 여성이다. 6세 때 수녀원에 보내져서 16세에 독신서약을 한 카타리나였지만, 이 과정에서 카타리나의 주체적 결단보다는 가정사나 당시 문화적 전제들이 강하게 작용했다. 이러한 때에, 결혼을 ‘소명’으로 받는 것이 성서적이라는 말에 얼마나 가슴이 뛰었을까? 뜻을 같이했던 다른 11명의 수녀와 함께 한밤중에 정어리 마차에 숨어 나오면서도 필시 새로운 ‘소명’ 인식에 들떴을 거다.

전직 사제와 전직 수녀의 결혼 생활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기형아가 태어나거나 적그리스도로 자랄 것이라는 저주와 멸시 속에서 목회자 가정을 이룬다는 것을 ‘소명’으로 여기며 산다는 것이 매 순간 도전이었을 테니. 그럼에도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그들은 새로운 그리스도교 가정의 ‘본’을 보여주었다. 카타리나는 개혁신앙가들이 이해하는 대로의 가장 전형적인 “돕는 배필”이었다. 비텐베르크에 있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을 고쳐서 목사관으로 사용하는 동안 그 모든 수고로움은 카타리나의 몫이었다. 40여 개의 방에는 늘 방문객들로 가득했다. “항상 열려있는 목사관”이라는 이상도 이때 생겼다. 루터는 이런 카타리나를 늘 칭찬하고 격려했다. “비텐베르크의 샛별” “카리시마(선물)” “집안의 안주인” “박사님” 이런 호칭으로 부르면서. 언젠가 순회설교를 나갔던 루터는 카타리나에게 애정 어린 편지를 보냈다. “비로소 나는 우리 집에 얼마나 좋은 포도주와 맥주가 있고 게다가 아름다운 아내, 아니 내 주인이 있는가 하고 생각했소.”5 루터는 카타리나를 기쁘게 하기 위해 맥주 한 통을 보내달라는 청원도 잊지 않았다.

존재론적으로는 평등하나 기능적으로는 위계적인?

   
▲ "카타리나가 열망하지 않은 것은 무엇일까? 아니, 혹 카타리나가 열망했더라도 승인되지 않았을 것은 무엇일까?" (카타리나 폰 보라의 초상화. 독일 화가 루카스 크랜치 디 엘더의 1550년 작)

완벽해! 실제로 많은 부르주아 개신교도들의 외부 환경은 루터와 카타리나의 조력 관계를 이상화하고 따르기에 적합했다. 인류 최초로, 귀족이 아닌 평민들의 아내가 생산노동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시대가 도래했기 때문이다. 가정을 지키며 남편의 바깥 활동을 내조하는 집안의 천사! 사회학적으로 “전업주부”라고 불리는 이 여성 모델은 근현대 사회에 와서나 가능했다. 카타리나는 전업주부의 기독교적 선배라고 부를 수 있다. 그녀는 분명 남편을 지원하고 가정을 꾸리며 자녀를 양육하는데 전력하는, 그러니까 ‘가정 사역’을 신적 소명으로 여기는 전례를 만든 여성이다. 하지만 《여성과 종교개혁》의 저자 키르시 스티예르나는 카타리나에 대해 이렇게 평가한다. “카타리나는 목회자의 아내이자 교수의 아내로서 무엇을 열망해야 하는지, 또 무엇을 열망해서는 안 되는지에 대한 모범을 제시하였다.”6 카타리나가 열망하지 않은 것은 무엇일까? 아니, 혹 카타리나가 열망했더라도 승인되지 않았을 것은 무엇일까?

교리 면에서 하나의 통일된 의견을 모을 수 없었던 다양한 종교개혁자들이 유독 ‘여성의 소명’에 대해서는 일치된 의견을 가졌다는 점이 흥미롭다. 신실한 개신교 설교가들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 안에서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묘사하며 이렇게 말했다. “남편이 머리라면, 아내는 몸이다.” “아내의 주된 의무는 복종이고, 남편의 주된 의무는 사랑이다.” “좋은 남편은 자상하고 순탄하게 아내를 이끌고,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보다 사랑하고 싶은 존재가 되려고 노력한다.” “좋은 남편은 아내가 남편의 지도를 즐겁게 따르고, 그것을 노예가 된 기분이 아니라 자유와 특권으로 느끼도록 이끄는 사람이다.”7

“남편과 아내는 영원한 생명이라는 면에서는 동등하나 가정을 다스리고 친교한다는 점에서는 동등하지 않다.” 로버트 클리버의 이 분열적 선언은 종교개혁 전통의 여성 이해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는 여성주의 이론가들이 소위 “온건한 가부장제”라고 부르는 견해다. 그러니까 여성의 자리는 ‘가정’이요 창조 질서로부터 유래한 소명은 내조와 육아라는 것이다. 이는 불과 한 세대 전만 해도 신실한 개신교 설교자라면 반복했던 ‘여성의 소명’이었다.8

‘재능사회’에서 발견하는 ‘여성의 새로운 소명’
정말 그럴까? 하나님은 이 땅에 당신의 형상으로 사람을 지어내시면서 인류의 반을 오직 보조자요 조력자로서 살아가라고 하셨을까? ‘완전한 남자’를 만듦으로써 비로소 ‘완전한 여자’가 되라는 ‘소명’으로 부르신 걸까? 카타리나 폰 보라와 동시대 인물이었고 자신의 소명을 ‘다른 재능’에서 찾았던 마리 당띠에르는 여성을 변호하며 이렇게 썼다.

“하나님이 몇몇 선한 여성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그들에게 성서를 통해 거룩하고 선한 것을 드러내시는 데도, 진리를 훼방하는 자들로 인해 여성들이 그에 관해 서로를 향해 글을 쓰고, 말하고, 선포하는 것을 망설여야 합니까? 아, 그들을 막으려고 하는 것은 너무나 뻔뻔한 일이 될 것이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재능을 우리가 숨기는 것 또한 너무나 어리석은 일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끝까지 견딜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시는 분입니다.”9

스스로 성서를 읽고 기도와 묵상 가운데 성서 해석을 하고 이를 글로 표현하는 데 재능을 발견한 여인들, 그녀들은 자신의 소명을 ‘작가 됨’에서 찾았다. 작가의 영어단어 ‘author’는 무언가를 지어내는(창조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 이름은 권위와 직결된다. 라틴어 ‘augere’는 author의 어원인데, ‘성장하는 데 동력이 되는 힘’을 뜻한다. 스스로의 신앙과 존재의 깊이가 자라고, 나아가 동료와 이웃에게 자신이 깨달은 삶의 힘을 나누어주려고 펜을 든 여성들. 그들의 소명은 집안과 교회 안에서 손과 발의 봉사로 나타날 때는 칭송받았으나, 권위를 가지는 행동으로 나타날 때 견제받고 심지어 고발당했다.

또 한 명의 카타리나, 그러니까 역시 한 전직 사제와 ‘소명으로서의 결혼’을 하였던 카타리나 쉬츠 젤이 이해한 “돕는 배필”은 폰 보라와는 달랐다. 그녀는 사적 영역만이 아니라 공적인 목회 활동에서도 동등하게 남편 마티아스 젤과 동역했으며, 자신의 이름으로 변증을 담은 글과 찬송가집, 성서해설서를 썼다. 스트라스부르 시의회의 경건한 남성들은 깜짝 놀라 마티아스를 불러 경고했다. 제발 아내를 조용히 시키라고. 그러고 보면 마티아스야 말로 성서가 그리는 이상적인 “돕는 배필”의 모범을 보인 인물이지 싶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주신 은사로서의 재능이 어찌 획일적일까? 이스라엘 초기 공동체의 비전을 보여주는 사사기의 “요담 우화” 역시 재능사회를 그리고 있지 않던가! 감람나무는 기름으로, 무화과나무는 열매로, 포도나무는 포도주로, 그렇게 타고난 재능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사람들에게 기쁨과 유익을 주는 수평적 관계의 공동체(사사기 9장 참조), 바로 그런 비전이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와 맞닿아 있다.

안타깝게도 마티아스가 죽자 카타리나의 독자적 행보는 더욱 큰 장애를 만났다. 남편의 장례식장에서 즉흥 설교를 하고, 교리적 이유로 장례집전을 거부당한 친구의 장례식을 인도하며, 자신의 신앙심과 재능에 기초하여 스스로의 삶에 권위를 부여했던 카타리나 쉬츠 젤은 의회와 교회로부터 고발당했고 공동체로부터 외면당했으며 결국 쓸쓸히 죽어갔다. 어찌 그녀뿐이랴! 성서가 말하는 해방적 복음에 고무되어 주체로 서고 자신의 재능을 발견했던 여성들 가운데 하필 그녀들의 재능이 ‘전업주부’가 아니었던 이들은 축출되거나 미쳐갔다. 하지만 사사 시대의 드보라를 위시하여 예수의 제자 마리아, 초대 교회의 수많은 여성 사역자들을 기억해보라. 교회가 제도화(institutionalization, 독일의 종교사회학자 에른스트 트뢸치의 개념어다)되기 전 생생한 산 신앙의 시절에는 재능의 사용에 남녀 차별이나 차이가 없었다. 그저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태어난 개인의 재능 차이였을 뿐.

더구나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후기-근대(late-modern) 사회는 이제 바야흐로 ‘재능사회’(meritocracy)로 진입해 가는 중이다. 초기와 중기까지의 ‘관료제적 자리’(bureaucracy)는 점점 효율성 면에서 통치 정당성을 잃어가고 있다. 한 번 배운 지식으로 평생을 사용할 수 있는 세상도 아니요, 전문성을 중심으로 빠르고 유동적인 이합집산의 네트워킹이 오히려 효율적인 세상이다. 그리고 이런 전문성은 남성들만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근현대의 초기 기획이었던 ‘일하는 남편, 집 지키는 아내’의 성별분업적 핵가족 모델은 이미 달라진 외부환경 속에서 구성원들에게 의미나 만족감을 주지 못하고 있다.

물론, 그럼에도 이것이 진정 ‘변하지 않는 진리’에 해당하는 부분이라면 손해를 감수하고라도 지켜야 할 일이다. 하지만 언제 하나님께서 여성의 자리를 본질적으로 제한하셨나? “돕는 배필”의 히브리어는 ‘ezer kenegdo’이다. 직역하면 ‘그의 마주봄과 같은 도움’이라는 뜻이다. 그 도움은 서로 마주보기 전까지는 정해질 수 없다. 각자의 재능이 다르고, 각자의 약점이 다른데 어찌 획일적일 수 있을까? 무엇보다 종교개혁의 핵심 정신은 “본래로 돌아가자!”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동등하게 옆으로 서서 마주보며 각자 가진 재능으로 서로를 건설하라고 짝 지워주신 인간관계를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그 정신에 부합되는 것 아닐까?

“만일 나의 주님께서 나에게 열 달란트를 주셨다면, 나의 의무는 그것으로 장사하여 열 달란트를 더 만드는 것입니다. 집 안의 장롱 먼지 속에 그 동전을 묻어두어서는 안 되지요. 나는 그것을 찻주전자에 넣어 찬장 속에 놓아두지 않겠어요. 식료품 선반 위, 빵 버터 과자 햄과 나란히 놓지 않을래요. … 어머니, 우리 각자에게 재능을 주신 주님은 언젠가 집에 오셔서 모두에게 보고서를 요구하실 거예요.”10

19세기 목회자의 자녀요 신실한 신앙인이었으며 여성 작가였던 샬롯 브론테는 소설 속 주인공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했다. 그러게 말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탤런트, 재능)를 어찌 묻어둘 수 있으랴. 또한, 그 소명이 어찌 획일적으로 ‘결혼’하여 ‘아내와 엄마’가 되는 것‘뿐’이랴. 종교개혁 500주년, 그 개혁 정신을 이어받아 바통을 꼭 쥐고 달리는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새로운 신앙고백에는, 남성과 여성으로 나누어 고정되고 닫힌 응시로 ‘너의 재능’을 제한하는 언어는 담길 수 없다. 핵가족만을 정상 가족으로 신성화하면서 결혼하지 않는 선택을 하였으나 의미 있고 헌신적인 공동체적 실험을 추구하는 ‘소명’을 가진 신앙인들을 억압하는 언어도 담길 수 없다. 신앙인 각자가 받은 ‘부르심(소명)’에 진실되게 응답하며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도래하는 그 역사에 참여하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하고 기도한다.


각주
1. 
루터, 《독일 기독교 귀족에게 고함》, 백소영 《세상을 욕망하는 경건한 신자들》 (그린비, 2013), 40쪽에서 재인용. 
2. 기 베슈텔 지음, 전혜정 옮김, 《신의 네 여자》(여성신문사, 2004)에서 소개된 표현들을 모아서 가져왔다.
3. 기 베슈텔, 앞의 책, 75쪽에서 인용.
4. 백소영, 《엄마되기 아프거나 미치거나》(대한기독교서회, 2009), 211-212쪽에서 재인용.
5. 키르시 스티예르나, 박경수 김영란 옮김, 《여성과 종교개혁》(대한기독교서회, 2009), 117쪽.
6. 키르시 스티예르나, 앞의 책, 122쪽.
7. 백소영, “평등한 창조를 부정하는 순종론을 깨라”, 구미정 김진호 이찬수 외.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기획 《교회에서 알려주지 않는 기독교 이야기》(도서출판 자리, 2012), 217쪽. 리랜드 라이큰 지음, 김성웅 옮김, 《청교도-이 세상의 성자들》(생명의말씀사, 2003)에서 여러 쪽에 흩어져 묘사된 내용들을 한데 모아서 재인용.
8. “여성은 아내로서 책임이 있습니다. 여성은 성경 말씀을 비유로 들자면, 교회와 같은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순종과 예배가 있는 곳이지요. 따라서 아내들도 교회로서 순결과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어야 하며 교회로서 예배가 양육의 사역이 요청되는 것처럼 집안에서 자녀들을 돌보고 위해서 중보하는 사역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그리고 남편을 ‘상응하는 돕는 자’로서 남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존경하며, 남편에게 맞추어 나간다면, 그런 아내는 ‘완전한 남자’를 만드는 ‘완전한 여자’가 될 것입니다.” 1999년 강남의 한 대형교회 목회자의 설교 내용도 같은 맥락이었다. 백소영, 《엄마되기 아프거나 미치거나》 (대한기독교서회, 2005), 230-231쪽.
9. Marie Dentiere, 《Defense of Women》, 키르시 스티예르나, 앞의 책, 268쪽에서 재인용.
10. 샬롯 브론테, 《Shirley》(1849), 오정화 《19세기 영국 여성 작가와 기독교》, 14쪽에서 재인용.

 


백소영
이화여대 기독교학과와 미국 보스턴대학교에서 기독교사회윤리학을 공부했다. 이화인문과학원 연구교수를 역임했으며, ‘기독교와 세계’ ‘현대문화와 기독교’ ‘종교와 문화’ 등을 주제로 대학에서 강의하고, 관련 주제를 중심으로 교회 및 시민단체에서도 강연하며 기독교 세계관과 윤리의식의 대중화에 힘쓰고 있다. 저서로는 《세상을 욕망하는 경건한 신자들》 《엄마되기, 힐링과 킬링 사이》 《교회를 교회되게》 《우리의 사랑이 의롭기 위하여》 《드라마 속 윤, 리》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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