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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휴먼 시대에 메시아를 기다린다는 것
[330호 커버스토리]
[330호] 2018년 04월 27일 (금) 11:22:40 신익상 goscon@goscon.co.kr
   
▲ '디지털 혁명'의 3차 산업혁명을 기반으로 하는 제4차 산업혁명은 과학기술과 자본주의가 결합한 결과물이다. (이미지: pixbay.com)

제4차 산업혁명이라는 말과 포스트휴먼이라는 말이 최근 몇 년간 한국 사회에서 유행처럼 논의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이 말들이 무엇을 뜻하고, 어떤 결과들을 가져올까요? 그리고 이 두 말들이 서로 어떤 연관이 있을까요? 만일 이 두 말들이 어떤 시대정신과 관련된 것이라면, 이러한 시대를 살아내야 할 민중의 신앙과 삶은 어떠해야 할까요? 이 지면을 통해서 이러한 궁금증을 풀어나가고자 합니다. 혹시 압니까? 운 좋게 신을 만나는 행운을 누릴지!

1. ‘제4차 산업혁명’이 무엇인가?
제4차 산업혁명은 말 그대로 네 번째 산업혁명이라는 말이지요. 어떤 사람은 제4차 산업혁명이 시작된 것이 아니라 제3차 산업혁명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이 말을 처음 세상에 내놓은 클라우스 슈밥(Klaus Schwab)은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20세기 중후반 세계 산업을 주도했던 제3차 산업혁명은 반도체의 등장과 이를 등에 업고 눈부시게 성장한 컴퓨팅 기술, 그리고 컴퓨터들 사이의 통신을 가능케 하는 인터넷 연결망을 핵심으로 합니다. 그래서 제3차 산업혁명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디지털 혁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4차 산업혁명은 사실 제3차 산업혁명의 유산인 ‘디지털 혁명’을 기반으로 합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제4차 산업혁명이 아니라 ‘제3차 산업혁명의 지속’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지적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슈밥이 제4차와 제3차 디지털 산업혁명을 구분하려고 하는 이유는, 제4차 산업혁명에서의 디지털은 이전의 디지털과 비교할 때 무언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연결’(connection)입니다. 제4차 산업혁명에서는 디지털을 기반으로 이전에는 분리되어 있던 다양한 과학기술들을 융합해서 사회, 경제, 문화 패러다임을 전환합니다. 따라서 제4차 산업혁명이란, 디지털 혁명을 기반으로 1차적으로는 과학기술의 여러 성과를 융합하고, 2차적으로는 여러 사회와 분야를 다양한 상상력으로 연결하여 산업에 실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파급효과는 단지 산업 현장뿐 아니라 국가와 기업을 포함하는 사회 생태계는 물론 가치관과 윤리, 철학에 이르는 인간 문명 전반에 미치게 될 것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4차 산업혁명의 이러한 특징을 담고 있는 유력한 과학기술들을 열거하자면, 사물인터넷(Internet of Things, IoT), 블록체인 기술, 3D 및 4D 프린팅 기술, 클라우드 기반의 로봇 간 네트워킹, 재생 가능한 신소재 개발, 유전자 가위 기술, 바이오프린팅 기술, 5G 이동통신 기술 등 셀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산업기술들이 가리키는 중요한 함의는, 기계와 정보 간의 평등한 민주화가 고도의 효율성을 가능케 하고, 이러한 기술혁신의 결과가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게 되리라는 점입니다. 디지털 기술을 기반으로 한 산업 현장의 ‘연결’이 산업 현장으로부터 인간 노동을 ‘분리’해낼 가능성이 크다는 말입니다.

   
 

2. ‘포스트휴먼’은 또 무엇인가?
제4차 산업혁명은 무엇보다 과학기술과 자본주의가 결합한 결과입니다. 이 결과가 인간 문명 전반에 미치는 영향을 숙고할 때 우리는 제4차 산업혁명을 말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이 영향이 인간 자신에게 미치는 경우를 생각하면 포스트휴먼(posthuman) 논의가 됩니다. 과학기술의 발전이 ‘인간 향상’(human enhancement)을 가져올 때, 그것이 인간에게 뜻하는 바는 무엇이며 가져올 결과는 무엇일까요?

사실, 포스트휴머니즘에 대한 생각은 아직 잘 정리되어 있지 않아서 다양한 용어가 때로는 혼용되거나 때로는 분리되어 사용됩니다. 트랜스휴머니즘(transhumanism)과 포스트휴머니즘으로 나누는 사람(신상규)이 있는가 하면, 분석적 포스트휴머니즘과 비판적 포스트휴머니즘으로 나누는 사람(로지 브라이도티)도 있고, 이러한 구분의 경계를 넘나들며 모호하게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여기서는 한동대학교 손화철 교수가 이반 칼루스(Ivan Callus)와 스테판 헤르브레흐터(Stefan Herbrechter)의 정의를 받아들여 사용하고 있는 ‘포스트휴먼-이즘’(posthuman-ism)과 ‘포스트-휴머니즘’(post-humanism)을 사용해서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트랜스휴머니즘이나 분석적 포스트휴머니즘은 포스트휴먼-이즘으로, 비판적 포스트휴머니즘은 포스트-휴머니즘으로 생각하면 대략 맞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통칭해서 포스트휴머니즘이라고 하면 되지 않을까 합니다.

과학기술에 힘입어 건강하게 수명을 연장하거나, 지능이 향상되거나, 정서적이고 도덕적인 능력이 탁월해지거나 하는 등의 향상을 통해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존재, 즉 포스트휴먼의 출현이 가능하리라는 낙관적 기대를 강조하는 경우를 포스트휴먼-이즘이라고 합니다. 반면, 인간 중심적인 생각을 비판함으로써 인문주의(humanism)를 극복하려고 시도하는 경우는 포스트-휴머니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로지 브라이도티(Rosi Braidotti)는 인문주의가 제시하는 서구 백인 남성 중산층 중심의 평균적인 인간상을 비판하는 반(反)-인간중심주의 전통에 서서, 인간과 인간 아닌 모든 대지의 존재들과의 상호연결성을 통해 확장된 주체를 떠올리는 것을 비판적 포스트휴머니즘, 즉 포스트-휴머니즘이라고 부릅니다.

포스트휴먼-이즘이건 포스트-휴머니즘이건 연결과 확장을 통한 향상을 말한다는 공통점이 있기에 모두 포스트휴머니즘입니다. 하지만 포스트휴먼-이즘은 이러한 향상을 인간‘의’ 향상으로 본다면, 포스트-휴머니즘은 인간 ‘아닌’ 향상이라고 본다는 점에서 결정적으로 차이가 나지요.

이렇게 되면 포스트휴먼을 떠올릴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연결과 확장을 통해 향상된 존재로서 포스트휴먼은 인간인가, 아니면 인간이 아닌가?” 포스트휴머니즘은 모두 인간에서 벗어나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인 것 같기는 한데, 그것이 벗어나서 도달하려는 것이 ‘바로 그’ 인간인지, 아니면 ‘인간 아닌’ 인간인지 아리송합니다.

3. 연결되다 = 벗어나다
여기서 잠깐 제4차 산업혁명과 포스트휴머니즘이 연결되는 지점을 명확하게 하고 넘어갈까요? 제4차 산업혁명의 핵심어는 ‘연결’이라면, 포스트휴머니즘의 핵심어는 ‘벗어남’입니다. 그리고 둘 다 과학기술과 자본주의의 동맹을 통해서 성장합니다. 둘 다 출신이 같습니다. 그렇다면 혹시, 제4차 산업혁명의 ‘연결’과 포스트휴머니즘의 ‘벗어남’은 동일한 길을 가게 되지 않을까요?

앞서 말한 것처럼, 제4차 산업혁명의 ‘연결’은 노동의 ‘소외’를 가져올 가능성이 있습니다. 조금 어렵게 말해서, 제4차 산업혁명의 과학기술은 한계비용 제로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생산량을 올리려면 그만큼 투자를 더 해야 할 텐데, 이렇게 생산량을 일정하게 올리는 데 드는 비용을 한계비용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제4차 산업혁명의 산업 현장에서는 아무리 생산량을 늘리더라도 추가로 비용이 들지 않는 한계비용 제로인 사회를 실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꿈같은 사회를 이룩할 가능성은 유감스럽게도 인간이 아니라 연결된 디지털 기계들에 있습니다. 지능을 가진 기계들의 네트워킹이 만들어내는 고도의 생산 효율성에 의해서 인간 노동은 일할 수 있는 공간을 빼앗기게 될지도 모르는 것이지요. 이러한 상황은 제1차 산업혁명의 기계들이 인간의 노동을 대체했을 때와는 또 다른 상황입니다. 당시의 기계들은 한계효용 제로와는 거리가 있었거든요. 그래서 인간의 노동이 새롭게 형성된 일자리에서 가치를 실현할 수 있었지요. 하지만 제4차 산업혁명의 지능 기계들 앞에서 인간의 노동은 설 자리를 잃고 맙니다. 역설적이게도, 인간의 노동이 가치가 없어서가 아니라 단지 그러한 노동이 필요 없어서 그렇게 됩니다.

다른 방식의 노동 소외를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이른바 저임금 불안정 노동 계급 ‘프레카리아트’(precariat, ‘불안정한’이라는 의미의 이탈리아어 프레카리오[precario]와 노동 계급을 뜻하는 독일어 프롤레타리아트[proletariat]의 합성어)의 양산입니다. 기계들의 민주적이고 고도로 효율화된 연결망이 인간에게 적용되어 탄생하게 된/될 ‘휴먼 클라우드’(human cloud) 방식의 노동 소비는 불안정하고 잉여적인 노동, 단적인 예로 비정규직을 확대하게 됩니다.

결국, 제4차 산업혁명은 자본주의 시스템을 바탕으로 과학기술의 성과를 연결하여 이룩되는 것이기에, 자본주의가 가질 수 있는 한계를 계승합니다. 즉 자본이 거둘 수 있는 성과에서 노동은 쉽게 분리됩니다. 디지털 기반의 연결이 인간을 노동에서 벗어나게 할지 모르지만, 그러한 벗어남이 유토피아인지 디스토피아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과연 자본은 고효율의 기계 노동이 생산한 잉여가치를 인간은 물론 자연과 기계를 포함한 모든 존재와 공유할까요?

   
▲ 포스트휴먼 시대에는 노동과 '인간 향상'으로부터 소외되는 '남겨진 자들'이 등장할 것이다. (이미지: www.pixbay.com)

4. 포스트휴먼의 시대정신: 특별히 새로울 것 없는 새로움
제4차 산업혁명과 출신이 같은 포스트휴머니즘 또한 자본주의의 욕망과 그 한계를 공유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포스트휴먼의 시대정신은 자본주의적 시대정신에서 더 많이 나아가긴 힘들 것 같습니다. 그것은 특별히 새로울 것 없는 새로움입니다.

포스트휴먼-이즘의 관점에서 볼 때, 인간 향상은 인간이 자신을 초월해서 새로운 인간으로 도약할 수 있도록 하는 발판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향상은 모든 존재에게 발판이 되어줄까요? 인간 향상은 자동차나 핸드폰같이 처음에는 일부 사람의 ‘특혜’였다가 나중에는 모든 사람의 ‘일상’이 될 수 있을까요? 인간 향상이 처음부터 모두에게 열린 것이 아니라면, 인간 향상의 불평등한 적용으로 인한 인간 간의 차이가 발생할 텐데, 인간 향상은 말 그대로 인간의 인간다움 자체를 변화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만일 이러한 변화가 인간다움이라는 관념을 포용적으로 확장하는 일에 실패하여 더 나은 인간다움과 덜떨어진 인간다움의 구분으로 이어진다면, 인간 향상은 인간 차별로 이어질 공산이 큽니다. 인간‘의’ 벗어남이 새로운 ‘분리’로 귀결할 수 있지요.

그럼 포스트-휴머니즘의 관점에서 볼 때는 어떨까요? 포스트-휴머니즘은 인간을 자연보다 우월하게 여긴다거나, 인권을 떠올릴 때 은근히 유럽의 백인 중산층 남성을 인간의 표준으로 생각하게 만든다거나 하는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는 일에 기계의 참여를 마다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말하자면, 인간들 사이의 평등한 상호관계나 인간과 자연 사이의 평등한 상호관계는 인간과 기계 사이에도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생각은 인간에 대한 관념을 아주 유연하게 생각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편견과 차별에 사로잡히지 않고 인간을 비롯한 만물을 대할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끕니다. 하지만 포스트-휴머니즘이 차별 철폐를 통한 만물의 해방을 인간계와 생태계를 넘어 인공물의 차원에까지 확장하려면 연결과 확장을 통해 기존의 인간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더 명확하게 밝혀야만 합니다. 모든 인간과 사회제도가 동시에 인간중심적인 인간 개념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결국 여기에서도 벗어난 것과 벗어나지 못한 것 사이의 다양한 차이가 발생할 텐데, 이러한 차이가 차별과 소외로 남지 않으리라는 확신과 이 확신을 현실로 옮길 방안이 나와야 하니까요.

5. 남겨진 자들, 새로운 메시아를 요구하다
결국, 제4차 산업혁명의 ‘연결’이건 포스트휴머니즘의 ‘벗어남’이건 적어도 하나의 중요한 문제에 봉착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남겨진 자들’(remnants)의 문제 말입니다. 그리고 이 문제로부터 ‘과연 포스트휴먼의 시대에 복음의 역할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 시작됩니다.

포스트휴먼 시대에는 노동으로부터 소외되고, 인간 향상으로부터 소외되는 자들이 남겨진 자들로 등장할 것입니다. 이들은 노동으로부터 소외된 자들이기 때문에 자본주의적 시대정신이 연장되고 있음을 반영하고, 인간 향상으로부터 소외된 자들이기 때문에 포스트휴먼의 시대정신이 개시되었음을 반영합니다. 남겨진 자들은 지속(자본주의)과 단절(포스트휴먼)에 이중으로 포위된 채 새로운 메시아의 도래를 기다립니다.

6. 다시, 민중(사건)은 메시아다
저는 포스트휴먼 시대의 남겨진 자들 속에서 민중을 다시 소환하자고 제안합니다. 왜냐하면, 민중이 메시아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민중은 포스트휴먼 시대 역사의 주체가 아닌 실패자이거나 낙오자일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현실에서 늘 억눌리고 빼앗김을 당하는 존재일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따돌림을 당하고는 힘과 풍요의 뒤안길에 버려져 남겨진 자들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동시에, 민중은 하나의 사건이기 때문에 단순히 “너희는 실패자야” “너희는 낙오자야” “너희는 억눌리는 자야” “너희는 빼앗기기만 하는 자야”라고 하면서 규정하는 말들을 덧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사건은 그 성격상 벌어져서 역사에 흔적을 남기고는 이내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건은 역사의 매 순간 격렬하게 반짝이다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고정된 규정에서 자유롭습니다. 반면에 그 사건이 의미 있는 사건이라서 오늘에 다시 소환될 필요가 있는 것이라면, 즉 만일 ‘민중 사건’이 되살아나려면 그것은 또 다른 새로운 사건을 통해서만 되살아날 수 있습니다.

‘예수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예수가 당대의 민중과 함께 민중 사건에 참여했다면, ‘예수 사건’이 오늘에 되살아날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 사건의 민중적 성격을 공유하고 있는 오늘의 구체적 민중 사건을 매개로 해야 합니다. 더욱이, 만일 예수 사건이 메시아 사건이라면 오늘의 민중 사건 속에서 메시아적인 어떤 것이 드러나야 합니다.

그런데 ‘메시아적인 것’이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어떤 긴장 상태를 말합니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과의 긴장 상태를 표시합니다. 예를 들어 예수가 메시아라는 말은 인간인 예수가 메시아 사건에 놓이는 순간, 단지 인간이기만 한 것이 아닌 어떤 것과의 긴장 상태 속에 놓이게 된다는 뜻입니다. 인간적인 것을 넘어서는 신적인 것이 인간 예수 내부로부터 부상해서는 인간의 인간다움을 초월하는 힘을 충동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힘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시대정신이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드는 전체적인 힘에 의문을 제기함으로써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메시아 사건에서는 이러한 의문 제기는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 ‘자체’입니다. 예수의 존재 자체가 억압하는 제국, 탐욕스러운 종교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었기에 예수 사건도 메시아 사건일 수 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포스트휴먼 시대에 남겨진 자들, 연결과 벗어남 사이에서 분리되는 자들이야말로 예수의 메시아 사건을 계승할 수 있는 민중들입니다. 이들의 존재 자체가 포스트휴먼의 시대정신이 품고 있는 야망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따르는 이들은 그 자신이 남겨진 자들이건 아니건 관계없이 남겨진 자들을 민감하게 발견하고, 남겨진 자들의 목소리를 지지함으로써 메시아 사건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제 민중-메시아는 포스트휴먼 시대를 예감하며 복음을 따르는 이들을 통해 포스트휴먼과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신익상
성공회대 신학연구원 연구교수이자 한마음감리교회 부목사다. 한국기독교학회 행정주간, KCRP 종교간대화위원회 위원, 사단법인 교회환경연구소 소장 등을 맡고 있다. 《변선환 신학 연구》 《이제 누가 용기를 낼 것인가?》 등의 책을 지었고, 존 폴킹혼의 《과학으로 신학하기》를 우리말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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