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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주의 해석학을 옹호하며
[342호 신학서 읽는 네 가지 시선]
[342호] 2019년 04월 29일 (월) 14:14:33 최경환 goscon@goscon.co.kr
   
 

1. 저자의 관심: 해석학과 교회 사이
교회는 어머니다. 우리 세대 대다수 그리스도인은 중고등학교 시절 교회에서 회심을 경험했다. 그래서 좋든 싫든 교회와는 애증 관계에 있다. 마치 잔소리하는 어머니가 짜증 나면서도 멀리 도망가지 못하는 자식처럼. 그러다가 대학(university)에 들어가 우주(universe)를 만난다. 마치 동굴 밖을 뛰쳐나온 철학자처럼 갑자기 새로운 세상을 접하고 어리둥절해진다. 처음에는 무신론자들이 득실거리는 캠퍼스에서 나름 기독교 변증에 열을 올리며 세계관 공부를 하기도 하고, 이런저런 아카데미를 기웃거리기도 한다. 당연히 교회를 보는 눈이 이전과 같을 순 없다. 어느 순간 ‘그동안 내가 기독교에 속은 거 아니냐?’라는 의심이 쑥 올라온다.

나는 이런 위험한 줄타기를 20년째 해오고 있다. 주위에 나와 비슷한 삶을 사는 이들이 의외로 만다는 사실에 약간의 위로를 얻는다. 이 책의 저자 메롤드 웨스트팔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아버지는 목사였고, 어머니는 중국 선교사가 되려고 했다. 매우 보수적이고 경건한 가정에서 자란 웨스트팔은 스스로 자신의 배경은 ‘반지성적 근본주의’였다고 말한다. 그러다 휘튼 대학교에서 역사학을 공부하고 철학을 공부하면서 소위 세속 학문의 매력에 푹 빠졌다. 칸트와 헤겔, 그리고 키에르케고르를 공부하면서 인식의 지평이 넓어졌다.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를 통해 신앙과 의심의 관계에 관심을 기울였고, 가다머, 레비나스, 현대 프랑스 철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면서 해석학, 미학, 종교철학 분야로 영역을 넓혀갔다. 그리고 이제는 영미권에 대륙 철학을 가장 잘 소개하는 철학자로 인정을 받고 있다. 

이 책은 오랜 시간 해석학을 연구한 철학자가 책 제목 그대로 해석학과 교회 사이에 가교를 놓는 창의적이면서 대중적인 작품이다. 그런데 그가 제시하는 해석학은 우리의 선입견을 여지없이 무너뜨린다. 교회가 상대주의 해석학을 수용한다고 큰일 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는 그동안 저자가 살아온 신앙 여정과 비슷하다. 오히려 상대주의 해석학은 ‘이것이야말로 유일한 해석이다’라고 말하는 해석학적 오만과 ‘어떤 것이든 다 좋다’는 식의 해석학적 무정부주의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는 건강한 태도라 할 수 있다. 정말 그럴까?

2. 비평가의 시선: 해석은 연주다
성서를 공부하는 신학생이든, 설교를 준비하는 목회자든, 혹은 인문학에 관심 있는 학생이든 결국에는 해석학으로 공부가 귀결되는 듯한 경험을 하게 된다. 전공이 뭐든 한 번쯤 해석학을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데 막상 가다머나 리쾨르의 책을 읽는다든가, 해석학 개론 책을 읽어도 이해를 위한 진입 장벽이 상당히 높아서 쉽게 포기하거나 절망하게 된다. 더 중요한 사실은 정작 그런 책을 읽어도 본인이 얻고 싶은 내용을 얻기 힘들다는 거다. 해석학이 성서 해석에 왜 필요하고, 교리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고 싶지만, 명쾌하게 말해주는 책이 별로 없다. 이 책은 정확하게 이런 필요를 채워주기 알맞은 책이다. 해석학의 문제의식과 중요한 지점을 적절하게 뽑아주면서도 그것이 어떻게 신학에 적용되고 유효한 통찰을 줄 수 있는지 잘 설명하고 있다.

저자는 기본적으로 해석의 다원성, 상대주의 해석학을 옹호한다. 해석학적 상대주의는 ‘어떤 해석이든 다 좋다’는 태도가 아니다. 또 그로 인한 해석의 무정부 상태를 옹호하는 것도 아니다. 웨스트팔은 해석학의 역사를 알기 쉽게 개괄하면서 가다머의 해석학을 비중 있게 소개한다. 해석은 마치 연주와 같다. 이것은 단순히 유비가 아니라 실제적인 것이다. 시대를 가로질러 혹은 동시대에도 연주자들은 같은 악보를 보고 저마다 다른 연주를 한다. 연주자의 느낌과 감정 그리고 실력에 따라 전혀 다른 연주가 가능하다. 저마다 서로 다른 연주를 하기 때문에 상대주의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어떤 연주가 정도에 벗어난 연주인지 분별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연주자는 악보라는 테두리 안에서 연주한다. 그렇기에 그 안에서 상대주의와 다원성이 인정되는 것이다. 해석학적 상대주의를 옹호한다고 해서 텍스트의 권위가 추락한다거나 해석의 무정부 상태로 빠지지 않는 이유다. “만일 해석이 제멋대로 주관적인 것이 되지 않으려면 대본, 악보, 텍스트의 제약에 종속되어야 할 것이다.”(168쪽) 그러나 연주는 언제나 새로운 사건이고 생산적인 활동이다. 언제나 기존의 연주를 뛰어넘는 새로운 연주자가 등장하고, 전혀 다른 감흥을 주는 또 다른 해석이 나오기 때문이다.

해석학을 배운다는 것은 결국 겸손함과 타자에 대한 존중을 배우는 것이다. 나만의 해석이 절대적이고 유일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기에 겸손할 수 있다. 또한 상대방의 해석도 충분히 좋은 해석일 수 있음을 받아들여야 하기에 타자를 존중하는 태도를 배울 수 있다. 설령 그 해석이 나에게는 너무나 이질적이고 심지어 위협적으로 다가오더라도 말이다.

문제는 남아있다. 생각을 극단으로 밀어붙여보자. 편곡자가 원곡을 파괴하는 수준으로 변형을 많이 했다면 어떻게 될까? 편곡자가 어떤 곡을 편곡했는지조차 관객이 헷갈린다고 한다면? 기독교 교리에 적용해보자. 교리를 재해석하고 변형하고 수정했을 때, 어느 정도, 어디까지 할 수 있는 걸까? 삼위일체론과 기독론을 새롭게 해석해서 기존 교리와 전혀 다른 의미를 생산했을 경우, 우리는 그것을 여전히 기독교라는 범주에 넣을 수 있을까? 기독교 교리에서 건드려서는 안 될 핵심 교리라는 것이 있기는 한 걸까? 성육신과 부활이 그런 개념일까? 더 심층적으로 질문하자면, 의미는 누가 부여하는 것이고, 권위는 어디로부터 주어지는 것일까? 계속해서 질문을 던질 수 있다면 책을 잘 읽은 것이다.

3. 편집자의 선택: 번역자, 출판사, 에라스무스 연구소
번역자 이야기를 안 할 수 없다. 김동규 박사를 처음 만난 건 그가 신학대학교를 막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할 때였다. 우리 둘은 서로 비슷한 고민과 비슷한 관심을 공유하고 있었다. 신학을 공부했지만 철학과 인문학에 관심이 많았다. 그리고 소위 학교 밖 아카데미 판에서 책 읽기 모임과 세미나를 하면서 재미있게 하고 싶은 공부를 했다. 그렇게 10년이 지났다. 그동안 서서히 대학이 몰락하는 과정을 지켜보고, 기독교 신학이 점점 실용적인 학문으로 전락하거나 특정 교파만을 무비판적으로 옹호하는 모습을 봐왔다. 이건 아니다 싶었다. 젊은 연구자들은 점차 설 자리가 없어지고 이제는 생계를 고민하면서 각자도생의 길로 접어들었다. 마지막 도전이라는 심정으로 그렇게 ‘인문학&신학연구소 에라스무스’를 만들었다.

이 책은 도서출판100의 도움을 받아 에라스무스 총서 1권으로 만들어졌다. 도서출판100은 김지호 대표가 운영하는 1인 출판사다. 그 역시 철학과 신학에 관심이 많은 젊은 사업가다. 총서 1권으로 웨스트팔의 이 책을 김동규 박사가 도서출판100에서 출간했다는 것 자체가 에라스무스의 성격과 방향을 잘 보여준다. 신학과 인문학을 함께 존중하면서 어느 것 하나를 무시하거나 환원하지 않는 에라스무스의 정신, 젊고 재능 있는 연구자들이 자신의 연구를 눈치 보지 않고 맘껏 펼칠 수 있는 공간,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삶에 도움을 주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더욱 풍성하게 전달하는 소통 능력, 이 모든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책이 나온 것이다.

출판 마케팅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중 하나가 ‘발견성’이다. 수많은 책들이 계속해서 쏟아져 나오기 때문에 좋은 책이 나와서 독자의 손에 도달하기까지는 꽤나 많은 장애물과 변수가 존재한다. 그래서 출판사마다 어떻게든 효과적으로 책을 알리고 홍보하기 위해 애를 쓴다. 아카데미 혹은 연구소가 출판사와 함께 북토크나 강독회를 진행하는 것은 서로 상생할 수 있는 좋은 전략이다. 출판사에서 제공하는 일종의 A/S라 할 수 있다. 어려운 책일수록 함께 모여서 책을 읽고 토론하는 문화가 더 확산되어야 한다. 에라스무스 연구소가 앞으로 출판사와 함께 기독교 인문학의 생태계를 건강하게 만든다면, 한국 기독교의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바꿀 수 있지 않을까.

4. 독자의 취향: 교회
요즘 오프라인 독서 모임이 인기다. 돈을 내고서라도 취향이 비슷한 사람끼리 함께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콘셉이 매력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면 말이 하고 싶어진다. 글도 쓰고 싶다. 그야말로 해석 공동체를 만들고 싶고, 그런 공동체에 참여하고 싶어진다. 원래 교회는 그렇게 탄생했다. 성서를 읽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의 삶을 나누는 공동체가 교회였다. 하지만 이젠 그 어떤 교회에서도 자신이 읽은 성서의 내용을 나누지 못한다. 아니 나누지 못하게 한다. 성서를 해석하는 건 목사만의 영역이니깐. 사실 그걸 깨뜨리기 위해 종교개혁이 일어났지만 지금 한국교회는 다시 성서 해석의 권한이 목회자에게만 귀속되어 있다. 내가 읽고 내가 해석한 내용을 편하게 이야기하고 싶은데 그걸 막으니 결국 교회를 나올 수밖에.

독서 커뮤니티 공동체를 표방하는 어느 회사 대표는 앞으로 자신의 회사가 대학교와 교회의 대안이 될 거라고 말한 바 있다. 대학은 점점 상업화되어 상아탑의 기능을 상실하고, 교회는 공동체성을 상실한 채 원자화된 개인들이 자신의 영성 목마름을 채우기 위해 들락거린다. 사람들이 독서 커뮤니티에서 소속감을 느끼고, 진지하게 공부하는 이유가 다 있다. 앞으로 이렇게 다양한 공동체 실험과 도전은 계속될 것이다. 교회는 대화하는 곳이다. 그게 아니라면 그냥 집에서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고 유명한 강사에게 성경 강해를 들으면 그만이다. 서로의 이야기를 경청해주고, 성서에 비추어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나누는 곳이 교회다. 동시에 교회는 끊임없이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새로운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공동체다. 교회는 완전한 공동체도 아니고, 완전해서도 안 된다. “교회들은 해석학적 유한함과 타락함 가운데 있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공동체이기” 때문이다(252쪽).

쉽고 가벼운 책을 읽을 때 느끼는 기쁨과 재미도 무시할 수 없지만, 묵직하고 진지한 책을 읽을 때 찾아오는 감동은 훨씬 깊은 여운을 남긴다. 이 책을 통해 현재 자신의 지평을 돌아보고, 교회의 정체성을 되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지평과 정체성에 계속 물음을 제기할 수 있고 비판할 수 있다면 이 책의 소임은 다한 것이다. 해석 본연의 임무는 끊임없이 대화하고 변혁하는 것이기에.

 

최경환
대학과 대학원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했고, 남아공 프리토리아 대학교에서 공공신학을 연구했다. 현재는 과신대(과학과 신학의 대화) 기획실장으로 일하면서 인문학&신학연구소 에라스무스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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