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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스〉와 〈그때 그들〉, 그리고 ‘지금 우리’
[342호 최은의 시네마 플러스] 〈바이스〉(2018)와 〈그때 그들〉(2018), 그리고 ‘지금 우리’
[342호] 2019년 04월 29일 (월) 14:34:07 최은 goscon@goscon.co.kr
   
 

‘조용히 있다가 사고치는’ 그 사람, 딕 체니
조지 W. 부시의 만행은 익히 잘 알려져 있지요. 9.11 테러 이후 알카에다를 응징하겠다고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고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한 것, 대량학살무기를 핑계로 이라크를 침공한 것은 모두 부시 정부 시절의 일이었습니다. 〈빅쇼트〉(2015)를 연출한 아담 맥케이의 최근작 <바이스(Vice)>(2018)는 아들 부시 대통령의 배후에서 악(Vice)을 도모한 실세로 부통령(Vice president) 딕 체니를 지목합니다.

“조용한 사람이 실상은 가장 위험하다. 그는 가만히 있다가 기회를 잡아 모든 것을 파괴한다” 였던가요. 〈바이스〉는 어느 ‘무명씨’의 말을 인용한 문장으로 딕 체니(크리스찬 베일)의 행적을 요약합니다. 이후로 줄곧 은유를 사용하는데요. 정치를 낚시에 비유하고, 체니가 주도해서 개악한 법안들을 만찬 코스 메뉴로 구성해서 요리사가 소개하고, 내각 구성의 실상을 보드게임으로 보여주는 식입니다.

낚시하는 사람이 조용히 ‘때’를 기다릴 줄 알아야 하듯이, 체니는 숨어들어야 할 때와 낚싯대를 휘둘러야 할 때를 알아차리는 동물적인 감각을 갖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백악관 최연소 수석으로 이름을 날리고 차기 대권주자 서열이 한참 올라가던 시절, 딕 체니는 정계를 은퇴하는데요. 보수적인 공화당 후보로 나서기에는 치명적인 결격사유(?)가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둘째 딸 메리가 레즈비언으로 커밍아웃을 했거든요. 그가 물러선 이유가 선거에 질 것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딸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바이스〉의 딕 체니에게 혹시 연민을 느낄 수 있다면 그가 아버지로서 보여준 이 결단 때문입니다.

그런데 조지 W. 부시가 대권에 도전하면서, 사업가로 승승장구하고 있는 딕 체니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이번에는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미끼를 던져야 할 타이밍이었죠. 부통령의 권한을 확대하는 조건을 내건 체니의 미끼를 – 체니 말에 따르자면 - “아버지에게 인정받는 것이 지상최대의 관심사인” 아들 부시는 덥석 물어 삼킵니다. ‘네오콘(신보수주의자)’의 사실상 수장으로서, 체니는 부시의 위기를 자신의 기회로 바꾸어 갑니다. 마케팅 전문가와 언론을 동원해 여론을 조작하고, 변호사들을 거느리며 교활하게 법 위에 올라선 그를 보고 있자면 법은 ‘해석하기 나름’이고 결국 강자를 위해 작동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개탄하게 됩니다.

부통령직을 수락하면서 사임한 회사 ‘핼리버튼’에서 체니는 예상보다 거액의 퇴직금을 수령했습니다. 그리고 아프가니스탄 침공과 이라크전 이후, 유전 서비스와 건설 회사인 핼리버튼의 주가는 500% 상승했다는 후문입니다. 재치 있는 영화 〈바이스〉는 막바지에 다시 한 번 은유를 동원하는데요. 체니의 정치 생명이 연장되는 것을 심장이식 수술로 표현했어요. 부시 정부의 숨은 권력은 이라크 참전 용사였던 한 젊은이의 심장을 떼어 달고 살아남았답니다.

베를루스코니의 ‘별장’이 풍기는 냄새
얼마 전 개봉했던 파올로 소렌티노 감독의 〈그때 그들(Loro)〉(2018)도 현존 정치인을 다룬 영화입니다. 1994년부터 2011년 사이에 총 세 차례나 이탈리아 총리를 지낸 실비오 베를루스코니가 영화의 주인공입니다. 이탈리아 재계 1위 부호로서 세금 포탈과 마피아 연루 부정부패, 사법농단, 성 스캔들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정치인이죠. 영화 초반부터 등장하는 ‘별장 성 접대’ 장면과 베를루스코니의 별장에서 벌어지는 섹스 파티가 낯설지 않아서 오히려 슬픈 블랙코미디입니다.

   
 

다만 〈그때 그들〉은 폭로과 고발을 목적으로 하는 영화는 아닙니다. 가장 팽팽한 긴장을 보이는 장면은 의외로 아내인 베로니카(엘레나 소피아 리치)와 실비오(토니 세르빌로)가 언쟁하는 영화의 후반부였어요. 어려운 책을 읽고 심오한 조각을 하고 구도에 열중하는 베로니카에게 실비오의 천박함은 참을 수 없는 것이었죠. 마침내 베로니카가 이혼을 요구하자, 실비오는 조목조목 따집니다. 당신이 누리는 그 예술과 철학과 종교는 무엇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냐고 말이죠. “당신은 길고 괴로운 삶의 책임을 떠안는다고 생각했겠지 … (하지만) 당신은 내 돈 덕분에 치욕과 쓰레기로 가득한 인생을 외면할 수 있었어!” 그간 어떤 비난과 모욕에도 입 꼬리가 광대까지 올라간 특유의 미소를 거두지 않았던 그가 여기서는 흥분을 참지 못합니다. 파올로 소렌티노의 페르소나인 토니 세르빌로의 연기가 압도적인 장면이기도 하죠. 전작 〈그레이트 뷰티(The Great Beauty)>(2013)와 〈유스(Youth)〉(2015)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젊음과 늙음, 아름다움과 추함 사이에 언뜻 내비치는 슬픔의 순간, 그리고 어쩌면 추함 때문에 지속가능했던 고상한 아름다움에 대한 묘사가 서늘합니다.

결국 실비오는 베로니카를 붙잡지 못해요. 별장의 여인들 중 하나였던 스텔라(앨리스 파가니)의 말 때문이었다고, 그는 오랜 친구에게 고백합니다. 스텔라는 거기서 유일하게 파티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실비오가 그를 낙점했을 때, 스텔라는 그에게서 “할아버지 냄새가 나서” 꺼려진다고 말합니다.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은, 그냥 할아버지 입 냄새라고요. 여전히 입꼬리가 올라간 미소를 짓고 있지만 실비오는 상당히 충격을 받은 얼굴입니다. 스텔라는 그가 안쓰럽고 슬프다고 했어요. 슬픔으로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면서요. 그리고 이내 별장을 떠납니다.

우리의 ‘늙음’과 수치심에 대하여
한 시대를 풍미했던, 하지만 이제 늙은 두 정치인을 다룬 영화들을 보며 다시 한국교회를 생각합니다. 우리도 혹시 그렇게 늙어버린 것은 아닐까요? 어색한 미소로 감정을 덮어둔 안쓰럽고 슬픈 얼굴과 할아버지의 입 냄새를 깨우쳐줄 ‘스텔라(별)’들은 어디로 가버렸나요? 벌써 여러 번 발작을 일으킨 늙은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펄떡이는 심장을 내주어야 했던 이들은 누구일까요? 우아하고 고상한 얼굴을 하고 안락한 교회에서 우리의 구원과 심신의 평안을 누리는 일과 베를루스코니(라고 쓰고 김학의라고 읽는)의 ‘별장의 광란’은 과연 무관한 일일까요? 혹시 우리 교회의 건축 헌금은 바로 그 별장에서 건너온 것이 아닐까요?

“이 나이가 되면, 실비오. 더는 창피함을 참을 수 없게 되는 겁니다.” 실비오의 별장에 초대받아 왔던 한 상원의원은 이렇게 말하며 그의 회유와 은밀한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두 영화는 상상력을 동원해서 그들에게 창피함을 덜어낼 방법이 있었다고 가정하는데요. 체니에게는 성소수자인 딸을 위해 정계를 은퇴했을 때, 말 그대로 낚시나 하며 노년을 평온하게 맞았으면 어땠을까, 묻고요(〈바이스〉는 영화 중반, 이 대목에서 가짜 엔딩 크레딧을 올리는 익살을 보여줍니다). 실비오에게는 제멋대로 나라를 ‘사랑하는’ 대신 재난을 당한 주민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그리스도와 틀니–을 선물해주는 게 좋겠다고 제안합니다. 물론, 현실의 두 노인은 상상할 수도 없었던 실천이었겠지요. 체니와 실비오에게 주어진 영화적인 상상력과 기회가, 또는 그들을 거절할 수치심이 아직 우리에게는 남아 있을까요? 우리가 그렇게까지 늙어빠지지는 않았다고 제발 말해주세요.

 

최은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에서 영상예술학 영화이론 전공 박사학위를 받았다. 중앙대와 청어람아카데미, CBS TV 아카데미 ‘숲’에서 강의했다. 영화평론가로 대중영화가 동시대 관객과 소통하는 방식에 관한 책을 집필하면서, 부르심에 따라 비정규직 말쟁이 글쟁이의 삶을 충실히 살고 있다. 저서로는 공저인 《영화와 사회》 《알고 누리는 영상문화》가 있다. 영상문화연구소 ‘필름포스’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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