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9호 커버스토리] 돼지를 생각하다

▲ 엘륄은 말한다. 기술은 자체의 논리를 따르면서 스스로 성장한다고. 민주주의를 무시하고, 천연자원을 고갈시키며, 문명을 획일화할 거라고.
   
▲ 자끄 엘륄. (사진: CC BY-SA-4.0 / Jan van Boeckel, ReRUN Productions)

오늘날 기독교가 한편으로 자연의 파괴에 영향을 미치고 다른 한편으로 권위주의적이고 중앙집권적인 국가 체제 설립에 영향을 끼친 사실을 비판하는 것에 일반적으로 동의한다. 이는 아주 단순한 방식으로 과장된 것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그들 간에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 살펴보는 것은 흥미로운 작업이 될 것이다. 내 생각에는 이 모든 것은 간결한 문장 하나로 설명될 것 같다. 즉, “기독교는 불을 사용했지만, 불을 제어하지 못했다!”

우리는 그 개요를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정리해볼 수 있다. 먼저, 예언자들의 메시지의 뒤를 이은 예수의 가르침을 통해, 권력, 법률, 사회학적 도덕, 종교 등의 모든 것으로부터 인간의 해방이 선포되었다. 그래서 원래 기독교는 하나의 ‘종교’가 아니었고 그 자체가 ‘종교’가 되지 말아야 했기 때문에, 내가 생각하는 정통 기독교, 즉 초기 기독교 세대의 기독교는 종교들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켰다. 기독교는 사물과 자연에 결부된 전통적인 신성한 것을 파괴했다. 다음으로 기독교는 자신의 환경과 세상에 대한 인간의 자유롭고 완전한 통제를 선언하였다. 그런 환경과 세상에서 기독교는 절대적인 지배자처럼 나타났다. 하나님은 인간을 자유롭게 하였다. 이는 인식할 수도 없고 파악할 수도 없는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초월적인 만큼 더더욱 그러하다.

마침내 기독교는 극단적으로 개인화되어 갔다. 즉, 기독교에서는 그 어떤 사회 집단이 지니는 가치보다 개인의 가치를 더 우선시했다. 예수의 가르침에서 중요했던 것은 바로 군중과 대중에서 떨어져 나온 ‘너’였다. 그런데, 이는 사람이 견딜 수 없는 상황이었다. 말하자면, 기독교의 메시지에는 제시된 요점 하나하나마다 대위법(對位法)1이 있다. 예를 들어, 인간은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는 했지만, 이는 오로지 그가 하나님께로 귀의하는 경우에만 생각할 수 있는 것이었고, 그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경우에만 생각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인간은 개인이 되기는 했지만, 이는 그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다른 유형의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는 경우에만 받아들일 만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공동체는 다른 모든 공동체의 역할을 지녀야 하면서도 다른 식으로 근거를 둔 공동체, 곧 ‘교회’이다.

인간은 더는 신성하지 않은 세상에 대해 제약 없는 지배력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그 세상을 바로 하나님의 창조물로 간주한다는 조건에서 그러했다. 달리 말해, 신성한 것이 이 세상 속에 더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이 세상은 하나님이 만든 작품이자 하나님이 준 선물이므로 전적으로 완전히 존중받아야 했다는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우리는 이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초월적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면서도 우리는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강생했으며,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지상에서도 갖게 되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다른 종교들의 신들만큼 우리와 가까이 있었고, 심지어 그 신들보다 훨씬 더 가까이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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