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0호 레드레터 크리스천] 무소유 공동체 ‘심플웨이’ 리더 쉐인 클레이본

쉐인 클레이본(Shane Claiborne)은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필라델피아에 위치한 무소유 공동체 ‘심플웨이’(Simple Way)의 창단 멤버로, 신수도원주의운동(New Monasticism Movement)을 주도하고 있는 평화운동가이자 작가이다. (신수도원주의운동은 현대사회와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수도원적 생활 방식을 추구하며 소비주의와 제국주의에 반대하고 비폭력 평화주의 및 사회 정의를 위한 윤리적 실천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지향하는 대안 기독교 운동이다. - 편집자) 국내에는 《믿음은 행동이 증명한다》(아바서원), 《예수혁명》(공저·IVP)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대부분의 시간을 공동체에 머물면서 주변의 이웃과 교제하며 보내지만, 여름이 되면 강연 활동을 통해 자신의 사역에 관심 있는 사람들을 만나 믿음의 실천을 도전하며 바쁜 일정을 보낸다. 마침 인터뷰 요청을 했을 당시 캐나다에서 강연 일정이 있던 관계로 직접 만날 수는 없었지만, 긴 이메일 인터뷰에 친절하게 응해주었다. 

   
▲ 머리에 쓴 두건과 헐렁한 바지, 후드티는 쉐인의 트레이드마크다. Photo by Ms. Tsar Fedorsky(www.redletterchristians.org)

인터뷰 요청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믿음은 행동이 증명한다》를 읽으며 많은 도전을 받았고, 미국이란 사회에서 믿음은 어떤 함의를 갖는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당신의 책이 한국에서도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요? 한국 독자들을 위해 당신이 사역하는 심플웨이 공동체에 대해 간단한 소개를 부탁합니다. 
먼저 저의 책들이 한국에서 출판되어 정말 기쁘게 생각합니다. 빠른 시일 내에 한국을 방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심플웨이에 관해서 솔직히 말하면, 우리 사역은 매우 단순한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예수가 전한 메시지의 의미를 제대로 믿고 그것이 조명하는 방식으로 살자는 것입니다. 믿음을 단지 천국 가는 티켓으로 제한하지 않고 불의, 빈곤, 전쟁, 억압에 관심을 갖게 하는 연료로 사용해야 한다는 거죠. 기독교는 죽음 이후의 문제를 다룰 뿐 아니라 이 땅을 사는 동안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의 문제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심플웨이 구성원들은 공동체에 거하며 가난한 이들과 물질을 나누고 노숙인들 및 재소자들과 함께 교제함으로써 우리가 먼저 단순한 삶(simple life)을 실천하고 그로 인해 주위 사람들도 그렇게 살아가도록 도전하려 합니다. 또한 우리는 폭력을 반대하는 평화주의자입니다. 이웃이나 마을 주변에서 총기사고가 근절되는 데 힘쓰고 이 세계에서 군사적 패권주의가 사라지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강압적인 힘으로 전해지지 않습니다. 정원을 가꾸고 벽화를 그리고 동네 아이들과 함께 노는 것과 같은 매력적인 방식을 통해 전해지지요. 주위에 사는 이웃이나 주변 사람들이 자동차 범퍼에 붙인 스티커나 티셔츠 로고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지는 않을 겁니다. 우리의 사랑이 우리가 그리스도인임을 드러내게 되죠. 

“신앙은 곧 행동이자 실천”이라는 말을 증명하듯, 당신은 실제 삶으로 기독교 신앙과 복음의 실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당신의 저서 The Irresistible Revolution[빠져들 수밖에 없는 혁명]의 한국어판 제목은 “믿음은 행동이 증명한다”입니다.) 근본주의 개신교도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바이블벨트 출신(테네시)이면서, 이스턴 칼리지 재학 시절 거리의 노숙인들과 함께 지냈습니다. 또한 퇴거 위기에 몰린 성 에드워드 성당의 노숙인 가족들과 함께 당국의 퇴거 명령에 맞서 싸우기도 했습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 중에는 희생자들을 기억하기 위해 철야집회를 열기도 했지요. 이처럼 실천적이고도 역동적인 도전을 해나가는 것은 타고난 유전자 덕인가요, 아니면 남다른 ‘용기’가 있나요?
사실 제가 (살아가는 방식이) 급진적으로 보이는 이유는 세상이 그만큼 더 미쳐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과 같은 방식으로 미쳐가기를 거부하면 급진적 부류가 되는 것 같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85명이 전 세계 70억 인구의 절반인 약 35억 명의 가난한 사람들이 가진 재산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부(富)를 소유하고 있는 현실을 정상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교회도 다르지 않습니다. 많은 교회들이 ‘신자’를 만들어내는 재주는 있지만 ‘제자’를 기르는 데는 실패하고 있습니다. 사탄조차 하나님을 믿으며 두려워하기까지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고, 천사와 사람의 말을 하며, 모든 종류의 이적을 행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바르게 믿는 것에 그치지 않고 바르게 사는 것, 이것이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당면한 도전입니다. 즉 ‘믿음이 우리를 어떻게 행동하도록 만드는가’와 같은 도전이지요. 

   
▲ 터진 옷을 재봉틀로 수선하고 있는 쉐인. (Photo by Ms. Tsar Fedorsky)

마지막 심판의 날에 우리에게 주어질 질문은 교리가 아닐 것입니다. “내가 굶주렸을 때 너는 무엇을 주었느냐? 내가 감옥에 있을 때 내게 찾아온 적이 있느냐? 내가 낯선 이방인으로 네게 찾아갔을 때 나를 반겨주었느냐?” 그렇습니다. ‘나는 어떻게 이웃을 사랑했는가?’가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는 진정한 질문이 될 것입니다. 심플웨이의 사역은 구원을 안겨주지는 않습니다. 다만 행동으로 구원을 입증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에게 가장 큰 장애물 중 하나는 다름 아닌 그리스도인들 아닐까요? 입안 가득 하나님의 사랑을 담아 말하지만, 막상 행동으로는 보여줄 게 없는 그런 그리스도인들 말입니다.

지난(2014년) 4월 16일 한국에서 일어난 세월호 참사에 대해 들었는지요? 미국 언론에서도 적잖이 관심을 가지고 보도하더군요. 서서히 침몰되는 배 안에서 300명이 넘는 생명이 수장되는 모습을 전 국민이 생중계로 지켜본 사건이었다는 점에서 그 충격이 다른 비극적 사고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도 깊습니다. 수많은 이들이 충격과 절망, 슬픔과 분노, 우울 등의 감정을 번갈아 경험하며 ‘집단적 트라우마’를 겪고 있습니다. 이 같은 거대한 슬픔과 분노의 상황에서 우리가 체념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요?  
세월호 참사 소식을 듣고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이 비극으로 상처받은 모든 사람들, 유족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또한 선장, 선원들을 비롯해 남은 여생 동안을 괴로움과 죄책감으로 살아갈 이들을 위해서도 간구합니다. 이 비극적 사건에서 모두가 느낀 분노, 비탄, 슬픔, 절망은 인간이었던 예수가 동일하게 느꼈던 고통의 감정입니다. 그는 슬프게 울었고, 크게 웃었으며 또 버려지는 비참함을 경험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의 진리를 볼 수 있습니다. 곧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 그분은 우리의 고통을 아신다’는 것이죠. 그래서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다른 이들의 고통에 귀 기울임을 의미합니다. 칼 바르트는 한 손에는 성경을, 다른 한 손에는 신문을 들라고 했습니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하늘의 일에만 너무 몰두해서 이 땅에서는 아무 쓸모없어질 정도로 내세의 삶에만 관심을 쏟아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와 같이 부당함이 우리 삶 속으로 침투해오는 이야기들을 말씀하셨습니다. 비극이 닥쳐올 때에, 우리는 멈춰서야 하고 또한 반응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교회 모임에 참석할 뿐 아니라 강도에게 두들겨 맞고 쓰러진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깊은 구덩이 안으로 기어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월호 참사 앞에서 우리는 반드시 멈추어 서서 질문을 던져야 할 것입니다. ‘이 비극적 참사에 대해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때로는 침묵이 죄가 될 수 있습니다. 기도해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하지만, 행동하는 것 또한 필요합니다. 하나님께 산을 옮기게 해달라고 간구할 때 그분은 때로 우리 손에 삽자루를 쥐어주시기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린다고 하지만 그분 역시 우리의 행동을 기다릴 것입니다.

이 비극적 참사가 단순한 재난사고가 아니라는 데 그 심각성이 있습니다. 한국사회에 내재되어온 문제들이 복합적으로 얽혀서 한꺼번에 드러난 사회적 대참사라고 볼 수 있는 거지요. 승객의 안전보다 돈을 우선시한 기업은 악했고, 자기 안위를 먼저 생각하여 탈출한 선장 및 선원들은 무책임했으며, 작은 민간어선이 50명 넘는 승객을 구할 동안 단 한 명의 승객도 구조해내지 못할 만큼 정부는 무능했습니다. 이런 문제에 대해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반응하고 대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세월호 참사와 같은 사고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묻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게 내버려두셨습니까?” 그런데 가까이 귀를 기울여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같은 질문을 하신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또 묻습니다. “하나님, 왜 가만히 계십니까?” 그러면 그분은 대답하십니다. “나는 너를 만든 것으로 이미 할 바를 했다. 네가 곧 나의 몸이고, 손이며, 발이고, 입이다.” 우리가 비극의 시기에 경계해야 할 내적 유혹은 냉소적이 되거나, 자만하거나, 냉담해지려는 마음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만 비난의 손가락질을 하고 싶은 유혹에도 맞서 싸워야 합니다. 하나님은 잘못을 행한 이들에게도 치유를 베푸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인종분리주의) 정책에 맞서 싸운 데즈먼드 투투(Desmond M. Tutu) 주교가 “하나님의 사랑은 너무도 커서 억압받는 자와 억압하는 자 모두를 자유케 한다”고 고백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도처에서 상처받는 이들이 치유받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의는 어떻게 회복될 수 있는지, 계속해서 질문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의는 처벌이나 보복의 방식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세상을 회복시키며 부정이 남긴 상처를 치유합니다. 하나님의 의는 용서, 구원, 그리고 잘못된 것들을 바로잡게 합니다.   

이 참사를 두고 한국의 한 초대형교회 담임목사는 주일예배에서 “하나님이 국민들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아이들을 대신 침몰시키셨다”고 설교를 했는데,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같은 논리에 동의하는 동시에 정부에 대한 비판을 삼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런 유의 설교와 그리스도인들의 반응은 사회적 고통에 대한 기독교적 해석의 문제를 다시금 상기시킵니다. 미국 교회가 사회적 고통에 대해 갖는 해석의 태도는 어떻습니까? 뉴타운 총기사건이나 허리케인 카트리나와 같은 참사에 대해 미국 내 교회나 사역자들은 어떤 관점을 보였습니까?
세상에는 ‘나쁜 신학’이 많이 있습니다. 비극적 사건이 일어난 뒤에는 반드시 몇몇 그리스도인들이 “여기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라고 말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미국 역시 9·11 테러와 허리케인 카트리나 참사를 비롯한 여러 많은 사건이 일어난 후에 “하나님이 하셨다”고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신학은 극히 일부만을 말한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7년 동안 강간당한 일곱 살 소녀에게 “그렇게 된 데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 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떨어져나간 한 괴물의 탄생을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종종, 전능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악을 허용하시는지와 같이 거대한 신학적 담론들을 화해시키려고 하지만, 이런 노력들은 결국 상처만 낳는 나쁜 신학으로 끝나곤 합니다. 핑계 거리가 없는 변명과 불의를 정당화하고, 축복할 가치가 없는 것을 축복하는 신학 말입니다. 그러나 나쁜 신학에 대한 해답은 신학 자체의 거부가 아니라 ‘좋은 신학’을 세우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교회는 위기의 시기에 상처 입은 이들을 끌어안고 구원의 길, 회복이 있는 정의와 용서의 길을 만들어가며 한걸음 더 올라서야 합니다.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을 증거하고, 어둠 가운데 빛이 되며, 비극의 한가운데서 피어나는 그리스도인들이 탄생해야 합니다. 때에 따라서는 듣기에 민감하고, 말하기는 더디 해야 할 것입니다. 

   
▲ Photo by Ms. Tsar Fedorsky

예수가 우물가의 여인을 만날 때 보여준 탁월한 듣기의 모범이 있습니다. 그는 성실히 들었고, 그 후에 물을 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분이 잘 듣기만 하셨다면 우리도 먼저 잘 듣는 일에 최선을 다할 필요가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하나님이 왜 불의를 허용하는지에 대해 논쟁합니다. 이에 대해 저는, 인간을 너무 사랑하셔서 자유를 주신 하나님이, 자초한 실수로 타인과 자연을 파괴해온 방식으로부터 우리가 회복될 수 있도록 돕고 계시다는 설명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다윗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범한 뒤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해 그녀의 남편 우리야를 전장에 내보내 죽게 한 사건에 대해 나쁜 신학은 “하나님의 뜻이 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진실은 다윗이 끔찍한 잘못을 저질렀고 매우 악한 행동을 했다는 것이며, 그럼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다윗의 잘못에 비견할 수 없이 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잘못을 통해서도 일하시지만, 그렇다고 잘못이 정당화될 수는 없습니다. 

《믿음은 행동이 증명한다》에서 “바퀴에 짓밟힌 사람들의 상처만 싸매줄 것이 아니라 바퀴 자체를 멈추려고 시도해야 한다”라는 본회퍼의 말을 인용하면서, 무비판적으로 시장경제의 부수적 피해자나 희생자들을 돌보는 데서 그쳐선 안 된다고 했습니다(160쪽). 또한 우리가 선한 사마리아인의 역할로 부름을 받았지만 “어느 날 우리는 이웃들이 계속 폭행과 강탈을 당하지 않도록 여리고로 향하는 모든 길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마틴 루터 킹의 말을 인용하면서 정부(권력)의 폭력과 기업의 악행(노동자 혹사와 학대 등)에 대해 문제제기를 한 바 있습니다(162쪽). 세월호 참사에 희생된 300여 명 중 대다수는 어린 10대의 학생들이었습니다. 앞으로 이 같은 참사가 되풀이되지 않기 위해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마틴 루터 킹의 말은 아름다우면서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강에서 많은 사람을 건져올린 후에, 상류로 올라가서 누가 그들을 강으로 던지고 있는지 알아내야 합니다. 희생자들을 돌보는 동시에, 불의가 계속되지 못하게 막아서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생선을 잡아준다면 그들은 하루 끼니를 해결할 수 있겠고, 낚시하는 법을 가르친다면 평생 생선을 잡아 먹을 수 있겠지요. 하지만 동시에 누가 그 연못의 주인인지 질문해야 합니다. 생선을 잡는 법을 알고 있지만, 연못까지 도달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음식을 줄 때는 성자라고 하면서, 당신들이 왜 굶게 되었는가 물으면 공산주의자라고 한다”는 돔 헬더 카마라(Dom Helder Camara) 대주교(1909~1999, 비폭력 평화운동가였던 브라질의 가톨릭 사제)의 말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이들과 함께하면서 그들이 어쩌다 거기에 머물게 되었는지 ‘질문’하는 것입니다. 누군가 설교했듯이, “우리가 성공의 사다리를 올라갈 때 주변을 잘 보지 않으면 우리가 올라가는 그 길로 내려오는 예수님을 그냥 지나쳐버릴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방식입니다.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이 되고, 강한 자는 내려지고 낮은 이는 높여지며, 배고픈 자는 배부르고 풍족한 자는 빈손으로 쫓겨나는 역설의 하나님 나라 말입니다. 

끝으로 한국의 독자들과 그리스도인들에게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까?
저는 주님이 ‘거룩한 불순응의 세대’(a generation of holy nonconformists)를 일으켜주시도록 기도합니다. 세상의 흐름에 순응하지 않고 예수의 상상력으로 마음이 새롭게 되어 변화된 새 세대가 오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함께 기도에 동참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심연수
본지 해외편집위원. 

 

 

[쉐인 클레이본의 주요 도서] 

   
 

믿음은 행동이 증명한다 

배응준 옮김 / 아바서원 펴냄 / 2018년 

복음의 본질을 탐색하고 실천하려는 ‘평범한 급진주의자’ 셰인 클레이본의 삶과 자기 고백이 담긴 책. 14장과 부록 네 편이 추가된 확대개정판. (원제: The Irresistible Revolution: Living as an Ordinary Radical)


예수 혁명 

토니 캠폴로 공저 / 안종희 옮김 / IVP 펴냄 / 2014년 

복음은 그 자체로서 전복적이지만, 그리스도인의 삶은 쉬이 바뀌지 않는다. 스승 토니 캠폴로와 함께 쓴 이 책에서 저자는 현장에서 건져 올린 복음의 진수를 통해 그 전복이 일어나도록 도전한다.  (원제: Red Letter Revolution)
 

행동하는 기도 

조너선 윌슨하트그로브 공저 / 이지혜 옮김 / IVP 펴냄 / 2010년

신수도원 운동가인 조너선 윌슨하트그로브와 함께 쓴 기도 안내서. 주기도, 요한복음 17장 예수님의 중보기도, 에베소서 1장 바울의 기도를 살펴보면서 ‘행동하는 기도’의 실례를 보여준다. (원제: Becoming the Answer to Our Prayers)

 

대통령 예수 

크리스 호 공저 / 이주일 옮김 / 죠이북스 펴냄 / 2016년

제국과 자본의 힘이 막강한 오늘날,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한 그리스도인들의 정치적 상상력과 실천을 촉발하는 책. 히브리 성경과 예수의 생애, 초대 교회를 들여다보면서 작은 저항적 실천을 탐구한다. (원제: Jesus for President)

 

세상을 바꾸는 리더십, 제자도 

존 퍼킨스 공저 / 신광은·박종금 옮김 / 정연 펴냄 / 2010년

미국의 1세대 복음주의 사회운동가인 존 퍼킨스와 함께 나눈 대화를 통해 진정한 리더십인 제자도를 탐구하는 책. (원제: Follow me to Freed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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