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9호 동교동 삼거리에서]
신앙, 삶으로 향기롭게 “교회는 타자를 위해 존재할 때만 교회가 된다.” 히틀러에 맞서 반나치 운동을 벌이다 플로센뷔르크 수용소에서 순교한 디트리히 본회퍼의 《옥중서신》(복있는사람)에 나오는 문장입니다. 이는 다르게도 읽힙니다. “그리스도인은 이웃을 위해 존재할 때만 그리스도인이 된다.” 오늘 교회라는 명패가 붙은 무수한 교회는 ‘교회’로 존재하는 걸까요. 그 수많은 교회를 다니는 이들은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있는 걸까요.
“교회 때문에 못살겠다.” 지난 8.15 광화문 집회 이후 전광훈 씨 교회 인근 식당 주인의 하소연을 담은 기사를 읽는 심정이 참담했습니다. 제가 사는 지역에서는 한 대형교회가 전세버스로 교인들을 집회에 동원했단 사실이 알려지자 “◯◯교회는 떠나라”는 현수막이 내걸렸지요. “신천지더러 이단이라더니 개독교가 더 이단 같다”는 포털사이트의 댓글보다 더 착잡했던 건, 어느 식당에 붙은 알림글이었습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 당분간 안 받습니다.” 오늘 한국 사회에서 사회적 거리두기는 교회·기독교로부터 거리두기로 급격히 옮겨가는 양상입니다.
미국 역사학자 제럴드 싯처가 쓴 《회복력 있는 신앙》(성서유니온)에는 유대교와 로마 종교를 거부하고 ‘제3의 길’(기독교)을 택한 초기 그리스도인들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들은 어떻게 당대 사회를 뒤흔들고 세계를 변화시킨 걸까요? “그리스도인들은 ‘기독교’ 의상을 입거나 … ‘기독교’ 언어를 사용하거나, ‘기독교’ 예배 장소를 짓지 않았다. … 그런데도 기독교는 영향력을 미쳤다. 그리스도인들은 교회 건물을 세우지 않고, 베드로의 표현대로 자신들이 ‘산 돌’(벧전 2:5)이 되려 했다. … ‘그리스도의 향기’(고후 2:15)를 내뿜기를 소망했다. … 삶의 방식으로 하나님 형상을 드러내려 애썼다.”
그들이 믿는 기독교 신앙은 삶에서 로마인들과 다른 “실천적 차이”를 만들어냈는데, 그 차이는 주후 250년 로마제국 인구 5분의 1을 죽음으로 몰아간 전염병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용기 있게 전염병에 맞서 환자들을 간호하고 죽은 자들을 매장해 주었다. 그들은 하나님이 사랑받을 가치가 없는 자신을 사랑해 주셨기에 다른 사람들을 사랑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믿었다.” “위험을 따지지 않고 환자들의 일상적인 필요를 챙기고, … 아픈 사람들을 돌보았으며, 그들과 함께 차분하고 행복하게 이생과 작별했다.”
오늘 우리 사회 그리스도인의 삶에서는 어떤 ‘실천적 차이’가 나타나고 있을까요. 광장을 장악한 극우 성향 교회 지도자들이 신앙 언어를 독점한 이때, 이번 호는 일상에서 다른 삶의 방식을 시도하며 향기를 드러내는 소박한 신앙인들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옥명호 편집장 lewisist@goscon.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