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9호 커버스토리]
자본주의적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모두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냉혹한 계산대 위에 올라야 한다. … 우리도 언젠가 쓸모없는 사람으로 낙인찍혀 공동체 밖으로 내동댕이쳐질지 모른다. 그러나 진정한 가치는 저울에 달 수도 없고 바코드를 찍어 계산할 수도 없다.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는 너나없이 동등하고 귀하기에 값어치를 따져서는 안 된다. 정말 그래서는 안 된다. (장노아, 《미싱애니멀》, 이야기나무, 27쪽)
편집디자이너로 일을 시작한 지 몇 년 안됐을 때, 멸종위기동물을 그리는 작가의 책을 작업한 적이 있다. 당시에는 어떻게 하면 일을 더 잘할 수 있을지에 온통 신경을 쏟아서 책이 전하려는 메시지에는 관심을 갖지 못했다. 정해진 근무 시간을 넘겨서 일하는 분위기가 당연하던 시기. 집단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개인을 희생해야 하는 사이클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책이 바로 그 ‘생산성’을 꼬집고 있음에도 읽어내지 못했다. 그간 내 가치를 증명해야 했던 수많은 과정들 역시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살 만한 사람이에요!”와 “나는 쓸 만한 사람이에요!”가 동의어라고 생각하며 달려온 시간들. 내 가치는 생산성이란 이름이 붙은 거대한 저울 위에서 계산되고 있었다.
성경을 펴보니 창세기에 묘사된 사람의 일과는 아주 ‘단순’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돌보고, 다른 존재들과 함께 살아가기. 하나님은 사람에게 땅을 돌보며 거기서 얻은 열매로 양식을 삼으라 하시고(창 1:29; 2:15), 다른 존재들에게 이름을 붙이게 하심으로써 혼자가 아닌 공동체로 모든 생명과 함께 살아가게 하셨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다는 게 무언가를 이뤄내기 위해 끊임없이 달려 나가는 게 아니라, 그저 창조된 세상을 함께 누리는 일뿐이라니. 큰 해방감이 들었다.
그러나 슬프게도 우리는 지음받은 대로 살아가기엔 스스로를 죄된 존재로 훼손했다. 이제는 창조된 그대로가 아닌 거룩한 백성으로 가는 길을 따라야 한다. 그 길목에서 우리는 훼손된 세상을 마주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주한 세상은 갈 곳 없는 이들을 착취한 애굽이었다. 출애굽기에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얼마나 과중하고도 불가능한 노역을 요구당하면서 생명 아닌 존재로 착취당했는지, 스스로 착취 구조에 매여 출애굽 이후에도 자기 해방을 이루기 어려웠는지 묘사한다.
“이스라엘 자손을 부리는 공사 감독관을 두어서, 강제노동으로 그들을 억압하였다. … 흙을 이겨 벽돌을 만드는 일이나 밭일과 같은 온갖 고된 일로 이스라엘 자손을 괴롭히므로, 그들의 일은 매우 힘들었다.”(출1:11, 14, 새번역)
이스라엘 백성의 인구가 늘어나자 위협을 느낀 애굽왕은 벽돌이나 회반죽 만드는 일과 같은 고된 노역을 시켰는데, 심지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내보내려 할 때엔 벽돌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짚마저 제공하지 않았고 스스로 마련해서 생산량을 맞추라고 명령했다. 쉼을 주면 저들이 예배할 것이라며 휴일도 주지 않는다. 강제노역을 통해 억압하려 했을 뿐 아니라 예배하지도 못하게 한 것이다. 이 성경 본문과 지금의 세상이 겹쳐졌다. 애굽이 그러했듯 힘을 가진 자는 약자를 착취의 대상으로 다루며 그 존재를 지워버린다. 이는 타자와 함께 살아가는 태초의 세상과는 매우 달랐다. 하나님은 그때도 지금도 그분의 질서로 창조된 세상을 우리가 돌보기는커녕 왜곡해 왔음을, 그 왜곡의 결과를 매번 마주하고 있음을 말하고 계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을 들으시고 애굽의 착취로부터 이들을 구해내시어 새로운 주인이 통치하시는 새 땅으로 초청하셨다. 그 땅에 들어가는 과정에서 하나님은 십계명을 주시는데 그중 하나가 안식일 명령이다. 내일의 것을 미리 준비하지 않고도 매일 그날만을 위해 양식을 거둬들이게 하셨고, 안식일을 위해선 미리 준비할 수 있게 하셨다. 그날엔 노동하지 않을 수 있었다. 쉴 새 없이 노역을 해 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갑작스레 주어지는 이 ‘쉼’은 아주 낯선 명령이었을 테다. 창조된 정체성을 깨달은 후, 쫓기듯 달려왔던 걸음을 멈추는 건 나 역시, 낯설고 두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안식을 통해 착취로 훼손된 존재를 회복하시려 했고, 창조된 삶을 풍성히 누리길 원하셨다. 이는 촘촘히 계급화된 이 시대의 착취를 멈추시며 피조세계를 안식으로 초대하시려는 손길로 확장할 수 있다. 나를 포함해 안식이 필요한 많은 이들이 떠올랐다.
존재만으로 축복받았던 삶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