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1호 한 몸 다른 모습: 그리스도교 다시 읽기] 구스타보 구티에레즈의 《해방신학》 성정모의 《시장, 종교, 욕망》

성정모(왼쪽)와 구스타보 구티에레즈.
성정모(왼쪽)와 구스타보 구티에레즈.

2000년 4월 미국 복음주의 잡지 〈크리스채너티투데이〉는 지난 세기를 돌아보는 기획으로 20세기에 출판된 종교 서적 중 고전적 위치에 오를 법한 책 100권을 발표했다. 현재 〈복음과상황〉의 ‘한 몸 다른 모습’ 연재를 통해 소개되는 책 중에는 단 한 권이 여기에 포함되어있다. 페루 출신 가톨릭 신학자이자 도미니크회 사제인 구스타보 구티에레즈(1928-2024)의 《해방신학: 역사와 정치와 구원》(Teología de la liberación: Perspectivas)이다.

페루에서 1971년에 출간된 이 책은 1973년에 영어로 번역되었고, 이후 라틴아메리카 해방신학을 전 세계에 알리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론보다 실천을 앞세우고, 존엄함 삶을 회복하는 인간화 과정을 구원과 결합하고, 사회과학적 통찰을 빌려 구조적 가난 속에서 교회의 존재와 사명을 재해석하는 등 구티에레즈는 내용만이 아니라 방법론에서도 20세기 중후반 신학에 새로운 도약을 끌어냈다. 이후 해방신학이라는 단어는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평등과 정의가 필요한 주변화된 공동체들의 핵심적 관심을 다루는 신학”1)이라는 뜻으로까지 확장되었다. 그렇기에 오늘날 흑인신학, 여성주의신학(feminist theology), 흑인여성신학(womanist theology), 민중신학, 생태해방신학 등도 넓게 보아 해방신학으로 분류된다. 하지만 별다른 설명 없이 ‘해방신학’을 언급할 때는 이러한 여러 형태의 급진적 신학 중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신학(Latin America Liberation Theology, LALT)을 가리키는 경우가 여전히 많다.

라틴아메리카의 억압적 사회구조에서 고통받는 사람의 경험을 재료로 삼는 만큼, 해방신학은 모든 사람을 위한 보편적 신학이라기보다는 상황적인 특성을 가진다. 그리고 성서와 교회 전통을 가난으로부터 해방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하다 보니, 기존의 종교적·정치적 권위에 대립하는 비판적 메시지를 낼 수밖에 없다. 그 결과 지난 반세기 동안 이런저런 이유로 해방신학에 대한 적극적 지지를 보이는 부류부터, 마르크스주의에 경도된 위험한 (심지어 이단적인) 신학으로 낙인찍는 부류까지 상반된 평가가 있었다.2) 해방신학의 정당성을 놓고 벌어지는 논쟁이 진행 중에도, 라틴아메리카 해방신학자들 그리고 이들과 연대한 세계 곳곳의 신학자들은 ‘가난한 자들에 대한 하느님의 우선적 선택’(option for the poor)이라는 성서적 주제를 급진화하며 삶의 정치·경제적 환경을 변화시키고, 전 세계 교회에 큰 도전을 던졌다.

하지만 1980년대 후반 이후 냉전체제가 종식되며 1세대 해방신학자들이 사용했던 마르크스주의의 계급투쟁을 향한 학술적·대중적 관심이 크게 꺾였다. 대신 시장 중심의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전 세계적으로 확장되었다. 이러한 변화된 상황은 21세기에 들어 해방신학이 여전히 유효하냐는 질문을 던지게 한다. 해방신학에 애정을 가진 사람들은 ‘이 땅에 가난한 사람의 고통이 끊이지 않고 하느님의 관심이 그들에게 향해 있는 한 해방신학이 존재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는 듣기에는 그럴듯하더라도, 사실 ‘그게 꼭 해방신학이어야 하는가?’라며 되묻게 된다.

해방신학의 영향력이 사라지지 않았는지, 오늘날도 여전히 세계가 이를 필요로 하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해방신학의 과거와 오늘을 알게 해줄 대표적 논의로부터 그 해답을 찾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렇기에 본 서평은 해방신학의 본격적 시작을 알리는 구티에레즈의 《해방신학》과 오늘날 주목받고 있는 해방신학자 성정모의 《시장, 종교, 욕망》을 중심으로 해방신학이 어떻게 신학적 자원을 활용하여 자본주의사회가 품고 있는 구조적 악을 진단하고, 이에 대한 신학적 해결책을 제시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온전한 해방을 위한 ‘가난한 사람들의 우선적 선택’

이 책은 압제 받고 착취당하는 남미 여러 나라에서 일어난 자유화 운동에 투신하고 있는 남녀들의 체험을 그리스도교 복음에 비추어서 고찰해 보려는 하나의 시도(試圖)이다. 오늘의 불의한 상황을 철폐하여 보다 자유롭고 보다 인간다운 변화된 사회를 건설하려는 공동노력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신학적 반성이다.3)

직설적이고 도전적이며 진취적인 선언이다. 《해방신학》의 첫 장을 열자마자 구티에레즈는 기존 신학과 차별화된 자신의 신학의 자료와 방법론과 목표를 부연 없이 독자들에게 던진다. 아마 신학사에 이처럼 강렬한 도입문장을 찾기란 쉽지 않을 것 같다. 구티에레즈와 동시대를 살았고 해방운동을 함께했던 신학자가 여럿 있었지만, 《해방신학》의 저자로서 구티에레즈는 해방신학의 상징 같은 존재가 되었다. 일례로 해방신학이 여전히 유의미한가에 대한 논의가 가열되던 2003년 당시 상파울루에서 개최된 ‘라틴아메리카와 카리브 지역 기독교’ 강연에서 구티에레즈는 이렇게 말했다. “해방신학은 죽지 않았다! 만일 죽었다면, 나를 그의 장례식에 초대하지 않았던 것”이다.4) 이 말에 청중들은 웃음과 박수로 화답했고, 이 모임은 해방신학의 필요성을 재확인한 사건으로 회자된다.

하지만, 실천을 이론보다 앞세우는 해방신학의 대표라는 후광 때문인지, 신학자로서 구티에레즈의 이론적 탁월함은 충분한 관심을 끌지 못하곤 했다. 그 결과 《해방신학》의 실제 내용이 아니라 해방신학에 관해 여기저기서 돌아다니는 말이 구티에레즈의 신학이라고 단정하는 사람도 의외로 적지 않다. 구티에레즈가 유럽의 명문 신학 교육기관인 벨기에의 루뱅과 프랑스의 리옹 가톨릭 대학교에서 공부했던 만큼, 《해방신학》을 정독하면 그가 한편으로는 그리스도교의 전통에 대한 깊은 이해 위에서 현대 성서학과 교의신학과 밀도 있는 대화를 펼치고, 다른 한편으로는 가난을 일으키고 영속화하는 구조적 악을 라틴아메리카인의 시선으로 재해석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본 서평에서는 지면의 한계를 고려하여 이를 세세히 설명하지 않고, 몇몇 대중적 선입견을 바로잡는 방식으로 책을 소개하고자 한다.

우선, 구티에레즈의 《해방신학》을 시발점으로 라틴아메리카 교회가 해방운동에 나섰다는 부정확한 역사적 선후관계부터 짚을 필요가 있다. 실제로는 1960년대에 라틴아메리카인들 사이에서는 자기들의 정치와 경제가 서구 강대국에 예속된다면 자율적인 개발과 성장은 불가능하다는 의식화가 일어나며 곳곳에서 혁명의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이러한 정치·사회·경제적 흐름에 거리를 두던 라틴아메리카의 교회는, 1968년 2월 메데인(Medellin)에서 열렸던 제2차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에서 전혀 다른 공식 입장을 발표했다. 메데인에 모인 주교들은 라틴아메리카가 비참한 상황 속에 있음을 인정했고, 교회의 사목을 부정의한 사회구조라는 ‘죄’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방식으로 재정의했다. 하지만 주교, 사제, 평신도 상당수가 해방운동에 투신하였음에도 자신들이 행동하는 신학적 이유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것은 “신학이 그들의 사상을 표현하는 데 적합한 범주”(구티에레즈, 261)를 정립해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구티에레즈는 기존 신학으로 라틴아메리카의 현실을 재단하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의 해방운동을 ‘뒤따라’ 성찰하고 그들 경험의 의미를 발견하는 방식으로 신학을 전개했다.

또 다른 대표적인 선입견으로는, 해방신학이 복음을 마르크스주의적으로 재해석했다는 이데올로기적 비판이 있다. 물론 해방신학자들은 종속이론이나 계급투쟁 등의 마르크스주의 사상을 부분적으로 수용한다. 사회과학과의 대화는 이전의 신학이 갖지 못했던 사회구조를 분석하고 이를 비판하는 예리한 시각을 가지게 해줬다. 하지만 정작 구티에레즈의 신학을 구성하는 데 크고 결정적 영향을 끼친 것은 그리스도교의 풍성한 신학적 자원임을 부정하기 어렵다.5) 그는 신구약 성서,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서, 메데인 주교회의 문서, 교황 문서 등으로부터 통찰을 끌어오고 권위를 빌려와 해방 개념의 전인간적 차원을 드러낸다. 또한, 초자연과 자연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재발견한 신신학(Nouvelle théologie), 일상적 삶에 현존하는 은혜의 체험을 강조한 칼 라너로 대표되는 초월적 신학, 성서적 역동적 역사 이해를 재발견한 폰 라트, 몰트만, 판넨베르크로 대표되는 현대 개신교 신학자들의 종말론 등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의식에 깊이 뿌리박은 교회와 세속, 하느님 나라와 역사의 이분법, 구원과 해방의 이분법을 극복하려고 한다.

끝으로, 해방신학이 구원과 인간화를 혼동하고, 근대 인간중심주의의 영향으로 “인간은 자기 운명의 주인”(46)이라는 환상을 일으켜 혁명을 유도한다는 대중적 우려가 있다. 하지만, 구티에레즈는 종교와 정치의 불가분리성을 강조하다 둘을 구별하지 못하면서 생기는 폭력적인 ‘혁명의 신학’에 비판적 거리를 유지한다(321, 주 124). 오히려 복음이야말로 해방과 구원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과장이나 축소 없이 보여준다.

현세적 진보 ―부정적 의미를 피하는 뜻에서 ‘인간해방’이라고 부르자― 와 그리스도 왕국의 성장은 둘 다 하느님과 인간의 친교, 인간과 인간의 친교를 목표로 한다. … 역사적, 정치적 해방사건이 곧 그리스도 왕국의 성장이며, 구원사건임에는 분명하지만, 그것이 그리스도 왕국의 도래 ‘자체’는 아니며 구원의 ‘전부’도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왕국의 역사적 실현이며 따라서, 그 완전상(完全相)을 선포하는 역할을 한다. (228-229쪽)

이러한 몇 마디 설명으로 《해방신학》의 진면모를 다 드러내기에는 구티에레즈가 풀어내는 신학적 담론의 결이 풍성하고 다차원적이다. 하지만, 해방신학을 설명하기가 힘든 더 근원적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구티에레즈와 그 동료들이 자신들의 저술을 정확한 해석과 엄밀한 분석의 대상으로 두지 않았다는 데 있다. 해방신학은 구조적 악에 저항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해방을 실천하는 현장에서 빛을 발하는 신학이었다. 하지만, 현장과의 밀접한 관련성은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해방신학의 존재와 사명도 비판적으로 질문하게 했다.

해방신학이 당면한 새로운 도전

라틴아메리카 해방신학의 선구작인 구티에레즈의 《해방신학》이 세계 곳곳에 끼친 충격과 영향력은 실로 대단했다. 단연 이 책은 현대신학의 고전을 언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문제적 대표작이 되었고, 해방신학은 20세기 현대 신학사나 라틴아메리카 정치사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주제가 되었다. 하지만 1989년 베를린장벽 붕괴와 소련의 해체로 대변되는 구세계의 몰락은 해방신학에 새로운 도전을 던졌다. 냉전 시대의 종식은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한 자본주의의 승리로 여겨졌고, 견제의 대상이 없어진 시장 중심의 경제체제는 전 세계로 급속히 확대되었다. 결국 ‘더 많이 가져야 행복하고 더 많이 소비해야 경제가 성장한다’라는 자본주의적 믿음이 보편적 세계 종교로 새롭게 등극하였다.

게다가 구티에레즈가 《해방신학》을 쓸 당시에는 예상치 못한 일들도 현장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해방신학의 영향 아래 여러 투쟁에 참여했음에도 가난한 사람들의 해방은 실제 잘 이루어지지 않자, 사람들은 실제 생활 조건을 향상할 구체적 방식에 더 관심을 두게 되었다. 이를 위해 정의와 연대의 가치를 잘 구현하고자 조합과 마을 운동이 조직되는 등 여러 공동체적 활동이 일어났다. 하지만, 해방운동에는 두각을 보였던 사람들이 조합의 지도자나 이사가 되자 관리와 운영에는 미숙함을 보이곤 했다. 그렇다고 이들의 업적을 단순히 ‘효율성’으로 평가하자니, 이는 그토록 반대해왔던 신자유주의의 논리를 그대로 답습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또한, 전통적으로 가톨릭 인구가 많았던 라틴아메리카에 1980년대 이후 복음주의가 본격적으로 소개되며 번영 복음(prosperity gospel)도 함께 퍼졌다. 그러자 해방신학이 실제 라틴아메리카의 풀뿌리 민심을 대변해 왔는지에 대한 엇갈린 평가가 일어났다. 아르헨티나의 한 익명의 신학자가 평했듯, “해방신학은 가난한 사람을 선택했다면, 가난한 사람은 오순절주의를 선택했다.”6) 이처럼 신학적 이상과 행정 능력 사이의 간격, 연대성과 효율성이 일으키는 모순, 교회와 대중 심리의 괴리 등은 해방신학의 다음 세대에 큰 도전으로 남게 되었다.

성정모는 해방신학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던 1980년대 이후의 상황에서 신학자로서 경력을 쌓아갔다. 특히, 그는 우고 아스만과 프란츠 힌켈라메르트 등이 주축이 되어 1977년에 설립한 코스타리카의 DEI(Department of Ecumenical Investigations) 연구소의 영향 아래 자신의 사상을 발전하였다. 1세대 해방신학자들이 주로 성서나 공의회나 주교회의 문서, 신학 이론 등을 통해 억압적 경제구조를 비판하였다면, 1980년대 DEI는 시장경제를 떠받치고 있는 신학적·형이상학적 기반을 분석하고 이에 대해 비판을 가했다. 1970년대 해방신학이 그리스도교 신학의 오랜 대화 상대였던 존재론적 철학 대신 사회과학을 선택하였다면, DEI는 그 외에도 사회심리학과 인류학, 교육학, 인문학 등 다양한 학문과 대화하며 보다 다차원적인 분석의 틀을 활용했다.

성정모도 복음을 통한 인간화와 구원을 이원화하지 않는 해방신학의 문법을 따르지만, 그의 글에는 이전의 해방신학자와는 다소 차별화된 문제의식과 방법론이 발견된다. 20세기 후반과 21세기 전반 해방신학의 흐름을 선도하는 신학자 중 한 명으로서, 그가 기존 해방신학의 한계를 성찰하고,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를 다각도로 분석하고 비판하는 모습을 잘 보여주는 책이 《시장, 종교, 욕망》이다.

ⓒ복음과상황 정민호
ⓒ복음과상황 정민호

우상으로서 시장 비판

보통의 경우 신학자가 자본주의를 비판하면, ‘21세기 경제가 얼마나 복잡한데 그런 순진한 소리를 하냐?’는 반응이 곧장 돌아온다. 물론 비대해진 시장 중심의 경제체제를 단순하게 설명하기도 어렵고, 이를 ‘옳다/그르다’라는 가치평가의 잣대를 가지고 접근하기도 힘들다는 학자들의 의견과 실무자들의 경험은 존중받아야 한다. 하지만, 신학적 분석 없이는 시장체제에 내재한 “내생적(內生的) 신학”(성정모, 27)을 폭로하기도, 경제가 날이 갈수록 더 노골적으로 종교적 성격을 가진다는 사실을 밝히기도 어렵다. 이러면 경제성장이라는 명목으로 약자에게 가해지는 폭력마저 체제 유지를 위해 불가피하다는 논리가 자연스레 퍼질 위험이 생긴다. 성서가 말하는 정의와 평화 대신 시장경제 속에서 경쟁과 승리가 최고의 덕목이 되어버린다.

경제의 종교화 현상 이면에는 유토피아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를 자본주의 체제가 충족하리라는 ‘우상숭배’적 믿음이 놓여 있다. 계몽주의가 종교적 미신을 타파하고 인간의 합리적 자율성을 중시했지만, 사실 근대성이 고대와 중세의 신화적 혹은 종교적 세계관의 흔적을 완전히 지우지는 못했다. 오히려 역사 속에서 유토피아를 일구려던 근대인의 진보적 낙관주의는 전근대적 낙원 개념의 세속화 없이는 설명될 수 없다. 단, 신에 대한 믿음 대신 삶의 한계를 극복하게 해주는 ‘기술’, 그리고 소비와 소유를 통해 욕망을 만족시켜주는 ‘시장’에 대한 믿음이 낙원에 이르는 조건으로 탈바꿈했다. 이로써 “자본주의는 기독교가 사후에 대해 했던 약속을 현실을 이행하는 자로 나타난다. 유토피아 개념의 변화는 사후 세계가 인간 역사의 한가운데로 들어오는 시간적인 개념뿐만 아니라, 사후 약속을 이행하는 자가 하느님에서 자본주의 체제로 이동한 데도 있다”(31).

이러한 자본주의 비판 이면에는 인간의 욕망에 대한 분석이 놓여있다. 인간에게 진선미를 향한 순수한 갈망 혹은 생존에 꼭 필요한 것을 향한 욕망만 있다면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욕망은 그것보다 더 복잡하기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온갖 비극이 일어났다. 성정모는 인류학자 르네 지라르의 이론을 빌려와, 인간에게는 결핍의 충족이 아니라 타인을 닮거나 따라 하고픈 ‘모방 욕망’이 있고, 이것이 오늘날 자본주의 체제가 몸집을 불려가는 원동력임을 밝힌다. 모방 욕망 때문에 인간은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하지는 않은 것마저 타인이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그것을 소유하고 싶어 한다. 기술 발전에 따른 미디어 산업의 확장으로 권력자와 유명인의 화려하고 부유한 삶에 더 노출될수록, 대중의 기대치는 더 상향 조절된다. 사람들이 가진 필요와 취향과 배경은 각기 다르지만, 자본주의는 시장의 세계화를 위해 광고를 통해 욕망을 전 세계적으로 동일화한다. 하지만, 실제 소유할 수 있는 대상은 한정되어 있기에, 사람들 사이에 경쟁은 가열된다. 그 결과 지구 한쪽에서 욕망을 합법적이고 고상하게 충족하는 동안, 다른 쪽에서는 악랄한 착취와 비인간적 억압이 발생한다.

물론 어느 시대에나 사회 내 대다수, 특히 권력과 부가 없는 사람은 경제적·사회적 소외를 경험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빈부의 차이가 더 크게 벌어지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이러한 구조적 고통과 악의 심각성에 대한 감각이 더 무뎌지는 경향이 팽배하다. 성정모가 분석하기에, 그 이유는 현대인은 자신들의 욕망을 충족시켜줄 세계 자본주의에 대해 유사종교적 신뢰와 희망을 품기 때문이다. 경제성장과 기술 개발을 통해 도달할 유토피아에 대한 환상은 시장체제를 역사의 섭리자로 만들고, 물질적 진보를 역사의 목표로 삼게 한다. 그 결과 가난한 자들의 고통은 시장이라는 초월적 존재가 경제를 성장시켜 전체 인류를 구원으로 이끌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필연적 희생으로 자리매김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시장에 대한 우상숭배적 신뢰는 자본주의 메커니즘에다 신앙의 문법을 각인해준다.

결국, 성정모의 예리한 펜 끝은 선진국 지배층의 욕망을 전 세계인의 욕망으로 만드는 자본주의 시장의 내적 논리를 향한다. 이전 세대 해방신학자들은 억압적인 사회구조가 전복되는 혁명에 기대를 걸었지만, 사실 인간 마음에 자리 잡은 모방 욕망은 혁명으로도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84). 그렇기에 신학의 임무는 단지 시장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체제의 신성화”와 “인간 제도와 행위의 신성화 과정에 숨어 있는 희생의 논리”(122)를 드러내는 데 있다. 부정의한 사회구조로 인한 약자의 고통을 시장경제 발전을 위한 불가피한 희생이라 부르는 순간, 사실상 우리는 악을 선이라고 인식하는 중이다. 이러한 현대인의 “평온한 양심”(153)을 불편하게 만들고, 욕망이 만들어낸 환상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해방신학이 현대 사회에서 여전히 필요한 중요 이유이다.

현대인을 위한 해방신학

사실 해방신학의 메시지는 20세기 남미에서 처음 등장한 것이 아니었다. 구약성서의 출애굽과 예언자 전통을 중시하고, 신약성서가 증언하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며 기성 종교와 정치체제에 저항하는 급진적 그리스도교는 초기 교회 이래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교회사에서 급진적 신학은 주류 교회로부터 늘 외면당하고 박해받았지만, 이러한 도발적 목소리는 성서로부터 그 정당성을 찾는 만큼 교회가 있는 곳마다 늘 새롭게 일어났다.7)

가난과 고통이 하나의 이론으로 재단되고 해결되는 것이 아닌 만큼, 해방신학은 다양하고 유연한 모습으로 계속해서 탈바꿈하는 중이다. 무엇보다도 21세기에 들어와서 시장의 우상화가 교묘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만큼, 오늘날 해방신학은 자본주의 체제에 내포된 희생 메커니즘을 폭로하는 분석을 예리하게 하는 한편, 약자의 희생을 요구하는 시장체제가 아니라 성서가 증언하는 참 하느님께 의지하며 살게 하는 은혜의 신학을 명확히 보여줄 사명이 있다. 즉, 가난한 자의 생명에 관심을 두시는 절대자, 계산 없이 인간을 조건 없이 용납하는 은혜8), 모든 희생 메커니즘을 무효로 만든 유일회적 희생으로서 십자가, 하느님께서 갈망하는 연대와 평등의 가치가 살아있는 공동체에 대한 희망 등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

결론을 맺고자 클리셰를 끌어다 쓰자면,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신 15:11) 해방신학으로 대표되는 급진적 신학 역시 이 땅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좋은 해방신학 책 한 권 이상을 읽는 것은 지구라는 복잡한 세계에서 살아가는 사람에게 중요한 신앙의 실천이 되리라 생각한다. 특별히, 구티에레즈의 《해방신학》에서 성정모의 《시장, 종교, 욕망》으로 이어지는 흐름을 따라가면, 복음을 이 땅의 정의와 평화로 번역하고자 행동하던 라틴아메리카 신학자들의 어제와 오늘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하느님께서 갈망하는 세계를 지금 여기서부터 살아가기 위해 우리의 신앙의 상상력과 언어가 어떻게 변화되어야 할지에 관한 불편하면서도 필요한 통찰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 주 

1) Anthony B. Bradley, “Liberation Theology”, 〈Oxfordbibliographies〉(2016. 06. 08.), (2022.6.21. 최종접속).
2) 일례로 이후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된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이 신앙교리성 장관 당시 발표한 “자유의 전갈(Libertatis Nuntius): 해방신학의 일부 측면에 관한 훈령”(1984. 08. 06.)은 자유의 전갈로서 복음이 해방의 힘인 것은 인정하지만, 해방신학은 마르크스주의와 잘못 결탁하며 진리의 의미가 전도되고 폭력에 의존할 위험이 있다고 진단한다. (2022.6.21. 최종접속).
3) 구스타보 구티에레즈, 성염 옮김, 《해방신학》(분도출판사, 1977), 11쪽. 이하 이 책을 직간접 인용할 때는 본문 내 (구티에레즈, 쪽수)로 표기한다.
4) 구티에레즈의 발언을 다음 책에서 재인용했다. 성정모, 홍인식 옮김, 《시장, 종교, 욕망》(서해문집, 2014), 169쪽. 이하 직간접 인용 시 본문 내 (성정모, 쪽수)로 표기한다.
5) 실제, 《해방신학》에서 종속이론을 설명하는 절(section)은 번역본으로 다섯 쪽 남짓할 정도밖에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114-119). 해방운동에 참여하는 사람 중 공산주의자라 불릴 정도로 사회주의 노선을 강경하게 취하는 사람도 있지만, 구티에레즈는 ‘민주사회주의’(democratic socialism)를 이상적 모델로 삼는다(147). 실제 해방신학자들 사이에서도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견해는 천차만별이다.
6) Donald Miller, “The New Face of Global Christianity: The Emergence of ‘Progressive Pentecostalism,” (2006/04/12) Pew Research Center, (2022.6.20. 최종접속).
7) Christopher Lawland, 《Radical Christianity: A Reading of Recovery》(Eugene: Wipf & Stock, 1988), 1.
8) 대중적으로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개신교 칭의론에서도 강조되는) 인간의 이해타산을 넘어서는 ‘낭비’로서 혹은 ‘값없는’ 신적 은혜는 해방 영성의 핵심 주제이다. 구티에레즈, 265쪽.

 


김진혁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조직신학, 철학, 윤리를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는 《순전한 그리스도인》 《질문하는 신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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