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0호 세상 읽기]

가증함이 더 나쁘다
나는 본래 남 얘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내 살이만으로도 벅찬데 옳으니 그르니 남의 살이 참견이 가당치 않다. 더욱이 그것이 내게도 해당되는 일이어서 내 연약과 죄를 생각나게 하는 일임에랴. 똥 묻은 개 겨 묻은 개 나무라는 격이요, 공연히 누워서 제 얼굴에 침 뱉는 일 아닌가.

1998년 미합중국 대통령 클린턴이 백악관 집무실에서 인턴 여비서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사실이 폭로돼 난리가 났었다. 그는 탄핵 직전까지 몰렸다. 윤리와 도덕으로 무장한 공화당과 보수 우파 기독교계가 이 부도덕한 ‘케네디’에게 맹공을 퍼부었다. 미국은 대단한 나라긴 했다. 특별검사가 청문회에서 대통령의 섹스 스타일을 까발리고 체액을 검사하는 대망신까지 주었으니.

그때였다. 노벨상 수상 작가들이 연명으로 미국사회의 성적 매카시즘에 자중을 요청했다. 그 선언 중 기억에 남는 한마디가 이것이다. “사람을 모욕 주는 데도 한계가 있다.” 그때 미국 청교도의 아들이며 기독교 도덕의 화신을 자처하며 모욕의 한계를 돌파했던 청문 특별검사 케네스 스타는 훗날 세계 최대 침례교대학인 베일러대의 성추문 사건을 축소하려다 총장직에서 해임된다.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 7:2) 세상살이의 넌센스와 아이러니라 해야 할까.

나는 노벨상 작가들의 선언에 비로소 양심의 가책을 덜고 당당해질 수 있었다. ‘그래, 나 역시 성적 욕망의 곤혹스러움과 고뇌를 안고 사는 남자로서 클린턴을 정죄하긴 어렵다.’ 내게 더 중요하게 보인 문제는 그의 부적절한 관계가 아니라 모욕의 한계였다. 물극필반(物極必反)이라던가. 모든 일은 절정에 도달하면 반전이 일어난다. 이를 성경적으로 번역해 본다면 ‘가증스러워진다’고 해야 할 것이다. 클린턴이 비록 성적 부도덕을 저질렀을망정 그를 망신 주는 행위도 도에 지나치면 가증한 일이 되고 만다. 힐러리는 케네스 스타의 지나친 까발림에 분노해 오히려 클린턴을 용서하게 됐다고 말했다. 요컨대 나는 누군가의 죄행이 아니라 정도에서 지나친 가증함에 대해서라면 말해야 할 의무를 느낀다. 가증의 죄성이 죄행의 죄성보다 더 나쁘다고 보는 것이다. 거기엔 죄에 대한 후회와 반성, 성찰과 회개, 거기서 나오는 생의 전반에 관한 검토로서의 겸손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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