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7호 3인 3책] 침묵 | 엔도 슈사쿠 지음 | 공문혜 옮김 | 홍성사 | 2003년 개정

서점 일을 하다 보니 책을 권해달라는 요청을 자주 받는다. 그런데 좋은 책을 권해달라는 것처럼 곤혹스러운 요청도 없다. 좋은 책이라니….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해달라는 말만큼이나 애매한 말이다. 게다가, 내가 보기에 좋은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도 좋은 사람이라는 법은 없듯이 내가 생각하기에 좋은 책이 다른 사람에게도 좋은 책이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어쩌겠나. 카프카 말마따나 ‘우리 안에 얼어붙은 바다를 깨뜨리는 도끼가 되기를 바라는’ 심정에서 그런 질문을 받을 때면 몇 권의 책을 이야기한다. 엔도 슈사쿠의 《침묵》이 대표적인 책이다.

누군가의 말을 빌리면 (《고백록》 《실락원》 《까라마조프씨네 형제들》과 더불어) ‘신학생이 실제로 읽었든 안 읽었든 감명 받았다고 말하는 책 다섯 권 중 하나’에 들어가는 책이라지만, 막상 《침묵》을 읽으면 낭패감이 먼저 든다. 한국 개신교인들이 싫어할 만한 모든 요소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신앙의 승리’를 다룬 이야기가 아니다. 지은이 엔도 슈사쿠는 이 책에서 ‘순교’라는 숭고한 가치를 실현해 낸 신앙의 승리자들보다는, 오히려 실패한, 신앙의 패배자들에 초점을 맞춘다.

유다처럼 끊임없이 배신을 일삼는 기치지로, 기치지로를 경멸하나 마침내 ‘배교’의 길을 택한 로드리게스, 그 로드리게스의 스승이었으나 마찬가지로 배교했던 페레이라. 모두가 패배자다. 이런 패배자 연대기를 누가 보고 싶겠나. 게다가 기독교이긴 하나 결국 로마가톨릭 이야기이고, 노벨 문학상 후보에는 올랐으되 수상까지는 못했다는 사실까지 알아낸다면 더 그런 심정일지도 모르겠다. 하물며 숭고하고, 아름답고, 선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충분히 못 봐서 안타까운 마당에 왜 배교자, 배신자, 찌질이들의 이야기를 봐야 한단 말인가?

그런데 재미있는 건, 이러한 시선이 기치지로를 대하는 로드리게스의 시선과 닮아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선은 가난한 이들, 어리석은 이들, 이 사회에서 밀려난 이들을 감싸 안는다는 이유로 기독교를 폄하하고 멸시했던 이들의 시선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스도인이라 고백하는 우리가 기독교의 핵심이라 고백하는 성육신 사건, 그리고 십자가 사건을 떠올려 보라. 모두 남루함, 배신, 찌질함과 연결되어 있지 않은가? 좀 더 과감하게 말하면, 성육신 사건과 십자가 사건은 지고지선한 하나님께서 찌질한 우리들을 위해, 찌질한(연약하고 남을 질투하고, 성공에 연연하고, 잠시 정의를 외치다, 순간적으로 선을 지향하다가도 어느새 안온한 삶에 머무르기를 반복하는) 우리 가운데, 찌질한 인간으로 오셔서(왕이 아니라 보잘것없는 하층민으로 오셔서), 찌질한 삶을 살다가(저 찌질한 인간들을 이끌고, 치유하다), 찌질하게(찌질한 이들에게 배반당하고 모욕당하면서) 죽음을 맞이한 사건이 아닌가?

로드리게스는 배교를 하고 나서야, 찌질해지고 나서야,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자신의 존재 또한 찌질하기 그지 없음을 깨닫게 되고 나서야 찌질이 기치지로를 마침내 한 사람의 동료 인간으로 대하게 된다. 어쩌면, 진정 우리 안에 있는 ‘얼어붙은 바다가 깨지기 위해서’는 우리 존재의 찌질함을 먼저 발견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마도 바로 그때 우리는 비로소 참 하나님이자 참 인간인 예수 그리스도라는 고백을 우리 몸과 마음에 새기게 되는 것일지도. 그러니 다시 한 번, 이 찌질한 실패자들 이야기를 당신에게 권한다. 근본적으로, 우리는 모두 찌질하니까.

 

박용희
장신대 구내서점, IVP(한국기독학생회 출판부) ‘산책’ 북마스터로 일했다. 책, 여행, 사람을 좋아한다. 새해 들어 고양시 덕은동에 헌책방 ‘용서점’을 내고 책과 더불어 하루를 열고 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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