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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만나 세월호 잊지 말아달라 당부했어요”
[324호 그들이 사는 세상] 뉴질랜드 사회에 세월호 사건의 진실 알린 레베카 정
[324호] 2017년 10월 27일 (금) 16:32:11 이범진 기자 poemgene@goscon.co.kr
   
▲ 뉴질랜드 사회에 세월호 참사 알리는 레베카 정 씨 ⓒ복음과상황 오지은

뉴질랜드 사회에 세월호 참사의 심각성을 알리는 활동을 해온 한국교포 레베카 정(30) 씨가 한국을 방문했다. 정 씨는 그동안 세월호 참사 관련 기사와 글들을 영문으로 번역해 알렸고, 교민들과 함께 3주기를 맞아서는 유가족을 뉴질랜드로 초청해 간담회를 열기도 했다. 최근에는 녹색당 후보로 뉴질랜드 국회의원 선거에도 출마했다. 직업은 의사이자 외과 연구자로, 현재 박사 논문을 쓰고 있다. 바쁜 일정 중에서도 한국을 방문할 때면, 꼭 세월호 유족과 만난다. 그에게 세월호 참사는 정치인, 의사,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다시 정립하게 한 큰 사건이었다. 국회의사당 근처에서 워크숍에 참석 중인 그를 만났다. 가슴에 달린 큰 노란 리본이 눈에 띄었다.

― 워크숍에 참석 중이라고요. 어떤 워크숍인지요?
더불어민주당 2017 세계한인민주회의 대표자대회 워크숍이에요. 저는 더불어민주당 당원은 아니지만, 뉴질랜드에서 세월호 활동을 함께한 분들이 여기 속해 있어서 그 인연으로 뉴질랜드 대표 두 명 중 한 명으로 참석하게 되었어요. 마침 한국 방문 시기와 잘 맞았고요. 오전에는 청와대에 다녀왔어요. 문재인 대통령을 만나서 세월호 사건 절대 잊지 말아달라고 당부하고 왔네요.

― 뉴질랜드에서 세월호 관련 소식을 영어로 번역하고, 피켓시위도 쭉 하셨다고요.
한국도 마찬가지겠지만, 뉴질랜드 한인 사회도 세월호 참사에 대한 관심이 빨리 식었어요. 뉴스를 찾아서 보지 않으면 진실이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는 것을 모르는 분도 많았고요. 공영방송만 봐서는 모르는 내용들도 많잖아요. 그래서 2년 동안 혼자 활동했어요. 혼자 하다 보니 할 수 있는 것은 기사를 번역해서 퍼뜨리는 것과 1인 시위 정도가 전부였어요.

   
   
▲ 세월호 유가족 초청 간담회 모습. (사진: 더 좋은 세상 뉴질랜드 한인모임 제공)
   
▲ "한 사람도 중간에 빠져나가는 분이 없었어요." 세월호 유족 초청 간담회 모습 (사진: 더 좋은 세상 뉴질랜드 한인모임 제공)

― 2년 동안 혼자서요?
혼자 활동하면서, 여기는 세월호 관심 있는 사람이 나밖에 없구나 싶었어요. 그러다가 작년 말부터 국정농단 규탄 촛불집회가 시작되었고, 2차 집회 때 모인 분들이 200명 정도 되었죠. 그때 만난 분들과 세월호 활동을 함께할 수 있었어요. 대다수 저보다 나이가 많은 분들이었는데, 혼자서는 불가능했던 일을 할 수 있었어요. 그 결과로 올해 3주기를 맞아 문지성 학생 부모님을 뉴질랜드에 초청했어요. 초청 행사 중 하이라이트는 오클랜드 대학교에서 열린 간담회였어요. 평일 밤에 열린 간담회였음에도 6시 30분부터 10시까지 200분 넘게 진행되었거든요. 한 사람도 중간에 빠져나가는 분이 없었어요. 〈뉴질랜드 헤럴드〉라는 큰 신문사에서 취재도 했고요.

― 세월호 유족 분들과는 어떻게 관계 맺게 된 건가요?
2014년 한국에 왔을 때 광화문에 세월호 광장이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때 직접 얼굴을 뵙고 눈물이 터졌어요. 대면하고 눈을 맞추었을 때, 세월호 참극의 실체가 더 확 다가왔어요. 마음속에서 뭔가가 펑 하고 터지는 느낌이었어요. 그때 이후로 기회 될 때마다 찾아뵙고 있어요.

― 여섯 살 때 뉴질랜드로 갔다고 알고 있어요. 우리말로 의사소통 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나요?
한인교회에 다녔기 때문에 기본적인 소통은 문제없어요. 어릴 때 한글학교 다닐 때, 한국말 못 한다고 놀림 받을까 봐 더 노력한 것도 있고요. 세월호 관련 뉴스를 번역하면서 더 공부하게 되었어요. 요즘엔 JTBC 〈뉴스룸〉의 손석희 앵커가 제 국어 선생님이에요.(웃음) 아, 한번은 안산에 유가족 치유 공간이 있다고 해서 대중교통으로 찾아가려다가 애먹은 적이 있었어요. 4호선 ‘한대앞’역으로 가야 했는데, 한대 앞이 ‘한성대 앞’인줄 알고 한성대역으로 간 거죠. 결국 안산까지 택시를 타고 이동했네요.

― 평소 적극적인 행동파인가요?
남들보다 행동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주어진 듯해요. 그리고 직업이나 관심 분야를 떠나서 제가 받은 달란트가 있다면 남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는 마음인 것 같아요. 힘들어하는 이웃이 보이면 돌아서지 못하는 그런…. 고등학교 때부터 앰네스티(국제사면위원회) 집회에 참여하기도 하고,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이 많았어요. 의대 공부를 하는 동안은 관심 갖기가 어려워졌다가 세월호 참사 이후로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 그러다가 2014년 12월에 한국에 왔을 때, 광화문 세월호 농성장에서 세월호 부모님들 처한 상황 보니까, 그때 어떤 큰 폭발이 제 안에서 있었던 것 같아요.

― 오클랜드 노스코트 지역구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한 것도 그런 ‘폭발’의 연속이었나요?
복합적인 이유가 있었어요. 제가 18세 때 투표권을 얻은 이후부터 지금까지 쭉 보수정당이 집권을 해서요. 2014년 총선 이후 적극적으로 정치 참여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녹색당에 들어갔는데 3년 정도 활동하고 당 차원에서 출마 제안이 있었어요. 세월호와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 이야기를 더 적극적으로 알릴 수 있다는 생각도 했고요. 뉴질랜드 또래 교민들의 정치 참여를 독려해야겠다는 목적도 있었고요. 많은 것을 고려해서 도전하게 되었어요.

― 녹색당원이 된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뉴질랜드 녹색당이 지난 총선 전까지만 해도 제2야당이었어요. 한국으로 치면 정의당과 노선이 비슷하다고 할까요? 총선 전까진 국회의원이 14명이었어요. 이번에는 조금 줄었지만요. 녹색당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환경문제만 다룬다고 생각하는데 사회이슈로도 꽤 진보적인 주장을 많이 하고 있어요.

― 선거 결과는요?
3등을 했어요. 나름 괜찮은 결과였다고 생각해요. 전국 득표보다 지역구 득표가 더 높게 나오기도 하고, 처음으로 적극적인 교민 상대 선거운동을 했다는 의미도 있고요. 다만 국회의원이던 분들이 낙선되는 상황이 발생해서 안타까워요. (뉴질랜드는 혼합비례대표제로 국회의원을 선출하고 있다. ‘정당 투표’와 ‘지역구 투표’를 통해 선출된다.)

― 한인교회는 대다수 보수적이지 않나요? 교인이 진보적인 녹색당의 후보로 출마했다는 사실이 교인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을지 궁금하네요.
맞아요, 보수적인 분위기. 아마 한인교회의 95% 이상 교인은 사회이슈에 대해서 보수적 입장일 겁니다. 그래서 제가 선거에 나가도, 안 찍어주시겠지 했는데 정치 색깔과 무관하게 저에 대한 신뢰로 찍어주시더라고요.(웃음) 주보 옆에 제 선거 홍보물도 놓아 주시고요.  

   
▲ "은폐된 것들이 다 드러나야죠. 그냥 넘어가면 안돼요. 세월호를 그냥 넘어가면 그다음엔 무슨 일이 있을지 끔찍해요." ⓒ복음과상황 이범진

― 선거에 재도전할 건가요?
총선이 끝난 지 한 달밖에 되지 않았어요. 고민 중이에요.

― 직업은 의사잖아요. 의사가 된 특별한 이유 같은 게 있었나요?
의대에 진학한 이유는 의료선교를 하기 위해서였어요. 열여섯 살 때로 기억해요. 미국이 아프간을 공격할 때였는데요. 여자들이 치료를 받아야 할 일이 많은데 남자 의사밖에 없다는 뉴스를 보고, 의사로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었어요.

― 지금도 변함없나요?
어려운 이웃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들을 찾아가야 한다는 마음은 늘 변함이 없어요. 외과 대장질환 쪽 박사과정 중에 있는데요. 전공은 보건의학 정책 분야로 하게 될 것 같아요. 한 사람의 건강을 좌지우지하는 것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환경의 문제이니까요. 큰 구조를 바꾸는 게 더 많은 사람을 살리는 길 같아요. 보건 정책이나 제도 개선에 더 관심이 가는 이유예요. 현직 국회의원 중에서도 의사 출신으로 보건 정책을 위해 적극적으로 일하는 사람이 있어요. 물론 반드시 정치인이나 장관이 되어야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죠. 한 마을에서도 시작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 이야기를 듣다 보니, 여러 활동의 핵심 동력이 신앙인 것 같은데요?
가족과 친척 영향이 커요. 친척 어른들이 신앙생활의 본이 되어주셨어요. 어머니 아버지는 30대 초반에 호주에서 목회하실 때, 이민자들의 설 곳이 지금보다 훨씬 좁았던 때에 불법체류자와 가난한 유학생들에게 늘 집을 개방하셨어요. 제가 어릴 때부터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을 본 영향을 크게 받은 듯해요.

― 소수인종, 여성으로 살아가는 어려움도 있겠지요?
이민 생활을 하면 누구나 겪는 어려움이죠. 유치한 인종차별도 있고, 명확하게 인종차별이라고 설명할 수 없는 일들도 많아요. 뉴질랜드도 반이민 정서가 심해요. ‘뉴질랜드 집값이 오르는 이유가 중국인이 다 사들여서 그렇다’고 소문을 내면, 동양인은 다 혐오 대상이 되거든요. 집값 문제는 이번 선거에서도 이슈였어요. 사실 중국에서 온 사람들이 사는 집은 3-10%밖에 되지 않아요. 정확하지 않은 정보를 퍼뜨리는 거죠. 가슴이 답답해요. 집값이 오르는 이유는 누군가 투기를 하기 때문인데요. 그들은 여론을 움직이는 힘도 갖고 있어요.

― 세월호 참사와 관련한 숨겨진 사실들이 조금씩 폭로되고 있는데요.
은폐된 것들이 다 드러나야죠. 그냥 넘어가면 안돼요. 세월호를 그냥 넘어가면 그다음엔 무슨 일이 있을지 끔찍해요. 지난해 겨울의 그 촛불집회 때처럼 시민들이 계속 관심을 가져야 진실이 드러날 거예요. 정부나 국회의원에게만 맡길 수는 없는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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