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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한 나라의 이재용
[343호 시사 잰걸음]
[343호] 2019년 05월 27일 (월) 17:05:20 박제민 goscon@goscon.co.kr

분식회계와 회계사기

말이란 게 참 희한하다. 같은 일도 다르게 표현하면 느낌이 확 변한다. 예를 들어 ‘종교인 과세’라고 해보자. “돈 내라고? 세금 내라고?” 다짜고짜 화부터 난다. 다른 표현, 좀 더 정확한 표현으로 ‘종교인 소득세 신고’라고 해보자. “국민이라면 누구나 소득을 신고해야 한다고? 그런데 나는 소득이 좀 적은데?” 분위기가 훨씬 부드러워지고 대화의 여지가 생긴다.

다른 예로 ‘분식회계’를 들어보자. “분식집 회계?” 같은 시답지 않은 농담은 하지 말자. 분식집도 어엿하고 떳떳하게 회계장부가 존재하겠지만 그 뜻이 아니다. 분식(扮飾)은 ‘꾸밀 분(扮)’과 ‘꾸밀 식(飾)’이 합쳐진 한자말인데 본래 뜻은 ‘몸을 보기 좋고 맵시 있게 하려고 하는 치장’이다. 분식회계라고 하면 보기 좋게 꾸민 회계라는 뜻이 된다. 뭐 그런가 보다 할 수 있다.

다른 표현, 좀 더 정확한 표현을 대볼까? 간혹 영어 표현을 찾아보면 그 뜻이 더 분명해지기도 한다. 분식회계를 영어로 ‘accounting fraud(회계사기)’ 또는 ‘fraudulent accounting(사기를 치는 회계)’이라고 한다. 뭐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열이 확 오르고 바로잡아야겠다는 욕구가 활활 생겨난다. 

그러니 이제부터 분식회계라고 하지 말고 ‘회계사기’라고 분명히 말하자.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 의혹’이라고 하지 말고,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사기 의혹’이라고 하자.

   
▲ JTBC <뉴스룸> 화면 갈무리

공장 마룻바닥에 파묻은 증거
영화나 드라마의 한 장면이라고 상상해보자. 잔뜩 겁먹은 표정의 사람들 사이로, 수사관이 마룻바닥을 거닐고 있다. 삐거덕, 삐거덕 마룻바닥에서 소리가 날 때마다 긴장은 커진다. 갑자기 수사관이 발걸음을 멈춘다. 잠깐의 정적은 수사관이 내지른 큰 소리에 깨진다. “여기다! 이 아래를 파헤쳐!”

마룻바닥 아래 무언가를 숨긴 사람들이 독립운동가나 민주 열사들이고, 그걸 찾는 사람이 제국주의 세력 또는 독재 권력이라면 우리가 상상한 것은 비극이 된다. 다음 장면은 어김없이 찾은 자들이 숨긴 자들을 무자비하게 고문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반대의 경우라면 어떨까? 숨긴 자들이 마피아 같은 범죄 집단이나 사기꾼들이고, 찾는 자들이 공정하게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이라면? 우리가 상상한 것은 권선징악의 통쾌한 복수극이나 정의가 끝내 승리한다는 유쾌한 활극이 될 것이다.

이런 영화 같은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삼성바이오로직스(삼성로직스)의 ‘회계사기 의혹’을 수사 중인 검찰은 인천 송도에 위치한 삼성로직스 공장의 마룻바닥에서 회사 측이 빼돌린 공용 서버와 노트북 등을 무더기로 발견해 압수했다. 세상 모든 것들은 다 자기 자리가 있다. 내가 일하는 작은 시민단체의 서버와 노트북은 각각 사무실 한쪽 구석과 책상 위에 있다. 그런데 초일류기업이라는 삼성은 왜 서버와 노트북을 마룻바닥 아래에 파묻었을까? 

이상한 일은 또 있었다. 검찰은 삼성로직스의 자회사인 삼성바이오에피스(삼성에피스) 팀장급 직원의 집에 감춰진 회사 공용서버를 찾아냈다. 내가 일하는 작은 시민단체의 서버를 우리 집으로 가져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 일단 무겁고, 가져가도 딱히 할 일이 없다. 그런데 초일류기업이라는 삼성은 왜 회사 공용 서버를 직원이 맘대로 가져가도록 했을까? 

검찰은 이 보물찾기 같은 짓을 꾸민 사람이 삼성로직스나 삼성에피스가 아닌 삼성전자의 임원이라는 정황을 포착했다. 같은 그룹이라지만 엄연히 다른 회사의 서버와 노트북을 파묻거나 감추는 일에 왜 삼성전자가 개입했을까? 이 일로 삼성전자 사업지원TF 상무인 백 아무개 씨가 구속됐다. 사업지원TF는 사실상 삼성 미래전략실(미전실)의 후신이라는 평가다. 구조조정본부, 전략기획실, 미래전략실, 사업지원TF… 삼성은 궁색해질 때마다 이들을 해체한다고 떠들어 놓고는 이름만 바꿔왔다.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이면 습관이고 방식이다.

백 아무개는 삼성로직스와 삼성에피스 임직원들의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일일이 조사해 ‘JY(이재용을 지칭하는 것으로 추정)’, ‘VIP(박근혜 전 대통령을 지칭하는 것으로 추정)’, ‘합병’ 등의 단어가 들어간 문건들을 폐기했다는 혐의도 받고 있다. JY, VIP, 합병… 이 세 단어를 연결하면 무엇이 나올까?

회계사기, 합병, 경영권 승계, 뇌물
삼성로직스의 회계사기 의혹이 사실일 경우 그 자체로도 큰 범죄다. 하지만 이 일이 이재용의 삼성 경영권 승계와 떼려야 뗄 수 없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이건희가 갑자기 쓰러진 이후 이재용의 삼성 경영권 승계 작업이 추진됐다. 경영권 승계를 위해서 삼성물산을 손에 넣어야 했다. 문제는 이재용에게 삼성물산 주식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삼성물산과 이재용이 대주주인 제일모직을 합병하자는 안이 나왔다.

원래 삼성물산이 3배 더 큰 회사였다. 그러나 합병은 제일모직이 3배 유리하게 진행됐다. 격차를 극복하기 위해서 제일모직의 가치를 부풀려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제일모직이 지분을 갖고 있는 삼성로직스의 가치를 부풀려야 했다. 회계사기가 일어난 이유다. 

삼성은 회계법인의 공인 아래 합법적으로 이뤄졌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최근 검찰 수사에서 그 회계법인의 회계사들이 삼성의 요구로 거짓말을 했다고 진술했다. 심지어 신용평가사들도 삼성의 요구대로 평가서를 써주고 10만 원에서 40만 원을 받았다는 언론 보도가 나왔다. 이것이 모두 사실이라면 빼도 박도 못하는 것이다.

만약에 회계사기를 통해 삼성로직스의 가치가 부풀려지지 않았다면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은 무산됐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두 회사의 합병에 캐스팅보트를 쥐고 있던 국민연금공단이 삼성로직스의 가치를 높게 보고 합병에 찬성했기 때문이다. 이재용은 삼성 경영권 승계를 위해 박근혜와 최순실에게 뇌물을 줬고, 박근혜는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이 성사될 수 있게 잘 챙겨보라고 지시를 내렸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이재용은 1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 받았지만 2심에서는 뇌물은 강요에 의한 것이었고 포괄적인 경영권 승계 작업은 없었다며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공정한 나라의 이재용
살면서 가장 강렬했던 역사적 경험을 꼽으라면, 나는 주저 없이 ‘촛불혁명’을 들겠다. 수많은 사람들이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쏟아져 나왔다. 사람들은 국정농단에 항의하며 “박근혜는 퇴진하라”고 외쳤다. 더 나아가 불공정하고 불평등한 세상에 대해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며 “재벌도 공범이다”라고 외쳤다.

청문회에 재벌 총수들이 줄줄이 불려나와 어색하게 고개를 숙이는 것을 보았을 때, 일부 경제인들이 경제계부터 기득권을 내려놓고 변하겠다고 한껏 몸을 낮추는 것을 보았을 때, 촛불혁명을 거쳐 당선된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공정한 나라를 만들겠다고 약속했을 때, 세상이 변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 힘들었던 지난 세월 국민들은 이게 나라냐고 물었습니다. 대통령 문재인은 바로 그 질문에서 새로 시작하겠습니다. 오늘부터 나라를 나라답게 만드는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구시대의 잘못된 관행과 과감히 결별하겠습니다. 대통령부터 새로워지겠습니다. (…) 재벌개혁에도 앞장서겠습니다. 문재인 정부 하에서는 정경유착이라는 낱말이 완전히 사라질 것입니다. (…) 문재인과 더불어민주당 정부에서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 (…) 공정한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특권과 반칙이 없는 세상을 만들겠습니다. 상식대로 해야 이득을 보는 세상을 만들겠습니다.

최근 문재인 대통령과 이재용의 만남이 잦다. 취임 후 7번째, 올해에만 4번째다. 이재용이 353일간 구치소에 있었는데도 이재용보다 대통령을 많이 만난 경제인이 없다. 대통령이 재판 중인 사람을 자꾸 만나는 것에 대해 비판이 일자 문 대통령은 이분법적으로 보는 사고에서 벗어나라고 충고하며 “재판은 재판, 경제는 경제”라고 선을 그었다. 평범한 나는 대통령의 거국적인 식견을 알 바 없다. 다만 박영수 특검팀이 이재용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하며 “경제도 중요하지만 정의를 세우는 일이 더 중요하다”라고 했던 말이 마음에 시큰하게 남아있을 뿐이다.

나라는 나라다워지고 있나? 구시대의 잘못된 관행은 없어지고 있나? 공범으로 지목되던, 어쩌면 주범일지도 모르는 재벌은 어떻게 개혁할 건가? 특권과 반칙이 없어지고 상식대로 해야 이득을 보는 세상은 만들어지고 있나? 이재용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곧 나올 거라고 한다. 공정한 나라에서 이재용이 있을 곳은 어디인가? 

 

박제민
20대 끝자락에 기독시민운동 판에 들어와 어느덧 30대 후반이 되었다. 낮에는 기독 시민단체 실무자, 밤에는 ‘동네교회청년’ 활동가로 살아가는 30대 청년이다. 보수적인 교회와 선교단체에서 자라면서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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