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5호 여정훈의 독서일기] 《초기 기독교의 예배와 복음전도》

     

우리 예배의 경쟁 상대는 누구인가?
요즘 나는 하루에도 두세 번씩 유튜브로 유명 교회의 예배 영상을 본다. 사실 본다기보다는 틀어 놓고 업무 BGM(배경음악)으로 깔아 놓는다. 이 얼마나 좋은 세상인가? 요즘 영어권에서 제일 사랑받는 노래를 만들어내는 베델교회도, 한때 최고였던 힐송도, 미국 성공회의 중심인 워싱턴 대성당도, 세계 어디를 가든 수만 명의 인파를 모으는 교황청도 자신들의 예배를 유튜브로 중계한다. 예배를 정교하게 기획하고, 잘 믹싱된 음향을 뽐내고, 다양한 앵글에 카메라를 배치해서 시청자가 현장에서보다 더 박진감을 느끼게 하는 예배 영상은 교파를 초월해 유행이다. 나 역시 50명 남짓 함께 드리는 교회 예배를 페이스북 라이브로 중계하고 싶어서 스마트폰에 연결할 수 있는 마이크를 하나 샀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우리 교회 예배를 힙하게 포장해서 외부에 소개하고 싶은 욕심이 내게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온라인 세계의 한구석은 현장보다 더 은혜롭게 포장된 예배들의 각축장이 된다.

사실 소셜미디어에 예배를 업로드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순간 내 마음속에서 ‘예배 경쟁’은 이미 시작되었다. 예배를 드리는 동안 예배의 모든 순간들은 머릿속 가상 카메라 앞에 세워진다. 찬양 인도자의 멘트, 설교자의 말투와 동작, 회중석에 앉은 사람들 의 표정 등의 풍경은 남들에게 어떻게 보일까? 화면 전환은 매끄러울까? 우리 예배에 참석한 이들은 성령 충만한 모습으로 보이고 있을까?

2000년대 초반에 유행했던 ‘예배는 콘서트가 아닙니다’ 같은 구호는 이제 식상하지만, 내 기억으로는 이런 종류의 구호들이 예배가 공연이 되는 현상을 막거나 그렇게 되는 시간을 늦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예배와 쇼는 다르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언제나 자신들의 진정성을 전시하기 바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잘 훈련된 밴드와 전기를 많이 쓰는 조명이 있는 교회들에 맞서 자신들의 예배를 홍보했고, 자신들이 부르는 노래들을 엮어 책으로 만들어 팔았고,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과 같이 예배하기를 원했다.

나는 무엇을 향해 이끌린 것일까?
두 달 전에 한국에 다녀간 제임스 스미스는 ‘텔로스’를 분별해야 한다고 일주일 동안 열심히 외쳤다. 이 그리스어 단어는 ‘목적’ ‘끝’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스미스는 이것을 종말론 비슷한 의미로 사용한다. 기독교 신학에서 종말론은 ‘마지막에 모든 것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모색이고, 성경은 구체적인 이야기들로 그것을 묘사한다. 사자 굴에 어린이가 손을 넣는다든지, 목마른 사람에게 생수를 주겠다든지, 많은 민족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예물을 드릴 것이라든지 하는 이야기가 바로 여기에 속한다. 좋은 삶에 대한 전망인 이런 이야기들은 삶을 이끄는 동력이 되어, 합리적 판단보다 더 큰 힘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온라인 공간에 게시된 잘 편집된 예배 영상을 보았을 때, 나는 무엇을 향해 이끌린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잘 녹음된 음악과 세련된 영상, 예배에 몰입하고 있는 회중들의 모습 등이었을 것이다. 이런 이끌림은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에서 다른 이들의 삶을 지켜볼 때 경험하는 것과 비슷하다. 소셜미디어에 게시되는 삶은 항상 매끈하게 잘 편집되어 있고, 긍정적인 면들로 가득하다. 많은 사람들은 다른 이들의 좋은 모습들을 보고 자기 일상과 비교하고, 그로 인해 박탈감과 우울감을 느끼게 된다고 하는데, 이것은 교회 예배를 담은 게시물에서도 마찬가지다. 소셜미디어에 게시된 예배 영상은 다른 것이 아닌 소셜미디어의 텔로스를 사용자의 마음에 새기고, 그것을 재생산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다른 콘텐츠들과 다르지 않다.

초기 교회는 예배를 숨겼다
메노나이트이며 초기 교회사 연구자인 알렌 크라이더는 《초기 기독교의 예배와 복음전도》에서 초기 기독교 예배가 우리 시대 소셜미디어적 욕망과는 전혀 다른 쪽을 향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가 살핀 바에 따르면 초기 교회는 자신들의 예배를 교회 밖 사람들에게 보여주려 하기보다는 숨기려 했다. 신자들은 전도지를 돌리거나 프로그램을 만들어 비신자들을 교회로 유인하려 하지 않았고, 기독교 신앙에 관심 있는 비신자가 예배에 참석하더라도 그들은 설교 후, 평화의 입맞춤이 시작되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지역 교회 지도자인 주교들은 더 많은 사람을 불러 교회를 채워야 한다고 권고하지 않았다. 교회 공동체는 교회의 부흥을 위해 기도하지도 않았다. 예배 자체의 매력을 대중에 어필하고, 그것을 통해 사람들을 교회로 이끌고자 하는 시도가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계속 성장했다.

크라이더가 이 책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초기 교회의 성장 동력이란 예배 자체를 대중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예배를 통해 빚어진 기독교적 삶의 방식이라는 것이다. 기독교의 주일 예배는 콘서트가 아니었지만 정성껏 준비되고 집전되었다. 신자들은 말씀에 대해 서로 토의했고, 사회적 지위와 상관없이 평화의 인사(입맞춤)를 나누었으며, 빵과 포도주로 자신을 기념하라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함으로써 하나님을 경배했다. 그 예배에 참여하는 이들은 다른 로마인들보다 자유로워 보였다. 그들에게는 로마 사회를 움직이는 다른 힘보다 하나님을 섬기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이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회심의 열쇠가 있었다. 무언가 큰 힘에 의해 희생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고 있던 이들이 기독교인들을 찾아왔고, 기독교인들은 그들을 위해 마귀를 쫓는 기도를 해주었다. 이 과정은 욕망을 재조정하는 과정이었다. 로마의 계급적 위계 안에서 안정된 지위를 차지하려던 욕망은 그것을 벗어나 새로운 나라의 시민이 되고자 하는 욕망으로 변경되었다. 이 욕망이 그들을 세례로 이끌었고, 3년 동안 이루어지는 재사회화(세례 준비) 과정을 기쁨으로 따르게 했다.

이 재세례파 학자가 드러내는 기독교 예배의 경쟁자는 다른 교회, 다른 교파의 기독교 공동체가 아닌 사회를 유지하는 욕망 체계였다. 크라이더가 인용한 순교자 유스티누스(저스틴)의 문장이 이 사실을 잘 보여준다.

“전에는 부와 재산을 늘리는 일에 큰 기쁨을 느꼈던 우리가 이제는 가진 것을 공동 기금으로 모으고, 필요한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있다. … 상종도 하지 않았던 우리가 이제는 … 함께 살면서 원수를 위해 기도함은 이방인들도 우리처럼 그리스도께서 주신 좋은 소망을 함께 나누기 위함이다.” (44쪽)

     
 

* 책의 개정판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인과 로마인의 이름을 영어식으로 계속 표기한 것은 아쉽다. 이 책이 처음 한국어로 나왔던 2003년보다 현재는 더 많은 고전이 번역되어 있고, 그리스어나 라틴어 이름 표기에도 합의가 폭넓게 이루어져 있다. 초기 문헌들의 책명도 전례학이나 교회사 연구에서 통용되는 것으로 통일된다면 다른 책과 함께 읽기에 더 좋지 않을까.

 


여정훈
대학원에서 신약성서를 공부하던 중 공부에 재능 없음을 느끼고 기독교 시민단체에 취직한 후 자신이 일도 못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일 못하는 사람 유니온’을 만들었다. 《일 못하는 사람 유니온》의 공저자 중 한 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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