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0호 3인 3책]

시편적 인간
월터 브루그만 / 박형국·김상윤 옮김
한국장로교출판사 펴냄 / 2017년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을 보았다. 왕은 좀비가 되어 있었고, 쫓겨난 세자는 도탄에 빠진 이들을 돌보며 남쪽으로부터 서서히 북쪽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드라마는 두 명을 나란히 보여주면서 시청자에게 누가 권력을 차지해야 하는지를 묻는 것 같다. 시청자는 이 드라마를 보기 위해 모니터 앞에 앉을 때 둘 중 하나에 대한 지지선언을 요구받는다. 드라마의 배경은 왕과 반상의 구분이 있던 조선시대지만 시청자는 등장인물의 입장에 서는 경험을 통해 세상에 대한 자신의 비전을 재확인하거나 점검하게 되는 것이다.

교황 비오 11세는 1925년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왕” 축일을 제정했다. 그는 이 축일을 제안하며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나라의 윤리적 비전을 확고히 하고, 그 안에서 연대하는 미래를 제시했다. 이 제안은 매력 있는 것으로 여겨져서 감리교, 루터교, 성공회, 장로교 등 교회력을 지키는 많은 개신교 교파들도 이 날을 함께 지키게 되었다. 근대국가가 수립된 이후 많은 국가들이 왕정이 아닌 민주적 정부를 선택했지만 왕이라는 단어는 여전히 권력의 현실을 파악하고 세상의 미래에 대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개념적 도구로서 유효하게 사용되고 있다.

《예언자적 상상력》으로 유명한 월터 브루그만은 2014년에 ‘상상력’과 관련된 좋은 책을 한 권 더 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시편을 소재로 유대-기독교 신앙이 만들고 계승한, 세계에 대한 상상력을 다룬다. 그에 따르면 시편은 여러 신들이 있던 고대 가나안 사회에서 ‘야훼 하나님의 대관식’이라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시편의 화자들은 바알과 야훼를 대립시키고, 이스라엘을 해방하여 그들과 언약을 맺은 야훼를 새로운 왕으로 청중에게 소개한다. 드라마에서처럼 두 지도자 모델이 대립하고, 청중은 선택을 요구받는 것이다.

시편이 소개하는 새로운 왕은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는 이, 곤경에 처한 자를 돕는 이, 그래서 온전히 믿을만한 이다. 비록 지금 정의가 수립되지 않는 것 같아 보여도 그는 신실하기 때문에 빼앗기고 억눌린 이들을 위한 신원을 행할 것이다. 브루그만이 요약하여 소개하는 이 새로운 왕의 모델은 언어학자이자 정치평론가인 조지 레이코프가 진보주의 정치 비전의 기반이라고 한 “자애로운 부모” 모델에 가깝다. 레이코프는 도덕적 판단의 기초로 “엄한 아버지” 모델과 “자애로운 부모”라는 두 모델을 제시하는데, “엄한 아버지”는 세상이 위험하므로 개인의 힘을 길러 홀로 설 수 있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 도덕 모델에서 중요한 것은 자립과 능력에 따른 보상이므로, 이 모델은 자유시장(자립)과 선별적 복지(보상)에 관한 지지와 연관된다. “자애로운 부모” 모델에서도 세상은 위험한 곳이지만 동시에 긍정적인 가능성으로 가득한 곳이다. 여기에서 양육자의 역할은 자녀가 보살핌과 존중을 받음으로써 그것을 다른 이들에게도 나누어 주는 사람으로 자라나는 것이다. 이 모델이 보편적 복지에 대한 지지와 관련되어 있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월터 브루그만은 시편을 비롯한 성경 전체가 하나님을 “자애로운 부모”에 가까운 권력으로 제시하고 있다고 정리한다.

이 책을 읽는 경험은 깊은 묵상과도 같았다. 저자는 삶에서 만나는 문제와 구약의 신학적 내용 양쪽을 모두 치열하게 고민했고, 그 고민의 깊이만큼 조심스러운 언어로 글을 써내려 갔으나 그 메시지는 선명하다. 모든 비밀을 아시는 분께 마음을 숨김없이 내려놓을 때 전능하신 이의 돌봄을 경험하게 되고, 그 경험이 삶을 바꾸며, 세상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재설정함으로써 정치와 경제를 포함한 세상 전체를 바꿀 힘을 준다는 것이다.

*맞춤법에 벗어난 표기가 종종 보인다. 다음 판이 나온다면 이 부분은 수정되면 좋겠다.
*저자가 찬송가를 인용하는 부분에서 한국어 제목이나 가사를 알려주면 좋지 않았을까. 예를 들어 마지막 페이지에 소개된 찬송가는 <21세기 찬송가> 66장, <성공회성가> 526장에 실려 있는 곡이다.
 

여정훈
대학원에서 신약성서를 공부하던 중 공부에 재능 없음을 느끼고 기독교 시민단체에 취직한 후 자신이 일도 못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일 못하는 사람 유니온’을 만들었다. 《일 못하는 사람 유니온》의 공저자 중 한 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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