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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디배움터: 더불어 빛나다
[322호 반디마을 한몸살이 08]
[322호] 2017년 08월 25일 (금) 14:48:00 정동철 ‘반디마을’ 올인 멤버, 몸된교회 전도사 goscon@goscon.co.kr
   
▲ 사진: 정동철 제공

우리는 대안을 만들려고 공동체를 시작하지 않았다. 어떤 성과를 통해 유명세를 탈 생각 같은 건 꿈에도 없다. 지금의 집필도 부담스럽고 민망할 따름이다. 다만 우리의 기록은 나실인의 공개적인 서원과 같은 것이다. 누구든지 거룩한 자로 구별되어 나실인이 되려고 한다면 그는 머리를 깍지 않고 당시 대중 음료였던 포도주와 포도의 소산조차 거부하고 부모의 장례식에서도 시체를 피하는 등 특이한 행동으로 드러나야 했다.(민 6:1-12) 이는 내면의 결심을 가시화하는 과정을 통해 스스로는 물론 공동체가 이를 지켜주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우리는 성경의 원안을 따르고 싶은 이들이며 같은 맥락에서 여러 실험을 거듭했던 위대한 선배들로부터 배우고 싶은 이들이다. 시작 단계에서 우리의 생각은 공개되었고, 여러 우려와 기대를 동시에 받았다. 이런 관심은 나실인의 덥수룩한 머리카락처럼 우리를 부담스럽게하지만 연약한 사람들의 결심을 강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모략이기도 하기에 그렇게 하기로 했다. 이런 나의 의도와는 달리 독자들이 우리 삶에서 대안적 문화를 발견하게 되었다면 그건 오래된 신선함일 것이다. 마치 명곡이 각 세대의 색채로 각색되어 새 노래처럼 들리듯 말이다. 그 오래된 신선함이 우리 삶의 전반에 새로운 대안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떠나서 생긴 문제를 돌아와서 해결하는 격이다.

부모의 청지기적 사명
그중 하나가 교육이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라는 아메리칸 인디언의 격언이 있다. 하지만 우리 시대의 교육은 매우 단편적이다. 교육은 교육자에게 맡기는 것이 최상의 선택이며 부모는 삼천지교(三遷之敎)의 자세로 뒷바라지를 하는 것이 최선으로 여겨졌다. 비단 교육뿐 아니라 삶의 전반이 전문화라는 이름으로 단조롭고 부분적인 것이 되었다. 집은 목수가 짓고, 병은 의사가 고치고, 사고는 보험사가 처리하고, 분쟁은 변호사가 해결한다. 한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모든 것에 자신의 손길이 닿아야만 했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모든 영역이 전문화되어가고 우리는 그 서비스를 받기 위해 나의 전문영역에서 돈을 버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는 단조로움에 빠져든다.

사실 교육의 첫 번째 책임자는 부모다. 어떤 교육 형태를 취하든 어떤 기관에 위탁하든 그 책임을 피할 수는 없다.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엡 6:4)는 청지기적 사명이 부모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다. 과연 부모들은 이런 사명을 내팽개치고 육아의 고역에서 탈출하고자 아이들을 어린이집, 유치원, 학교, 학원으로 서둘러 보내기를 갈망하는 것일까? 아님 전문성이라는 탁월성에 대한 열등감으로 일찍이 전문기관에 위탁을 선택해버리는 것일까?

모든 것이 현상을 설명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사회구조가 바뀌었음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과거 농경사회에서는 가족 공동체가 육아의 수고를 덜어 주었다. 삶의 기술과 지식 또한 부모와 마을 공동체가 전수해주었다. 산업화 도시화가 가속화 되면서 이주민이 된 사람들은 붕괴된 공동체와 개별화 된 삶에 익숙해졌고, 그런 문화 속에서 육아와 교육은 오롯이 한 가족 혹은 여성의 짐이 되어버리기 일쑤였다. 이런 상황에서 공교육은 배움의 불균형을 해결하는 것과 개별 가족을 지원하는 것에 획기적인 대안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는 오히려 공교육의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다. 대안이 되었던 공교육은 우리 사회 여러 가지 질병의 원인이 되고 있지만, 교육정책은 죄충우돌 표류하고 있고 달리 방법을 찾지 못한 부모들은 익숙한 방식대로 아이들을 학교에 맡긴다. 그렇다 하더라도 공교육에 의존하는 부모들을 무조건 비난할 수는 없다. 다만 이런 상황 속에서라도 청지기적 사명은 무엇일까를 고민해주길 바랄 뿐이다.

공동체로 모여 살게 되면 그런 고민에 선택의 폭이 많이 넓어진다. 한 아이를 키울 마을이라는 ‘학교’가 자연스럽게 형성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청지기의 자세로 최선의 교육을 고민한다. 내가 홈스쿨링을 처음 고민할 때만 해도 이것이 공동체 전체의 고민은 아니었다. 그러나 큰아이가 홈스쿨을 시작되면서 함께 사는 이들에게도 곧 다가올 미래였기에 여러가지 논의가 있었다. 나는 공동체가 근본적으로 지향하는 것이 하나님의 통치 안에 있는 삶이었기에 어떤 형태를 취하더라고 그 정신에만 동의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교육의 형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고 선택할 문제이며, 선택 이후에는 청지기로 살기 위해 힘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함께 살아보려고 다가온 가족들 중 한 친구가 초등학교 교사였는데, 그는 나보다도 더 복잡한 위치에 있었다. 초등학교 교사가 공교육에 희망을 두지않고 자기 자식은 대안학교를 보내거나 홈스쿨링을 한다는 것이 스스로 용납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나도 그때는 그리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말하기도 했다. 교육의 형태는 본질이 아니므로 부족한 부분은 공동체가 교육과정을 만들어 해소하면 될 일이라고 설명했다. 얕은 생각이었다. 아이 셋을 가르치면서 교육은 단지 지식의 습득이 아니기에 우리 선택이 아이들의 삶의 방향을 결정할 뿐 아니라 우리 공동체의 정체성을 교육이라는 매개를 통해 농축하고 전수하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자라는 것은 아이들만이 아니었다. 삶으로 본이 되는 것이 우리 홈스쿨의 지향점이기에 우리 삶도 치열했고, 그 만큼 성장했다. 부끄럽지만 수 년 전 내 교육 소신을 기억하고 있던 공동체 가족들 앞에서 말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함께 교육하자고 청하였다. 거대한 흐름을 벗어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두렵고 떨림의 정도가 내 미래를 선택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자식의 장래 문제인데 부모가 대신 선택하는 것이니까 더욱 그렇다. 논의가 길어지고 깊어질 수밖에 없는 의제였다. 

반디배움터: 더불어 빛나다(Twinkle Together)
공동체의 한 형제가 그동안 함께 논의하던 교육적 문제와 본인의 고민을 정리해서 들려주었는데, 길고도 깊은 고민이 잘 정리된 듯하여 소개한다.

공교육(公敎育)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 즉 보편적이고도 일반적인 가치를 가르치는 것이 공교육이 아닌가? 그런데 지금의 공교육이라 불리는 학교는 그런 공적가치 즉 약자를 보호하고 다름을 존중하며 함께 공존하는 방법을 배우기는커녕 극단적인 무한경쟁에 내몰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것은 오히려 공교육이 아니라 값싼 사교육에 지나지 않는다. 사욕을 채우기에 적절하면서도 가장 저렴한 교육으로 전락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교육은 공공의 가치를 실현해야 한다. 배움은 결코 진공상태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공동체가 바로 진정한 배움의 환경으로 작용한다. 공동체가 가지고 있는, 중요한 가치가 세대를 이어 공유되고 전수되는 공간, 공동체의 가장 큰 결실인 ‘사람’이 길러지는 곳, 그곳이 바로 배움터이다. 따라서 온전한 배움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그 환경인 공동체가 온전히 서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이 배움터와 공동체는 상호의존적이다.

옳은 말이다. 사족을 달자면 단지 공교육의 현실에 대한 반동이 우리의 에너지원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에너지원은 하나님의 통치가 교육 현장에서도 증명되도록 갈망하는 열정이어야 한다. 또한 다양한 교육의 형태들이 존중되어 선택의 폭이 더욱 넓어져야 한다. 그래서 결의하여 만든 것이 ‘반디배움터’이다. 작은 빛을 가진 반딧불이가 함께 모여 세상을 환하게 비추듯이, 배움터의 구성원이 혼자가 아닌 함께, 자신만 빛나는 스타가 아닌 서로를 비추고 세상을 비추는 존재가 되는 바람이 담겨 있다. ‘학교’라는 이름이 갖는 선입견, 즉 교사와 학생이 구별되어 교사가 학생들에게(혹은 어른이 아이들에게) 일방적으로 지식을 전달하는 방식으로 학습이 이루어지는 곳이라는 생각을 극복하기 위해 ‘학교’ 대신 ‘배움터’라고 이름 붙였다.

‘배움터’라는 이름이 담고 있는 중요한 의미는 이러하다.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배움의 주체여야 한다. 모두가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성숙을 위해 항상 배워가야 한다.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가 따로 있지 않다. 모두가 가르치면서 배우고, 배우면서 가르칠 수 있다. 배움터의 교육은 주지주의적 교육에 국한되지 않고 전인적인 교육과 삶과 밀접하게 연관된 실천적 교육을 기대한다. 반디배움터의 학생은 올해까지 5명으로 열네 살 진이, 열한 살 인이, 열 살 민이와 하빈이, 여덟 살 성훈이가 이들이다. 현재는 홈스쿨을 중심으로 한 빌리지스쿨 형태를 취하고 있다.

 교육과정은 매우 단순하여 초등학교까지 모두가 공감하는 목표가 고작 신앙전수와 책읽기를 스스로 하는 정도이다. 수학은 초등 3학년이 되면 시작한다. 그 전엔 주로 생활에 불편함이 없는 돈 계산, 치수, 부피, 시간, 날짜를 깨닫는 정도로 만족한다. 영어는 더 관대하여 중학생 때부터 시작한다. 그 외엔 아이들의 관심과 부모의 욕심을 반영하여 많은 운동과 예능교육을 가미한다. 오후 시간이 주로 수영, 야구, 축구, 피아노, 요리, 미술, 노작, 커피드립, 작문 등을 한다. 별거 없다고 생각했는데 써 놓고 보니 제법 많은 시도를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도 별거 없다고 느끼는 것은 우리가 동의하여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신앙교육과 책읽기와 작문 정도여서 그런 것 같다. 나머지는 관심에 따라 생겨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한다. 그저 관심의 정도에 따라 중요함과 사소함으로 나누지는 않는다. “더불어 빛나다”라는 반디배움터의 지향점 안에 그 경중을 나누는 화두가 담겨 있다.

1. 하나님과 더불어 : 빛이신 하나님을 깊이 알아가고 그분을 닮아갈 때 우리가 빛 비추는 존재임을 깨달아 간다. 이를 위해 반디배움터는 영성훈련의 기초 위에 세워진다.

2. 이웃과 더불어 : 배움의 궁극적인 목적은 자신을 넘어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기 위함이다. 이를 위해 연약하고 소외된 자들의 아픔을 공감할 수 있는 공감력과 건강한 사회를 함께 이루어 가기 위한 공적 의식을 갖추도록 훈련한다(덕성). 이를 바탕으로 이웃을 구체적으로 섬기기 위한 실천적 지식(혹은 실천적 기술)을 습득하도록 노력한다.

3. 자연과 더불어 : 자연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우리의 보금자리이며, 우리는 이들을 잘 가꾸고 보존할 책임을 있다. 자연이 주는 혜택을 감사하게 여기며, 이들과 공존하는 삶의 방식을 체득하도록 노력한다.

4. 더불어 함께 : 함께 빛을 모을 때 세상을 더 환하게 비출 수 있음을 깨달아 간다. 이를 위해 서로의 빛을 발견해주며, 서로 연합하고 연대하는 공동체적 삶의 태도를 배우고 익힌다.

이런 가치들은 대체로 수업보다 공동체적 삶을 통해 전수되기를 기대하며 결국 이 배움터가 자립의 터전이 되기를 소망한다. 공동체의 각 사람이 자신이 가진 빛의 색깔을 발견하고, 스스로 빛을 비추는 법을 터득해가도록 도울 수 있으면 좋겠다. 우리는 이들 빛이 함께 비취는 세상을 꿈꾼다.

심심한 아이들
여기까지가 우리 교육의 이상이라면 현실은 어떨까? 부모들은 요맘 때 아이들이 많이 뛰어놀기를 바란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아이들은 늘 심심해한다. 처음 얼마동안 많은 친구들을 사귀고 놀아야 할 때에 고립되어 심심한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가 선택한 결정이므로 문제들이 생길 때마다 자책할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극복하려고 애쓰니 장점도 드러났다. 심심함을 자원 삼아 인내와 창의를 가르친다. 요즘 아이들은 너무 많은 자극을 받는다. 심심할 겨를이 없을 정도로 즉각적으로 반응해주고 프로그램도 다양하게 제공된다. 그래서 인내를 배울 필요가 없다. 우리 아이들은 심심함을 노래하다가 지루함의 끝자락에서 놀이를 발견한다. 종이접기, 나무토막으로 공작하기, 땅파기, 역활극하기 등… 별거 아닌 것들로 장난감을 만들거나 창의적인 놀이를 개발한다.

어느 날에는 뒷산에 등산로를 만들고 나무에 밧줄을 걸어 오르내리기도 했다. 몇 번 그러다 말겠지 했는데 의외로 등산과 숲 속 탐사는 오래 지속되었다. 열 살 아이들이 주축이 되어 벌인 일인데 꼬맹이들까지 산으로 끌고 올라가는 장면이 자주 목격되었다. 궁금해진 어른 한 명이 아이들의 뒤를 밟았다. 그리고 카톡으로 공개된 하나의 동영상엔 모두의 마음을 뭉클하게 하는 장면이 담겨 있었다. 산 위엔 아이들의 비밀 놀이터가 있었다. 쓰러진 나무를 이용한 탈거리, 낡은 밧줄을 이용한 그네, 아이들의 로망인 ‘본부’까지…. 그야말로 갖출 건 다 갖춘 숲속 놀이터였다. 그걸 만드느라고 아이들은 날마다 산에 오른 것이다. 나는 동영상을 본 후에도 그곳에 직접 가보지는 않았다. 그들만의 공간이니까 추억 속에 잘 간직되길 기대할 뿐이다. 아이들은 이렇게 점점 자라날 것이다. 우리 공동체의 어른들이 집을 짓고 회의하고 손님을 맞이하듯 아이들도 놀이터를 짓고 토론하고 친구들을 초대한다. 흉내내기가 아니라 그렇게 삶을 살아간다.

 

정동철
1971년생으로 울산대학교에서 산업디자인을 공부한 뒤 IVF(한국기독학생회) 캠퍼스간사로 14년 동안 섬겼다. 지금은 ‘디자인잇다’ 대표로 일하면서, 몸된교회 전도사로 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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