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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x Seoulia’
[322호 스무 살의 인문학]
[322호] 2017년 08월 25일 (금) 14:58:58 김희림 철학을 좋아하는 20대 인문학도 goscon@goscon.co.kr
   
▲ 서울 야경 (사진: Larry Koester)

놀이터의 기하학
디스토피아 문학을 읽는 영문학 수업 시간이었습니다. SF 소설들을 읽으면서 지금 우리가 사는 문명을 공간론으로 비추는 수업이었지요. 교수님은 강의 도중 흥미로운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그는 다소 뜬금없이 강원도 출신의 수강생이 있는지 물었습니다.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 교수님은 학생들에게 강원도를 떠올릴 때 연상되는 이미지나 경험들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대답들이 나왔습니다. 적잖은 이들이 도박장을 이야기했고, 동해나 정동진에 여행을 다녀온 경험을 말하는 이들이 나머지였습니다.

교수님은 도박장과 여행 이야기를 가만히 들으시더니 제 기억에 오래 남을 말을 남겼습니다. 기억을 더듬어 재구성한 교수님의 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보시다시피 강원도는 하나의 독립적인 공간이 아닙니다. 강원도는 서울에 사는 중산층 정상 가족들의 주말 놀이터로 전락했지요. 서울에서 기능할 수 없는 전근대적 환경과 휴양에 대한 욕망이 소비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고, 강원도는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합니다. 문명은 중심과 주변을 끊임없이 생산하고, 주변은 중심에게 복종하지요.” 저는 매우 충격적이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저는 서울에 처음 올라와서 대학 선배들을 만났을 때의 대화를 떠올렸습니다. 저를 소개하며 부산에서 왔다고 하자 모두들 똑같은 반응을 보였습니다. 다들 부산 여행 경험을 이야기했습니다. 감천문화마을과 해운대가 빠지지 않았지요. 당시 저는 이상한 기분을 느꼈습니다. 제가 평생을 자란 고향이 누군가에게 여행지로 느껴진다는 점이 무척 괴이했던 것입니다. 형용하기 힘들었던 그 감정을, 주변과 중심, 그리고 지역성(Regionality)에 대한 고민을 이어가면서 비로소 조금씩 해석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사는(買) 사람과 사는(住) 사람
올 초에 제주도로 사흘간 가족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즐거웠습니다. 서울에서 대학 생활을 하는 저와 동생이 부모님과 보낼 수 있는 많지 않은 시간이었거든요. 짧지만 소중한 여행이었습니다. 날씨가 여행 기분을 따라주지 못할 때도 있었지만 우리는 기운차게도 사흘 내내 제주도 곳곳을 다녔습니다. 시장과 박물관과 산책로를 쏘다니고 맛있는 음식들을 찾아먹었습니다. 가족여행으로 만난 제주도는 고등학교 졸업여행으로 다녀온 제주도와는 또 달랐습니다. 그런데 그 즐거운 여행을 하면서 저는 마음 어느 한구석이 늘 편치 않았습니다.

어디를 둘러봐도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관광객과 그들을 맞이하는 사람. 돈을 내고 구경하는 사람과 돈을 받고 구경시켜주는 사람. 추억할 것을 탐하는 사람과 그 추억에 값을 매기는 사람. 보러온 사람과 보여주는 사람. 제주도의 여행지에는 오직 사는(買) 사람과 파는(賣) 사람이 있었지만, 사실 우리들은 사는(住) 사람과 가는(行) 사람입니다. 여행을 하며 저는 관광‘객(客)’으로 불렸지만 제주도에서의 사흘간 가는 사람인 저는 사는 사람들을 압도했습니다. 분명 손님으로 놀러간 제가 섬의 주체가 되어 움직였고 모두들 저를 대접했습니다.

그러나 따져보면 제주도에서 제가 구경한 모든 것들은 누군가의 생계였습니다. 시장 구경만 해도 그렇습니다. 저는 작고 가난한 동네 시장 옆에서 자랐습니다. 전쟁터와 같았던 그 시장. 10년을 함께 장사해도 자리싸움이 붙으면 당장 장사 그만둘 것처럼 싸우고, 그 다음 날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웃으며 술잔을 나누던 사람들. 혹시 이 이야기가 낭만적으로 들리신다면 관광객으로 사는 것에 익숙한 분이실지도 모르겠네요. 그렇게 싸우던 사람들은 모두 제 친구의 부모님들이었습니다. 오늘을 팔아야 내일을 살 수 있던 사람들에게 양보의 여유는 많지 않았고, 아무리 상처가 깊어도 다음날 어떻게든 화해해야 하루를 버틸 수 있었습니다.

제주도에서 제가 만난 사람들도 다들 비슷한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밀려드는 관광객들에 맞춰 삶의 리듬을 가꾸면서 말입니다. ‘예쁜 쓰레기’에 지나지 않는 기념품을 팔고 대단할 것 없는 음식들에 제주도 특산물이라고 광고하는, 누군가에게 구경을 당하기 위해 구성되는 사회. 객(客)들이 시선의 주체가 되는 사회. 이 완벽한 주객전도의 간극을 느끼며 저는 부산으로 돌아왔습니다. 제게는 고향인 도시,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감천문화마을과 해운대로 기억되는 바다 여행의 도시인 부산으로 말입니다.

‘Pax Seoulia’
근현대사를 쥐고 흔든 서구 열강들의 제국주의적 침탈의 폭풍을 겪으며―그 폭풍이 과연 지나갔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을 수 있습니다―그에 대한 반성과 저항으로 탈식민주의(Postcolonialism)가 따라 나왔습니다. 억압자를 제국으로, 피억압자를 식민지로 상정하고 억압을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탈식민주의 비평 방법론입니다. 이후 여러 운동들이 탈식민주의를 수입했습니다. 탈식민주의를 수용한 여성주의는 가부장제와 남성성을 제국, 여성을 식민지로 보았고 생태 및 환경주의는 인간을 제국, 자연을 식민지로 읽었습니다.

탈식민주의적인 방법론은 억압의 주체로서의 제국을 전제합니다. 즉, 이 세계에 어떠한 제국들이 있느냐가 첫 질문이 되겠지요. 한국 사회는 식민지 경험을 바탕으로 재구성된 기억들이 많기에 이러한 비평이 쉽게 먹히는 듯하지만, 그만큼 한국의 제국주의적 성격은 납득하지 못합니다. 일본의 조선 점령에 대한 탈식민주의 비평은 한국인들의 심금을 울리기 적절하지만, 남한의 베트남 전쟁 참전이 제국주의에 동참했다는 함의를 갖는다는 것과 그리하여 일본의 조선 점령을 암묵적으로 정당화하는 기제였다는 이야기를 꺼내면 살아남기 힘들지요.

나아가 지금의 한국 사회가 제국의 지리학을 답습했다는 말은 더더욱 통용되기 어려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살펴봅시다. 압도적인 물량의 부와 재원이 오직 서울을 향해 흘러들어온다는 점과 서울을 중심으로 주변의 도시들, 아니 전국 모든 도시들이 상대적인 기능을 한다는 점에서 한국은 서울을 중심으로 한 고전적인 제국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강원도는 중산층 정상 가족들의 주말 놀이터로, 제주도는 일상의 반복으로부터 떠날 수 있는 이국적 휴양지로 재구성되는 것을 우리는 똑똑히 보고 있지 않나요.

앞서 언급한 탈식민주의 여성주의를 다시 제국주의적으로 해석하면, 관광은 사회적 강간입니다. ‘조국 근대화’는 서울 사람들의 입맛에 맞는 문화적 식민지 건설에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세워진 문화적 식민지에서 사생아로 탄생한 수많은 문화자본들은 식민지의 것이 아닙니다. 제국에 사는 시민들 것이지요. 원주민들은 사생아로 태어난 문화자본들을 기르는 보모로, 그리고 문화자본들을 재생산하기 위해 애쓰는 산파로 전직합니다. 서양의 근대화는 독재와 제국으로부터의 탈피였다면 한국은 근대화를 통해 독재와 제국을 완성합니다.

서울에 대한 상상
그렇게 서울-수도권이 아닌 곳은 모두 ‘지방’으로 환원되고 지방에 특색을 부여합니다. 정밀한 수준의 오만함입니다. 한 공간이 내적으로, 그리고 독립적으로 버틸 수 있는 힘을 애초에 전제하지 않은 채 사회를 구성하고는 지역성을 창조하는 것은 오만함입니다. 지역화는 타자화의 특수입니다. 문명은 중심과 주변을 끊임없이 생산하고, 주변은 중심에게 복종한다는 영문학 교수님의 말을 다시금 떠올립니다. 제2의 도시라는 부산에 살면서도 중심에 편입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서 서울로 대학을 가야겠다고 다짐한 수험생 시절의 저를 돌아보면서 말입니다.

저는 이번 주가 지나면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부산으로 내려갑니다. 군 입대를 앞두고 반 년 정도 집에서 쉬면서, 지나치게 정신없었고 바빴던 서울에서의 활동들을 털어내고 재충전의 시간을 가지려고 해요. 이러한 결정을 내리기까지 무척 고민이 많았습니다. 6개월이라는 짧은 시간이지만, 서울에서만 배울 수 있고 활동할 수 있는 것들을 정리한다는 것은 적잖은 욕심의 비움을 요했습니다. 그렇지만 이내 마음을 정리하며 부산에서 배울 수 있는 것들을 정리해보았습니다. 부산대학교 철학과 대학원 수업을 청강하기로 했고, 늘 부족한 고전어 공부에 집중하기로 계획을 새로 짜면서 말입니다.

그렇지만 부산으로 돌아가서 또 하나 제가 탐구하고 싶은 과제는 지역성(Regionality)입니다. 어느새 서울이라는 중심에서 그 중심성을 내면화한 저는 그 뿌리 깊다는 부산의 사투리를 버렸고, 부산 지리보다 서울 지리에 익숙합니다. 부산으로 돌아간다는 느낌보다 서울을 떠난다는 느낌이 더 강렬합니다. 부산에서 쉬는 시간과 군 복무를 하는 시간은 제가 자연스레 망각했던 지역성을 상기할 기회가 되겠지요. 주변에서 중심으로 유학하면서 잊었던 주변성을 말입니다. 그러나 언젠가 서울로 다시 되돌아오(가)는 것을 전제한 상황에서 이러한 해석학적 도전을 통해 제가 ‘지방’을 ‘지방’으로 인식하지 않을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실존은 호명에 대한 부정에서 출발합니다. 지방이라 불리는 것, 여행의 대상과 수도 중심의 근대화의 부산물로 불리는 것을 거부할 때 그 공간은 독립성을 갖습니다. 제국의 질서를 좇는 한국 사회에서 식민지의 독립성을 탐구하는 것은 인식론적 반역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그것 또한 제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이고 할아버지와 아버지 세대가 근대화를 거치면서 구축한 세상입니다. 제국의 놀이터와 관광지로 불리는 그 호명들을 거부하는 공간의 실존은 가능할까요? 서울로부터의 평화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요? 서울에서의 마지막 생활을 정리하면서 비로소 저는 서울 그 자체를 상상해봅니다.

 

김희림
장차 전문성과 대중성, 다양성을 겸비한 인문학자를 꿈꾸는 스무살 인문학도. 머리 아픈 철학책을 좋아하는 만큼이나 시끄러운 베이스 기타 연주를 즐기며, 비폭력·반전·반핵을 지지하면서 삼류 무협영화 ‘덕후’를 자처한다. 아버지인 김기현 목사와 함께 ‘로고스서원’을 꾸려나간다. 경희대 철학과 2학년에 재학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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