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8호 스무 살의 인문학]

▲ 사진: Max Pixel

‘Three Little Pigs’
외우는 것을 지독히도 싫어하는 제 성격이 형성된 때는 아홉 살의 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아버지는 제게 영어로 쓰인 동화책들을 통째로 외우도록 가르쳤습니다. 그 일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릅니다. 동화책이더라도 책에 쓰인 모든 문장을 술술 외우는 과제는 아홉 살 아이에겐 분명 벅찬 일이었습니다. 어찌나 고되게 외웠는지, 그 동화책의 몇 구절들은 아직도 입가에 맴돕니다. 그 덕에 저는 영어를 대할 때 대단한 자신감을 갖게 되었지만, 암기라는 말만 나오면 질색하는 성질도 얻고 말았습니다.

처음 외운 동화책은 《아기돼지 삼형제》(Three Little Pigs)였습니다. 짚과 나무로 집을 지은 첫째와 둘째 돼지는 늑대의 무력에 의해 집을 잃고, 튼튼한 벽돌을 쓴 셋째 돼지의 집으로 도망가 함께 늑대를 막아냈다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원작에서는 첫째와 둘째가 늑대에게 목숨을 잃지만, 제가 읽은 어린이용 판본에서는 첫째와 둘째가 살아남아 셋째의 벽돌집으로 도망갑니다. 그리고 세 형제가 행복하게 사는 것으로 마무리되지요. 잘 알려진 것처럼 아기돼지 삼형제는 성실하게 준비해야 재난을 막을 수 있다는 교훈을 전합니다.

동화를 외우는 것이 너무 싫었던 저는, 하기 싫은 일을 마주하는 사람들이 으레 그러하듯 책을 펼쳐 놓고 딴생각에 빠지기 일쑤였습니다. 특히 책의 마지막 장면을 매일 같이 곱씹었습니다. 아기돼지 삼형제가 행복하게 살았을지 궁금했습니다. 집을 잃고 막내의 집으로 들어가 더부살이하는 두 형들이 정말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까요? 당시 저는 셋째 돼지가 형들에게 자기 집에서 살게 해주는 대가로 매일 짚과 나무를 구해오도록 시켰으리라는 진지한 확신을 갖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그 확신을 구체적으로 설명할 길이 없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아기돼지 삼형제의 마지막 장면에서 자본과 계급의 탄생을 읽었던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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