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호 스무 살의 인문학] 이병주의 〈철학적 살인〉에 대한 법철학적 소고

▲ '초국가적 폭력에 대한 저항'이라는 확고한 철학 위에서 움직인 본회퍼와 안중근

TV는 ‘사랑’을 싣고
우리네 세상은 연애 없이는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연애하는 이들이 없다면 카페와 식당은 문을 닫을 것이며, 작가와 작사가는 아무것도 쓸 수 없을 테니까요. 연애라는 개념이 19세기 자본주의와 함께 태동했다는 고전적인 논의는 차치하고서라도, 경제라는 하부 구조가 연애에 적잖이 기댄다는 것은 금방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눈치채야 할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대한민국 어느 곳에서라도 볼 수 있는 연애에 대한 묘사와 미화, 그리고 격려는 특정한 연애, 나아가 사랑에 대한 특정한 ‘세계관’을 전제하고 심지어 강요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흥미롭게도 독점적 사랑, 모노아모리(Monoamory)입니다. 한 사람은 오직 한 사람과 사랑으로 맺어진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사고입니다. 독점적 사랑이 특정한 세계관이고, 그것이 강요된다는 말에 놀라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독점적 사랑이나 일부일처제(Monogamy)가 자연스럽다고 말하는 인류학자는 절대 없습니다. 인류의 과반수가 비독점적 사랑, 폴리아모리(Polyamory)의 세상에서 살고 있고 오직 16%의 국가만이 일부일처제를 ‘법’으로 정해놓았습니다. 엥겔스가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에서 밝혔듯이 일부일처제는 여성의 종속과 억압, 그리고 유산을 편하게 물려주기 위해 발명한 사고에 불과하지요.

그리하여 인간은 그 본성인 비독점적 사랑에 격렬히 매료되나 그만큼 격렬히 저항합니다. 그러나 본성과 싸워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노아모리의 세상에서 불륜은 모든 사람이 은밀히 꿈꾸고 선망하지만 결코 드러낼 수 없는 모순이지요. 몇 년 전부터 TV를 지배한 막장드라마는 이러한 인간의 생물학적 본성과 사회적 초자아의 숨 막히는 추격전의 긴장을 환상적으로 풀어냅니다. 막장드라마가 막장인 이유는 그것이 불륜이라는 인간의 본성과 함께 본성을 금지하는 사회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싫지만 싫어할 수 없는, 그래서 ‘욕하면서 보는’ 막장드라마의 불륜은 막장이라고 불리기에는 너무나 뛰어난 인간학 교과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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