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2호 커버스토리]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아, 예루살렘의 모든 거리를 두루 돌아다니며, 둘러보고 찾아보아라. 예루살렘의 모든 광장을 샅샅이 뒤져 보아라. 너희가 그 곳에서, 바르게 일하고〔정의를 실천하고〕 진실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을 하나라도 찾는다면, 내가 이 도성을 용서하겠다.” (렘 5:1, 이하 새번역, 〔 〕는 필자)
설마 당시 예루살렘에 정의를 실천하고 신실하게 살려는 이들이 정말 단 한 사람도 없었던 것일까?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한 주류그룹과 그 동맹세력의 총체적 타락에 너무나 절망스러운 나머지 그렇게 강한 어조로 말씀하신 게 아닐까 싶다. 내 눈엔 주류 한국교회의 현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강도의 소굴
예레미야 당시 남유다 타락상의 가장 치명적인 모습 중 하나는 야훼(주님)의 성전 즉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컫는 집을 “강도들의 소굴”로 변질시킨 것이다(렘 7:1-11). ‘야훼’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알려주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해방자, 곧 억울하게 고통당하는 사회적 약자들을 억압체제에서 해방해주시는 분이란 뜻을 담고 있다(출 6:2-9). 야훼의 성전은 그런 해방자 하나님을 만나 그를 경배하며 교제하는 영광스러운 장소다. 그런데 폭력적으로 사회적 약자들을 억압하고 착취함으로써 자기 잇속을 챙기는 자들이 야훼의 집에서 신앙의 이름으로 신분세탁을 받아 그 안에서 오히려 존중받으면서 편히 쉬고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로부터 600여 년 후 예수님은 다시 똑같은 맥락에서 동시대 예루살렘 성전의 타락상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그 지배세력에 온몸으로 저항하셨다(막 11:15-18). 그로부터 2천 년 가까이 지난 오늘, 슬프게도 대다수 주류 한국교회는 동일한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태로 전락하고 말았다.
바울신학에 의하면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야훼의 성전이란 본질을 이어가면서 더욱 발전된 모습을 지닌다.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머무시는 성전이다.(엡 2:20-22) 사도들과 예언자들이 말과 삶을 통해 그 집의 든든한 기초를 놓았다. 몸으로 오신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가르침과 삶 그리고 죽임당하심과 부활을 통해 그 집의 모퉁잇돌이 되셨다. 그를 믿음으로 자라가는 그리스도인들은 모퉁잇돌을 중심으로 서로 정교하게 연결되어 집으로 지어진다. 그 집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사도와 예언자들의 가르침을 전수받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갈수록 깊이 알아가며, 성도들과 교제하는 가운데 성령으로 임하시는 하나님을 뜨겁게 만난다. 실로 온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영광스럽고 튼실한 집이다. 그런 집이 강도의 소굴로 전락한다는 것은 너무나 끔찍한 타락이요 부패다.
1. 우상숭배를 야훼신앙으로 속이기
예레미야는 야훼의 집이 어떻게 강도의 소굴로 전락하게 되는지 그 요인을 명료하게 보여준다. 첫째, 당시 최고 인기 우상인 바알을 숭배하면서 마치 야훼신앙인 것처럼 스스로를 속임으로써 선조들이 타락한 길을 걸어갔다(렘 7:4, 6, 9). 이집트에서 해방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을 만나러 산에 오른 모세가 오랫동안 내려오지 않자 불안해하며 금송아지 상을 만들었다. 그리곤 외쳤다. “이스라엘아! 이 신이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너희의 신이다.(출 32:4)” 그들의 언어상으로는 야훼 즉 해방자 하나님을 결코 버리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야훼 하나님을 금송아지로 슬쩍 바꾸었다. 그들은 이튿날 아침 일찍이 그 신상 앞에 제단을 쌓고 제사를 지내며 야훼 절기라 명명했다. 먹고 마시고 흥청거리며 뛰노는 열광적인 축제를 열었다. 스스로를 속이는 전형적인 행태다. 예레미야 당시 유다 백성들 역시 같은 길을 걷고 있었다. 입만 열면 하나님의 이름 야훼를 열렬히 불러대며 ‘안전하다’ 고백했지만 그들이 실제로 경배하는 대상은 풍요의 신 바알이었다.(렘 7:6, 9; 23:27)
마찬가지로 예수님 당시 타락한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섬겼던 야훼는 돈의 신 맘몬이었다.(마 6:24; 눅 16:14) 오늘 대다수 주류 한국교회 역시 같은 길을 걸어가고 있다. 열광적으로 주님(야훼)을 부르지만, 실상은 맘몬을 섬기고 있다. 맘몬숭배의 결정적 증거는 ‘축복의 복음’, 《야베스의 기도》, 《깨끗한 부자》, 《긍정의 힘》, 《왕의 재정》 등으로 계속 이어져 온 기복신앙 혹은 탐욕의 복음의 만연이다. 그들이 공유하는 핵심은 스카이 제서니의 도식을 발전시켜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
A를 제물로 바치고, B 기도문을 암송하며, C를 삼감으로, 하나님의 축복 D를 받아서, “하나님과 이웃을 더 크고 멋지게 섬기자!”1
주류 한국교회에서 A는 주일성수·십일조·전도(교회 몸집 불리기용)를, B는 긍정적 믿음으로 물질적 축복을 간구하는 기도를, C는 술·담배·마술·요가 등을, D는 경제적 부와 사회적 성공을 각각 뜻한다. 이런 기복신앙을 부추기는 맘몬의 매력적이고 간교한 함정은 위 따옴표 안의 문장에 있다: “하나님과 이웃을 더 크고 멋지게 섬기자!” 이야말로 자신이 기복신앙 신봉자라는 걸 강력 부인할 수 있게 만드는 거짓된 근거다. 이런 논리가 성경적인 것처럼 보이는 건, 구약을 자기 입맛에 맞게 선택적으로 인용하고 예수님의 가르침과 신약은 완전히 무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약시대에도 참된 믿음으로 살았지만, 축복은커녕 경제적 가난과 사회적 고통과 처절한 실패로 현실의 삶을 마감해야 했던 고통스러운 경우가 수없이 등장한다(시 73:13-14; 히 11:35-39). 멀리 갈 것도 없이 예레미야가 그 대표적 인물 중 하나다.(렘 15:18; 20:1-2, 14-18; 37:11-38:28; 41:6-44:30)
예수님은 공적 사역을 시작하기 직전, 40일 금식 후 사탄의 시험을 받으면서 하나님 나라는 경제력·초자연적 카리스마·국력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하나님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순수한 야훼신앙을 통해서 세워져 감을 온몸으로 말씀하셨다.(마 4:1-11) 하나님 나라와 그의 정의를 펼쳐가는 데는 “먹고 마시고 입는 것”만 있으면 충분하다!(마 6:25-34) 이를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할 필요까진 없겠지만, 최소한의 경제적 조건만 갖추고 있으면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다는 뜻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언젠가부터 ‘인프라’(기반시설) 운운하며, 부자들에게 이런저런 방식으로 손을 내밀기 시작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맘몬으로 변장한 사탄의 일로 변질시켜 왔다. 물론 그 와중에 반듯하고 현란한 성경적 언어유희나 경건한 겉모양새를 결코 잃어버리지 않았다. 한국 주류 교계에서 튼튼한 재정적 기반을 갖춘 교회와 그 담임목사가 제왕적 절대 권위를 휘두르고 있는 건 그런 연유에서다.
2021년 초가 되면 명성교회는 세습을 반대하던 애초의 예장통합 교단총회 결정을 무력화하고 담임목사직 세습을 끝내 확정·관철시킬 것으로 전망된다. 이는 주류 교계를 지배하고 있는 맘몬의 힘이 얼마나 큰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아버지 담임목사(김삼환)가 2013년 WCC 세계총회를 부산에서 개최하는 데 준비위원장으로 주도적 역할을 했으며, 그 아들 목사(김하나)는 〈복음과상황〉처럼 사회참여적인 미국 잡지 〈소저너스(Sojourners)〉의 창시자인 짐 월리스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아버지 목사가 이사장인 세계기독교미래포럼은 2015년 짐 월리스를 주강사로 초청해 성대하게 집회를 연 바가 있다는 점이다. 그는 방한 당시 아들 목사가 담임으로 있던 새노래명성교회 주일설교도 했다. 그에 앞서 수년 전 짐 월리스를 여름전국대회 주강사로 초청하려다 너무 비싼 비용 때문에 포기해야 했던 성서한국 측은 그 기회에 그를 초청해 집회를 열고 싶어 했으나 역시 실패했다. 김삼환 목사 측이 그와 독점계약을 맺었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교회의 주인이 야훼 하나님이신지 돈의 신 맘몬인지 도무지 분간이 되질 않는다.
작년 가을 총회 때 예장합동 총회장으로 취임한 소강석 목사는 자기 교회에서 열린 취임감사예배 때 감사패·공로패를 전달하며 헌금 덕담을 했다. 한 장로님을 무대에 세워 ‘십일조를 한 달에 5천만 원을 넘게’ 하는 분이라고 공개적으로 칭찬하고, 교회에 돈이 부족하니 헌금을 더 많이 해달라며 감사패에 1억, 3억 값을 매겨 전달했다.2 ‘덕담 삼아 그럴 수도 있는 거지, 왜 말꼬투리를 잡아 속 좁게 비판하느냐’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건 단순히 우스개가 아니다. 돈에 엄청난 힘을 실어주는 뼈 있는 공적 언어다. 그가 설사 맘몬숭배를 비판하는 설교를 천 번 만 번 멋지게 했다 해도, 그 몇 마디면 그 모든 설교를 무력화하는 데 충분하다. 금송아지를 ‘야훼 하나님’이라고 부르며 열렬히 경배하는 것과 똑같은 효과를 낳는다.
시인인 소강석 목사는 2015년 천상병귀천문학대상을 받았고, 종교개혁500주년이자 윤동주 탄생100주년인 2017년엔 윤동주문학상을 받았다. 같은 해 사랑의교회에서 진행된 ‘종교개혁, 다시 시작이다’라는 주제의 예장합동 주관 포럼에 주강사로 참여해 토론 좌장을 맡은 오정현 목사에게 힘을 실어 주었다. 그는 요즘 주류 교계에서 포용력 있는 소위 통 큰 지도자로 주목받고 있다. 그렇다면 주류 한국교회는, 타락한 종교 지도자들에게 강력히 맞서 싸우다 스러져 간 하나님의 사람들과 그들의 하나님 앞에, 아니 그렇게 저항하다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님 앞에, 도대체 무슨 낯으로 설 수 있을까? 예수님은 야훼신앙과 맘몬숭배가 결코 같이 갈 수 없다고 엄중히 경고하셨는데(마 6:24), 주류 한국 교계에선 신비스러울 정도로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참 무섭고 슬픈 일이다.
2. 상호 결탁으로 사회정의 짓밟기
야훼의 집이 강도의 소굴로 전락하는 둘째 요인은 타락한 지도자들과 백성들이 상호 결탁해 사회정의를 짓밟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렘 7:6, 9) 당시 지배동맹세력과 그 추종자들은 대표적인 사회적 약자들인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억압했다. 모두 도둑질에 탐닉하면서 죄 없는 사람들을 법정에 세워 살해하였다. 사실 첫째 요인과 둘째 요인은 언제나 동전의 양면이다. 둘의 공통점은 물질적 풍요에 대한 빗나간 탐욕이다. 물질적 풍요 자체는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것이다.(창 1:3-2:14, 특히 2:11-12) 하지만 그것을 함께 누리려 하지 않고 이기적으로 탐하면(렘 5:28) 사회정의를 짓밟게 된다. 이를 위한 그들의 탐욕적인 연대 행동에 놀란 하나님은 이렇게 탄식하신다.
“예언자들은 거짓으로 예언을 하며, 제사장들은 거짓 예언자들이 시키는 대로 다스리며, 나의 백성은 이것을 좋아하니, 마지막 때에 너희가 어떻게 하려느냐?” (렘 5:31)
오늘 부패한 한국교회의 현실과 너무 흡사하다. 예언자 역할을 해야 할 신학자들이나 목사들이 거짓된 붓으로 율법을 거짓말로 바꿔버린다(렘 8:8). 사회적 약자들이 지배동맹세력에 의해 억압과 착취를 당해 억울하게 상처를 입고 끙끙 앓고 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평화로다, 평화로다!” 노래를 부른다.(렘 6:14; 8:11) 루터 종교개혁의 3대 슬로건인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을 왜곡하여 사회불의를 자행하는 이들에게 쉽게 면죄부를 부여한다. 사회정의를 외치는 이들을 도리어 성경·은혜·믿음에 반하는 율법주의자라며 공격함으로써 사회불의에 침묵할 것을 신학적으로 강요한다. 그들은 교인들이 하나님의 이름 야훼를 잊어버리도록 계략을 꾸민다.(렘 23:27) 제사장 격 인물들과 함께 사람들의 안색을 살피며 혹시 “부담되는 야훼의 말씀이라도 있습니까?” 묻는다.(렘 23:33) 이유인즉슨 부담되는 말씀을 왜곡해 재해석해 줌으로써 그들의 부담을 덜어주고자 함이다. 그래야 교인들의 사랑과 지지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은혜를 빙자해 달달한 말씀을 탁월한 언변으로 늘 새롭게 전할 줄 아는 이가 교인들 중에서 인기 순위 1위를 차지하는 것이 대다수 주류 교회의 분위기다. 이들은 결국 교인들 누구도 치명적 죄악에서 떠날 수 없게 만든다.(렘 23:14)
제사장 역할을 감당해야 할 목사와 장로들은 ‘거짓 예언자’들에게 배운 대로 형식적인 예배를 이끈다. 그런 예배에 열심히 참여하기만 하면, 특히 헌금을 많이 하면 그가 축재과정에서 사회적으로 어떤 불의를 저질렀는지 따지지도 묻지도 않고 아주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추어올린다. 그런데 놀랍게도 다수의 교인은 이런 상황 전체를 좋게 여겨 지지한다. 너무 오랫동안 짓밟혀 절망에 익숙해지면 예나 지금이나 못된 지도자들에게서 도리어 희망을 찾는 중병을 앓게 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오히려 참 예언자 역할을 하는 이들을 교회에서 몰아내려고 애쓴다. 그런 자들이 없어도 자신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가르쳐줄 각양 지도자들이 얼마든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렘 18:18) 그러니 그런 교회는 강도들이 오히려 존중받으면서 편안히 쉴 수 있는 소굴이 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노동자들을 억압하는 데 선도적이었던 이랜드그룹 박성수 회장과 축재과정에서 온갖 불의를 저지른 이명박 전 대통령이 주류 한국교회에서 얼마나 각광을 받았는지 우리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야훼의 집을 강도의 소굴로 전락시킨 것보다 더 고질적인 병폐가 있다. 하나님의 처절한 호소와 엄중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전혀 회개할 줄 모르는 고집이다.
회개할 줄 모르는 고집
하나님께서 회개할 줄 모르는 고집스러운 유다 백성 때문에 오죽 답답하셨으면 예레미야에게 다음과 같이 토로하셨을까?
“예레미야야, 내 백성을 시험해 보아라. 금속을 시험하듯 시험해서 도대체 그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밝혀 보아라. 그들은 모두 반항하는 자들이다. 모함이나 하고 돌아다니며 마음이 완악하기가 놋쇠나 무쇠와 같다. 모두 속속들이 썩은 자들이다. 풀무질을 세게 하면, 불이 뜨거워져서 그 뜨거운 불 속에서 납이 녹으련만, 불순물도 없어지지 않으니, 금속을 단련하는 일이 헛수고가 되고 만다. 그들의 죄악이 도무지 제거되지 않는다.” (렘 6:27-29)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아무리 치명적 범죄를 저질렀어도 진실로 통회하고 돌이키면 언제나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는 분이시다. 당연히 우상숭배와 사회적 불의도 용서받을 수 있다. 죄질이 가장 고약한 건 회개할 줄 모르는 고집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레미야 당시 유다 백성들이 그들의 선조보다 더 악한 일을 한다며 그들이 각각 자신의 악한 마음에서 나오는 고집대로 살고 있음을 지목하신다.(렘 16:12)
그들은 하나님의 책망을 받으면 회개할 생각은 하지 않고 그저 살 궁리만 한다.(렘 2:27) 탐욕 때문에 가난한 사람을 죽여 그들의 피가 자신들의 치맛자락에 묻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에게 아무런 죄가 없다고 시치미를 뚝 떼며 오히려 하나님께 대든다.(렘 2:23, 34-35; 16:10) 한발 물러선다 해도 마음의 할례는 행하지 않은 채로 회개하는 시늉만 한다.(렘 3:10; 4:2-4) 하나님과의 친분을 과시하는 한편, 하나님은 인자하신 분이라 칭찬해드리며 온갖 악행을 마음껏 저지른다.(렘 3:4-5) 샤를 보들레르의 시집 《악의 꽃》 권두서시, ‘독자에게’에 나오는 한 대목과 똑 닮았다.
우리 악은 완강하고, 회한은 비열한 것 / 참회의 값을 듬뿍 짊어지고 / 우리는 즐겁게 진창길로 되돌아온다, / 값싼 눈물에 우리네 온갖 떼가 씻긴다 믿으며.
어디서 많이 목격한 친숙한 장면이어서 일일이 예를 들 필요조차 없지 않은가? 오늘 대다수 한국교회가 실로 비극적인 것은 바로 이런 죄에 점점 깊이 빠져들기 때문이다. 마땅히 회개해야 할 주류 한국교회 지배동맹세력은 동성애 반대, 차별금지법 반대 등을 전가의 보도로 휘두르며, 눈물 어린 마음으로 정의로운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 이들을 이단아로 정죄하여 교회 밖으로 쫓아내고 있지 않은가? 마치 타락한 지배세력이 눈물의 예언자 예레미야를 오히려 반역자로 몰아 두 번이나 구타하고 투옥했던 것처럼!(렘 20:1-2; 37:14-16)
회개할 줄 모르는 고집의 맨 밑바닥에는 무지가 아니라, 악을 되풀이하고 싶은 욕망이 도사리고 있다.(렘 7:10; 9:5-6) 그런 탐욕에 사로잡히는 순간 하나님을 알고 싶어 하는 의지가 사라져 버린다. 회개 불능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예수님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 가르침이 하나님에게서 난 것인지, 내가 내 마음대로 말하는 것인지를 알 것이다” 말씀하셨다.(요 7:17) 여기서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는 것은 전후 맥락에 비추어 볼 때 사회적 약자를 살려내기 위해 목숨 걸고 불의한 기득권세력에 맞서 저항을 불사하는 실천을 말한다. 이런 실천이야말로 정통교리에 동반되어야만 하는 정통실천이다.(렘 22:15-16; 마 25:31-46) 정통실천의 길을 갈 의지가 있는 사람만이 참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싶어 하기에 듣고 깨달아 회개할 수 있다. 이를 두고 앤드류 커크는 성경적 인식론이라 지칭하며 그 근거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지식은 공론(空論)을 통해서가 아니라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행동으로 나타나는 순종을 통해서 얻어진다.… 왜냐하면 우리가 무엇을 들을 수 있는가는 우리가 무엇을 실천에 옮길 준비가 되어 있는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3
그럼 한국교회의 내일은 정말 없는 것일까?
한국교회의 내일
결론부터 말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의 내일은 있다.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포기를 알지 못한다. 바울이 노래한 것처럼 ‘모든 것을 덮어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고전 13:7)
예레미야서에도 그 사랑이 너무나 절절이 표현되어 있다.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도 고집스러운 유다 백성에게 질려 하나님께 여러 번 불평을 폭풍처럼 쏟아 놓는다.(렘 12:1-2; 15:10; 15:15-18; 20:7-9, 14-18) 하나님 역시 마찬가지다. 예레미야에게 세 번이나 ‘너는 이 백성을 보살펴 달라’고 하거나 ‘그들에게 은총을 베풀어 달라고 나에게 기도하지 말라’ 하신다.(렘 7:16; 11:14; 14:11) 심지어 모세와 사무엘이 자기 앞에 나와 빈다고 해도 유다 백성에게 마음을 기울이지 않겠다고 말씀하신다.(렘 15:1) 그들을 불쌍히 여기기에도 지치셨기 때문이다.(렘 15:6)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다. 하나님은 다시 그들을 돌이키기 위해 예레미야에게 예언자의 임무를 잘 수행할 것을 명하신다. 유다의 멸망과 그들의 바빌로니아 유배가 확정된 후엔 놀라운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신다.(렘 31-33장)
한국교회 문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시는 예수님
예수님 역시 야훼 하나님의 끈질긴 사랑을 온몸으로 보여주셨다. 십자가에 못 박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으시면서도, 몰라서 그런 것이니 모든 반역자들을 용서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신다.(눅 23:34). 오늘까지 예수님의 재림과 최후의 심판이 연기되고 있는 건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의 기도를 들으셨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이미 파악한 베드로는 ‘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벧후 3:8)라는 말로 재림의 지연을 설명한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상을 동시에 섬기면서도 회개할 줄 모르는 라오디게아 교회 때문에 토할 것 같다고 말씀하시곤 금방 그 교회 문밖에 서서 두드리신다. 그리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라고 호소하신다.(계 3:20) 나는 그 예수님이 지금 주류 한국교회 문밖에 서서 그 문을 간절한 마음으로 두드리고 계신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한국교회의 아름다운 내일이 저절로 열리는 건 아니다. 누군가 그 음성을 듣고 문을 열어 드려야 한다. 그래야 예수님과의 풍성한 식탁 교제가 회복되어 한국교회에 건강한 새 살이 돋게 될 것이다. 그게 가능하려면 예레미야 같은 남은 자들의 역할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당시 〈복음과상황〉 편집장이던 서재석 님과의 인터뷰가 생각난다. 교회개혁실천연대(이하 ‘개혁연대’) 출범을 보름 앞둔 2002년 11월 9일 정오, 민들레영토 대학로 별관에서였다. 그가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던진 질문이 지금도 생생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