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2호 커버스토리]
* 이 글은 2020년 가을 한 복음주의 선교단체의 ‘중간 성찰’ 프로그램에서 기독교사회윤리학자의 한 사람이자 외 부자의 시선으로 조언했던 미간행 원고를 기초로, 본지의 기획 의도와 주제에 맞춰 논조와 내용을 한국교회와 복 음주의권으로 넓혀 대폭 수정, 확장하였음을 밝힙니다. ― 이하 필자 주
저항 세대, 사회와 교회의 고인 물이 되다
저는 68년생 87학번입니다. 굳이 출생과 대학 입학 연도를 밝히는 이유는 이 두 연도가 대한민국 현대 사회와 교회에서 가진 상징성과 제도적 힘이 남다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과상황〉 30주년을 기념하며 한국교회의 현주소와 미래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일에도 역시 이 연도는 중요하죠. 68혁명은 근현대 문명과 제도가 ‘당연’(taken-for-granted)으로 여겨온 공동체적 삶의 방식과 규율에 대해 반대 의사를 표명한 젊은이들의 저항 목소리로 요약됩니다. 1987년 ‘서울의 봄’은 오랜 군부독재를 끝내고 대통령 직선제로 상징되는 민주화의 결실을 얻은 젊은이들의 승리를 의미하고요. 게다가 저는 ‘저항’이라는 단어가 아예 종교 분파의 이름이 되어버린 개신교도로 태어났고 자랐습니다. 그러니 이 세 ‘토포스’(topos, 위치 혹은 자리)가 중첩된 저와 제가 속한 세대에게 ‘저항’(프로테스트)은 개인적 선택지나 취향을 넘어 삶의 조건이었던 셈입니다.
〈복음과상황〉은 제가 청년이던 1991년에 탄생했지요. 60년대 출생한 80년대 학번들이 ‘아직’ 푸르르던 시절, 세상의 모든 ‘당연’에 당돌하고 당당하게 “왜요?”하고 일어서서 질문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복음주의 진영에서 성장한 것도 아니고 시작 무렵부터 〈복음과상황〉에 참여한 것이 아님에도, 그 이름만 듣고도 금세 이 잡지가 담은 그리스도인들의 꿈과 사명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잡지의 이름과 방향은 시대정신을 담기 마련이니까요.
우리 ‘86세대’에게도 신앙 선배들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선배들은 ‘영혼 구원’에 대한 절실함이 남달랐습니다. ‘복음주의’라면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죠. 실제로 ‘복음’ 전파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칠 수 있었던 선배들의 신앙 열정을 의심하지는 않습니다. 세계 기독교 선교 역사에서도 독보적인 ‘선교 한국’의 성과를 이루었으니까요. 하지만 우리의 신앙 선배들은 개인의 영혼 구원이라는 중차대한 1차 과제에 치중하느라, 우리가 두 발 딛고 살아가는 이 땅의 제도(함께 살아가는 방식)가 점점 비인간적, 불신앙으로 치닫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때론 보면서도 외면했지요, 선교 활동의 기회를 확보하기 위해서. 일제 치하에서도, 군부독재 기간에도 ‘그리스도인은 오직 영혼 구원의 문제에 힘쓸 따름이다’ 천명했던 ‘정교분리의 원칙’은 이 땅에서 유난히 빛을 발했습니다.
하지만 1980년대 말의 ‘상황’을 지켜보던 젊은 그리스도인들의 입장은 달랐습니다. 시민들이 사회적·물리적·정신적으로 자유를 억압당하고 인권을 유린당하는 ‘상황’에서 ‘복음’의 사회적 차원을 더는 외면할 수 없었거든요. 당시 한국교회 주류가 보인 대표적 성향, 즉 “자본주의 친화적-영적 기독교”는 그 오랜 외면의 결과였습니다.1 개인의 영혼 구원을 붙드느라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관심하지도 저항하지도 않았어요. 아니 오히려 그 사회 안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선한’ 영향력을 끼치겠다는 야무진 각오로 높이 내달리느라 ‘청부론’이니 ‘고지론’이니 하는 신앙 담론에 사로잡혀서, 물질적 성장의 ‘맛’을 보게 된 교회와 신자들은 자본주의 친화적인 행태를 자신들의 삶과 신앙 안에 고착시켰죠. 그러니까 근현대 대한민국에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이 땅에서의 물질적 성공 플러스 천국에서의 영혼 구원’이라는 이중 티켓이었던 셈입니다.2
하지만 ‘한강의 기적’은 중산층만 만들어내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도시 빈민들이 양산되고 그들에게 근현대 한국의 자본주의적 ‘같이 살기의 방식’(제도)은 성실한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와 안정적 미래를 보장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소위 ‘86세대’에게서 터져 나왔습니다. 이러한 공동체적 삶의 방식은 과연 옳은가?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는 과연 죽어서 가는 천당일 뿐인가? 1세기 평범한 유대인들을 환호하게 했던 ‘복음’, 기쁜 소식이 되었던 ‘하나님 나라’는 무엇이었나? 오늘날 대한민국 땅에서 ‘하나님 나라’는 어떤 모습으로 체현되어야 하지? 〈복음과상황〉은 이 열기를 동력 삼아 출발했다고 생각합니다. 양손에 ‘성경’만 쥐어서는 현재를 제대로 책임 있게 살아낼 수 없을 뿐더러, 성경 안에 오롯이 담긴 ‘복음’도 놓치게 된다는 위기감이 모여 폭발한 것이었겠죠. ‘복음’과 ‘상황’을 함께 부여잡고 오늘을 책임 있게 살겠다고요.
그리고 그때 푸르름으로 동참했던 ‘86세대’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한국교회라는 제도적 영역 안에서 나름의 힘을 가진 중견 이상의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들이 되어 있습니다. 또한 이들이 대표로 있는 단체나 조직은 어느덧 그들의 목소리가 단체나 조직 전체를 대표하는 양 여겨지는 ‘상황’이 되었죠. ‘레거시(legacy) 리더십’이라고 하죠. 카리스마적 리더 한 사람이 남긴 정신적 유산이 한 단체를 대표하고 향방을 결정짓는 리더십 말입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한두 사람의 목소리가 전체를 대표하게 된 데에는, 그 목소리를 성실하게 복사하고 전달했던 ‘86세대’의 순종적 열정에도 문제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는 ‘선생님(들)’이 있었습니다. 젊은 우리는 저항의 동기와 열기는 있되 그 권위를 우리 선생님(들)의 주장에서 찾았습니다. 주체적으로 씨름하면서 내 것으로 내어놓은 창조적 신앙고백의 내용을 만들지 못했습니다. 능력이 없었다기보다는 그럴 수 없었다는 것이 맞겠습니다. 일종의 문화적 전제였죠. 권위 있는 선생님(들)의 말씀을 많이 인용할수록, 우리의 권위도 그만치 높아졌으니까요. 복음주의 영역도, 진보신학 영역도 레거시 리더십에 의지하던 시절입니다.
우리의 선생님(들)은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말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사회적 차원도 주장하셨죠. 복음주의권에서는 개개인의 각성과 신앙적 실천이 점차로 성취해가는 제도의 변화에 방점이 찍혀 있었다면, 진보적 영역에서는 구조와 제도 자체를 변혁하는 문제를 직접적으로 붙잡고 씨름했습니다. 복음주의 영역에서 유행했던 ‘제자도’라는 키워드는 그래서 정당성과 동력을 얻게 되었던 거죠. 우리의 동시대 젊은이들이 독재정권과 천민자본주의에 저항하며 싸울 때, 마치 기독교 ‘복음’이 그 흐름의 반대편에 있는 양 가르쳤던 주류 한국교회와 달리, 우리의 선생님들은 신앙에 고무되어 사회적 상황에 참여할 수 있는 복음적 길을 제시해주셨습니다. 정의와 평등, 사랑과 평화는 근대 시민사회의 이상일 뿐 아니라, 구약의 예언자들이 그린 ‘그날’과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의 비전 안에 담긴 복음의 핵심임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또래 젊은이들 앞에서 당당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방법은 달랐습니다. 너희의 화염병처럼 우리는 성경을 들었노라고. 이 안에 좌우에 날선 검과 같은 말씀이, 복음의 진리가 이 땅의 부정의와 불평등, 전쟁과 폭력을 그치게 할 것이라고! 무엇보다 우리 선생님들이 풀어주신 주장이 우리의 주장이 되었고, 그분들이 제시하시는 방향이 우리의 방향이 되었기에 한 방향으로 한목소리로 ‘운동성’을 가지고 달릴 수 있었죠.
확고한 믿음과 강한 열정으로 그렇게 달려왔기에 ‘86세대’는 오늘날 한국의 정계, 재계, 교육계, 시민단체, 교회조직 어디서든 제도적 힘을 가진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 곰곰이 돌아보니 ‘선생님의 수제자’ ‘인정받은 제자’라는 자부심은 있되, 내 소리를 내는 이는 여전히 드문 것 같습니다. 누군가의 고백처럼 평생 선생님의 말씀에 “각주를 다는 인생”입니다.3 그러다 보니 진영 논리에 갇혔습니다. ‘복음’이 무엇인지, 나의 자유 영혼으로 치열하게 부딪히는 대신 ‘선생님의 말씀’을 퍼 나르며 충직한 ‘제자 군단’이 되어갔습니다. 이제 어느덧 30년 전 스승의 나이가 되어버린 우리는 ‘내 선생님’의 부재 상황에서 당황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현재를 채우고 있는 것은, 거의 교리화 되어버린 ‘그분(들)의 말씀’ 뿐이죠. 그리고 우리의 후배들은 그 말들의 영향권 밖에 있는 듯합니다.
* 이 글은 2020년 가을 한 복음주의 선교단체의 ‘중간 성찰’ 프로그램에서 기독교사회윤리학자의 한 사람이자 외 부자의 시선으로 조언했던 미간행 원고를 기초로, 본지의 기획 의도와 주제에 맞춰 논조와 내용을 한국교회와 복 음주의권으로 넓혀 대폭 수정, 확장하였음을 밝힙니다. ― 이하 필자 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