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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의 발자국
[325호 스무 살의 인문학]
[325호] 2017년 11월 28일 (화) 11:58:15 김희림 철학을 좋아하는 20대 인문학도 goscon@goscon.co.kr
   
▲ ≪햄릿≫에서 유령과 햄릿은, 서로 타자였으나 시간이 지나며 일자(一者)로 수렴된다. (이미지: 위키미디어코먼스)

부활
하루아침에 아버지를 잃은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그의 유령이 성 안을 떠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고민 끝에 그 유령을 만나보기로 결심합니다. 유령은 정말로 아버지의 유령이었습니다. 유령은 대중에게 발표된 것과 달리 들판에서 독사에 물린 게 아니라 지금 왕관을 쓰고 있는 자신의 동생에 의해 암살당했다는 이야기를 아들에게 전합니다. 유령의 이야기를 듣고 그는 광분합니다. 주체할 수 없는 분노를 억누르고 아버지의 동생을 향한 복수를 기획합니다. 그 처절하고 지난하며 광기에 물든 복수극이 펼쳐집니다.

문학사상 손꼽히는 걸작, 셰익스피어의 《햄릿》은 그렇게 막을 올립니다. 장엄한 시작입니다만, 그 앞부분을 읽을 때마다 떨칠 수 없는 의문점이 있었습니다. 도대체 이 유령이 누구일까? 이야기의 처음에 나타나 사람들을 압도하고 복수의 불꽃을 피우고는 다시 등장하지 않는 유령. 유령은 햄릿의 내면 의식일지도 모릅니다. 아버지의 왕위와 어머니를 빼앗은 삼촌에 대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발동해 무의식이 유령으로 등장했다는 프로이트적 해석도 그럴듯하니까요. 누구의 해석이 어쨌든 간에 ‘유령’의 등장으로 시작되는 이야기는 신비로웠습니다. 삶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이야기가 죽음에서 삶을 되돌아보는 존재로 시작한다니 말입니다.

죽음을 살면서
1945년 영국의 저지 섬(Bailiwick of Jersey), 그레이스는 비명을 지르면서 잠에서 깨어납니다. 두 아이의 어머니인 그는 전쟁에 나간 남편을 기다리면서 넓은 집을 관리하고 있습니다. 두 아이는 학교를 가지 못하기에 그레이스가 직접 가르칩니다. 학교는커녕 낮에는 집 밖에 나가지도 못하고 커튼을 꽁꽁 쳐야 합니다. ‘빛에 알레르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늘 아이들과 지내는 그레이스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여서 아이들에게 늘 신앙을 교육합니다. 거짓말을 하면 지옥에 가고, 순교자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신앙을 부정하면 저주받을 것이라면서요.

그렇게 고독하게 지내는 그레이스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집안의 하인들을 대체할 세 명의 하인들을 뽑습니다. 그레이스는 늘 조용한 것을 좋아해 전화와 라디오도 없고 전기도 독일군이 끊은 채로 두지요. 그런데 세 명의 하인들이 들어오면서 집안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립니다. 아무도 없는 위층에서 발소리가 들리고, 문이 저절로 닫히며 커튼이 열리며, 한밤중에 피아노 연주가 들리기도 합니다. 아이들은 자꾸 유령, 그것도 유령 가족을 본다고 말합니다. 유령은 없다고 아이들을 다그치지만, 그레이스는 기어코 유령의 목소리를 듣고야 말지요.

어느 아침 그레이스와 두 아이들은 경악하며 일어납니다. 집안의 모든 커튼이 사라진 것입니다. 공포에 사로잡힌 그레이스는 이 일이 유령의 소행이라고 믿고 유령을 잡겠다고 온 집안을 뒤지다가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됩니다. 세 명의 하인들이 사실은 50년 전에 결핵으로 죽었다는 것입니다. 정원에 세 하인들의 무덤이 있는 것도 발견하지요. 그레이스는 하인들을 총으로 위협하며 아이들을 위층으로 올려 보냅니다. 그레이스의 위협에 끄떡 않으며, 집안일을 총괄하던 밀스 부인은 산 자와 죽은 자가 섞여서 살 수도 있다는 이상한 말을 합니다.

그 말을 이해할 수 없는 그레이스는 부정하며 총을 쏘지만 맞을 리가 없습니다. 함께 살았던 하인들이 유령이라니. 그러나 진정한 공포는 아직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위층에서 비명소리가 들려 급히 올라간 그레이스는, 충격적이게도, 탁자에 둘러앉은 사람들과 퇴마사를 만납니다. 두 아이들은 퇴마사에게 무언가를 속삭입니다. 퇴마사는 아이들의 말을 탁자에 둘러앉은 사람들에게 전합니다. ‘엄마가 베개로 두 아이를 죽이고 자살했다’고요. 그레이스는 격노하며 퇴마사의 종이를 찢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레이스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레이스와 두 아이들은 유령이었고, 탁자에 앉은 사람들은 그 집에 살던 사람들이었으니까요.

모든 퍼즐이 맞추어집니다. 침입자라고 생각한 유령들은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이었고 그레이스와 두 아이들이 유령이었습니다. 하인들은 그레이스 가족의 죽음에 맞춰 나타난 것이었고요. 그레이스는 아이들을 안고 울며 자신의 죽음을 인정하고, 그러나 이 집은 우리 것이니 떠나지 않을 거라고 다짐합니다. 흐느끼는 그레이스 옆에 밀스 부인이 나타납니다. 죽은 자와 산 자가 섞여서 살 수 있다면서. 그레이스는 아무런 부정도 못합니다. 밀스 부인은 따뜻한 차를 타주겠다고 하고, 그레이스는 차를 마시겠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집에 살던 가족이 떠나는 광경을 그레이스가 지켜보며 대문에 ‘For Sale’이라는 푯말이 붙는 것으로 끝납니다.

To be or Not to be
이 이야기는 니콜 키드먼 주연의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 감독의 영화 《디 아더스》(The Others, 2001)입니다. 유령을 쫓는 사람이 유령이었고 내내 쫓기던 유령은 사람이었다는 충격적인 반전으로 잘 알려진 작품이지요. 처음 영화를 봤을 때 반전에 얼마나 크게 충격 받았는지요. 그런데 영화를 계속 읽으면서 전혀 다른 부분에 매료되었습니다. 유령은 무섭습니다. 그레이스는 유령이 무서워 떨며 절규하지요. 그런데 스스로가 유령이라는 사실은 굉장히 빨리 받아들입니다. 우리가 유령이라도 이 집은 우리 것이라고 아이들에게 되뇌며 죽은 자와 산 자가 섞여 산다고 말하는 ‘유령’ 밀스 부인이 차를 타주겠다고 하자 금방 마시겠다고 하거든요.

저는 이 부분이 굉장히 흥미로웠고 또한 무서웠습니다. 가능한 것일까요? 유령을 두려워하고 부정하며 살았건만 스스로가 유령인 것은 차를 마시면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 말입니다. 어쩌면 영화의 제목이 그 수수께끼를 파헤칠 좋은 힌트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The Others. 다른 것들, 곧 타자(他者)라는 뜻입니다. 이 영화에서 ‘The Others’는 누구일까요? 선뜻 떠오르는 것은 ‘유령’입니다. 그레이스를 공포에 떨게 한 유령들이 타자겠지요. 그런데 조금 이상합니다. 사실 유령은 그레이스가 아니었던가요? 그렇다면 타자는 그레이스 자신인가 봅니다. 그런데 더 이상해집니다. 그레이스 자신이 타자라면 누가 ‘나’란 말인가요?

여기서 다시, 햄릿과 유령의 조우를 되새겨봅니다. 유령은 햄릿에게 죽음을 보여줍니다. 아버지의 비극적이고 어처구니없는 죽음을 보여주고 그 원수를 갚는 길은 삼촌을 죽이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아니, 그 이전에 유령 자체가 죽음의 표상입니다. 햄릿은 죽음이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고 죽음을 만났고 죽음을 기획합니다. 기실 이것은 유령과 인간의 만남이니만큼 죽음과 삶의 만남입니다. 유령과의 은밀한 만남이 끝나고 햄릿은 뒤틀린 세월(Time is out of joint)을 한탄합니다. 세월, 곧 세상의 축이 어긋난 것을 탄식하지요. 생육하고 번식하라는 메시지로 요약되는 생(生)의 이념이 지배하는 세월에 이물질이 들어옵니다. 바로 죽음입니다. 죽음을 만났고 죽음에 사로잡힌 햄릿에게 삶은 극히 미약한 것입니다. 그의 삶은 이제 죽음에게 바쳐졌습니다.

그래서 햄릿은 뼈저리게 갈등합니다. To be or Not to be. 존재할 것인지 고민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인간과 삶의 세월을 좇아 존재할지(To be) 깊은 밤에 만난 유령과 죽음의 세월을 따를지(Not to be) 미치도록 고민하지요.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그는 유령과 죽음의 세월을 고릅니다. 하이데거에게는 미안하지만 이것은 존재가 시간을 배신하는 순간입니다. 존재는 시간을 뛰어넘어 죽음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햄릿은 왕자로서의 고결한 인간성과 삶을 버리고 광인(狂人) 행세를 하며 죽음을 불사합니다. 이해하기 힘든 부분입니다. 한밤중에 성벽에 나타난 유령의 말에 그간의 모든 삶을 헌신짝처럼 던질 수 있다니요.

없는 있음(Absent Presence)
그것은 죽음이 삶보다 강력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만난 삶은 더 이상 스스로를 유지(To be)할 수 없습니다. 그 사실을 알기에 삶은 죽음에 저항하며 죽음으로부터 얼굴을 돌립니다. 그레이스가 집안에 유령들이 있다는 것을 결단코 부정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들었음에도 인정하지 않는 것, 그리고 죽은 자들은 지옥이나 천국에 머문다고 강조하는 것이 그러한 맥락입니다. 죽음이 삶에 틈입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죽음의 흔적, 유령을 거부하지요. 그러나 유령에 대한 강력한 거부와 대비되게 죽음은 금방 받아들입니다. 삶을 견지할 때 죽음은 완전한 타자(他者)라고 여겼으나 죽음을 만난 순간 삶이 타자가 되며 죽음이 곧 ‘나’입니다.

《햄릿》에서 유령과 햄릿은, 《디 아더스》에서 ‘유령’과 그레이스는, 서로 타자였으나 시간이 지나며 일자(一者)로 수렴됩니다. 삶이 아니라 죽음으로, 인간이 아니라 유령으로 말입니다. 죽음을 마주한 그들은 처절할 정도로 깊게 갈등합니다. 그러나 결론은 정해져 있습니다. 죽음이라는 본질을 거부할 수 없지요. 햄릿은 Not to be를 중얼거리면서, 그레이스는 차를 마시면서 뒤틀린 세월에서 흘러나온 죽음의 목소리에 승낙합니다. 죽음을 마주한 사람은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요. 햄릿과 그레이스는 죽음에 대한 그동안의 저항과 삶에 대한 의지가 무색하게 마음 깊은 곳에서 삶을 내려놓습니다.

적막한 무인도의 해변에 찍힌 발자국을 보며 우리는 누군가가 이 길을 걸었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곳에 없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전혀 알 수 없지요. 발자국은 있음과 없음이 공존하는 극적인 순간을 드러냅니다. 유령도 발자국처럼 죽음과 삶이 공존하는 존재입니다. 자신의 죽음을 경험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만 경험할 수 있는 것은 타인의 죽음이지요. 타인의 죽음은 우리에게 언제나 유령으로 다가옵니다. 그리고 인간은 그 유령에 홀립니다. 누가 이 길을 걸었는지도 모르지만 그 발자국을 따라 걸을 수밖에 없는 무인도의 표류인(漂流人)처럼요. 그렇게 길을 걷다가 죽음을 만나고 그토록 붙들었던 삶이 바로 타자라는 비극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본질적인 죽음이 부질없는 삶을 집어삼키는 결말을 안다고 한들 우리는 별 수 없이 살고 죽음을 만나겠지요. 그런들 뭐 어떡하겠습니까. 차 한 잔을 마시면서 유령의 발자국을 따라가는 수밖에 없겠지요. 
 

김희림
장차 전문성과 대중성, 다양성을 겸비한 인문학자를 꿈꾸는 스무살 인문학도. 머리 아픈 철학책을 좋아하는 만큼이나 시끄러운 베이스 기타 연주를 즐기며, 비폭력·반전·반핵을 지지하면서 삼류 무협영화 ‘덕후’를 자처한다. 아버지인 김기현 목사와 함께 ‘로고스서원’을 꾸려나간다. 경희대 철학과 2학년에 재학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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