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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가 된 환대와 화평의 성찬
[322호 최은의 시네마 플러스] 〈바베트의 만찬〉(1987)
[322호] 2017년 08월 25일 (금) 15:09:24 최은 영화연구가 goscon@goscon.co.kr
   
 

〈바베트의 만찬〉(1987)이라는 영화를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19세기 후반 덴마크의 외딴 마을에 사는 두 할머니와 그녀들의 프랑스인 가정부 이야기였지요. 30년이나 된 영화지만 저는 성찬 혹은 성만찬에 관한 영화로 이보다 더 적합한 텍스트를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특히 지난 며칠 꽤 애를 써 보았습니다만.

환대
꽃처럼 고운 자매 마르티나(버짓 페더스피엘)와 필리파(보딜 카이어)는 마을에서 존경받는 목사의 딸들이었습니다. 강직하고 금욕적인 아버지는 사람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했지요. 세월이 지나 그가 사망한 지 오래지만, 노자매는 결혼하지 않고 함께 살며 얼마 남지 않은 신도들에게 아낌없는 선행을 베풀고 있습니다. 두 사람에게 마을을 떠날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젊은 날 마르티나에게는 무절제한 생활에 대한 처벌로 숙모댁에 잠시 유배중인 청년 장교 로렌즈(자를 쿨레)와의 짧은 인연이 있었고, 노래를 잘하는 필리파에게는 우울증으로 요양을 온 파리의 성악가 아킬 파핀(장 필립 라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자매의 아버지와 그들이 믿는 하나님은 딸들이 부친을 떠나 각자의 인생을 사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수십 년 만에, 그들에게 파핀의 편지를 손에 들고 바베트(스테파니 오드런)라는 프랑스 여인이 나타납니다. 파핀은 난리 통에 남편과 자녀를 잃은 가련한 바베트를 거두어달라고 부탁했어요. 가정부를 둘 형편이 아닌 자매는 난색을 표했으나 바베트는 무보수를 자원하며 다시 한 번 간청합니다. 포기를 순종으로 여기고 살아온 청교도 자매가 오갈 곳 없는 바베트라는 여인을 환대하는 것으로부터 이들의 기적 같은 인연은 시작됩니다. 

죽음: 자기를 낮춤
알뜰한 바베트가 살림을 맡으면서부터 마르티나와 필리파의 형편은 오히려 나아졌습니다. 바베트 덕에 그들은 예배와 공동체를 섬기는 일에 더욱 전념할 수 있었는데요. 그로부터 14년이 지난 어느 날 바베트가 복권에 당첨되었다는 소식이 날아옵니다. 자매는 만 프랑이나 되는 큰 돈이 생겼으므로 바베트가 곧 자신들을 떠날 거라고 믿었어요. 그런데 뜻밖에 바베트는 부친 목사 탄생 100주년 기념일에 자신의 비용으로 음식을 준비하게 해달라고 청합니다. 

바베트가 만찬을 준비하느라 주문한 진기한 식재료들과 최고급 와인이 줄줄이 도착하자, 자매는 두려워졌습니다. 마을이 온통 쾌락의 소굴로 돌변할까 봐서요. 그들의 염려를 듣고, 신도들은 식사를 하는 동안 음식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기로 서로 약속합니다. 프랑스식 코스요리가 제대로 재현된 음식 영화로 유명하지만, 사실 〈바베트의 만찬〉 최고의 볼거리는 만찬 당일 손님들의 얼굴입니다. 와인을 머금어 발그레해진 볼로 눈을 똥그랗게 뜨고 입을 오므려가며 애써 딴 소리를 하는 노인들의 표정은 어쩌면 그렇게 사랑스럽고 귀여운지요. 차마 비웃을 수조차 없도록 말입니다.

오랜만에 숙모를 방문해 동석하게 된 로렌즈만이 예외였습니다. 그는 오랜 왕실 출입으로 프랑스식 궁정 요리에 정통해 있었거든요. 바베트의 음식이 얼마나 훌륭한 것인지 알 길이 없는 마을 노인들과 관객들을 대신해서 로렌즈는 요리들을 일일이 설명하고 감탄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그는 프랑스에서 따라올 자가 없었다는 ‘카페 엉글레’의 여자 요리사 이야기를 전합니다. 바베트의 요리는 그 식당의 메뉴가 틀림없다는 겁니다. 

바베트의 신비는 여기에 있습니다. 바베트와 함께 살게 되면서 자매가 가장 먼저 했던 일은 그에게 ‘요리’를 가르쳤던 일이었어요. 마른 빵을 떼어 수프로 끓여 내거나 생선을 물에 데쳐 내놓는 것이 전부였지만, 마르티나와 필리파의 요리법을 바베트는 진지하게 배우고 익힙니다. 소금 간마저도 금지된 덴마크의 시골에서 그 14년 동안, 최고의 프랑스 요리사 바베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그것은 바베트에게 매일 ‘죽는’ 고통이자 자기를 비우는 ‘케노시스’의 체험이 아니었을까요?

   
   
 

죄의 고백과 화해, 고통의 치유와 하나님을 알아감
결국 바베트는 그 하룻밤의 만찬을 위해 가진 돈을 다 소비했다지요. 그리스도의 성만찬이 그랬듯, 초대된 손님들에게 바베트의 만찬은 용서와 평화가 임하는 놀라운 사건이었습니다. 바로 그 식탁에서 열두 명(열두 제자와 같은 수입니다)의 노인은 과거에 상대방을 속였던 것, 질투했던 것, 출세와 욕망을 위해 용기를 내지 못했던 것을 서로 고백하고 용서를 구합니다. 바베트는 이렇게, 가장 절망적인 순간에 자신을 돌보아주었던 환대를 공동체의 평화로 일구어 냈습니다.

그렇다면 바베트 자신에게 그 만찬은 무엇이었을까요? 은혜 갚음이나 희생의 의식이었을까요? 그렇지만은 않았을 겁니다. 바베트 자신도 그것이 타인을 위한 것만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어요. 음식을 준비하고 대접하는 동안 바베트는 수많은 과거의 기억과 감정들을 몸으로 견디고 받아내야 했겠지요. 하지만 그 수고로운 과정을 모두 마친 후, 바베트에게도 이 만찬은 고통을 넘어서는 회복과 치유가 되었습니다. 돈을 다 써버렸다고 걱정하는 마르티나에게 바베트는 말합니다. “예술가는 가난하지 않아요.” 필리파가 여기에 덧붙이지요. “하지만 이게 끝은 아니야. 바베트는 천국에서도 훌륭한 예술가가 될 거야. 천사들이 얼마나 기뻐할까!”

〈바베트의 만찬〉이 보여주는 성찬은 또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보태지고 새로워지는 현장이기도 합니다. 예컨대 명예와 영광이 다 부질없다고 믿게 된 늙은 파핀은 바베트를 그들에게 보냈고(편지에 이렇게 쓰였어요. “당신들의 선택이 옳았습니다. 나는 지금 외로워졌어요.”), 젊은 날 명예와 영광을 좇아 대단한 성취를 이룬 노년의 로렌즈는 마르티나를 떠난 자신의 선택이 틀렸을까 봐 불안해했습니다. 바베트의 만찬 후 그는 결국 신도들 앞에서 이렇게 고백하게 됩니다. “자비와 진실은 함께합니다. 정의와 축복은 하나입니다.” 놀랍게도 이것은 젊은 시절 파핀의 대사와 그에 앞서 자매의 부친의 설교에 등장했던 문장 그대로입니다. 자신의 ‘옳음’을 증명하고 확인받고 싶었던 경직된 그에게 하나님은 ‘자비’의 모습으로 찾아오셨던 겁니다. 사실 그렇지요. 나의 옳음 때문에 일상이 ‘잘’ 굴러가는 것이 아니라, 많은 경우 나의 옳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참아주심(자비) 때문에 우리가 평화롭지 않던가요. 

다시 보아도, 〈바베트의 만찬〉은 저에게 최고의 성찬 영화입니다. 환대가 환대를 낳는 사귐과 용서와 평화를 이루어내는 섬김과 나눔의 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확장과 강박 없는 고백, 그리고 고통의 치유가 정찬의 코스 요리처럼 꼬리를 물고 등장하는 것을 보게 되지요. 그리하여 이 성찬을 애써 함께 나누고 싶어집니다. 일상의 예배가 바로 이런 거겠지요.

 

최은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에서 영화이론을 공부했고, 중앙대와 청어람아카데미 등에서 강의했다. 영화 연구자로 대중영화가 동시대 관객과 소통하는 방식에 관한 책을 집필하면서, 부르심에 따라 비정규직 말쟁이 글쟁이의 삶을 충실히 살고 있다. 저서로는 《영화와 사회》(공저), 《알고 누리는 영상문화》(공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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