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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에게 교육을!
[349호 시사잰걸음]
[349호] 2019년 11월 29일 (금) 10:24:18 박제민 goscon@goscon.co.kr

웃기지도 않고 믿기지도 않지만, 요즘도 종종 수능시험을 치르는 꿈을 꾼다. 갑자기 시험을 봐야 하는데 공부를 하나도 안 한 것이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채로 한참을 당황하다가 잠에서 깨는데 한참동안 꿈인지 실제인지 멍하다. 유·초·중·고로 이어진 장구한 십 수 년의 시간은 이렇게 당혹스러운 트라우마를 남겨놓았다. 아마도 피해자는 나 혼자가 아닐 것이다. 피해는 꿈이 아니라 현실이 된다.

주일학교 청소년부 교사를 그만둔 지 꽤 오래됐지만 여러 기억은 남아 있다. 좋았고 고마웠던 기억이 많고, 험악했거나 충격을 받은 기억도 있다. 시험기간이 되면 다른 ‘학생’의 교과서를 몰래 갖다버려서 공부를 못하게 방해한다는, 한 학생이 들려준 이야기가 가장 뚜렷하다. (이런 일을 하는 사이를 두고 도저히 친구라고 쓸 수 없어서 그냥 학생이라고 썼다.) 나는 그 학생에게 거짓말하지 말라고 했고, 그는 나를 세상물정 모르는 사람으로 취급했었다.

임기 절반을 보낸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0월 22일 국회에서 발표한 2020년도 예산안 시정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국민들께서 가장 가슴 아파하는 것이 교육에서의 불공정입니다. 최근 시작한 학생부종합전형 전면 실태조사를 엄정하게 추진하고, 고교서열화 해소를 위한 방안도 강구할 것입니다. 정시 비중 상향을 포함한 ‘입시제도 개편안’도 마련하겠습니다.”

국민들이 가장 가슴 아파하는 정도가 아니라, 열이 받치는데도 어찌할 바를 모르겠는 수많은 일들 중에 하나가 교육의 불공정인 것이 맞다. 학생부종합전형(학종)에 대해 실태조사를 하고 고교서열화를 해소하겠다는 말도 당연히 좋게 받아들이고 잘하시라고 기도라도 해드리고 싶다. 그런데 마지막 말은 뭔 소리지 싶었다. 교육에서의 불공정을 없애는 것이 어떻게 정시 비중을 높이는 것으로 연결되는지 모르겠다. 나보다 많이 배우시고 잘사시는 나라님들(가끔은 종교인들)의 말에 토를 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해 의심하고 알아보고 쓰고 말하는 것이야말로 ‘잰걸음’을 걸었던 이유였다.

대한민국의 대학 입시제도
대한민국의 대학 입시제도는 참 많이 바뀌었다. 단순히 많이 바뀐 것으로만 욕할 수는 없다. 법과 제도가 문제가 있으면 빨리 빨리 바꿔야 한다. 다만 바꾸려는 지향과 방법이 올바르냐가 중요하겠다.
대한민국의 대학 입시제도는 크게 수시와 정시로 나눠진다. ‘정시와 수시’라고 하지 않고 ‘수시와 정시’라고 하는 것은 수시모집을 먼저 하고 정시모집을 나중에 하는 시간 순에 따른 것이다.

수시는 크게 학생부교과전형, 학생부종합전형(학종), 논술전형, 특기자전형의 4가지로 나뉜다.
첫째, 학생부교과전형은 학생부에서 오로지 교과 영역, 즉 내신 성적만 보고 학생을 뽑는 것이다. 내신 경쟁이 치열한 학교에 다니면 아무래도 불리할 수밖에 없다.
둘째, 학생부종합전형(학종)은 말 그대로 학생부의 교과 영역뿐 아니라 비교과 영역까지 종합적으로 반영해서 학생을 뽑는 것이다. 즉 내신 성적을 포함하여 출석과 결석, 봉사활동, 수상, 자격증, 독서, 체험활동 및 자기소개서와 추천서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해서 학생을 뽑는다.
셋째, 논술전형은 각 대학이 내는 논술고사 성적으로 학생을 뽑는 것이다. 인문계와 자연계 시험으로 나뉜다.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는 사고력과 쓰기 능력을 측정한다고 하는데 실은 가이드북에 예시문제, 모범답안, 채점기준이 다 나와 있다. 그래서 모 대학 입학처장은 "대학별고사의 논술은 글쓰기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특기자전형은 실기가 중요한 예체능이나 외국어 특기자, 과학 특기자 등 특정 분야에 능력이 있는 학생을 뽑는 방법이다.
정시는 단순하다.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점수를 가지고 학생을 뽑는 제도다.

2020년에 학생을 뽑는 비율은 수시 77.3%, 정시로 22.7%다. 그중에서 수시로 학생을 뽑는 비율은 학생부교과전형 54.8% 학생부종합전형 31.7%, 특기자전형 7.2%  논술전형 4.5%, 기타 1.8%다. 각자의 전형은 서로 얽혀 있다. 학생부교과전형에서도 출석과 봉사 등 비교과 영역이 일정 부분 반영되고, 각각의 수시전형은 수능시험을 봐서 최저기준을 만족해야 최종 합격이 된다. 학교, 학과마다 제각각의 선발기준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야말로 입시체제는 천차만별이다.

   
▲ 구인회·김정은의 〈대학진학에서의 계층격차: 가족소득의 역할(2015)〉. 조사대상은 서울아동패널(2004~2014), 2014년 대학진학 결과 추적한 895명이다. (출처: 사교육걱정없는세상)
   
▲ (출처: 사교육걱정없는세상)

똑같은 시험으로 줄 세우는 게 공정하다는 착각
이제는 전 장관이 된 조국 씨는 ‘서해맹산’(바다에 서약하고 산에 맹세한다는 뜻)의 심정으로 제멋대로 구는 검찰을 바로 잡겠다고 했지만 허망하게도 불쏘시개 역할로 끝났다. 그를 향한 이념 공격은 낡아빠져 보였지만, 자녀를 둘러싼 의혹은 쉬이 넘길 수 없었다. 웃기지도 않는 것은 공격에 앞장섰던 자유한국당 원내대표 나경원 씨도 똑같은 의혹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조국뿐이겠는가. 나경원뿐이겠는가. 이른바 ‘조국 사태’로 불리는 이 사건은 대한민국이라는 집에서 전망 좋고 공기 좋은 위층에 자리 잡은 인간들은 보수와 진보, 수구와 개혁에 상관없이 모두 제힘을 바탕으로 기회를 쉽게 대물림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조국 사태, 나경원 사태, ◯◯◯ 사태… 우리는 이 사건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좋은 대학, 좋은 학과를 나와야 좋은 직장, 좋은 직업을 얻을 수 있다. ‘좋은’의 교환 수단은 돈이다. 솔직히 수시든 정시든 상관없이 돈이 많아야 좋은 대학, 좋은 학과에 갈 수 있다. 그래야 좋은 직장, 좋은 직업을 얻을 수 있다. 그래야 돈을 많이 벌 수 있다. 그래야 내 자식이 또다시 좋은 대학, 좋은 학과를 가도록 돈을 쓸 수 있다. 국민들이 가장 가슴 아파하는 교육에서의 불공정은 번뇌와 업보처럼 돌고 도는 돈과 교육의 연결고리다.

그런데 정시 비중을 늘려서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똑같은 시험을 보게 하고 그 점수대로 줄 세우는 것이 그나마 공정할 것이라는 기대는 초라하고 빈곤한 생각이고 현실과도 동떨어져 있다. 돈이 많은 사람들도 천차만별의 입시제도가 복잡하고 힘들기는 마찬가지다. 차라리 단순해져서 가진 돈을 마음껏 투자하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실제로 한국교육개발원이 발표한 ‘2018 교육여론조사’에 따르면 월 소득 600만 원 이상 고소득자들은 38.2%로 수능 확대를 가장 선호했다. 월 소득 400~600만원 미만 소득계층도 29.7%로 수능 확대를 가장 선호했다. 반면에 월 소득 200~400만원 미만 소득계층은 30.4%로 특기적성 확대를 가장 선호했다. 월 소득 200만원 미만 소득계층도 28.6%로 특기적성 확대를 가장 선호했다. 정시가 확대되면 누가 유리하고 누가 불리한지, 일상을 사는 사람들은 정확히 느끼고 있다. 그런데 교육 불공정을 없애기 위해 정시를 확대하겠다는 생각은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나온 걸까?

상상력에게 교육을!
돈과 교육의 연결고리를 파괴해야 한다. 국민들이 가장 가슴 아파하는, 실은 열이 받치는 교육의 불공정을 정말로 고치고 싶다면 말이다. 백 년을 준비하는 큰 계획이라는 교육에 돈이 많고 적음이 개입할 여지를 완전히 차단해보자는 상상은 왜 하지 말아야 하나?

안식월에 잠시 머물며 쓰윽 구경한 독일은 대학교육을 무상, 즉 공짜로 시켜준다. 공부에 전념하라고 생활비까지 준다. 자국인이나 외국인의 차별은 없다. (바뎀뷔르템베르크 주만 이례적으로 외국인에게 약간의 등록금을 받는데 여론이 좋지 않다.) 교육이 국가가 책임져야 하는 공공의 영역이라는 확고한 믿음 때문이다. 특정 인기 학과를 제외하면 정원도 따로 없다. 학생이 공부하고 싶은 의사를 최대한 존중해주는 것이다.

돈에 구애받지 않고 원하는 대학에 가서 원하는 공부를 할 수 있다면 조국 사태, 나경원 사태, ◯◯◯ 사태라고 할 일들은 원천적으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 정도는 되어야, 최소한 이 정도 상상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있어야, 추운 겨울에 촛불을 들었던 보람이 있지 않을까? 어느 대통령 후보자가 약속했던 완전히 새로운 대한민국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최근 JTBC 〈차이나는 클라스〉에서 강연한 김누리 교수(독어독문학)는 독일이 오늘날 같이 변모하게 된 계기로 6.8혁명을 꼽았다. 6.8혁명의 유명한 구호가 있다. “상상력에게 권력을!” 나는 상상력에게 교육을 맡기고 싶다. 정시 확대 같은 초라하고 빈곤한 상상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원하면 마음 편히 공부할 수 있고, 공짜는 사회주의네 공산주의네 같은 시시한 시비에 공동체가 귀 기울이지 않으며, 그래서 학교나 학과에 따른 차별이 없어지고, 벌어들이는 돈의 차이가 인격에 대한 차이로 연결되지 않는, 그런 세상에 대한 상상력에 교육을 설계할 권력을 주고 싶다.

새로운 세상, 좋아진 세상을 겪어보고 싶다. 나중에 누군가 “세상은 어떠냐?” 물으시면 “전보다는 나아졌습니다” 하고 싶다. 

(그동안 ‘시사 잰걸음’을 읽어주신 분들에게 인사드립니다. 정말 고마웠습니다.)

■ ‘시사 잰걸음’은 이번 회로 연재를 마칩니다. 성원해주신 독자 여러분과 장기 연재로 지면을 빛내주신 필자에게 깊이 감사드립니다.



박제민
20대 끝자락에 기독시민운동 판에 들어와 어느덧 30대 후반이 되었다. 낮에는 기독 시민단체 실무자, 밤에는 ‘동네교회청년’ 활동가로 살아가는 30대 청년이다. 보수적인 교회와 선교단체에서 자라면서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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