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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500주년’은 우리에게 무엇이었나?
박득훈 교회개혁실천연대 공동대표·김근수 해방신학연구소장 좌담
[326호] 2018년 01월 04일 (목) 10:45:56 옥명호 편집장 lewisist@goscon.co.kr
   
▲ 1년간의 연재를 마무리한 시점에, 필자였던 박득훈(65) 교회개혁실천연대 공동대표와 김근수(57) 해방신학연구소장이 종교개혁 500주년을 회고하면서 교회 세습, 종교인 과세 이슈, 교회의 공공성 등을 주제로 대화를 나누었다. ⓒ복음과상황

본지는 2017년 한 해 동안 ‘종교개혁 500주년’을 되새기고 오늘의 한국교회 개혁 방향을 짚어보는 ‘연중기획’을 연재해왔다. 개신교 목회자와 가톨릭 신학자가 필자로 참여하여 꼬박 1년 동안 필담(筆談)을 나누었는데, 종교개혁의 의미를 재평가하는 글(1-2월호)을 시작으로, ‘21세기 한국교회 개혁’(3-4월호)의 과제와 함께, ‘종교와 경제’(5-6월호), ‘종교와 정치’(7-8월호), ‘종교와 거룩’(9-10월호), ‘종교와 헌금’(11-12월호)을 주제 삼아 지상(紙上) 대화를 펼쳐왔다. 연재 중에 독자들로부터 매회 연재글을 읽고 토론과 대화의 장을 열고 있다는 소식을 받곤 했다.

1년간의 연재를 마무리한 시점에, 필자였던 김근수(57) 해방신학연구소장과 박득훈(65) 교회개혁실천연대 공동대표를 한자리에 모시고 종교개혁 500주년을 회고하면서 교회 세습, 종교인 과세 이슈, 교회의 공공성 등을 주제로 대화를 나누었다. 이 좌담은 지난 12월 6일, 광화문 북카페 ‘산 다미아노’에서 2시간 여에 걸쳐 진행되었다.

 

― 지난 한 해 동안 <연중기획: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가톨릭과 개신교의 대화>를 연재해주셨습니다. 연재에 대한 주변 반응은 어땠는지, 연재를 마치신 소감은 어떠신지 궁금합니다.

박득훈 (이하 ‘박’) : 지난 8월 퇴임한 새맘교회에는 한 성도가 전체 교우들과 일반인을 대상으로 만드는 팟캐스트가 있는데, 제가 연재하는 원고를 낭독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어요. 연재하는 글이 교우들에게도 도움이 되고 도전을 주는구나 싶어 감사했지요. 사실 제가 평소에 설교를 하거나 글을 쓸 때, 청중이나 독자 반응을 확인하지 않는 편이에요. 겁이 나서요.(웃음) 그래서 결과나 반응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맡기고 말아요.

김근수 (이하 ‘김’) : 연재 요청을 받고 500주년을 축하하는 마음으로 기꺼이 참여했는데, 박득훈 목사님 뒤를 따라가며 썼기 때문에 큰 어려움은 없었어요.(웃음) 제 글을 개신교 독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하긴 했습니다. 가톨릭 안에서는 종교개혁 500주년 관련 움직임이나 축하 분위기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저 혼자 이야기하는 편이었거든요. 지난 2014년에 펴낸 《교황과 나》(메디치미디어) 이후로는, 이번 연재 글을 통해 개신교 독자들에게 가톨릭을 비교적 공정하게 소개할 수 있는 드문 기회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 연재 들어가기 전, 새맘교회에서 김근수 선생님 모시고 교우들 앞에서 대담을 가진 일이 있었어요. 선생님이 쓰신 《행동하는 예수》(메디치미디어)를 몇몇 교우들과 읽고 나서 대화하는 자리였지요. 그런 인연으로 이번 연재를 통해 가톨릭과 개신교가 하나의 마음으로 한국기독교를 바른 방향으로 이끌고자 함께 힘을 쏟았다는 점이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큰 보람이었습니다.
김 : 저 역시 목사님 통해서 제가 개신교와 신학적, 정서적으로 친근하게 느낀 기회가 되었다는 점에서 제게는 행복한 한 해였어요.

― 종교개혁 500주년과 관련하여 국내외 가톨릭과 개신교에서 있었던 움직임, 동향을 좀 짚어주시지요.

김 : 개인적으로는 한국 가톨릭에서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면서 공식 의례나 행사를 통해 직접 축하하는 움직임이 있길 기대했는데, 전혀 없어 아쉬웠어요. 마치 동생의 축제를 축하하는 그런 마음을 보여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런 관대한 태도가 없는 게 천주교 현실 아닌가 싶어 안타까웠습니다. 물론 지난 11월말 교황청에서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축하하는 기념 우표를 발행했어요.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이 중앙에, 왼쪽에는 성경을 든 루터가, 오른쪽에는 루터의 친구이자 종교개혁가인 필리프 멜란히톤이 그려진, 바티칸 조폐국이 발행한 우표입니다. 또 5월에는 ‘작은 형제회’에서 ‘종교개혁 500년 세미나’를 열어 유해룡 장신대 교수와 고계영 프란치스코회 신부, 그리고 저도 참여했는데, 가톨릭 주교회에서는 움직임이 전혀 없었죠.

   
▲ 교황청이 발행한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우표. (이미지: Philatelic and Numismatic Office of Vatican City State)


박 : 개신교에서는 여러 학술대회가 있었는데, 외람된 말이지만 기대가 되지 않아 별로 참여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어요. 종교개혁을 깊이 있게 성찰하려면 돈이 얼마나 교회를 더럽히는지를 짚어야 하고, 그 부분이 빠지면 표피만 건드리는 거라고 봅니다. 교회 부패의 핵심을 건드리는 심도 있는 신학적 성찰이 있었다면 안팎으로 알려졌을 텐데 그런 게 전혀 없었던 걸 보면 제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은 거 같아요. 마음 아팠던 건, 지난 8월 17일 예장 합동 교단에서 주최한 ‘종교개혁 500주년 한국교회 미래전략 수립을 위한 포럼’입니다. 주제가 “종교개혁, 다시 시작이다”였는데, 이날 포럼 내용 전체를 인터넷에 올라온 동영상으로 들었는데 마음이 참 아팠어요. 한마디로 얘기하면, 개혁 대상을 개혁 주체로 설 수 있게 밀어주는 행사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이 포럼에서 개혁적인 메시지가 아주 없지는 않았어요. 그러나 언어로 표현된 메시지는, ‘매체가 곧 메시지’라는 말이 있듯 포럼 장소가 사랑의교회였고 매우 중요한 마지막 토론의 좌장이 오정현 목사였다는 사실에 담긴 강력한 메시지에 완전히 묻혀 버린 셈이죠. 더구나 오정현 목사는 자기 교회와 한국교회에 대한 자랑만 늘어놨어요. 이게 한국교회의 슬픈 자화상이라고 봐요. 이런 식이면, 틀림없이 지금 명성교회 세습의 주인공 김하나 목사도 나중에는 한국교회 개혁의 주체로 서게 되는 상황이 올 겁니다. 이날 포럼에서 소강석 목사가 한국교회가 사회로부터 통으로 비판받게 된 결정적 계기를 두 가지로 얘기했는데요. 하나는 2007년 아프가니스탄 단기선교팀 피랍사건 때 한국교회 리더십이 제대로 방어하지 못했고, 또 하나는 네오마르크시즘의 영향을 받은 교회 내부 비판세력이 성경적 기준이 아닌 평등과 인권이라는 잣대로 교회를 흠집 내서 그 신뢰도를 떨어뜨렸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하더군요. 교회 개혁을 말하면서 정작 교회가 세상의 비판을 받는 이유가 무엇인지 전혀 감을 못 잡는구나 생각했죠.

김 : 역사상 로마 가톨릭 교회는 지금까지 두 번의 가장 큰 위기가 있었어요. 한 번은 종교개혁 당시였고, 두 번째는 1, 2차 세계대전 이후였는데, 이때 가톨릭교회는 무기력했습니다. 종교개혁 당시에는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를 통해 방어적으로 대응하면서 퇴보했는데, 가톨릭을 쇄신하기에는 충분하지 못한 대회였어요. 그러나 2차 바티칸 공의회(1961-1965)를 통해 현대 세계와 적극 소통해야 한다는 취지로 적극적으로 대응했어요. 이번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한국 개신교회는 트리엔트 공의회 방식으로 기울어진 것 같아요. 이게 지난 9월 각 교단 총회에서 명백하게 드러났다고 봅니다. 퇴행적인 결의들이 나오고, 세습으로 찬물을 끼얹는 등 상당히 슬프고 안타까운 모습이었지요.

   
▲ "베드로는 은과 금이 없어도 얼마든지 생명을 살리고 하나님 나라 일을 할 수 있다고 했어요. 그런데 오늘날 부패한 한국 개신교회는, 이상하게도 목회자들이 돈이 많아야 주님의 일을 크게 잘 할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죠." ⓒ복음과상황 이범진

― ‘면죄부’로 상징되는 종교개혁 당시와 견주어 볼 때, ‘교회 세습’이 두드러지는 오늘의 한국교회 상황을 어떻게 보시는지요.

박 : 면벌부(면죄부) 판매의 핵심은 교회가 돈을 절실히 필요로 했다는 점이에요. 세습도 결국 교회가 돈이 필요하고 그 돈을 계속 운영할 권력을 놓치지 않으려는 게 핵심입니다. 교회가 왜 그렇게 돈을 필요로 할까요? 하나님 나라 일을 하는 데 돈이 정말 그렇게나 많이 필요하냐는 거예요. 중세 때는 성 베드로 성당 재건축과 고위 성직을 구매하기 위해 돈이 필요했어요. 개인적으로는, ‘면벌’부에 담긴 본연의 신학적 정신 자체는 크게 잘못되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잘만 사용하면 ‘면벌’이 인간에게 위로가 되고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는 장치라고 생각하지만,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변질되면서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어요. 명성교회의 경우, 아들을 담임목사로 청빙 결정 후 청빙위원장이 공개적으로 ‘교회의 장기적 안정을 위한’ 선택이었다고 했어요. 그건 어마어마한 규모의 재정, 인원, 건물, 땅을 안정적으로 관리하고 유지하기 위해 세습이 필요하다는 얘기예요. 다른 목사가 와서 출석 규모가 줄면 재정이 타격 받고, 교회 전체가 흔들려서 심각한 위기가 온다는 거죠. 교회가 돈이 많으면 안정적으로 성장한다는 얘기나, 재정수입이 확보되면 성공이고 돈이 줄면 교회 위기라는 얘기는 한참 잘못된 겁니다. 중세나 현대나 교회가 많은 돈을 필요로 한다는 것, 이게 잘못됐습니다! 부패한 교계 리더들이 강하게 거부하거나 유예를 요구해온 종교인 과세 문제의 핵심도 거기에 맞닿아 있어요. 어떻게 해서든 ‘목회활동비’를 과세 대상에서 제외시키고 싶었던 거죠. 본색이 드러난 겁니다. 이 목회활동비가 바로 목회자가 맘대로 쓸 수 있는 교회 재정인데, 대형 교회일수록 그 액수가 어마어마합니다. 그 목회활동비에 세금을 부과하면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되는 거지요. 목회활동비의 엄청난 규모가 공개되고, 잘못 사용한 경우 그 내역이 들통날 것도 겁이 나는 거지요. 그런데 정말 과세와 세무조사를 피해야 할 만큼 돈이 많아야 목회 활동을 제대로 할 수 있는 걸까요? 베드로는 은과 금이 없어도 얼마든지 생명을 살리고 하나님 나라 일을 할 수 있다고 했어요. 그런데 오늘날 부패한 한국 개신교회는, 이상하게도 목회자들이 돈이 많아야 주님의 일을 크게 잘 할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죠.

김 : 저는 개인적으로 한국 개신교가 가톨릭보다 ‘행업(行業) 사상’에 더 빠졌다고 봐요. 실제 운영하는 시스템을 보면, ‘행함으로 구원받는다’는 생각을 개신교가 가장 크게 믿고 있잖아요. 한국 개신교가 돈으로 좋은 일 할 수 있다는 함정에 빠졌어요. 돈으로 좋은 일 하는 건 종교가 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예수님이 돈 모아서 일하지 않았어요. ‘돈으로 좋은 일할 수 있다’는 논리에 빠지면, 더러운 돈이든 깨끗한 돈이든 많이 모으고 그 돈을 배분하고 운용하는 권력이 필요하게 되는 악순환이 계속될 겁니다. 중세 때 일어났던 일이 똑같이 일어나고 있어요. 종교가 돈으로 좋은 일 할 수 있다는 거 자체가 신학적으로 틀렸어요. 이게 바뀌지 않으면 안 됩니다. 돈 문제를 건드려야 종교의 본색이 드러납니다. 세 가지 ‘오직’(Sola)을 아무리 떠들어도 그건 이미지일 뿐, 실상은 돈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느냐가 가장 중요한 거예요. 예를 들어, 자신을 찾아온 부자 청년에게 예수님이 교리나 성서 지식을 물어봤나요? 아니에요. 가진 걸 모두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라고 하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청년의 질문에 예수님은 경제, 사회 이야기를 하셨잖아요. 그러니까 오늘날 한국 가톨릭과 개신교가 예수님께 ‘우리가 영생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묻는다면, 예수님은 분명 ‘너희가 가진 재산 싹 팔아서 전부 가난한 사람에게 주라’고 하실 겁니다. 그게 답이에요. 그 문제가 핵심입니다.

박 : ‘종교와 거룩: 교회가 복원해야 할 언어, 거룩’(323호)에서도 이야기했지만, 한국교회의 신학적 신앙적 언어가 다 오염되어 버렸어요. 믿음, 은혜, 성경… 단어는 그대로 쓰지만 그 의미가 다 뒤틀려 버렸습니다. 그 원인이 무얼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돈입니다. ‘면벌’부도 신학적 의미가 바뀐 건 돈 때문이거든요. 돈을 욕망하니까, 단어는 그대로 쓰지만 내용을 바꾸어버려요. 김하나 목사님이 세습으로 명성교회 담임목사로 위임되면서 정말 ‘아름다운’ 말을 했어요. “명성교회의 영원한 주인은 하나님입니다”라고요. 참 기가 막힐 노릇이죠. 그러면서 멋진 해석을 붙였어요. “우리가 몇 십만이 모여도 하나님이 함께해 주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요, 단 한 명만 남을지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가장 아름다운 교회인 줄 믿는다.” 말은 정답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가 엄청난 돈을 갖고 있는 거죠. 하나님이 교회의 주인이라는 표현은 쓰지만, 그 신학적 의미는 빠져 있는 거예요. 그 말의 내용이 정말 살아 있다면, 아버지를 이어서 아들이 담임목사 자리를 양심상 도저히 꿰찰 수가 없죠. 그런데 내용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껍데기 언어만 남았어요. 주인 됨의 신학적 의미와 내용은 온데간데 없어졌어요. 그게 정말 무서운 거예요. 그래서 교인들이 모두 속잖아요. 그 말만 들으면, 성도들로서는 ‘명성교회의 영원한 주인은 하나님이시니까 이건 절대로 세습이 아니야’ 하겠죠. 그러니 그들은 왜 이렇게 사람들이 세습이라며 난리를 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거죠. 그 교회 장로님이 JTBC 인터뷰에서 그랬잖아요. “명성교회 와서 직접 예배를 드려보시고 교인들의 예배 자세라든가 예배를 드리는 모습들을 보면 아마 이런 말씀들(세습 운운)은 일거에 사라지리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숨이 확 막히는 것 같았어요. 언어는 껍데기만 남고, 내용은 사탄이 주는 것으로 가득 차 있어요. 한국교회가 언제쯤 이 사실을 깨달을 수 있을지, 가슴이 정말 터질 거 같습니다.

   
▲ "그분은 돈으로 가난을 구제하는 방식은 택하지 않았어요. 그게 교회에 주는 교훈입니다. 교회가 돈을 많이 걷어서, 돈을 이용해서 가난을 해결하려 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 돈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얼마나 돕느냐보다는, 교회가 어떻게 하면 가난해질 수 있느냐가 핵심입니다." ⓒ복음과상황 이범진

― 김하나 목사가 한 말은, 사랑의교회가 새 건물을 완공한 뒤 “하나님께서 다 하셨습니다”라고 크게 써붙였던 현수막 문구를 생각나게 합니다.

박 : 예배당 준공예배 때 오정현 목사가 “새 예배당은 이런 교회가 되게 하소서”라고 기도한 기도문이 있는데, 거기에 가난한 사람, 약한 사람, 고통받는 사람들 이야기가 나와요. “가난하고, 약하고, 소외되고, 고통하는 자들이 주저없이 왕래하기에 문턱이 없는 편안하고 친근한 그런 교회… 산간벽촌의 교인이 성큼성큼 주저없이 들어와서 찬송과 기도할 수 있는 교회… 복음을 모르는 자들이 아무런 거리낌없이 들어올 수 있는 낮은 교회가 되게 하소서.” 저는 여기서도 ‘매체가 곧 메시지’라는 얘길 하고 싶어요. 사랑의교회가 정말 가난한 사람, 낮은 사람들을 그렇게 생각하는 교회라면 그렇게 화려한 건물을 당장 팔아야 해요. 당장 팔아 없애고 천막을 치든지 해야지요. 그렇게 화려한 건물 지어놓고 가난한 사람들, 산간벽지 시골 사람들이 와서 은혜받고 감동받게 해달라? 그런 사기가 어디 있습니까.

김 : 천주교가 11세기 들어서 처음으로 ‘사제 독신제’를 의무로 했어요. 그 전에는 결혼한 사제들도 있고 결혼하지 않은 사제들도 있었는데, 결혼한 사제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이 교회 재산을 자녀들에게 빼돌렸거든요. 그걸 막기 위해서 의무로 독신을 지키게 한 것인데, 앞으로 한국교회를 살리려면 ‘목사 의무 독신제’를 도입하는 건 어떤가 싶어요.(웃음) 물론 불교 조계종을 보면 또 독신제도 무용지물이겠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요.

― 두 분 모두 연재 중에 ‘가난’과 ‘가난한 교회’를 자주 언급하셨습니다. 기독교와 부(富), 신앙인 개인과 부는 서로 적대적인 관계인지, 부를 버려야 한다고 보시는지요?

박 : 저는 금욕주의자는 아닙니다. 물질적인 풍요 자체를 적대시하지 않아요. 제가 강의할 때마다 청중들에게 던지는 질문이 있어요. “에덴동산에 무엇이 있습니까?” 이 질문에 대해 대부분 생명나무, 선악과, 아담, 하와 등은 언급하는데 어떤 경우에도 끝까지 안 나오는 게 있어요. 희한한 일이에요. 분명 하나님이 에덴동산에 순금과 호마노란 보석도 있게 하시고, 베델리엄이라는 향료도 있게 하셨는데 끝까지 안 나와요. 저는 성경에서 그게 눈에 쏙 들어왔는데, 그런 답이 나오는 않는 게 굉장히 흥미로웠어요. 저는 솔직히 물질적인 화려함을 좋아합니다. 옷에 욕심을 부리지는 않지만, 자연스럽게 코디하고 조화롭게 갖춰 입어요. 그게 문제라고 생각 안 해요. 부가 축적되었음에도 모든 이가 하나님을 잃지 않고 감사한 마음으로 골고루 부를 누리며 살 수 있다면 그게 최고지요. 그런데 왜 자꾸 가난을 강조하고 부에 대해서 저항하느냐, 그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경제적 풍요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 부를 왜 소수의 사람만 누리느냐, 이거죠. 대다수 사람들은 억압당하고 착취당하고 생존의 위협을 느끼는데, 왜 소수만 풍요를 누리며 사느냐는 거죠. 그건 하나님의 정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세상을 바로잡아야 하는데 가난해지지 않고는 결코 뭐가 문제인지 알 수도 없고, 풀 방법도 없어요. 부도 누리고 세상도 바꾸겠다는 건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이 불평등한 세상을 바꾸려면 일단 가난해져야 해요.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의 서러움, 아픔, 고통, 슬픔, 그 처절한 외침이 내 것이 되어야 합니다. 저도 그렇게 완전히 동화되진 못하고 있지만 최소한 노력이라도 해야 비로소 세상의 불의한 억압 구조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풍요를 누리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다만, ‘모든 사람이 골고루 부를 누리게 되었을 때 과연 하나님을 잃어버리지 않을까’ 하는 문제가 있어요. 분명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봐요. “부는 악이 아니라 유혹적이다”라는 자끄 엘륄의 말을 좋아합니다. 엘륄은 “부는 악을 행하도록 이끄는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는 말도 했죠.

김 : 모두가 고루 부를 누릴 때 하나님을 잃어버리지 않을까 하는 고민을 하게 될 날은 안 올 거예요.(웃음) 성도가 가난해야 하느냐와 교회가 가난해야 하느냐는 다른 문제입니다. 가난이 인간성을 망치니까 가난에 저항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해방하자는 해방신학이 나왔잖아요. 그러나 교회는 신학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써 생겨났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비우심, 낮아지심, 가난하심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사건이에요. 이 십자가에서 나온 게 교회라면, 교회가 예수님을 따르는 조직이라면 그대로 해야 하는 거예요. 계절 실업자가 되었던 예수님은 돈의 유혹을 많이 느끼는 자영업자 출신입니다. 악마의 유혹을 받을 때 세 가지 유혹 중 하나가 돈이었고, 자영업자로 살 때 얼마나 유혹을 느꼈으면 하나님과 돈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했겠습니까. 그분은 돈으로 가난을 구제하는 방식은 택하지 않았어요. 그게 교회에 주는 교훈입니다. 교회가 돈을 많이 걷어서, 돈을 이용해서 가난을 해결하려 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 돈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얼마나 돕느냐보다는, 교회가 어떻게 하면 가난해질 수 있느냐가 핵심입니다.

박 : 교회가 가난한 사람들의 생존 문제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갖는 건 옳다고 봐요. 초대교회에서 가난한 사람이 생기면 공동체가 관심을 갖고 사랑을 실천했잖아요. 바울도 예루살렘 교회가 가난에 시달릴 때 다른 교회에 권면해서 모금을 했고, 그걸 전해주러 갔어요. 죽임 당할 위험 때문에 말리는 사람을 뿌리치고 갔잖아요. 교회가 생존의 위협을 느끼는 이들에게 물질적인 도움을 주고자 하는 건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자체가 잘못됐다고는 생각지 않아요. 다만 성경에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고 할 때의 ‘모든 것’은 엄청난 부가 아니라 ‘필요’를 말하는 겁니다. 오병이어로 5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을 왕으로 삼고 싶었던 데서 사람들의 욕망이 작동하기 시작했어요. 그때 예수님이 그걸 차단합니다. 자신의 살과 피를 제시하며 존재의 변화로 초대하시는 거죠. 필요 충족에서 탐욕으로 넘어가는 경계선을 엄중히 지키신 겁니다. 결국 그들 모두 실망하여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 대다수 한국교회는 그 경계선을 지키지 못했어요. 그러면서 자꾸 ‘돈이 많아야 가난한 사람 돕고 큰 일을 할 수 있다’고 떠들어 왔어요. 예수님의 살과 피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고, 그나마 한국교회가 말하는 예수님의 살과 피는 왜곡되어 버렸어요.

김 : 돈에 관해서 극복해야 할 두 가지 명제가 있다고 생각해요. 하나는 ‘돈은 축복의 결과’라는 것, 그리고 ‘돈으로 선을 행할 수 있기 때문에 돈이 필요하고 모아야 한다’는 것. 이걸 이기지 않으면 한국 개신교나 가톨릭은 올바로 설 수 없습니다.

박 : 기복신앙의 함정이 있어요. 열심히 예수 믿고 (혼자) 마음껏 누리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대개는 “많이 벌수록 가난한 사람들을 더 많이 도울 수 있으니까 많이 벌어서 도와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이걸 기복신앙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서’에 방점이 찍혔다고 생각하면서 스스로 자신이 이타적이라고 착각합니다. 기복신앙 추종자들에게 그게 바로 기복신앙이야 하고 말하면 싫어합니다. 자기는 가난한 사람 도우려는 거라고 자신을 변호해요. 그러나 성경 어디서도 ‘너희가 가난한 사람을 돕기 위해 부자가 되라’고 말하지 않아요. 지금 있는 것으로 가난한 사람을 섬기라고 하죠. 

   
▲ "지금 한국 가톨릭이나 개신교는 부자 청년처럼 예수님을 벌써 떠났어요. 하나님이 가톨릭과 개신교를 떠나신 게 아니고, 우리 스스로 하나님에게서 멀리 벗어나 떠난 거예요." ⓒ복음과상황 이범진

김 : 우리 속담에 ‘개 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쓰라’는 말이 있는데, 개 같이 벌면 개가 되지 정승이 될 수 없어요.(웃음) 우리는 흔히 어떤 돈이든 좋게 쓰면 되지 않나 하는데, 프란치스코 교황은 더러운 돈은 벌지 말라고 했어요. 정승 같이 안 써도 좋으니까 개 같이 벌지 말라는 거예요.

박 : ‘가난한 사람을 도우라’는 말과, ‘부자가 돼서 가난한 사람을 도우라’는 말은 완전 다른 말이에요. 지옥과 천국의 차이입니다. 이걸 어떻게 하면 한국교회가 알아들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대문짝만하게 써서 붙이고 돌아다니고 싶은 심정이에요.

김 : 예수님이 부자 청년에게 “당신이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 주시오”라고 했을 때 청년이 슬퍼하며 돌아갔잖아요. 아마 그는 자기 재산 중 일부를 좋은 일에 쓰면 안 되겠냐고 항변하고 싶었을 거예요. 김하나 목사도 부자 청년처럼 우리 명성교회가 가진 걸로 좋은 일을 해서 좋은 인상을 받으면 되지 않나 생각하는 건지도 몰라요.

박 : 적나라하게 얘기하면 이거예요. ‘예수님이 제게 가지신 우려는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우려가 저에겐 해당되지 않는다는 걸 증명해보이겠습니다. 사회적 약자를 살리고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곳에 돈을 쓰겠으니 지켜봐 주시고 저에 대한 우려를 거두어 주시기 바랍니다.’

김 : 예수님이 부자 청년에게 가진 것을 다 팔라고 하셨을 때는 이런 의미가 담겼을 거라고 봐요. ‘당신이 가진 그 재산은 대부분 부정하게 쌓아올린 거 아닙니까. 가난한 사람들에게 갈 몫인데 당신이 구조적 모순을 이용해서 유별나게 벌었을 뿐, 그 부는 당신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을 하시고 싶으셨을 거라고 봐요.

박 : 두 가지를 덧붙이고 싶은데, 부자 청년은 자신의 부가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여겼을 수 있어요. 자기가 어려서부터 율법을 잘 지켰으니 자기 믿음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이고 은총이라고 받아들이는 거죠. 그렇게 자기 부에 대한 신학적 신앙적 정당성을 확고하게 갖고 있었을 거예요. 또 하나는, 자기가 가진 많은 부가 돈을 숭배해서가 아니라 좋은 일, 하나님 일에 쓰기 위한 거라고 항변하고 싶었을 겁니다. 이게 다 자기를 속이는 거예요. 자기기만이 가장 벗어나기 힘든 병인데, 약이 없어요. 박근혜 전 대통령이 대표적이잖아요. 자기는 잘못한 게 없고 오직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했을 뿐인데 친구에게 배신당한 거라고 스스로 속이고 있잖아요. 부자 청년에게 유일한 약은 재산 다 팔아서 모두 남에게 주는 것밖에 없어요.

김 : 지금 한국 가톨릭이나 개신교는 부자 청년처럼 예수님을 벌써 떠났어요. 하나님이 가톨릭과 개신교를 떠나신 게 아니고, 우리 스스로 하나님에게서 멀리 벗어나 떠난 거예요.

박 : 예수님 앞에서 부자 청년이 아주 점잖게 떠났어요. “슬픈 기색을 띠고” 떠났다는 의미가, 예수님의 말을 인정하는 척하면서 떠났다는 의미예요. 차라리 예수님이랑 싸우면서 담판을 지었다면 나을 뻔했어요. 한국교회도 ‘점잖게’ 하나님을 떠나고 있는 거예요. 말로는 ‘하나님이 우리 교회의 영원한 주인’이라고 하면서 얼마나 점잖게 예의를 차리나요. 실제 내용으로는 완전히 하나님을 박살내면서 말이죠. 

김 : 개신교에서는 ‘가나안 성도 걱정이다’ 하고, 천주교에선 ‘냉담 신자 걱정이다’ 하잖아요. 저는 오히려 교회 자주 나오는 신자들이 걱정이에요. 이 열심 있는 신도들로 인해 개신교나 가톨릭이 무너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박 : 지난 12월 12-15일까지 사랑의교회에서 ‘새생명축제’라고 전도대회를 열었는데, 총 2,559명이 예수 믿기로 결심했다는 교계 언론보도가 있었어요. 저는 이게 무서운 일이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이제 오정현 목사는 회개할 길이 없겠구나 싶어서요.
김 : 물의를 일으킨 대형교회 목사들이 회개하기는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는 일보다 어려울 겁니다.

― 앞서 종교인 과세 이야기가 잠시 나왔는데, 정부와 종교계가 서로 타결을 한 듯한데 이 문제는 어떻게 보시는지요?

김 : 이번에 정부가 개신교측의 끈질긴 압력과 요구로 인해 어떤 정치적 타결을 봤는지 모르겠지만, 종교인 과세 원안에서 많이 물러섰어요. 이것은 한국 개신교가 정화될 수 있는 가능성을 더 좁혀버린 슬픈 사건이에요. 당장 먹기는 곶감이 달다고, 개신교가 세금을 덜 낼 여지는 생겼지만 회개의 가능성은 그만큼 더 멀어졌다고 생각합니다. 

박 : 회개의 가능성이 유예된 거죠. 가톨릭이나 불교와 달리 개신교가 종교인 과세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건, 앞서 얘기한 바와 같이 ‘목회 활동비’와 관련이 있습니다. 개신교 대형교회 담임목사가 자기 맘대로 쓸 수 있는 돈을 그만큼 많이 갖고 있다는 얘기죠. 개인적으로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가 쓴 《대한민국은 왜?》(사계절)를 굉장히 중요한 책으로 보는데, 이 책에서 한국교회 주류세력 핵심에 월남 기독교인들이 있다고 얘기해요. 종교인 과세 유예에 앞장선 김진표 국회의원과, 이 문제로 교계 인물들과 대화를 많이 나눈 김동연 경제부총리겸 기재부 장관도 기독교인이에요. 한국교회의 정치적 힘이 정말 강합니다. 한국 사회 상층부에 기독교인들이 포진하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개신교회가 정부를 향해서 아니라고 말하면, 그게 교계뿐 아니라 정부와 국회에 포진한 기독교인들의 힘에 의해서 관철이 되는 거예요. 소강석 목사가 ‘종교인 과세 시행 2년 유예’를 주장하면,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는 정치권의 기독교 지배세력이 합류해서 통과시키는 거예요. 심각한 상황이죠.

김 : 역사적으로 보면 가톨릭은 원래 권력에 의지해서 종교의 안정성을 노리는 특징이 있었고, 개신교는 돈을 통해서 안정성을 노리는 특색이 있었는데, 한국 사회에서는 개신교나 가톨릭 똑같이 돈과 권력을 동시에 추구하는 쪽으로 변질되었어요. 그리고 한국 사회 상층부의 교인들을 통해서 권력집단으로 작동하는 거죠. 최근 장정일 문학평론가가 “문학이 권력을 잃어야 문학이 산다”고 말했는데, 종교야말로 권력을 잃어야만 비로소 종교가 될 거예요. 독일을 예로 들면, 종교는 종교계 내부를 넘어 전 국민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정부가 관여를 합니다. 한국만 해도 종교인구가 국민의 절반이 넘잖아요. 그래서 정치인들이 단지 선거의 표를 의식하지 말고 종교가 중요한 사회 이슈라는 생각으로 적극 감시해야 합니다. 저는 공무원과 종교인은 사회적으로 ‘원스트라이크 아웃제’를 실시해야 한다고 봐요. 돈 비리에 연루되면 종교인이나 공무원은 다시는 그 일을 못하게 자격을 박탈하고 집행유예 없이 실형에 처해야 한국 사회의 종교 적폐 청산에 도움이 될 거예요.

박 : ‘아멘 삼창’입니다.(웃음)

― 정부가 국가 차원에서 개입할 때 종교 박해 혹은 탄압이라는 비판이나 저항이 있을 텐데요.

김 : 그런 걸 종교 박해나 탄압이라고 하면 도둑이 제 발 저리는 꼴이죠. 깨끗한 종교인은 오히려 당당할 겁니다. 국민들이 보기에는, 종교인들이 왜 돈 문제에서 깨끗하지 않은지 그게 이상한 거예요.

박 : 그런 태도는 굉장히 이율배반적인 겁니다. 과거 군사정권 시절 기독청년들이 한창 반독재민주화운동할 때는 로마서 13장을 내세우면서 국가권력에 복종하라, 하나님이 세우셨으니 순종하라고 했잖아요. 납세는 국민의 의무입니다. 종교인도 국민으로서 소득세 내는 건 당연한 일이죠. 국가는 과세할 권리가 있고, 그건 하나님께서 세상 권력에게 맡기신 임무라고 볼 수 있어요. 그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겠다는데, 과거 민주화운동하던 이들에게는 국가에 순종하라고 해놓고 이제 와서는 종교 탄압 운운하면 정말 속보이는 짓이죠.

김 : 한국의 종교지배세력 중에 이명박·박근혜 정부에 밀착되지 않은, 협력하지 않은 세력이 있었습니까? 그때는 그렇게 해놓고 지금 그들 세력 중에 문재인 정부에 협력하는 사람 누가 있습니까? 과거 정부에 순종했으면 지금도 그래야지 왜 달라지나요? 국가가 당연히 할 일(세무조사)을 하겠다는데 그걸 왜 면제해달라는 겁니까?

박 : 설사, 정부가 안티기독교 세력이고 교회를 손 좀 봐야겠다는 속셈으로 세무조사를 한다고 가정해보죠. 그렇다 해도 교회가 세무조사 자체를 반대할 이유가 없어요. 받을 거 받고, 문제 없으면 그만인 거예요. 정부가 권력을 이용해서 교회를 손보려 한다면 그건 저항하면 되죠. 저항하다가 핍박 받는다면 그게 교회가 갈 길이지 그걸 왜 두려워하고 피해가려 하나요.

― 오늘날 한국 가톨릭과 개신교에서 ‘신앙의 공공성’에 대한 연구나 논의 수준, 혹은 가톨릭과 개신교의 공공성 수준은 어느 정도라고 보시는지요?

김 : 원래 ‘공공성’은 따로 언급할 필요도 없이 ‘교회’라는 단어 자체에 이미 들어 있는 개념이에요. 예를 들어, ‘명성교회는 김삼환 목사 것이다’ 하면 애초에  틀렸잖아요.

박 : 교회를 가리키기 위해 사용된 헬라어 ‘에클레시아’(ecclésĭa)는 본래 ‘민회’(民會)라는 뜻이었어요. 민회는 일반 시민들이 모여서 시민사회 전체의 문제를 함께 의논하고 결정하는 기관이었죠. 그 용어를 교회로 가져온 거예요. 그러니까 교회는 출발 때부터 좁은 의미의 종교인 집합체가 아닌, 세상 전체를 위해 존재하는 기관이라는 거예요. 예수님이 그랬잖아요. 세상의 빛이 ‘되라’, 세상의 소금이 ‘되라’고 한 게 아니고 이미 세상의 빛‘이다’, 세상의 소금‘이다’라고 하셨단 말이죠. 너희가 세상 속에서 공적인 존재로 새롭게 태어났다고 말씀하신 거거든요. 그러니까 이미 교회는 처음부터 세상 속에서 공적인 존재로 출발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김삼환 목사가 교인의 3대 의무를 성수주일, 십일조, 전도라고 했는데, 여기서 그가 말한 ‘전도’의 의미는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게 아니라 성수주일과 십일조 잘하는 사람을 교회로 데려오는 걸 말해요. 그러니까 교회의 공공성, 교회 자체가 공공적인 존재라는 사실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겁니다. ‘교회’라는 말을 김삼환 목사님도 쓰고 저와 김근수 선생님도 쓰지만, 그 의미는 전혀 다른 거예요. 정말 심각한 문제입니다. 주일성수 잘하고 십일조 잘하는 사람들이 열심히 하면 교회가 잘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 교회가 세상에 어떤 영향을 미치느냐, 교회 때문에 세상이 깨끗해지고 밝아졌느냐 하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는 거죠. 세상에 관심이 있으면 세습을 하겠습니까? 세상에서 온갖 비난이 빗발치는데 지금이라도 철회를 해야지, 공공성에 대한 이해가 눈꼽만큼도 없는 거죠. 과거 김삼환 목사가 통합교단 총회장 할 때 부총회장이었던 지용수 목사(양곡교회)가 ‘명성교회 욕할 시간 있으면 전도나 하라’고 했어요. 그게 과거 예장통합 총회를 이끌었던 지도자가 한 말이에요. 공공성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거죠. 간섭하지 말라고 했으면 정말 세상에, 공적인 영역에 영향도 안 미치면 좋겠어요 제발. 그런데 영향은 또 엄청 미쳐요. 종교계 원로라고 청와대 들어가고, 세월호 참사 일어났을 때 대통령을 교회로 불러서 위로하고. 이런 양심 불량한 태도가 어디 있습니까.

김 : 명성교회 장로님이 JTBC와 인터뷰할 때 ‘외부에서 비판하지 말고 우리 교회를 다니면서 비판하라’고 했어요. 제가 그분한테 묻고 싶었어요. 그러면 북한에 가서 살아야 북한을 비판할 수 있는 거냐고. 북한 사람들이 ‘우리는 여기서 잘 살고 있는데 왜 남한 사람들이 우리를 비판하느냐’ 하면 우리가 북한을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까? 김수환 추기경이 ‘교회의 주인은 그 교회 신자가 아니라 가난한 사람이다’라는 말씀을 하셨어요. 이게 교회의 공공성에 대한 정확한 얘기라고 봐요.

박 : 예수님도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하나님 나라가 너희들의 것이다’라고 하셨죠.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은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들과 동전의 양면이에요.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인데, 그런 사람들은 최선을 다해 가난해지려고 애쓰게 되어 있어요. 이런 사람이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죠.

― 한국 사회에서는 비교적 가톨릭이 개신교에 비해 좀 더 공공성을 추구하는 모습 아닌가 합니다.

김 : 그건 아마도 개신교의 개교회주의와 달리 가톨릭은 중앙 통제로 운영되다 보니 일탈이나 적폐가 비교적 덜 드러나서 그런 인상을 주는 거죠. 가톨릭도 적폐는 만만치 않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가톨릭이든 개신교든 불교든, 누가 먼저 망하나 시합하는 거 같아요.
 

   
▲ "한국교회의 신학적 신앙적 언어가 다 오염되어 버렸어요. 믿음, 은혜, 성경… 단어는 그대로 쓰지만 그 의미가 다 뒤틀려 버렸습니다. 그 원인이 무얼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돈입니다." ⓒ복음과상황 이범진

박 : 공공성과 관련해서 요즘 공공신학에 대한 논쟁이 있긴 해요. 공공신학이 기존의 자유주의 사회 질서를 그대로 놔둔 채 영향을 미치려고 하는 관점에는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있어요. 공공신학자들은 대체로 기존의 틀을 근본적으로 흔들지는 않으려 하기 때문에, 《정의론》을 쓴 정치철학자 존 롤스를 좋아하죠. 이와 달리, ‘교회의 공적 책임은 지금의 자유주의 근대국가를 근본적으로 흔드는 차원의 사회적 책임을 말하는 것이다, 지금의 틀을 그대로 둔 채 공적 역할을 잘 해보겠다는 것은 기독교적 사회윤리를 많이 타협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흐름이 있습니다. 근대 국가가 자본주의에 너무 깊은 영향을 받아 지나치게 개인주의적이고 공동체성이 없기 때문에 근원적으로 흔들어서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흐름인데, 소위 공동체주의자들이 그런 얘길 많이 해요. ‘교회론이 곧 사회론이다’라고 말하는 스탠리 하우어워스나 존 밀뱅크 같은 사람들이죠. 여기에 올해 《Awaiting the King: Reforming Public Theology》(Baker Academy)란 책을 펴낸 제임스 K. 스미스가 가세하고 있죠. 이런 논쟁은 계속 이어갈 필요가 있을 텐데요. 저는 개인적으로 체 게바라를 참 좋아합니다. 그가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현실주의자)가 되자. 그러나 가슴 속엔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라는 말을 했는데요. 어떤 의미에서 공동체주의자들이 얘기하는 교회의 공공성은 현대 사회에선 불가능한 꿈이에요. 그러나 그 불가능한 꿈을 품고 자본주의 사회가 어떻게 하나님 나라에 근접할 수 있을지 노력하는 일을 비판해서는 안 된다고 봐요.

김 : ‘가톨릭’(catholic)이라는 단어 자체가 보편적이라는 뜻이 있고 이미 공공성을 내포하고 있거든요.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로 이른 바 ‘사회교리’라고 해서 가톨릭 교리를 정치, 경제, 사회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하는 논의가 활발합니다. 이 논의의 개신교 버전이 교회의 공공성에 대한 논의, 공공신학 아닌가 해요. 그런데 지금 가톨릭 신학은 죄의 문제보다는 불평등 문제를 훨씬 더 많이 다루고 있어요. 죄 문제도 중요하고 포기할 수 없는 주제지만, 현대 사회에는 불평등이 새로운 죄를 양산하고 있기 때문에 불평등의 문제를 다루는 게 가톨릭판 공공신학의 주제인 셈이죠.

박 : 우리가 흔히 말하는 죄는 ‘개인적인 죄’를 말하는 것이고, 불평등은 ‘사회적인 죄’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죄인과 세리들의 친구였지만, 그들에게 죄가 없다고 생각하시지는 않았을 거라고 봐요. 그럼에도 그분은 그들의 친구가 되었고 지배세력을 향해서 강력하게 항쟁했습니다. 예수님도 개인의 죄보다는 사회 지배세력이 불평등을 만들어내는 죄악을 더 큰 이슈로 본 것이죠. 가톨릭이 그 방향으로 가는 건 바람직한 일이고, 개신교도 공감하고 협력해야 한다고 봐요. 

김 : 예수님은 개인적 죄에 너그러우셨고 사회적 죄에 단호하셨습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사회적 죄를 더 우선적으로 다뤄야 한다고 봅니다.

박 : 개신교의 교단별 총회는 여러 형태의 죄인을 양산하는 것으로 끝났어요. 동성애자, 요가와 마술 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지지하거나 존중하는 사람들을 모두 죄인으로 만들었습니다. 개신교 교단 총회에서 종교개혁 500주년에 그런 죄인을 양산하는 게 참 한심했어요. 지금 총회가 다룰 죄가 그런 것이냐 하고 예수님이 꾸짖으셨을 거 같아요. 교회 세습이나 지배세력의 죄를 다뤄야지 뭐하는 거냐 하셨을 거 같거든요.

김 : 지금 예수님이 오시면, 한국 개신교의 최대 문제는 성소수자나 이슬람이 아니라 대형교회와 교회 세습이라고 하실 겁니다. 개신교의 문제를 교회 바깥이 아니라 안에서 찾아야 해요.

박 : 실은 그런 점이 한국교회가 공공성 문제에 별 생각이 없다는 강력한 증거예요. 자기 종교권력을 강화하는 부분에만 몰두하는 거죠. 안식일과 제사를 이용해서 종교적 권력과 도덕적 우월성을 확보하려했던 예수님 시대 유대교 지도자들과 같아요. 예수님이 그때 성전을 뒤엎으셨잖아요.


김 : 개신교회는 외부에 희생양을 양산하는 습관이 있어요. 천주교는 외부 세력을 악마화하지는 않는 반면, ‘우리는 천사다’ 하는 교만이 있어요. 한국 천주교는 오만과 싸우고, 개신교는 혐오와 싸워야 합니다.

― 목사님은 목회에서 조기 은퇴하신 지 6개월 여가 되셨고, 선생님은 누가복음 해설서 《가난한 예수》(동녘)를 내셨는데요. 끝으로, 두 분이 2018년에 어떤 계획을 세우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박 : 저는 목회 은퇴 이후 하루하루 살고 있어서 별다른 계획이 없어요. 은퇴하니까 뭐하냐고들 많이 물어서 모범답안으로 준비한 게 있어요. ‘바람 따라 물결 따라’입니다. 2018년에도 바람 따라 물결 따라 살 거예요. 한국교회의 현실을 목도하면서 퇴임 후 생활이 마냥 홀가분하고 편안한 시간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정말 많이 행복했어요. 앞으로도 이대로 살 수 있으면 더 이상 바람이 없겠어요.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 말이 또 성경적이에요. ‘바람’은 성령, ‘물결’은 정의와 관계가 있잖아요. 성경에 “정의를 하수(河水) 같이”(암 5:24)라는 표현이 있죠. 이렇듯 성령의 바람 따라, 정의의 물결 따라 살아가는 건 제 삶의 푯대이기도 합니다. 그밖에는 《돈에서 해방된 교회》(포이에마) 후속편 격인, “돈에서 해방된 사회”(가제)를 집필 마무리해야 합니다. 잘 마무리할 수 있도록 이 글을 읽으실 독자들께 기도를 부탁드려야겠네요.

김 : 저는 세상에서 남은 날 수를 세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언제 하나님이 부르실 지 모르지만 그때까지는 예수님 더 연구하고, 따르고, 가까이 하는 혁명적이고 실천적 노력을 계속하며 살고 싶어요. 그리고 이왕이면 우리 시대 사람들이 고민하고 겪는 문제에 응답하는 학문적 연구도 깊이 하고 싶어요. 집필 작업도 계속 할 생각인데, 예수 평전을 세 권으로 써내고 싶어요. 이미 써낸 마가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21세기북스)와 마태복음 해설서 《행동하는 예수》, 그리고 누가복음 해설서 《가난한 예수》에 이어 요한복음 해설서 “기쁜 예수”를 마무리할 생각이에요. 신학자는 글로 싸우는 투사라고 생각해요. 하나님 나라 전파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 방해 세력과 싸우는 데 하나님이 건강과 지혜와 용기를 주시면, 생애 끝까지 글을 쓸 생각입니다.

박 : 한 해 동안 ‘연중기획’ 연재를 통해 생각할 기회를 줘서 복상 편집진에 고맙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연재글을 읽어주신 독자들께도 정말 감사합니다. 복상 독자가 한국 사회 희망이자 미래라고 생각합니다. 다수가 함께하지 않는다 해도 낙심하지 마시고, 하나님은 한 사람만 있어도 세상을 구원하고 교회를 새롭게 하시는 분이니까 복상 독자들이 새해에도 용기 있게 살아가시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 1년 동안 함께 글을 쓰고 연재하다 보니, 김근수 선생이 가톨릭 해방신학자라기보다는 동지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 점도 제겐 참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김 : 복상 독자들께 종교개혁 500주년을 다시 한 번 진심으로 축하한다는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개신교와 가톨릭은 하나님과 함께 걷는 길에서 동지이고 동반자, 도반(道伴)입니다. 지나간 500년은 서로 멀고 다름을 강조한 시간이었다면, 향후 500년, 1,000년은 개신교와 가톨릭이 공통점이 많고 가까운 형제요 자매로 가까워지는 시대가 되기를 바랍니다. 박 목사님 글 보면서 목사님은 신앙의 형님, 저는 신앙의 아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박 목사님 한 걸음 뒤에서만 따라가면 저는 멸망의 길로 가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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