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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하라, 대체복무가 가까이 왔느니라
[333호 시사 잰걸음]
[333호] 2018년 07월 30일 (월) 11:11:43 박제민 goscon@goscon.co.kr
   
▲ 6월 28일 헌법재판소는 대체복무의 길을 여는 판결을 내렸다. (사진: 전쟁없는세상 제공)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심판으로 친숙해진 헌법재판소가 가진 제1의 권한은 여러 법률이 최상위 법인 헌법에 맞게 작동하는지 심판하는 것이다. 헌법재판소가 어떤 법률에 대해 헌법에 부합한다는 뜻의 ‘합헌’ 결정을 하면 그 법률의 작동이 그대로 유지된다. 반면에 헌법에 위배된다는 뜻의 ‘위헌’ 결정을 하면 즉시 그 법률의 작동이 무효가 된다. 한편 ‘헌법불일치’ 결정은 사실상 위헌인데 즉각적인 무효로 인한 사회적 충격을 줄이기 위해 시간을 주고 법률을 고치라고 하는 것이다.

2018년 6월 28일에 헌법재판소가 내린 판결은 역사에 기록되어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헌법재판소는 병역거부를 처벌하는 병역법 규정(병역법 제88조 1항)에 대해 여전히 합헌이라고 결정했다. 그러면서도 병역의 종류에 대체복무가 없는 것(병역법 제5조 1항)은 헌법이 보장하는 양심의 자유를 침해한다며 헌법불합치를 선고하고 2019년까지 법을 고치라고 했다. 참으로 절묘한 판결이었다. 병역을 기피하면 처벌한다는 기존 입장을 유지하면서도 자기 양심에 따라 병역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처벌해왔던 관습을 뒤엎고 대체복무의 길을 연 것이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우리 헌법은 “모든 국민은 양심의 자유를 가진다”(헌법 제19조)고 명시한다. 이른바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은 이 조항을 근거로 병역을 거부한다. 그런데 ‘양심적’이라는 표현이 불필요한 오해를 가져왔다. 어떤 이들은 군대에 안 가면 양심적이고, 군대에 가면 비양심적이냐고 성낸다.

이러한 오해는 우리가 통상 사용하는 양심의 의미와 헌법상 양심의 의미가 다르기 때문에 생긴다. 국립국어원이 만든 〈표준국어대사전〉은 양심에 대해 “사물의 가치를 변별하고 자기의 행위에 대하여 옳고 그름과 선과 악의 판단을 내리는 도덕적 의식”이라고 한다. 옳고 그름과 선과 악. 양심의 의미를 이렇게 받아들이면 성이 날만도 하다.

하지만 헌법이 말하는 양심의 의미는 사뭇 다르다. 헌법재판소는 “헌법이 보호하려는 양심은 어떤 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함에 있어서 그렇게 행동하지 아니하고는 자신의 인격적인 존재가치가 허물어지고 말 것이라는 강력하고 진지한 마음의 소리”라고 했다.(전원재판부 96헌가11, 1997. 3. 27) 양심의 의미를 이렇게 받아들인다면 이른바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은 ‘마음의 소리’에 따라 도저히 군사 행위에 가담할 수 없어서 거부한 사람들이다. 그렇다고 이들과 다른 선택을 해서 군대에 간다고 비양심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는 이 같은 불필요한 오해를 줄이기 위해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을 권하고 있다.

한국 사회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거부하는 가장 큰 이유는 ‘안보 문제’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특수한 안보 상황’을 이유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번에 헌법재판소도 “병역거부라는 양심의 자유가 군복무라는 공익의 가치보다 우선할 수 없다”면서 병역거부를 처벌하는 것에 대해서는 합헌이라고 결정한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와 비슷한 상황을 겪었거나 겪고 있는 다른 나라들을 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우리처럼 분단을 겪었지만, 그 특수한 안보 상황에도 비교적 이른 시기인 1960년부터 대체복무법을 도입했다. 특이한 것이, 대체복무를 결정할 때 국가가 양심에 대해 판단하지 않고 철저히 개인에게 맡긴다. 독일은 매년 약 10만 명 이상이 대체복무를 하고 있다.

대만은 지금까지도 중국과 오묘한 긴장 관계에 있지만 2000년부터는 대체복무를 허용했다. 병역을 회피할까 봐 강력한 처벌 규정을 두었지만 그러한 시도는 없었고, 대체복무를 너무 많이 신청할까 봐 할당제를 두었지만 항상 미달되었다고 하니, 우리도 걱정을 한시름 놓아도 될 것 같다.

기독교 전통, 평화주의와 정당전쟁
한편 한국교회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거부하는 가장 큰 이유는 ‘여호와의증인’을 얄미워하기 때문일 것이다. 전 세계에서 병역거부를 이유로 수감된 사람 중 절대다수가 대한민국에 몰려 있는데 그중 여호와의증인 신자가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신앙에 따라 병역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여호와의증인 이외에도 꾸준히 생겨나고 있고 신앙이 없어도 평화에 대한 신념 때문에 병역을 거부하는 사람들도 나오고 있다. 사실 평화주의에 따른 병역거부는 기독교의 오랜 전통이다. 우리가 잘 아는 존 스토트나 대천덕(루번 아서 토레이 3세) 신부도 기독교 신앙에 따라 병역을 거부한 것은 꽤 알려진 사실이다.

세계교회사에서 기독교가 로마제국으로부터 313년에 공인을 받고 380년에 국교가 되기 이전을 ‘초기 기독교’라고 하고, 그 이후를 ‘콘스탄티누스적 기독교’(Constantinian Christianity)라고 구분한다. 당연히 두 시기의 기독교는 여러 가지로 다른 모습을 보인다. 그중에서도 중요한 차이는 전쟁에 대한 입장이 평화주의에서 정당전쟁(正當戰爭)으로 옮아간 것이다.

초기 기독교는 전설처럼 내려오는 예수의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기고 그대로 지키려 애썼다. 특히 예수가 산 위까지 좇아온 극성팬들에게 “누가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도 갖다 대라,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에 따라 절대로 폭력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한편으로는 로마군대가 황제를 신으로 숭배하는 것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렇게 말씀을 따르고 신앙을 지키려는 실천이 병역거부로 이어졌다. 295년 북아프리카에 살았던 막시밀리아누스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군대에 갈 수 없다고 주장해 처형당했는데 이는 역사에 기록된 최초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였다.

하지만 “서는 곳이 다르면 보이는 풍경이 다르다”고 했던가? 기독교가 공인되고 국교가 되면서 전쟁과 폭력에 대한 기독교의 입장이 변하게 된다. 이때부터 제국의 평화가 기독교의 평화였고 제국에 대한 위협은 기독교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됐다. 때문에 ‘야만인’들로부터 공동체를 지키는 전쟁은 받아들일 수 있다고 했고 심지어 의롭기까지 하다고 보았는데 이것이 발전해 정당전쟁 이론으로 구체화되었다.

하지만 정당전쟁 이론이 전쟁을 정당화하려는 수단으로 오해되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나름대로 전쟁을 최소화하려는 발명품이었다고 봐야 한다. 즉 정당전쟁 이론에 따르면, 전쟁은 △마지막 수단으로써 방어가 목적이고 △정당한 권위 아래 선포되고 진행되어야 하며 △학살이나 약탈을 금지하고 △무장하지 않은 민간인을 보호하며 △패배자에게 관대해야 하고 △성공적으로 종결될 가능성이 있어야 하며 △손실보다 이익이 커야 한다는 등의 조건을 충족할 때만 정당하다고 봤다. 이런 조건을 충족할 만한 정당한 전쟁은 많지 않을 것이며 이 때문에 평화주의만큼은 아니더라도 이 정도만 돼도 괜찮을 것이라고 봤다.

정당전쟁 이론은 오늘날 ‘정통(이라 주장하는) 기독교’에서 폭넓게 받아들인다. 불행히도 역사에서 ‘성전’으로 포장된 수많은 전쟁이 있었지만 말이다. 예수가 가르쳐주셨다고 기록된 말씀은 무시될 순 없었지만 정당전쟁 이론에 밀려 그리스도인 개인의 윤리로 격하되었다. 하지만 16세기에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다시 주목받기 시작해 재세례파를 중심으로 오늘까지 맥을 이어오고 있다.

평화주의와 정당전쟁, 두 가지 전통을 모두 가진 기독교는 병역거부와 대체복무제 도입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가져야 할까? 2001년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의 첫걸음을 땐 오태양 씨가 쓴, ‘사회봉사로써 병역의무를 이행하고픈 어느 젊은이’라는 글의 한 대목이 길잡이가 되어 줄 수 있을 것 같다.

“양심의 자유는 개인적 차원의 지고지순한 정의이며, 국방의 의무는 사회적 차원의 정의라고 생각합니다. 과연 이 양자가 반드시 대립할 수밖에 없는 것인지, 양자를 ‘시비와 우열의 관계’가 아닌 ‘상생과 조화의 관계’로 재정립할 수는 없는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와 자의에 의한 군복무자의 삶이 모두 존중받을 수 있는 길은 없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양심의 자유와 국방의 의무’는 영원히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이라기보다는, 그렇게 양자가 적당한 거리를 존중하며 함께 가는 ‘조화로운 길’이라고 하겠습니다.”

‘마음의 소리’에 따라
매년 마음의 소리에 따라 병역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500명이 넘는다. 군복무를 했지만 마음의 소리에 따라 예비군 훈련을 거부하는 사람들도 나오고 있다. 이들을 처벌하는 것과 다른 선택을 할 기회를 주는 것 중에 무엇이 그 개인과 우리 공동체에 더 유익할까? 이번 헌법재판소의 판결은 이에 대한 해답이라고 볼 수 있다. 군복무뿐 아니라 대체복무도 할 수 있는 2020년 이후는 전쟁없는세상,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같은 단체들의 꾸준한 노력의 결과며, 무엇보다도 1950년 이후 군대 대신 감옥을 택했던 1만 9천 7백여 명의 삶을 갉아 넣은 미래다.

예전에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연설하는 데 군복을 입은 한 노인이 소란을 부린 적이 있었다. 청중들이 야유를 퍼붓자 오바마가 말리면서 말했다. “그는 노인이다. 우리가 공경해야 한다. 특히 군복을 입은 것으로 보아 그는 군인이었던 것 같다. 우리는 그에게 존경을 보내야 마땅하다.” 외국에서 병역이 가지는 무게를 느낄 수 있는 장면이다.

반면에 우리나라에서는 여기저기서 신성하다고 추켜세우는 것이 무색하게 병역에 대한 부정적 생각이 강한 것이 사실이다. 오죽하면 보수 논객인 전원책 변호사가 한 토론방송에서 “이 세상에 가고 싶은 군대가 어디 있어요? 아무리 먹어도 배고프고, 아무리 자도 졸리고, 아무리 입어도 추운 데가 군대입니다”라고 말해 ‘전거성’이라는 별명을 얻었을까. 많은 젊은이가 군대에 “끌려간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소리에 따라 선택할 수 있을 때 군복무도 그 의미와 명예가 더해지지 않을까.

 

박제민
20대 끝자락에 기독시민운동 판에 들어와 어느덧 30대 중반이 되었다. 낮에는 ‘기독교윤리실천운동’ 실무자, 밤에는 ‘동네교회청년’ 활동가로 살아가는 30대 청년이다. 보수적인 교회와 선교단체에서 자라면서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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