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4호 시사 잰걸음]

   
▲ 고 노회찬 의원 빈소 (사진: 정의당 홈페이지)

2018년 7월 23일 오전, 국회의원 노회찬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김동원(드루킹) 씨에게 불법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의혹을 받고 있었다. 짧게 공개된 유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2016년 3월 두 차례에 걸쳐 경공모(드루킹이 이끌던 ‘경제적 공진화 모임’)로부터 모두 4천만 원을 받았다. 어떤 청탁도 없었고 대가를 약속한 바도 없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다수 회원들의 자발적 모금이었기에 마땅히 정상적인 후원절차를 밟아야 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누굴 원망하랴. 참으로 어리석은 선택이었으며 부끄러운 판단이었다. 책임을 져야 한다.

아! 눈이 다 휘둥그레지고, 머릿속은 새하얘지는 것 같았다.

노회찬, 비극의 주인공
노회찬은 고등학생 때 학교에서 유신독재를 비판하는 문서를 만들어 뿌렸고, 대학교 졸업을 앞두고 용접 기술을 배워 인천에 있는 한 공장에 위장취업하면서 노동운동을 시작했다. 노동자를 위한, 노동자의 정치 세력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남은 인생의 대부분을 진보 정당을 세우는 데 바쳤다.

무명인에 가깝던 노회찬이 유명해진 것은 2004년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였다. 민주노동당 사무총장이었던 그는 각종 토론에 출연해 뛰어난 입담을 선보였다. 그 덕분에 사람들은 민주노동당이라는, 다소 ‘불안한’ 이름을 가진 정당이 실은 별로 불온하지 않고 오히려 약자들을 위해 필요한 정치 세력이라고 여기게 됐다.

결국 민주노동당은 예상을 뛰어넘고 10명의 당선자를 냈다. 비례대표 8번 후보였던 노회찬 자신도 당선됐는데, 그것은 헌정 사상 최초로 10선 국회의원이 되기 위해 염치불고하고 자유민주연합(자민련) 비례대표 1번 후보로 출마했던 김종필을 밀어내고 얻은 결과였다. 김종필의 퇴장과 노회찬의 등장은 구시대가 끝장나고 새 시대가 열린 상징 같았다. 국회에 처음 등원하는 날에 양복, 한복, 점퍼 차림을 한 민주노동당 국회의원 10명이 국회 앞 횡단보도를 지나 걸어서 국회 본청으로 들어가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국회의원이 된 노회찬은 약자들을 보호하고 강자들을 견제하는 정치를 하려고 했다. 그가 처음으로 발의한 법안은 이름에 어머니의 성을 쓸 수 있도록 민법을 개정하는 것이고, 마지막으로 발의한 법안은 국회의 눈먼 돈인 특수활동비를 없애자는 법안이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정치적 메시지도 삼성전자 반도체 피해자들과 복직한 KTX 승무원들을 향한 축하 인사였다.

국회의원으로서 그의 존재감이 한껏 드러난 때는 이른바 ‘삼성 X파일 사건’에 연루된 소위 떡값 검사들의 명단을 공개한 일이었다. 대한민국 정치인 중에 삼성과 검찰이라는, 돈과 힘의 아이콘에 이처럼 대놓고 도전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마땅한 행동이었지만 그 결과는 녹록지 않았다. 

정파 갈등으로 진보 정당은 분열했고 지역구 선거에 나섰지만 간발의 차이로 낙선했다. 다시 나간 선거에서는 당당하게 당선됐지만, 삼성 X파일 사건이 발목을 잡아 의원직을 상실했다. 그의 촌철살인대로 “도둑이야 소리쳤더니 왜 소리 지르느냐고 처벌한 격”이었다.

분열, 낙선, 상실은 현실의 문제로 연결됐다. 그때 드루킹이 접근해왔다. 아마도 단 한 번, 그의 표현대로 ‘어리석은 선택’과 ‘부끄러운 판단’을 했다. 그것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고 안타까운 행동을 했다. 참 괜찮았던 정치인, 노회찬은 이렇게 한 편 비극의 주인공이 되어 갑자기 우리 곁을 떠났다.

비극과 민주주의
비극이 언제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두고 이야기가 많지만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 아테네에서 시작됐다는 말이 많다. 비극의 어원은 옛날 그리스 말인 트라고디아(Tragodia)인데 해석하면 ‘염소의 노래’라는 뜻이다. 아테네에서 디오니소스 신을 기리는 대축제에서 요새 ‘쇼미더머니’ 하듯이 비극 경연대회가 성대하게 열렸고 우승자에게 염소를 상으로 줬기 때문이란다.

잘 알다시피 이 시기 아테네는 세계 역사에서 최초로 민주주의를 시행하고 있었다. 민주주의의 어원 역시 옛날 그리스 말에서 민중을 뜻하는 데모스(Demos)와 권력을 뜻하는 크라티아(Kratia)가 합쳐진 것이다. 해석하자면 민중권력, 또는 ‘권력은 민중에게 있다’고 할 수 있다.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든다. 우리 헌법 1조와 똑 닮았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그 옛날 아테네가 시도했던 민주주의는 모든 시민들이 참여하는 직접 민주주의였는데 시민들의 능력이 별 차이 없다는 믿음을 가지고 추첨을 통해 돌아가며 공직을 맡았다. 우리는 요즘에서야 학계에서 ‘추첨제 민주주의’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고 녹색당에서는 추첨을 통해 대의원을 뽑는데, 고대 아테네 민주주의자들의 결단이 놀랍다. 다만 시민의 범주에 여성, 외국인, 어린이, 노예 등은 포함되지 않았다. 오늘날 민주주의자들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지점이다.

어쨌든 민주주의라는 엔진을 단 아테네는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 중에서 제일 잘나갔다. 안팎으로 민주주의를 시샘하는 자들에게 끈질기게 공격받았고 일시적으로 민주주의가 붕괴되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시민들은 힘을 합쳐 독재자들을 몰아내고 민주주의를 복원하곤 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아테네 민주주의가 발달할 때 비극도 유행했고, 민주주의가 몰락하자 비극도 활기를 잃었다는 것이다. 단순한 우연일까? 예술은 정치에 속박되지 않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분리될 수도 없다. 실제로 아테네의 민주주의자들은 비극을 만드는 데 재정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가난한 시민들을 대신해 입장료까지 내주었다. 왜 그랬을까?

아테네 민주주의와 비극 사이에는 ‘인간의 불완전성’이라는 연결고리가 있다. 비극의 주인공들은 당대의 영웅이지만 또 한낱 불완전한 인간에 불과하다. 그들은 결국 하마르티아(Hamartia)라고 불렸던, ‘인간적 흠결’ 때문에 비극적 운명에 빠져든다. 문제를 푸는 데 집착했던 오이디푸스가 그랬고, 국가의 질서를 지키겠다고 고집을 부렸던 크레온이 그랬으며, 권력을 잡고 교만했던 크세르크세스가 그랬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을 봄으로써 개인의 감정을 해소하고 사회를 안정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카타르시스(Catharsis)적 기능이 그것이다. 비극을 통해 인간의 불완전성을 절감했다면 정치권력을 소수의 영웅에게 몰아주는 잘못을 저지를 수 없을 것이다. 이 때문에 아테네 시민들은 민주주의자였고 비극의 기획자이자 관객이었다.

“주여, 그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노회찬은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고 우리는 원치 않던 비극의 관객이 되었다. 대체 노회찬의 하마르티아, 인간적 흠결이 무엇인가? 그 자신이 표현한 대로 ‘어리석은 선택’과 ‘부끄러운 판단’인가? 관객으로서 동의하기 어렵다. 이 주인공은 낡은 양복 한 벌, 허름한 구두 한 켤레로 무대를 누비던 사람이다.

어쩌면 그가 갖고 있던 높은 도덕심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언제가 그는 진보에게는 더 엄격한 도덕성을 요구하는 것이 인정해야 할 현실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단 한 번, ‘어리석은 선택’과 ‘부끄러운 판단’을 한 것을 스스로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비유와 입담은 여전히 화려했지만, 언제부턴가 낯빛이 매우 어두워 보였다.

또 하나는 평생을 거쳐 일궈온 진보 정당, 함께한 동지들에 대한 애정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만약 그가 특별검사에게 불려 다니며 사나운 언론의 카메라 앞에 선다면, 그래서 4천만 원을 받은 사실이 알려진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는 물론이고 비로소 지지를 얻기 시작한 정의당도 함께 매도되었을지 모른다. 이 주인공에게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오이디푸스처럼, 크레온처럼, 크세르크세스처럼, 노회찬도 자신의 인간적 흠결인 높은 도덕심과 애정 때문에 끝내 비극적 운명에 들어갔다.

노회찬의 장례식장에는 무려 7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찾아와 애도했다. 누구나 할 것 없이 줄을 서고 기다리고 나서야 조문을 할 수 있었다. 참 슬프게도, 민주적이었다. 그 줄에는 장애인, 해고 노동자, 성소수자들도 있었다. 매일 새벽 6411번 버스를 타는 분들도 있었을지 모른다. 국회 영결식장에 영정이 들어갈 때는 청소노동자들이 한 줄로 서서 맞이했다. 노회찬이 ‘여성의 날’ 때마다 장미를 건넸던 분들이다. 민주공화국의 주권자임에도 사실상 투명인간 취급을 당하는 이분들을 위한 민주주의를 어떻게 만들어갈까? 돈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 돈이 없어도 할 수 있는 정치를 어떻게 만들어갈까? 비극을 통해 민주주의를 깨쳤던 아테네 시민들처럼, 오늘날 또 어떤 비극의 관객이 된 우리는 무엇을 깨칠 것인가?

노회찬을 떠나보내던 며칠 동안 슬프고 괴로워 〈레퀴엠〉을 찾아들었다. ‘죽은 이를 위한 미사곡’이다. 첫 가사가 이렇다. Requiem aeternam dona eis Domine! 주여, 그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죽음 이후의 삶은 아무도 모르기에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된다. 다만 그 권한을 홀로 갖고 있는 신께서 그이의 다친 곳을 어루만지시고 편히 쉬게 해주시면 참말 좋겠다.

 

박제민
20대 끝자락에 기독시민운동 판에 들어와 어느덧 30대 중반이 되었다. 낮에는 ‘기독교윤리실천운동’ 실무자, 밤에는 ‘동네교회청년’ 활동가로 살아가는 30대 청년이다. 보수적인 교회와 선교단체에서 자라면서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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